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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98권, 선조 39년 4월 5일 계묘 2번째기사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별전에서 조서를 맞이하는 의식을 연습하다

사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영조습의례(迎詔習儀禮)를 거행하였다. 상이 도승지 윤방(尹昉)에게 이르기를,

"중국 사신을 만날 때 어렵게 여겨 멀리 떨어져 있지 말고 꼭 가까운 곳에 있으라. 내 기력이 예전과 같지 않으니, 만약 실례하는 일이 있거든 품하여 도와주어야 하겠다."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소신이 마침 이런 때에 이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힘써 직책을 수행하려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만, 살피지 못하는 실수가 있을까 항상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머지 다른 일은 거의 모두 수거(修擧)했는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거의 모두 수거하였습니다. 이제 습의를 하려고 하는데 의주(儀註) 가운데 다시 여쭐 일이 있습니다. 유조(留詔)하는 의례가 《오례의(五禮議)》에 없기 때문에 이번에 이 의주《오례의》에 준하여 마련했습니다. 즉 칙서(勅書)를 받고 나서 예필(禮畢)을 선언한 뒤에 유조례를 행하는 것으로 절차를 마련하였는데, 이번 습의 때에는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예필을 선언하는 일절(一節)은 유조한 뒤에 있어야 한다.’고 하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사(詔使)에게 의주를 이미 보냈으니 이제 와서 고칠 수는 없다. 우선 의주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위(迎慰)한 승지는 앞으로 나오라."

하니, 황시(黃是)가 앞으로 나아가 부복하였다. 【황시가 정주 영위사(定州迎慰使)로 나갔다가 서로(西路)에서 들어 왔다. 】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은 어떤 사람이던가?"

하니, 황시가 아뢰기를,

"밤중에 연회를 베풀고 다음날 새벽에 나왔기 때문에 중국 사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청간(淸簡)하였습니다. 모두들 ‘근래 이런 중국 사신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연회할 때에 행례(行禮)하는 태도를 보니 매우 공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행의 두목(頭目)이 분란을 일으킬 걱정은 없던가?"

하니, 황시가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정주에 들어와 행보석(行步席)을 모두 거두게 한 뒤에 걸어왔으며, 또 침장(寢帳)이나 비단요 등 물건을 모두 본 고을의 사람에게 직접 건네주었는데, 이는 대개 다음날 출발한 뒤에 가정(家丁)들이 빼앗아 가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양사(兩使)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 반찬(盤饌) 등 물품을 태반이나 줄였는데도, 너무 호화롭게 할까 염려하여 양사가 일시에 주방(廚房)에 직접 가서 두루 살피고 나와 또 줄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사가 무슨 일로 먼저 떠났는가?"

하니, 황시가 아뢰기를,

"원접사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고 단지 자연스럽게 앞뒤로 떠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문루(門樓)의 결채(結綵)를 가정 등이 모두 약탈하자 중국 사신이 중군(中軍)을 보내 잡아들여 힐문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시신(侍臣)이 부복하는 것은 관례이므로 갑자기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찬례(贊禮)가 무릎을 꿇고 고하는 것을 조사(詔使)가 미안하다고 한 이상, 부복하는 것도 미안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릎꿇고 고하는 것을 미안하게 여기는 것은 무릎꿇는 자체를 무례하다고 본 것인가, 아니면 황상(皇上)이 위에 계시므로 자기 임금에게 무릎꿇고 고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은 서는 것을 공경하는 예로 삼지만 고할 일이 있을 경우엔 꼭 무릎을 꿇으니 이 또한 공경하는 예입니다. 조사가 미안하다고 한 것은 아마도 황상이 위에 계시므로 압존(壓尊)하는 데 있어 미안하다고 하는 뜻인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예는 중국과 다르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은 오래 서 있지 못하니 입시(立侍)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입시를 하느냐 부복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예에 합당한지의 여부만을 논할 뿐입니다. 신하가 오래 서 있게 되는 고통이야 따질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문제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밖에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여러 집사들이 전좌(殿座) 앞에 들어와 영조습의례를 거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윤방이 나아가 아뢰기를,

"상께서 잠시 대내(大內)에 들어가 계신 뒤에 연레(宴禮)의 기구를 배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드디어 대내에 들어갔다. 연례 기구를 배설한 뒤에 상이 다시 별전에 나아와 연향습의(宴享習儀)에 임하였다. 예가 끝나자 연향 기구를 거두고 나갔다.


  • 【태백산사고본】 108책 19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174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巳時, 上御別殿, 行迎詔習儀禮。 上謂都承旨尹昉曰: "天使時, 勿以爲難而遠伏, 須在近地。 予之氣力, 不如前日, 如有失禮之事, 稟助爲當。" 尹昉對曰: "小臣適於此時, 冒忝此任, 黽勉供職, 恐有不察之失, 每以爲慮。" 上曰: "他餘事, 幾盡修擧乎?" 對曰: "幾盡修擧矣。 今將爲習儀, 儀註中有更稟之事。 留詔儀, 《五禮儀》無之, 故今此儀註, 依《五禮儀》磨鍊。 而受勑後唱禮畢, 其後方行留詔禮, 習儀時, 依此爲之。 或言: ‘禮畢一節, 當在留詔之後。’ 云, 敢稟。" 上曰: "詔使前儀註已去, 今不可改, 姑依儀註爲之。" 上曰: "迎慰承旨進前。" 黃是進前俯伏。 【是以定州迎慰使, 自西路入來。】 上曰: "天使何如人乎?" 對曰: "夜半設宴, 翌曉出來, 雖未詳知其如何, 大槪淸簡。 皆曰: ‘近來無如此天使’ 云。 宴時行禮, 極爲恭遜矣。" 上曰: "一行頭目, 有紛挐之患乎?" 對曰: "天使入定州, 行步席使之撤捲而後行。 又撤寢帳及錦褥等物, 皆親授本官人, 蓋明日發行之後, 慮有家丁挐取之患而然也。 且聞, 兩使在義州, 盤饌等物太半減省, 而猶恐其侈汰, 兩使一時親往廚房, 周覽而出, 又爲減省矣。" 上曰: "副使何以先行乎?" 對曰: "遠接使亦未知其所以然也, 但以自然先後行, 知之矣。 門樓結綵, 家丁等盡爲掠奪, 天使遣中軍, 拿致詰問云矣。" 尹昉啓曰: "我國侍臣, 例爲俯伏。 此例不可遽改, 然, 詔使旣以贊禮(詭)〔跪〕 告爲未安, 則俯伏亦似未安矣。" 上曰: "以跪告爲未安者, 以(詭)〔跪〕 爲無禮乎? 抑以爲, 皇上在上, 不可跪告於其君乎?" 曰: "中原人以立爲敬, 而有告則必跪, 亦敬也。 詔使之未安云者, 似爲皇上在上, 壓尊未安之意也。" 上曰: "我國禮, 與中原異。 且我國之人, 不能久立, 立侍似難矣。" 對曰: "立侍與俯伏, 只論禮之當否而已。 臣下久立之苦, 奚足計哉?" 上曰: "此亦不可不慮。 然, 自外議處可也。" 諸執事入殿座前, 設行迎詔習儀。 禮畢, 尹昉進曰: "自上暫入大內後, 宴禮器具排設何如?" 上遂入內。 宴禮器具排設後, 上復御別殿, 臨宴享習儀。 禮畢, 撤宴享器具而出。


  • 【태백산사고본】 108책 19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174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