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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90권, 선조 38년 8월 10일 임자 6번째기사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이막동이 오랑캐에게 잡혀 갔다가 탈출한 일을 성윤문이 아뢰다

평안 병사 성윤문(成允文) 【무재(武才)는 있지만 문자를 모르니 병사의 직임에는 합당치 않다. 】 아뢰기를,

"만포 첨사(滿浦僉使) 홍유의(洪有義)의 치계에 ‘본월 28일 건너편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말로 외치기를 「나는 북도 보을하(甫乙下) 사람인데 속히 강을 건너고 싶다. 」하여 즉시 마상선(亇商船)을 보내 실어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보을하 성 밑에서 자란 이막동(李莫同)이란 사람이다. 」하였다. 그의 나이와 잡혀간 날짜 및 돌아오게 된 이유에 대해 물었더니, 답하기를 「나는 지금 23세이며, 옛날 노추병(老酋兵)이 보을하진(甫乙下鎭)을 공격하여 첨사가 전사하고 번호가 모두 살육당하던 날, 나도 노성(老城)으로 잡혀가서 노추의 매부(妹夫)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근일 직전(稷田)에서 수확하는 일로 만차 부락(彎遮部落)으로 오게 되었는데 고향 생각이 절로 나 그대로 도주할 생각을 하였다. 낮에는 산에 올라가 숨고 밤이면 몰래 떠나 어렵게 여기까지 왔다. 」 하였는데, 오랑캐에게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우리말이 분명치 못하고 서툴렀다. 향통사(鄕通事)를 시켜 호어(胡語)을 섞어가며 대답하게 했더니, 말하기를 「노추홀온(忽溫)이 서로 통신을 하는데, 금년 봄에 홀온노성에서 우리 나라 사람을 많이 사갔다. 」하고, 또 「내가 만일 고향으로 돌아가면 글을 모르니 도훈도(都訓導)나 병방(兵房)은 될 수 없지만 배패(陪牌)는 충분히 될 수 있다. 」 하였다. 또 보을하 근처 여러 진보(鎭堡)의 거리에 대하여 말하는데 모두 정확하였다. 위인이 몸집이 매우 장대하여 참으로 장정이었다. 외모가 다르기는 하지만 한 번 말을 나눠보니 우리 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의 고향을 그리는 심정은 실로 애처롭기만 하였다. 전례 대로 강계부(江界府)에 구류하고서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5책 190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110면
  • 【분류】
    외교-야(野)

    平安兵使成允文 【雖有武才, 未解文字, 不合制閫之任。】 啓曰: "滿浦僉使洪直義馳報內: ‘本月二十八日, 越邊有一彼人, 以我國言招呼曰: 「我是北道甫乙下人物, 願速過江。」 卽送亇商船載來, 則自言: 「我本甫乙下城底生長胡人, 名李莫同。」 問其年紀多小, 擄去歲月及投來根因, 則答曰: 「我時年二十三。 昔老酋兵直擣甫乙下鎭, 僉使戰死, 藩胡盡被殺掠之日, 我亦擄往老城, 服役於老酋之妹夫家。 近日以稷田刈穫事, 使送于灣遮部落, 自不勝懷土之情, 仍爲逃走之計, 晝則登山、夜則潛行, 艱難到此。」 久在虜中, 故雖通我言語, 音澁而不明。 使鄕通事, 雜以胡語答則但曰: 「老酋忽溫通信, 今春忽溫賣我國人物于老城甚多」 云。 又曰: 「我若回還故土, 目不知書, 雖不能爲都訓導、兵房, 而陪牌則足以爲之」 云。 又說甫乙下近處列鎭堡道里遠近, 無不明言。 爲人軀殼長大無雙, 眞箇壯丁。 貌樣雖殊, 一接言語, 無異於我國之民, 其首丘之心, 實爲可矜。 依前例, 拘留于江界府, 以待朝廷處置耳。’"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105책 190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110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