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성 등이 여러 향교와 서원에 서찰을 보내 정인홍이 지은 《발남명집설》을 비방하다
성균관 유생(儒生) 정호성(丁好誠)·허실(許實)·유희량(柳希亮)·최성원(崔誠元) 등이 팔도 열읍(列邑)의 향교(鄕校)와 모든 서원(書院)에 서찰을 보내어 정인홍(鄭仁弘)이 지은 《발남명집설(跋南溟集說)》065) 을 추악하게 비방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영남(嶺南)은 인재의 부고(府庫)이고 사론(士論)의 근본이 되는 곳이다. 신라로부터 고려 그리고 고려로부터 성조(聖朝)에 이르기까지 명유(名儒) 석사(碩士)가 많이 배출되어 국가의 원기를 부지한 것을 뚜렷이 상고할 수 있다. 지난 선조(先朝) 때 퇴계(退溪)와 남명 두 분 선생이 같은 도에서 함께 탄생하시어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고 의리(義理)를 밝혀 인심을 맑게 하고 세교(世敎)를 부지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훈도(薰陶)되어 점점 감화하고, 보고 감동하여 흥기(興起)한 자가 부지기수였다. 비록 난세를 당했어도 사람들이 자식으로서 효(孝)에 죽고 신하로서 충(忠)에 죽어 인륜(人倫)이 밝혀져 금수(禽獸)가 되지 않고 중국(中國)이 이적(夷狄)이 되지 않은 것은 두 분 선생의 공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분들의 출처(出處)가 같지 아니하여 혹은 도(道)를 행하여 시국을 구제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혹은 초야에 살면서 자기의 뜻을 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나, 결국은 모두 도의 군자(道義君子)에 어긋나지 않았다. 어찌 반드시 같아야만 되겠는가. 그런데 양가(兩家)의 문도(門徒)들이 두 분의 학문 깊이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행적만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방하여 수세(數世)가 지나면서 더욱 심화되니, 뜻있는 선비들이 개탄한 지 오래이다. 이번에 명색이 관학 유생인 자들 몇명이 【생원(生員) 정호성·허실이 성세영(成世寧)의 외손 한언(韓琂)과 양홍주(梁弘澍)의 사위 권집(權潗) 등과 더불어 그 일을 주장하여 유생들을 위협하여 거느리고 지방에 통문(通文)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사리를 아는 사람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 남명의 문도에게 감정을 품고서 정인홍의 《발남명집설》을 빌미로 각도에 글을 보내어 선사(先師)을 얕잡아 보고 조롱하기를 못하는 짓이 없이 하였다. 그들이 인홍을 배척하여 은근히 남명을 공격하고, 퇴계를 추존하여 드러내놓고 남명을 배척한 것을 살펴보면 지나친 질투로 억누르고 찬양하기를 너무 심히 하였으니 속 좁은 짓임을 알겠다. 남명은 은일지사(隱逸之士)로 학문을 독실히 하고 실행에 힘썼으며, 도를 닦고 덕을 쌓았으니, 정통한 학식과 해박한 견문은 더불어 비교할 사람이 적다. 전현(前賢)과 짝하고 후학(後學)에 종사(宗師)가 될 만하니, 그렇다면 어찌 퇴계만 못하겠는가. 인홍은 남명과 가장 오랫동안 종유(從遊)하여 의발(衣鉢)을 전수받은 자로 퇴계가 귀암(龜巖)066) 을 지나치게 허여한 것을 보고 의심을 하자, 남명의 문하인들이 지나친 말을 만들어 그를 도와 공박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는 ‘저 귀암은 몹시 부정한 자이다. 남명이 악한 사람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였으니, 절교한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혹자는 잘못하여 남명을 너무 심했다고 여기니, 내가 스승의 뜻을 발명하지 않으면 천 년 후에 누가 참으로 시비(是非)를 알겠는가.’라고 여겨 집설에 간략히 그 일을 변명한 것이니, 주제 넘고 망령되다는 비방은 면할 수 없으나 그 정상은 애처롭다. 아, 학술이 밝지 못하고 시비가 분명치 않아서 남명같이 도학이 높은 분으로 오히려 곡사(曲士)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이야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백세 후에 아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 【태백산사고본】 105책 18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93면
- 【분류】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成均館儒生丁好誠、許宲、柳希亮、崔誠元等, 通書于八道列邑鄕校及諸書院, 醜詆鄭仁弘跋《南溟集說》。
【史臣曰: "嶺南, 人才之府庫; 士論之根抵。 自新羅至于高麗, 自高麗迄于聖朝, 名儒、碩士彬彬輩出, 以扶國家之元氣者, 班班可考。 曩在先朝, 退溪、南溟兩夫子者, 竝生於一道, 倡明道學, 開示義理, 以淑人心, 扶世敎爲己任, 士子之薰陶漸染, 觀感興起者, 不知其幾人矣。 雖當衰亂之世, 人之所以爲子死孝; 爲臣死忠, 彝倫以之不獸, 中國免爲夷狄者, 何莫非兩先生之功耶? 惟其出處不一, 或以行道救時爲心; 或以隱居求志爲樂, 而要其歸則皆不離於道義, 君子何必同被? 兩家門徒, 不能明知二公學問之深淺, 徒執其迹, 互相訾謷, 迄數世而滋甚, 有志之士, 慨嘆久矣。 今者名爲館學儒生數三輩, 【生員丁好誠、許宲與成世寧外孫韓琂、梁弘澍女壻權潗等主張其事, 脅率章甫, 通文于外方, 稍知事理之人, 皆不從焉。】 挾憾於南溟門徒, 借鄭仁弘跋《南溟集說》, 馳書各道, 侮弄先師, 無所不至。 觀其指斥仁弘, 而潛攻南溟; 推尊退溪, 而顯排南溟, 至以 ‘嫉惡之過, 抑揚太甚。’ 爲說, 多見其不知量也。 南溟一肥遯之士, 篤學力行, 修道進德, 精識博聞, 鮮與倫比。 可以追配於前賢; 宗師於後學, 則豈可與退溪差殊觀哉? 仁弘從遊最久, 得其衣鉢之傳者也。 見退溪過許龜巖而致疑, 南溟門下之人, 設淫辭, 而助之攻則其心以爲: ‘彼龜岩, 不正之甚者也。 在南溟嫉惡如讎之心, 絶之宜矣。 而或者誤以南溟爲已甚之歸, 我不發明其師志, 則千載之下, 孰知眞是非哉故, 於《集說》略辨其事, 雖未免僭妄之譏, 其情則慼矣。 噫! 學術不明, 是非不著, 道學如南溟, 而尙未免曲士之議, 他尙何說哉? 直百世, 以俟知者之知耳。"】
- 【태백산사고본】 105책 18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93면
- 【분류】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