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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88권, 선조 38년 6월 7일 경술 2번째기사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이시언이 북변의 상황과 군량 조달, 왜적의 전투력 등을 아뢰다

상이 순변사(巡邊使) 이시언(李時言)을 별전(別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시언에게 이르기를,

"적세(敵勢)가 저와 같은데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전부터 사람들은 ‘북방의 적은 쉽게 상대할 수 있다.’고들 했습니다만, 신은 북적(北賊)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속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적의 철기(鐵騎)가 아군과 평원에서 접전할 경우에는 아무리 포수(砲手)라 할지라도 사격할 틈이 없으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성지(城池)를 고수하는 것이 상책으로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적의 형세를 보아가면서 뒤쪽을 치기도 하고 혹 기병이 불편하고 보병이 편리하거든 요새지를 점거하고 있다가 적이 해이해진 틈을 타 그 진영을 야습하면 될 것입니다. 군사작전은 멀리서 헤아릴 수는 없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수성(守城)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일에 대해 현지에 가서 그대의 마음을 다하라. 이름을 죽백(竹帛)에 남기는 일이 바로 오늘에 있다. 이제 멀리 떠나기에 앞서 말할 일이 있거든 다 말하도록 하라."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신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러나 북방은 성자(城子)가 너무 큰데 반해서 사람은 적으니 성을 지켜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군량을 준비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신이 일찍이 삼수(三水)와 홍원(洪原)에서 수령으로 있을 때 보니, 그곳은 부민(富民)이라곤 전혀 없고 주민들의 생활 상태가 무척 어려워 하삼도(下三道)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곡식을 모아들이려 해도 곡식을 얻을 길이 없는데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군사만 증가시킨다면 필시 군량 결핍의 근심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은 동쪽을 쪼개어 서쪽을 보완하는 식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본디 알고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통제사(統制使)가 되었을 때 남방의 일을 대략 살펴 보건대, 요즈음 기미하는 형세가 있는 바 올해는 적의 대군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충청도의 전선(戰船) 10척을 예로 들면 1척의 격군(格軍)이 1백 명으로 1명당 쌀 5석을 8결(結)에서 수합(收合)하는데, 1척을 1운(運)으로 할 경우 쌀이 5백 석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계산해보면 10척이면 5천석인데 만약 2운(運)으로 하여 가미(價米)를 거둘 경우 1만 석의 군량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상상도(慶尙上道)의 군량을 영해(寧海)를 경유, 마상선(亇尙船)으로 수송하여 북도(北道)로 들여 보내고, 충청도 주사(舟師)의 가미를 경상도로 돌려 보충시킨다면 접제(接濟)가 가능한데, 충청도에서 영남(嶺南)까지는 대선(大船)도 통행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할 경우 5천 석을 얻을 수 있는데 군량 5천 석을 얻기가 어찌 용이한 일이겠습니까. 특별히 어사(御史)를 파견하는 목적이 쌀을 얻는 데 있는데 원래 없는 곡식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북쪽 바다의 풍랑이 거세지면 형편상 배로 운반하기가 어려우니 6월 번(番)에 대해서는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7월 번의 가미(價米)를 미리 수합하면 제때에 맞게 조치해서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1명당 바쳐야 할 5석을 4석으로 감해주더라도 마땅할 것이며 모미(牟米)로도 아울러 바치도록 해줘야 할 것입니다.

신이 이런 의견으로 비국(備局)에 의논했더니 비국 역시 계품하려 했습니다만 남방의 방비를 망각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북방의 일이 시급한데 만약 금년에 기회를 잃을 경우 저 적들은 전날에 품지 못하던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니 분명하니, 금년에 반드시 극진하게 조치하여 대비해야만 일을 치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성(守城)하는 기구로는 화기(火器)만한 것이 없는데 그중에 화포(火砲)가 최상이요, 삼안총(三眼銃)도 말 위에서 사용하면 아주 좋은데 중국 사람들도 말 위에서 사용합니다. 바야흐로 양진(兩陣)이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하나 하나 모두가 꼭 명중한다고는 할 수 없어도 성세(聲勢)를 도울 수 있으므로 적들이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신이 계청하여 가지고 가고 싶지만 군기시(軍器寺)의 군기(軍器)가 절대량이 부족하니, 해조로 하여금 따로 조치해 마련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신의 목숨이야 계교할 겨를이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들어간 뒤에 길은 멀리 막혀 있는 상태에서 군사는 오지 않고 양향 역시 떨어진다면 신이야 애석할 것 없겠으나 국사가 염려됩니다. 비변사 당상이 아무리 극진히 요량한다 해도 수천 리 밖의 일을 반드시 장계한 뒤에야 시행해야 한다면 군량을 운송하고 군사를 증원한다 한들 형세상 미칠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먼저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충청도는 몇 명, 황해도는 몇 명 하는 식으로 미리 장속(裝束)을 하고 전마(戰馬) 등에 관한 일도 먼저 조치해 놓고서 사변에 대비해야 할 것으로, 고급(告急)하기를 기다려 조치한다면 미치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리고 군사 백 명이 장수 하나보다 못한 법이니 변장(邊將)을 엄밀히 가려 차견해야 하겠습니다.

본도(本道)에 도착하여 일일이 치계할까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사항은 비변사와 의논하겠다. 교전할 즈음에 장사(將士)들이 참급(斬級)을 못했다 하더라도 용감히 역전(力戰)한 자를 서계(書啓)하면 따로 논상하겠다. 이번 건퇴(件退)의 전투에서 우리가 패배하기는 했지만 용감하게 역전한 사람이 그 가운데 없지 않을 것이니, 공론이 일컫는 자들을 일일이 계문(啓聞)하여 시상한다면 장사들이 다투어 격려될 것이다."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빙고(憑考)할 자료가 없으므로 참급한 것으로 증거를 삼습니다만 이제 전교를 받들었으니 자세히 알아보아 일일이 치계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부터 참괵(斬馘)한 것으로 공을 삼아 왔는데 지금은 별도의 규정으로 말하는 것이니 야전(野戰)과 수성(守城)에서 역전(力戰)한 사람을 물어 치계하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은 왜적과 싸워보았는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신은 왜적이 입성한 때로부터 시작해서 이후로 대소의 전투를 1백여 차례나 치렀는데 왜적과 서로 싸우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왜적은 각자가 싸우는데 한 번 대장의 분부가 떨어지면 기필코 승첩을 거둘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싸우기 때문에 그들과 전투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창졸간에 왜적을 만나게 되었던 까닭에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설령 여유있게 이적과 마주쳤다 하더라도 방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마전(馬戰)으로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포(放砲)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총통(銃筒)은 두려워할 만하나 제대로 살펴보기만 하면 피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어떤 이는 ‘왜적은 마전(馬戰)을 잘 못한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마전 역시 극난(極難)한 일은 아닙니다. 왜적이 처음에는 잘 못했지만 나중에는 능숙해졌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은 총을 잘 못 쏜다는데 사람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적을 보기만 하면 먼저 궤멸되어 달아나는 것으로 능사를 삼습니다. 장수의 경우에는 아무리 충성스럽지 못하다 하더라도 군율을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달아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달아나는 군졸을 다 죽일 수 없는 형편인데 바로 전부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왜적은 총을 잘 쏘지는 못한다 해도 아군이 활 두 발을 쏘는 사이에 별안간 앞에 나타나니 우리 나라 사람은 잘 쏜다고는 하지만 멀면 맞추지 못하고 가까우면 왜적의 칼을 두려워하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활을 쏘고 나서 단병(短兵)으로 달려들까 두려워하여 미처 쏘지도 못하니 활을 쏘는 것도 믿을 게 못 되는 실정입니다. 왜적이 칼을 잘 쓴다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 칼을 잡고 나아가면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들 도망치는 것을 상책으로 알고 있는데,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왜적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적은 우리 나라 사람이 도망치거나 죽는 것을 보고 싸우러 나가는 것을 즐겨 하는데, 이 때문에 왜적의 기세는 더 높아지는 데 반해 우리의 사기는 저상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도산(島山) 전투에 종군하면서 목격한 일인데, 마귀(麻貴)가 지휘하는 달자(㺚子) 2백여 명이 모두 환편(環鞭)을 들고 난타하는 모습이 소낙비 쏟아지듯 벼락치듯 하여 피할 틈도 없었으며 총통 또한 발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때 적병이 달아나는 모습이 꼭 우리 나라 사람이 도망치던 때와 같았으니 이로써 본다면 총통은 마전(馬戰)에 있어서는 역시 말기(末技)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도 방포(放砲)할 겨를이 없었단 말인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방포할 틈도 없었습니다. 도망칠 겨를도 없는데 더구나 방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평원(平原)에서 접전할 때에는 아무리 포수가 있다 할지라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성(守城)할 때에는 총통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이번 건퇴(件退)의 전투에 대하여 듣건대, 적이 착용한 갑옷은 모두 중국 갑옷이라서 우리 나라의 궁력(弓力)은 위력이 대단치 않아 뚫을 수 없고 오직 총통만이 관통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온 북적(北賊)이 대부분 달자 같은데 곳곳에서 성을 에워싸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정탐을 하지 못해 적의 다과(多寡) 여부를 쉽게 알지 못합니다. 만약 곳곳에서 성을 포위할 경우 수성 또한 어려울 것이니 어찌 근심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번호 등은 모두 우리 나라에 녹식(祿食)을 바라고 있었는데 난리 후에 북방의 물력(物力)이 결딴나는 바람에 그 녹식의 숫자를 감하게끔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 이득을 취할 수 없는 데다 저 적들이 위압적으로 겁을 주니 번호가 배반하고 저 적들에게 들어간 것은 이치상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비유컨대 ‘집에 울타리가 일단 없어지면 적이 와도 무엇으로 막겠는가.’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저 적은 예(禮)로 대우할 수도 없고 위엄으로 제어할 수도 없으니 그들을 대처하는 방도가 대체로 어렵습니다. 이에 앞서 종성(鍾城)에는 몇 장, 온성(穩城)에는 몇 장, 하는 식으로 공명 고신(空名告身)을 가지고 가서 번호에게 수직(授職)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빈 말이 아닌 듯싶습니다. 저들이 만약 진정으로 와서 구한다면 공명 고신을 주어도 됩니다. 근래에도 통간(通簡)하는 사람이 있어 왕복하는 즈음에 적 내부의 일을 역시 알 수 있었는데, 사정(司正)이나 사맹(司猛) 등의 공명 고신을 계청(啓請)하여 가지고 가면 좋을 듯싶기에 황공하게도 감히 진달하는 바입니다. 우리 군대의 힘이 떨칠 때에도 회유책을 쓰는 것이 마땅한데, 더구나 지금의 병력으로는 장차 지탱할 수 없을 테니, 이런 일을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명 고신 몇 장을 여기에서 가져가고 싶은가. 예전에도 그런 예가 있었으니 설혹 기만당한다 하더라도 또한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옛적부터 번호에게 직첩을 주는 일이 있어 왔습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처치할 수만 있다면 전처럼 급식(給食)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병세(兵勢)를 완화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눈이 쌓인 뒤에는 호마(胡馬)엔 철발굽을 대지 않으니 나오지 못할 것이므로, 필경 무사하게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시일을 지연시키는 계책은 될 수 있습니다. 오직 묘산(廟算)에 달려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의논해서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모든 일에 더욱 진력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4책 18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77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인사(人事)

○上引見巡邊使李時言於別殿, 上謂時言曰: "賊勢如彼, 何以制之?" 時言曰: "自前人言, 北方之賊易與, 而臣則每慮北賊, 未嘗不懷悶於心。 賊之鐵騎, 與我軍遇於平野, 則雖砲手, 不及放火, 臣意, 莫如固守城池。 觀賊之勢, 或尾擊, 或騎兵不便, 而便於步兵, 則據險守要, 因賊懈怠, 而夜斫其營, 則可矣。 兵難遙度, 然臣意則以守城爲主。" 上曰: "凡事往盡乃心。 垂名竹帛, 正在今日。 如有可言之事, 今當遠離, 宜盡言之。" 時言曰: "臣當死生以之。 但北方城子, 過大而人少, 難於守城。 峙乃糇糧, 爲今日之急務。 而臣曾於三水洪原作倅時見之, 其處絶無富民, 居人生理甚艱, 非如下三道, 雖欲募粟, 而無得穀之路。 若不慮此, 而徒添軍士, 則必有庚癸之患矣。 臣固知破東補西之不可。 而曾爲統制使, 粗察南事, 則近日有羈(靡)〔縻〕 之勢, 今年則賊之大軍必不來矣。 忠淸道戰船十隻, 則一隻格軍一百名。 一名米五石, 以八結收合, 一隻一運, 米五百石。 以此推之, 十隻五千石。 若減出其二運價米, 則一萬石軍糧, 可以得之。 以慶尙上道軍糧, 由寧海, 以亇尙船輸運, 入送北道, 以忠淸道舟師價米, 轉補慶尙道, 則可以接濟, 自忠淸至嶺南, 則雖大船, 亦可行矣。 若然則可得五千石, 五千石軍糧, 豈可容易得之乎? 特遣御史, 意在得米, 而本無之穀, 從何得乎? 北海風高, 則勢難船運, 六月番雖不可及, 七月番預爲收合, 其價米則可以及期措送矣。 一名當納五石, 雖減捧四石, 宜當而牟米亦當竝捧矣。 臣將此意, 議于備局, 則備局, 亦欲啓稟, 而南備不可忘, 故未果耳。 但北方之事時急, 若於今年失機, 則彼賊必生前日所不生之心, 今年必極盡措備然後, 可以爲矣。 守城之具, 莫如火器, 而火砲最上, 三眼銃亦於馬上用之極好, 唐人亦用於馬上。 方其兩陣相對之時, 雖不必箇箇皆中, 可助聲勢, 敵必畏矣。 臣欲啓請齎去, 而軍器寺, 軍器絶少, 令該曹, 另爲措備入送宜當。 臣則死暇計? 但臣入去之後, 道路隔遠, 軍士不至, 糧餉亦盡, 臣不足惜, 國事可慮。 備邊司堂上極盡料量, 而數千里之事, 必待狀啓而後爲之, 則雖運糧、添兵, 勢不可及, 必先爲之規畫。 忠淸道則軍士幾名, 黃海道則幾名, 預爲裝束, 戰馬等事, 亦先措備, 待變爲當。 若待告急後措置, 則恐難及矣。 且軍百, 不如將一, 邊將極擇差遣爲當。 願至本道, 一一馳啓。" 上曰: "卿所言之事, 當議于備邊司。 將士於交戰之際, 雖不能斬級, 力戰勇敢者書啓則當別爲論賞。 今番件退之戰, 雖遭敗北, 力戰勇敢之人, 不乏於其中, 公論所言者, 一一啓聞施賞, 則將士爭能勸勵矣。" 時言曰: "朝廷無以憑考, 以斬級爲驗。 今承傳敎, 仔細聞見, 一一馳啓。" 上曰: "自古以斬馘爲功, 今則以別規言之, 野戰守城, 問以力戰人, 馳啓可矣。" 上曰: "卿與戰乎?" 時言曰: "臣始自, 賊入城之後, 大小百餘戰與相戰, 極難矣。 倭賊各自爲戰, 一聞其將分付, 必以力戰, 勝捷爲期, 所以難與戰也。 或云: ‘我國之人, 倉卒遇此賊, 故未及禦之。’ 以臣思之, 雖從容遇此賊, 亦難禦矣。 然若馬戰, 則不足畏矣。" 上曰: "其於放砲, 何?" 時言曰: "銃筒雖可畏, 若能審視, 則可以免矣。" 上曰: "與我國人何如? 或曰: ‘不能馬戰’ 云, 然耶?" 時言曰: "馬戰亦非極難之事。 倭賊初則不能, 終亦能之矣。" 上曰: "倭賊不能射, 而人莫敢敵, 何?" 時言曰: "我國人見賊, 則先潰以走爲能事。 將則雖不忠, 畏有軍律, 不敢先走。 軍之走者, 不可勝誅, 惟其不可勝誅, 是以走耳。 倭賊雖不能射, 兩矢之間, 忽焉到前, 我國之人雖曰善射, 遠則不中, 近則劍可畏。 發矢之後, 恐其短兵來接, 未得發矢, 射亦不足恃矣。 雖善用劍, 我國人若持劍而進, 則可以敵矣。 我國人則不能如此, 皆以走爲善策, 走且不及, 則爲賊所殺。 賊見我國之人, 或走或死, 樂爲之赴戰。 是以, 之氣增長; 我之氣沮喪矣。 臣曾從(道山)〔島山〕 之戰得見, 麻貴所率㺚子二百餘名, 皆持環鞭, 亂打如雨疾雷, 不及掩耳, 銃筒亦不暇放。 賊兵之走, 亦如我國人之走, 以此見之, 銃筒於馬戰, 亦末耳。" 上曰: "亦不及放砲耶?" 時言曰: "不及放矣。 走且不贍, 況能放砲乎? 以此言之, 平原接戰之時, 雖有砲手, 不能敵矣。 然, 於守城, 則莫如銃筒。 今聞, 件退之戰, 賊所着之甲, 皆唐甲。 我國弓力不猛, 不能穿甲, 而惟銃筒能穿云。" 上曰: "北賊之來, 多如㺚子, 處處圍城, 則何以爲之?" 時言曰: "我國之人不能偵探, 賊之多寡, 不能易知矣。 若處處圍城, 則守城亦難, 豈非可慮? 藩胡等咸仰我國祿食, 而北方於亂後, 物力板蕩, 減其祿食之數, 故無利於我國, 而彼賊以威㤼之, 潘胡之叛入於彼賊, 理之然也。 比如人家藩籬旣撤, 賊至誰禦? 且彼賊, 不可以禮待之; 不可以威制之待之之道, 蓋亦難矣。 前此有將空名告身, 授職藩胡之事, 如鍾城幾張, 穩城幾張云, 似非虛語。 彼若以誠而來求, 則可授空名告身。 近來亦有通簡之人, 往復之際, 賊中之事, 亦可知矣。 或司正、或司猛, 若得啓請持去, 則似好, 惶恐敢達。 其在兵力盛時, 亦當有羈縻之策, 況今兵力將不可支, 如此事, 擧行何如?" 上曰: "空名告身若干張, 欲自此持去乎? 自前有此例, 雖或見欺, 亦何關乎?" 時言曰: "自古有藩胡職帖之事, 若能如是處置, 則雖不能如前給食, 亦可以緩其兵勢。 雪塞之後, 胡馬無足鐵, 不能出來。 雖不可望其畢竟無事, 可爲延時之計。 惟在廟算。" 上曰: "議而爲之。" (上)〔又〕 曰: "凡事更加盡心。"


  • 【태백산사고본】 104책 18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77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