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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87권, 선조 38년 5월 22일 을미 3번째기사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북변에서 일어난 건퇴와의 교전 상황을 이징험이 아뢰다

함경도 안문 어사(咸鏡道按問御史) 이정험이 아뢰었다.

"신이 이달 4일 토병(土兵)을 시재(試才)하는 일로 행영(行營)으로 달려가는 길에 병사(兵使)를 만났는데, 그는 남·북도(南北道)의 포수(砲手)와 사수(射手) 3천여 명을 거느리고 건퇴를 분탕시키기 위해 번호(藩胡)의 탁두와 약속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행영에 머물면서 첩보(捷報)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8일 신시(申時) 경에 갑자기 영중(營中)에서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였습니다. 깜짝 놀라 연유를 물었더니 ‘행영의 군사가 싸움터로부터 와서 아무 아무의 존몰(存歿)을 말한 까닭이다.’고 했습니다. 신이 바로 행군(行軍)의 승패에 대해 묻자 ‘7일 석양에 아군이 종성(鐘城)에서 탁두의 군사를 대동하고 강을 건넜고 8일 이른 새벽에 건퇴의 적굴(賊窟)에 도착했다. 선봉이 시배(時排) 밖에 있는 오랑캐들의 집에 들어가 분탕할 무렵에 오랑캐들이 미리 대비하여 매복시킨 철기(鐵騎) 수백 명이 불시에 뛰쳐나와 칼을 휘두르며 아군을 어지럽게 공격하자 아군이 당해낼 수가 없어 일시에 무너졌다. 보병은 산으로 도망치고 기병은 길을 따라 달아나 각기 살길을 찾아 도망쳤다. 우후 성우길이 몸을 돌보지 않고 용맹을 떨쳐 일어나 몇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서 퇴각하여 직접 오랑캐 서너 명을 베자 적이 조금 물러섰다. 만일 우길이 힘을 다해 적을 막지 않았더라면 아군은 거의 강을 건너지 못할 뻔했다.’ 하였습니다.

종성 일로(一路)에는 칼에 찔리거나 화살에 맞은 상처를 싸맨 군사들이 잇달아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분탕당한 시종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니 모두 똑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도처의 진보(鎭堡)에 고아와 과부들의 곡성이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망자(戰亡者) 가운데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었던 사람들이 혹 3∼4일이 지난 뒤에 돌아오기도 하므로 현재로서는 그 숫자를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제장(諸將) 가운데 훈융 첨사(訓戎僉使) 임의(任義)가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고 회령 판관(會寧判官) 이상룡(李祥龍)도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탁두의 휘하 군사도 2∼3명이 전사했고, 번호(藩胡) 석을장개도 화살을 맞았으며 그의 아들도 칼에 찔렸습니다.

대체로 일도(一道)의 정병을 모은 이번 한바탕 싸움에서는 이익이 없었습니다. 제장들이 벤 것이 50여 급(級)이라고는 하지만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습니다. 인심이 꺾여 싸우기도 전에 저절로 무너질 상황이어서 보기에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병사 김종득은 오랫동안 변경에 있었으므로 오랑캐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지난번 동관의 함락을 보고서 북받치는 분통을 누르지 못하여 국위를 드러내기 위해 오랑캐의 토벌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겼으니, 그 정성은 참으로 가상합니다만 경솔히 큰 일을 벌였다가 국위를 손상시킨 것입니다.

조정에서 조처한 육진(六鎭) 가운데 종성이 더욱 홀라온(忽刺溫)의 적과 가까운데 말할 수 없이 탕패되어 군대는 반달치의 군량도 없고 토병(土兵)조차도 매우 잔약합니다. 그러니 만일 조그만 변이라도 발생할 경우에는 우리의 땅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입방(入防)과 군량을 저축하는 계책을 조정에서 또한 시급히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104책 18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8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軍事) / 외교-야(野)

咸鏡道按問御史李廷馦啓: "臣於本月初四日, 以土兵試才事, 馳到行營, 路上逢着兵使, 已領南、北道砲、射手三千餘名, 以件退焚蕩事, 約藩胡 卓斗以去云。 臣留行營, 佇待捷音, 初八日申時, 忽聞營中, 哭聲轟天。 驚惶問之, 則營軍士, 自戰所來言, 某某存歿之故。 臣卽問行軍勝敗之形, 則初七日夕, 我軍自鍾城, 帶同卓斗軍渡江, 初八日早朝, 到件退賊窟。 先鋒纔入恃排胡家焚蕩之際, 賊胡已先準備, 埋伏鐵騎數百許, 不意突出, 揮劍亂擊我軍, 我軍不能抵當, 一時潰散。 步軍登山以走, 馬軍由路奔北, 各自逃生。 虞候成佑吉忘身奮勇, 率若干戰士, 且戰且退, 手斬賊胡數三然後, 賊小退。 若非佑吉盡力拒戰, 則我軍幾不能濟云。 鍾城一路, 裹瘡之軍, 或逢劍、或中箭者, 連絡以還, 問其焚蕩形止, 則如出一口。 到處鎭堡, 孤兒、寡婦之哭聲, 慘不忍聞。 戰亡人則奔逬山谷之人, 或過三四日後, 亦有還來之人, 時未詳知其數。 諸將中, 訓戎僉使任義逢劍重傷; 會寧判官李祥龍逢箭重傷。 卓胡之軍二三, 亦爲戰死; 藩胡 石乙將介中箭, 石乙將介之子亦逢劍。 大槪聚一道之精銳, 不利於今次一擲, 諸將斬馘, 雖曰五十餘級, 所獲不能補其所亡。 人心沮喪, 有不戰自潰之形, 所見極爲悶慮。 兵使金宗得, 久在邊上, 備諳虜情, 頃見潼關之陷, 不勝奮激, 思欲揚示國威, 以討賊爲己任, 其誠固爲可嘉, 而輕擧大事, 致損國威。 朝廷以處置六鎭之中, 鍾城尤甚逼近忽賊, 蕩敗無形, 軍無半月之糧, 土兵亦甚凋殘, 脫有小警, 恐非我有。 入防、峙糧之策, 朝廷亦當急急講究。"


  • 【태백산사고본】 104책 18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8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軍事)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