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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86권, 선조 38년 4월 29일 계유 2번째기사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이조가 원손의 강학관 차출을 청하자 동궁이 원손이 아직 어리니 이를 참작해 달라고 아뢰다

이조가 원손(元孫)의 강학관(講學官)을 차출할 것을 청하였다. 왕세자가 주차(奏箚)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타고난 기질이 어느 누구보다도 편박하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저술가의 풍도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난리 이후로 세상의 변고가 이것 저것 많고 우환과 병이 잇달았으며 성질도 게으름이 습관화되어 마침내는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된 채 세월이 어느덧 30년이 지나갔습니다. 반평생을 돌아보면 무식하기 짝이 없어 밤중에 스스로 탄식하면서 옛사람에게 부끄러워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헛된 이름을 훔쳐 성명(聖明)을 크게 속여 청궁(靑宮)에서 대죄하고 있으면서 각별한 은총을 입으니, 사람의 자식으로서 신처럼 융숭한 은총을 받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신이 항상 큰 은총에 감격하여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오직 한번 죽음으로써 은총에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지난번에 유사가 어린아이를 취학시키는 일로 누차 아뢰기에 미안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하정(下情)을 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결정이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감(聖鑑)이 진실로 이미 통촉하시어 신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마땅히 재처하실 것이기에 입시하여서도 일찍이 한마디 말씀도 우러러 아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지(聖旨)에 강원(講員)을 차출하도록 특별히 윤허하셨다는 말을 삼가 듣고 놀랍고 황공하여 여러 날 동안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다가 어제 참람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염치없이 청대(請對)하여 감히 불안한 심정을 피력하여 천위(天威)를 범하였으니, 죄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정성이 위를 감격시키지 못하여 윤허를 받지 못하고 삼가 성교를 받드니 ‘사람이 출생한 지 8세가 되면 모두 소학에 들어간다. 책임이 중하므로 학문을 강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유사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셨는데, 이 명령을 듣고는 놀라 더욱 몸둘 바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10년 동안 자식을 깊이 아끼고 염려한 이유는 자식이 하나만 있기 때문이며 그가 널리 배우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장성하기만을 바랐으니,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혈성으로 말씀드린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또 사리상 크게 그럴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사세에 관계된 것이 옛날에는 적의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적의하지 않는 것이 있으며, 전에는 편리하였지만 나중에는 편리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영명한 재주와 비범한 성품이 아니라면 젖내 나는 어린아이가 서책이 무슨 물건이며 학문이 무슨 일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와 같은 데도 억지로 수학하게 하면, 당시에 비웃음을 살 뿐만 아니라 또한 후세에도 비난을 받게 될 터이니, 어찌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신하를 아는 데는 임금만한 이가 없고 자식을 아는 데는 아버지만한 이가 없는 것입니다. 나이는 8세이지만 실지는 겨우 7세로서 성품이 노둔하고 재주도 또한 영민하지 못한데, 이와 같은 자품으로서 이와 같은 시기를 당하여 신이 만약 성은(聖恩)을 탐내어 경솔하게 처리하여 그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게 한다면, 말을 채찍질하여 밭을 갈게 하는 것과 같이 번거롭기만 하고 이익이 없을 것이니, 이는 삼척 동자도 아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감당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어찌 감히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민망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유사가 혹 이와 같은 줄을 모르고 전례를 인용하여 강원(講員)을 차출할 것을 청하였더라도, 그 가부를 참작하는 것은 오직 성단(聖斷)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변변찮은 충정을 굽어 살피시어 윤허한 명령을 빨리 거둬들여 어리석은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겠습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성상을 우러러보아 간곡히 명을 기다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정원에 전교하기를,

"동궁의 수서(手書)를 예조에 내려보내라."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원손의 강관 인원을 먼저 차출하여 보도하는 방도를 세울 것으로 승전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강서원(講書院)이 개설되지 않았으니 강학 인원을 별도로 차출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관직으로 겸차(兼差)할 것인지는 본조가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으니, 예조로 하여금 다시 상의하여 결정해서 차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 때문에 동궁이 차자를 올렸다. 】


  • 【태백산사고본】 104책 186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人事)

○吏曹請差出元孫講學官。 王世子奏箚曰:

伏以, 臣受氣偏薄, 最出人下, 齠年志學, 嘗慕作者之風。 而自亂離以後, 世故多端、憂病相仍, 性又習懶, 遂爲自棄之人, 歲月荏苒三十之年, 忽焉已過。 點檢半生, 只是面墻, 中夜自嘆, 有愧古人。 不幸盜竊虛名, 厚誣聖明, 待罪靑宮, 恩眷卓殊, 人子遭逢之盛, 未有如臣者。 臣常感激鴻私, 晨夜雪涕, 只以一死, 爲圖報之期。 不意頃者, 有司以穉兒就學事, 累度啓稟, 不勝未安, 欲陳下情。 而非但時未講定, 聖鑑固已洞燭, 不待臣言, 自當裁處, 蒙恩入侍, 不曾一言仰達。 而伏聞聖旨, 特許講員差出, 驚惶累日, 不能自定, 乃於昨者, 不揆僭越, 冒昧請對, 敢瀝危悰, 瀆犯天威, 罪在不赦。 誠未上格, 未獲允兪, 恭承聖敎曰: "人生八(威)〔歲〕 , 皆入小學。 責任爲重, 不可不講學, 依有司所啓而爲之。" 聞命震越, 益無所容。 臣十載之間, 舐犢之(憂)〔愛〕 , 連綿不止, 只有此子, 不願博學, 惟望長成, 不避煩聒, 瀝血控辭者, 誠以此也。 且大有所不然者, 凡干事勢, 有宜於古, 而不宜於今; 有便於前, 而不便於後。 苟非英明之才、岐嶷之性, 則黃口小兒, 不知書冊爲何物; 學問爲何事。 如是而强使受學, 則非獨取笑於當今, 抑亦貽譏於後世, 豈非可懼之甚乎? 嗚呼! 知臣莫如君; 知子莫如父。 年雖八歲, 實纔七齡, 性旣駑劣, 才又不敏。 以如此之姿, 當如此之時, 臣若貪戀聖恩, 率爾處置, 使之講學, 則譬如策馬以耕, 徒煩無益, 尺童所知。 如有一分可堪之勢, 則何敢瀆擾哉? 臣實悶迫, 不知所爲。 有司雖或不知如此, 援例請差講員, 其參酌可否, 惟在聖斷。 伏乞聖慈, 俯察微衷, 亟收宣命, 俾安愚分則雖死之日, 猶生之年。 無任瞻天、仰聖待命懇迫之至, 昧死以聞。

傳于政院曰: "東宮手書, 下于禮曹。" 【吏曹啓曰: "元孫講官人員, 先爲差出, 以爲輔導之方事, 捧承傳矣。 講書院旣不開設, 則講學人員, 或別爲差出、或以他官兼差事, 自曹未知的據, 令禮曹, 更爲商確, 定奪差出, 何如?" 傳曰: "允" 以此, 東宮陳箚。】


  • 【태백산사고본】 104책 186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