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가 북변에 목면을 보낼 것, 오랑캐 방비를 위해 좋은 요새지를 얻을 것 등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성과 김종득 등의 장계를 삼가 보건대 건퇴의 적이 회령 지역 안에 거주하는 번호 벌이대(伐伊大)와 독소(篤所) 두 부락을 침범해 왔습니다. 접전한 곡절에 있어서는 비록 자상하고 간략함이 동일하지 않지만, 대개는 동관에서 이익을 얻은 뒤에 군사를 건퇴에 유둔시켜 놓고 드나들면서 침입하여, 우리로 하여금 대처하느라 지치게 하니 꾀가 흉악합니다. 반드시 여러 진(鎭)에 군사를 증강하여 배는 더 방비하여야만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육진이 현재 군량이 다 떨어져 당장 접제하기가 매우 곤란한 형편입니다. 게다가 농민들마저 농사를 중지하고 싸우느라 추수를 기대할 수 없으니, 앞으로 군량을 조달할 일이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전일에 계하하신 대로 평안도 포수 및 황해도·강원도·경기의 무사 등은 다시 독촉하여 급히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밖에 혹 정예병을 더 뽑아 계속해서 들여보내더라도 본도에서 군량을 미처 비치하기 전에 많은 수효의 병사를 증강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닐 듯합니다. 우선 병조로 하여금 다시 2백 명을 뽑아 미리 행장을 꾸리게 하였다가 서서히 사세를 보아가며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독운 어사(督運御史)를 이미 차출하였으니 수일 내로 떠나 보내야 하겠습니다. 다만 강원도 영동에서부터 북도까지의 거리가 매우 먼데 어사 한 사람이 두 도를 왕래하게 되면 시일이 오래 걸려 시급한 일이 반드시 지체될 것이니, 한 사람을 더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 하기를,
"윤허한다. 북도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우선인데, 도로가 험하고 멀어 배로 운반하기가 어려우며 비록 운반하더라도 넉넉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면포(綿布)를 많이 들여보내 중국과 우리 지방에서 무역하면 한편으로는 군민(軍民)의 의복을 만들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군량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니, 병조와 호조의 면포를 연속적으로 들여보내는 외에는 별달리 좋은 방도가 없다. 그러나 저축된 것이 얼마 없으니 목면(木綿)을 많이 마련할 계책을 본사(本司)가 상의하여 조처하되, 혹 조도사(調度使)의 규례에 의하여 관원을 지방에 차출해 보내는 일을 계책을 써서 참작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우리 나라의 성은 오직 광활하게 하는 데만 힘쓰고 견고하게 하는 데는 힘쓰지 않으며 또 험준한 데에 웅거하지 않아 제비집과 똑같으므로 그것을 보고는 손뼉을 치며 웃지 않는 중국 사람이 없다. 동관에서 성이 함락당할 때에 적호가 길다란 사닥다리를 이용하여 성을 넘어왔다고 하니, 성인데도 넘어왔다면 그 높이를 상상할 수 있다. 듣건대 회령성(會寧城) 안에는 우물이 없다고 하는데, 어찌 물이 없는 성에서 적을 방어할 수 있겠는가. 당초에 진을 설치하였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만약 포위당하게 되면 성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스스로 며칠 동안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오랑캐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항상 업신여기는 뜻이 있다고 한다. 조경(趙儆)이 일찍이 본부의 부사가 되었으므로 반드시 상세하게 알 것이니 불러다가 물어보고 상의하라. 성안의 여러 곳을 깊이 파보게 하기도 하되 그래도 우물을 얻을 수 없으면 차라리 진을 옮기어 후회를 남기지 말게 하라.
또 적의 형세를 보건대 좀도둑질이나 하는 하찮은 적과 비할 바가 아니다. 군사를 나누어 출몰하여 우리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고, 또 번리(藩籬)를 제거하여 우리가 의지할 것이 없게 만든 뒤에, 수만 대군을 계속 몰아 구름처럼 모이고 개미떼처럼 붙어 육박전을 벌여 성으로 올라오게 되면, 우리의 쇠잔한 성과 허약한 병졸로 어떻게 그에 대처할지 모르겠다. 육진의 요충 지역에 산성이 있으면 진(鎭)을 설치하여 험준한 데에 웅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형세가 좋은 지역 한두 곳을 얻으면 비록 10만의 오랑캐라도 침범할 수 없을 터이니, 또한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4책 186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9면
- 【분류】군사(軍事) / 외교(外交) / 재정(財政)
○備邊司啓曰: "伏見徐渻、金宗得等狀啓, 件退之賊, 來犯會寧境內住胡伐伊大、篤所兩部落。 接戰曲折, 雖有詳略之不同, 大槪得利潼關之後, 留兵於件退, 出沒侵軼, 使我疲於奔走, 其爲兇計深矣。 必須添兵列鎭, 倍加隄備, 庶可支撑。 但六鎭見糧匱竭, 目前接濟, 極爲無形。 加以農民輟耕荷戈, 無望秋成, 前頭繼餉, 尤極可慮。 前日啓下, 平安道砲手及黃海、江原、京畿武士等, 更爲催督, 急急入送爲當。 此外雖或加抄精軍, 鱗次入送, 而本道糧餉, 未及措置之前, 數多添兵, 恐非得宜。 姑令兵曹, 更抄二百, 預令裝束, 徐觀事勢, 以爲處置爲當。 督運御史, 已爲差出, 數日內, 當爲發送。 但自江原嶺東, 北道道里絶遠, 御史一員, 往來兩道, 動淹時月, 時急之事, 必至遲滯, 加出一員, 何如?" 傳曰: "允。 北道足食爲先, 而道路險遠, 未易船運。 雖運不敷, 若多入綿布, 貿換於彼我地方, 一以爲軍民之衣; 一以爲兵糧之用, 兵、戶二曹綿布, 可以連續入送, 他不暇計。 然所儲無幾, 多辦木綿之策, 本司商議措處。 或依調度使例, 差官於外方, 設策參酌施行。 且我國城子, 惟務廣闊, 不務堅壯, 又不據險, 有同燕壘, 華人見之者, 無不拍手而笑之。 潼關陷城時, 賊胡用長梯, 逾越云, 城而逾越, 其高卑可想。 聞, 會寧城中無井泉云, 豈有無水之城, 可以禦敵之理乎? 當初, 設鎭, 所未曉矣。 倘或被圍, 不待攻城, 而自不保於數日之內矣, 虜知之, 常有凌侮之志云。 趙儆曾爲本府府使, 必能詳知, 可招問商議。 或令深鑿城中諸處, 猶不能得焉, 則寧爲移鎭, 毋貽後悔。 且觀賊勢, 似非零賊狗偸之比。 分兵出沒, 使我不得耕農; 又撤藩籬, 使我有齒寒之患然後, 長驅數萬之衆, 雲屯蟻附, 肉薄登城, 以我殘城弱卒, 不知何以待之。 六鎭要害之地, 如有山城, 可以設鎭據險。 苟得形便一二處, 雖十萬之虜, 無能爲矣, 亦當議處。"
- 【태백산사고본】 104책 186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59면
- 【분류】군사(軍事) / 외교(外交)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