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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80권, 선조 37년 10월 20일 병인 5번째기사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예조에서 종묘 제사에 쓰이는 기명과 찬품을 개정할 것을 건의하다

예조가 【판서 허성(許筬), 참판 신식(申湜), 참의 송준(宋駿). 】 아뢰기를,

"종묘(宗廟)를 중건하는 공사는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묘중(廟中)에서 행용(行用)하는 절목(節目) 가운데 미안한 점이 많이 있으니 시급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로 후록(後錄)에 기재하여 아뢰니 대신과 의논하여 품재(稟裁)해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종묘의 대소 사전(祀典)과 찬품(饌品) 가운데 숫자를 감손한 것이 있는데 당초 환도한 처음에는 물력(物力)을 제대로 갖출 수가 없어서 부득이 이렇게 조처한 것입니다. 제사를 풍부하게 하느냐 간소하게 하느냐는 여부는 때에 따라 예(禮)에 의거하여 증감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만, 찬품에 이르러서는 감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정에 의거하여 찾아보면 신도(神道)도 먼 것이 아니니 어찌 매우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사이에 국가에서 행용(行用)하는 대소 물품이 거의 다 복구되었는데 이 제물만이 아직도 감손한 대로 있으니, 인정과 예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더욱 미안한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복구하여 마련케 해서 오는 을사년부터는 횡간(橫看)에 의거하여 진배(進排)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열성(列聖) 기신제(忌辰祭)의 찬품은 평소 문소전(文昭殿) 대제(大祭)의 예(例)에 따라 했었는데, 지난해 다시 마련할 적에 각 능(陵)의 삭망제(朔望祭) 때 쓰는 찬품을 적용하였으므로 풍약(豊約)196) 이 너무도 달라서 이미 미안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효경전(孝敬殿)에는 문소전의 제례(祭禮)를 적용했기 때문에 기신제에도 평시의 찬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열성의 찬품에 감손의 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더더욱 미안한 일이니, 이제부터는 열성의 기신제에도 평시의 찬품을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옛날에는 희생(犧牲)·기명(器皿)·의복(衣服)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감히 제사를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기(祭器)를 준비하지 못하면 연기(燕器)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제기를 갖추지 못했을 경우 연기로 대신 쓰면 될 것인데도 반드시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그 의의가 어찌 엄하고도 중하지 않습니까. 종묘의 제사 때에 쓰는 기명(器皿)은 오로지 사옹원(司饔院)의 사기(沙器)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예기(禮記)》에 이른바 연기라는 것으로 옛사람이 감히 이것으로 제사 지낼 수 없다고 한 물건인 것입니다. 이는 고례(古禮)로 헤아려 보아도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그리고 자성(粢盛)은 한 그릇에 들어가는 숫자가 원래 4승(升)인데 자기 사발에는 단지 2승만 들어가기 때문에 나머지 2승은 감손하여 쓰지 않고 있습니다. 연기(燕器)는 본디 제사에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인 데다가 이를 제기로 쓰는 탓으로 자성의 원수(元數)가 감손되었으니, 더없이 미안한 노릇입니다. 허다한 제기를 일시에 모두 만들 수는 없지만 보궤(簠簋)·변두(籩豆) 등속은 우선 국(局)을 설치하여 급속히 제조하게 하소서. 그리고 희상준(犧象樽)·관분(盥盆) 등속은 사세를 보아가면서 제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대례(大禮)가 끝난 뒤에 즉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계하하였다. 【난리가 지난 뒤 10여 년 사이에 온갖 폐기되었던 것을 모두 다시 일으켜서 심지어는 왕자의 제택(第宅)까지도 굉장하게 완비하였다. 그런데 유독 종묘의 제사에 쓰는 기명(器皿)과 찬품(饌品)만은 소략하게 한 채 갖추지 않았으니 해조(該曹)에서 진달한 것이 너무 늦었다. 】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완평 부원군 이원익, 영중추부사 이덕형, 영의정 윤승훈, 좌의정 유영경, 우의정 기자헌은 의논드리기를,

"해조의 공사(公事)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오성 부원군 이항복은 의논드리기를,

"신은 오랫동안 종묘의 제조(提調)로 있으면서 직접 이 일을 보았으므로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평시의 제물을 고찰해 보고 외공(外貢)의 증감된 숫자를 참고하여 보건대, 정조(鼎俎)에 오르는 것이 배로 풍성하지는 못하지만 외방의 공물은 진실로 증가되고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늘 민망하게 여겨왔습니다만 감히 발론하지 못했습니다. 수년 이래 모든 일들이 대략 이미 복고(復古)되었지만 유독 이것만은 복고되지 않고 있는데 전에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욱 흠전(欠典)이 되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유사(有司)가 지난해 친제(親祭)할 때의 예(例)에 견주어 회복시켜 그대로 시행하려 했었으나 그 일이 시행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강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용(器用)을 갖추는 데 대한 선후 차제가 더욱 시의(時宜)에 합당하니, 다시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의논한 대로 하라고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1책 180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680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재정(財政) / 사상-유학(儒學)

  • [註 196]
    풍약(豊約) : 풍부함과 절약함.

○禮曹 【判書許筬、參判申湜、參議宋駿。】 啓: "宗廟重建公事, 旣已蒙允矣, 廟中行用節目, 多有未安者, 不可不急時釐正。 別開後錄以啓, 議大臣稟裁施行何如? 一, 宗廟大小祀典, 饌品有減省之數。 蓋當初還都之時, 物力無形, 出於此不得已之擧。 祭之繁簡, 因時據禮, 容有增減, 至於饌品, 則不可損削。 求之人情, 神道不遠。 豈非未安之甚乎? 今至十餘年之久, 國家大小行用之物, 幾盡復舊, 而惟此祭物, 尙在所減之中。 揆之情禮, 尤極未安。 令該曹復舊磨鍊, 來乙巳年爲始, 依橫看進排何如? 一, 列聖忌辰祭饌品, 平時依文昭殿大祭例, 而頃年改磨鍊時, 用各陵朔望祭饌品, 豐約頓異, 已爲未安, 而卽今孝敬殿, 則用文昭殿祭禮之故, 忌辰祭, 用平時饌品, 列聖忌辰, 猶用省約之規, 尤極未安。 自今以後, 列聖忌辰祭, 竝用平時饌品何如? 一, 古者, 牲殺器皿衣服不備, 則不敢以祭, 且祭器不備, 不造燕器。 祭器不備, 代以燕器, 猶可也, 必至於不敢以祭, 則其義豈不嚴且重哉? 宗廟祭用器皿, 專用司饔院沙器, 此禮所謂燕器, 而古人所不敢以祭之物。 揆之古禮, 亦極未安。 且粢盛一器, 元數四升, 而磁沙鉢, 只用二升, 故餘二升, 減去不用。 燕器本不可以祭, 而以器之故, 減削粢盛, 尤極未安。 許多祭器, 雖不能一時竝擧, 簠簋籩豆之屬, 爲先設局, 急速造作, 而如犧象樽盥盆之類, 觀勢隨造宜當。 大禮畢後, 卽時擧行何如?" 啓依允。 【亂後十餘年, 百廢皆興, 至於王子第宅, 亦極宏敞, 而獨於宗廟之祭, 器皿饌品, 略而不備。 該曹所陳, 吁亦晩矣。】 議于大臣, 則完平府院君 李元翼、領中樞府事李德馨、領議政尹承勳、左議政柳永慶、右議政奇自獻議: "依該曹公事施行宜當。" 鰲城府院君 李恒福議: "臣久忝宗廟提調, 親見此事, 常懷未安。 爲考平時祭物, 參之外貢增減之數, 登之鼎俎者, 雖不倍豊, 外方所貢, 固是增加, 故心常愍焉, 而未敢發。 自數年來, 凡事略已復古, 而此獨不擧, 在前則猶可, 而在今則尤爲欠典。 伏聞有司, 擬於先年親祭時, 復之, 仍以行之, 事果不行。 今不可不講。 其器用之備, 先後次第, 尤合時宜, 不敢更有別議。" 啓依議。


  • 【태백산사고본】 101책 180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680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재정(財政)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