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관찰사 이시발이 유승서와 박대근이 귤지정과의 문답을 장계하다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장계(狀啓)하였다.
"유승서(柳承瑞)와 박대근(朴大根)이 동시에 관사(館舍)에 가서 조용히 술자리를 마련하고 정형(情形)을 캐물어 보게 하였더니, 귤지정(橘智正)이 대답하기를 ‘글 속에 이미 다 말했는데 다시 할 말이 없다.’ 하였습니다. 승서 등이 묻기를 ‘이번 서계(書契)는 필시 평조신(平調信)의 뜻으로 만든 것이 아닐 것이다. 어찌 핍박하는 말로 큰 일을 도모하려고 하는 것인가. 우리 나라가 너희 대마도(對馬島)의 절박한 심정을 알고 있기는 하다만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손문욱(孫文彧)이 북경(北京)·밀운(密雲) 등지의 각 아문(衙門)에 간 것인데, 5월쯤이면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정이 태도와 안색을 변하며 말하기를 ‘여기에서 천조(天朝)까지 빨리 가면 20여 일이고 천천히 가더라도 1∼2개월밖에 걸리지 않는다. 지난해 여름에 곧바로 떠난 사람이 올해 5월에야 돌아온다고 말하는 것은 필시 이 일을 늦추려는 계획일 것이다. 만일 천조에서 허락하지 않아 결말을 내기 어려운 형편이라면 회답할 말을 주어 우리 소도(小島)가 먼저 주륙을 당할 환란을 면케 해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천만 다행이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대근이 대답하기를 ‘손문욱이 지난 7월 요동(遼東)과 광녕(廣寧) 등지의 아문(衙門)으로 떠나 주선하고 돌아왔다가 사신(使臣)을 수행하여 12월 22일에 출발했으니, 이렇게 계산한다면 그의 귀환 날짜는 바로 금년 5월쯤 되는데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지연된 폐단에 대해서는 깊이 유념하고 있는 바이다.’ 하니, 지정이 대답하기를 ‘지난해도 이런 식이고 올해도 이런 식이니 진정 가강(家康)이 더욱 화를 낼까 염려된다. 동병(動兵)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승서 등이 답하기를 ‘너희 대마도에서 하고 싶어하는 일이 있어 가강에게 품했다가 미처 회답을 받지 못했을 경우 너희 대마도가 과연 우리 나라에 대해 멋대로 가부를 행사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 나라의 천조(天朝)에 대한 분의(分義)는 너희 대마도와 가강의 관계와 비교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도 조신이 매양 이처럼 급박하게 독촉하려 하니 너무도 사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귤지정이 대답하기를 ‘조신이 어찌 이런 곡절을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가강이 태합(太閤)의 유명(遺命)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하여 이렇게 급박하게 독촉하고 있으므로, 이를 민망하게 여긴 나머지 실제로 사세가 급하다는 것을 고하게 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박대근이 대답하기를 ‘너희 나라가 진정 제대로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자세로 임하여 예의에 맞게 했던들 천조에서 어찌 들어주지 않을 리가 있었겠는가. 책봉사(冊封使)를 태만스럽게 대우하였고 재차 병란을 일으킨 뒤에야 비로소 성의를 보이는 짓을 했기 때문에 천조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처럼 지연된 것이다. 이 모두는 일본의 잘못으로서 우리 나라가 주선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이 반드시 점차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니, 망동을 부려 앉아서 기회를 잃지 않도록 신중히 처리하여 조신의 마음을 위로해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니 지정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반드시 손문욱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들어가야 하겠다. 다만 생각하건대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게 되면 조신이 필시 의아하게 여겨 또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이니, 작은 배를 먼저 들여보내는 것이 낫겠다.’ 하였습니다.
박대근이 답하기를 ‘천조의 위관(委官)이 현재 왜정(倭情)을 탐지할 목적으로 서울에 와 있는데, 만일 이런 말을 듣게 되면 그가 반드시 달가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관찰사에게 밀품(密稟)하여 회보(回報)하도록 하겠다.’ 하니, 지정이 말하기를 ‘가강의 속마음을 들어 알기로는 내가 김광(金光)만 못하다. 작은 배를 먼저 보내는 것의 편리 여부를 시급히 비보(飛報)하여 회시(回示)해 주면 고맙겠다.’ 하였습니다. 박대근이 말하기를 ‘김광이 일찍이 조신과 함께 왜교(倭橋)에서 조금 머물렀었던가?’ 하니, 지정이 신강(信康)을 돌아보고 묻자, 신강이 대답하기를 ‘지난해 8월 무렵 조신의 식읍(食邑)에 가서 서로 만난 적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지정의 언사와 안색이 점점 공손해졌는데, 손문욱을 기다리기로 기약을 하고 파했습니다. 이른바 신강이란 자는 조신의 가인(家人)입니다. 이 밖의 정태(情態)에 대해서는 억측(臆測)하기 어려웠다고 하였습니다.
당초 비변사의 계사(啓辭)로 행이(行移)한 데 따라 지수(指授)한 뜻으로 정형(情形)을 캐물어 보게 한 결과 답한 내용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9일 지수(祗受)한 밀지(密旨)에 지시한 사항에 대해서는 즉시 유승서 및 박대근에게 알렸는데, 문답(問答)한 회보(回報)가 오는 즉시 치계(馳啓)할 생각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98책 172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585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명(明) / 외교-왜(倭)
○慶尙道觀察使李時發狀啓: "柳承瑞與朴大根, 一時就館, 從容設酌, 鉤問情形, 則智正對曰: ‘書中已盡, 更無他言。’ 承瑞等問曰: ‘今番書契, 必非調信意所作也。 何以逼迫之辭, 欲圖大事乎? 我國雖知爾島切迫之誠, 不能擅斷, 故孫文彧前往北京、密雲等地各衙門, 當於五月間回來。’ 語未畢, 智正動容變色曰: ‘自此往天朝, 急則二十餘日, 緩則一二月矣。 去年夏月上馬去人, 今年五月當還云者, 必欲緩此事計也。 若天朝不許, 勢難結局, 則願賜回話, 俾免小島先戮之患, 千幸萬幸。’ 大根答曰: ‘孫文彧, 去 七月發向遼東、廣寧等處衙門, 周旋而歸還, 隨使臣, 十二月二十二日起身。 以此計之, 其歸, 正在今年五月間。 此亦不可不慮。 其間遲延之弊, 深用爲念。’ 智正對曰: ‘去年如是, 今年又如是, 誠恐家康之怒益深。 動兵奈何?’ 承瑞等答曰: ‘爾島有所欲爲之事, 稟於家康, 而未及回答, 則爾島果能擅行可否於我國乎? 況我國之於天朝分義, 不啻若爾島之於家康, 而調信每欲督迫如此, 其不諒事體甚矣。’ 智正對曰: ‘調信豈不知如此曲折乎? 但家康欲不負大閤遺命, 而督迫如此, 是以爲憫。 實告事急耳。’ 大根答曰: ‘爾國苟能明恕而行, 要之以禮則 天朝豈有不從之理乎? 慢待冊使, 再動干戈而後, 始爲輸誠, 以此天朝群議不一, 遲延至此。 是皆日本之過, 非我國不能周旋者。 然事必漸成, 愼無妄動, 坐失機會。 以勞調信之心可也。’ 智正對曰: ‘然則必待孫文彧回日入歸, 第念久不還去, 則調信必疑, 又遣他人。 莫若小船, 先爲入送耳。’ 大根答曰: ‘天朝委官, 方以倭情探聽事, 來在京城。 若聞此言, 則彼必不肯。 我當密稟於觀察使, 回報爲計。’ 智正曰: ‘聞知家康心跡, 我不如金光小船先送便否, 作急飛報, 以示回下幸甚。’ 大根曰: ‘金光, 曾與調信, 少留倭橋否耶?’ 智正顧問信康, 信康對曰: ‘去年八月時分, 到調信食邑, 而相逢者也。’ 辭色漸遜, 以待孫文彧爲期而罷。 所謂信康者, 調信家人也。 此外情態, 難以臆料云云。 初因備邊司啓辭行移, 以其指授之意, 鉤問情形, 則所答如此。 初九日, 祗受密旨內指授辭緣, 則卽爲知會于柳承瑞及朴大根處, 待其問答回報, 卽爲馳啓計料。 詮次善啓。"
- 【태백산사고본】 98책 172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585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