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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71권, 선조 37년 2월 23일 갑진 2번째기사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일본국 현소가 김광에게 편지를 보내다

일본국 현소(玄蘇)김광(金光)에게 보낸 글은 이러하다.

"내가 왜사(倭史)를 살펴보건대 ‘인황(人皇) 제7대 효령제(孝靈帝) 45년에 진 시황(秦始皇)이 즉위하였다. 얼마 후에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일본에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을 요구하였고 일본도 오제삼황서(五帝三皇書)를 요구하였는데 진 시황이 보냈다. 25년 뒤에 진 시황이 분서 갱유(焚書坑儒)를 하였으므로 공자(孔子)의 전경(全經)은 일본에 남아 있다.’ 하였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일본에서 통용하는 글자는 겨우 마흔 여덟 글자가 있을 뿐으로 이것을 가명(假名)025) 이라 하는데, 이에 앞서는 중국 글을 보지 못하였을 것인데, 어찌 쉽사리 읽고 뜻을 알았겠습니까. 부질없이 상자에 담아서 간직해 두었을 뿐일 것입니다.

그뒤 응신제(應神帝) 때에 이르러 백제국(百濟國)에 박사(博士)를 구하여 경사(經史)를 전수하니 귀천(貴賤)이 없이 중국 글을 익혔으며, 불경(佛經) 및 유교(儒敎)와 제대 백가(諸代百家)의 글이 차례로 잇달아 들어오니, 사람들이 유교에 오상(五常)이 있고 불교에 오계(五戒)가 있는 것을 알아서 날로 묻고 달로 배워서 드디어 문명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일본을 가리켜 동방 군자국(東方君子國)이라 하였으니 이는 중화(中華)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운수가 쇠퇴하여 나라가 어렵고 근심스럽게 되어서는 공가(公家)에서나 사가(私家)에서 전투만을 일삼아 문적(文籍)을 버리고 전쟁을 일삼은 지 이제 1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에 중국이 귀한 줄을 모르고 선린(善隣)이 소중한 것을 깨닫지 못하여 군자의 나라가 맹수의 나라로 바뀌었으므로 발톱이 길고 어금니가 날카로운 자는 흥성하고 발톱이 짧고 어금니가 무딘 자는 상망(喪亡)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고 슬픕니다.

근래 평수길(平秀吉)이란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름도 몰랐던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었으나 기상이 하늘에 치솟는 듯하였으므로 국왕이 그의 사람됨을 듣고 불러다가 벼슬을 시켰습니다. 여러 차례 승진되어 관백(關白)의 직임을 맡게 되자 1백 년 동안 복종하지 않던 무리를 토벌하였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치면 반드시 빼앗으니, 66주(州)가 얼마 안 가서 신복(臣服)되었습니다. 이에 남해(南海)의 여러 섬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기도 하고 상인(商人)에게 토산품(土産品)을 맡겨 보내기도 하니, 초목도 그의 위명(威名)을 알 것이라 하겠습니다. 어느날 평의지(平義智)에게 명하기를 ‘듣건대 예전에는 조선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왔는데, 앞서는 정(鄭)026) 이 있었고 뒤에는 신(申)027) 이 있어 사람들이 두 사신을 칭찬하여 훌륭한 사신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일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니, 가상하다. 그런데 근래 일본은 사신을 보내는데도 조선은 사자를 보내지 않은 지 오래니, 네가 바다를 건너가서 사신을 청하여 옛일을 회복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기축년028) 에 평의지가 몸소 바다를 건너갈 때 나와 평조신(平調信)도 따라갔으나 그 뒤에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여 빨리 결정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경인년에 평의지를 길잡이로 삼아 황(黃)029) ·김(金)030) ·허(許)031) 세 사신이 일본에 왔고, 또 그 이듬해 신묘년에 나와 평조신이 세 사신을 호송하여 바다를 건너 그해 가을 8월에 귀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임진년에 과연 대란(大亂)이 일어났으니, 아, 이것이 누구의 허물입니까. 두 사신이 일본에 왔을 적에는 인교(隣交)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는데 세 사신이 왔다가 가서는 인교가 갑자기 변해졌으니, 대개 소견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지금의 공자(孔子)도척(盜跖)이 모두 진애(塵埃)가 되었으니 굳이 논할 것도 못되는 것으로 가부는 높은 시렁에 묶어두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괴문(槐門) 가강공(家康公)이 대합(大閤) 수길(秀吉)의 유명(遺命)을 맡아 여러해 동안 귀국에 화친을 청하였으나 귀국에서는 아직 승락하는지 않는지의 여부를 보이지 않고 평의지와 평조신에게 답장만을 내렸으니, 반드시 좋은 일은 늦어지고 혐의스러운 일은 빨라지는 것으로서 아마도 대기(大器)는 늦게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니 누가 그르다 하겠습니까. 그렇기는 하나 평의지와 평조신은 결코 마침내 늦게 성공하리라는 것을 모를 것이니 어찌 맹수가 바다를 건너는 것을 억류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졸렬한 공장이가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게 되면 큰 그릇을 이루지 못할 것이고, 이루어지면 평의지와 평조신은 죄과(罪科)를 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족하(足下)는 오랫동안 일본에 있었으므로 일본의 시세를 익히 알 터이니 여러 가지 보고 들은 것을 조금도 남김없이 각로(閣老)들에게 여쭈어 스스로 신사(信使)가 되어 화교(和交)를 증험하게 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족하가 귀국에 막대한 충성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점에 있습니다마는, 족하는 두 사신을 본받으려고 생각하십니까, 세 사신을 본받으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 안중(眼中)에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청상(淸商) 소리를 듣고 각(角) 소리라 하는 것은 곡조를 잘못 탄 때문이 아니라 듣는 자가 잘못 들었기 때문이고, 화벽(和璧)032) 을 보고 돌이라 하는 것은 화벽이 천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는 자가 분명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매우 삼가야 하겠습니다. 아, 사람이 사람과 싸우는 것은 의리를 중시하고 목숨을 경시하기 때문이고 짐승과 싸우는 것은 용맹해서가 아니고 피할 줄 모르기 때문이니, 이것도 잘 판별해야 하겠습니다. 내 나이 일흔에 가까왔으니, 남은 목숨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치란과 흥망은 죽은 사람에게 관계되지 않는 것으로 걱정할 것도 없지만, 두 나라 백성을 근심하여 말하는 것이니, 가엾이 여겨 살피기 바랍니다. 박수영(朴壽永)은 향어(鄕語)를 잘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손수 이야기를 적어 올리니, 어여삐 보아 주기 바랍니다. 또한 나이 늙고 눈이 어두워서 부끄러운 줄 압니다만 이각로(李閣老)전첨지(全僉知)는 함께 천리 밖에서 처음으로 뵈었으니, 또한 이런 내용으로 말하여 주십시오."【이각로는 이덕형(李德馨)인데 지난 신묘년033) 에 선위사(宣慰使)였고, 전첨지전계신(全繼信)인데 지금 경상 우후(慶尙虞候)가 되어 적사(賊使)가 올 때마다 반드시 더불어 접대하는 자이다. 】


  • 【태백산사고본】 97책 17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572면
  • 【분류】
    외교-왜(倭)

  • [註 025]
    가명(假名) : 가나.
  • [註 026]
    정(鄭) : 몽주(夢周).
  • [註 027]
    신(申) : 숙주(叔舟).
  • [註 028]
    기축년 : 1589 선조 22년.
  • [註 029]
    황(黃) : 윤길(允吉).
  • [註 030]
    김(金) : 성일(誠一).
  • [註 031]
    허(許) : 성(筬).
  • [註 032]
    화벽(和璧) : 변화(卞和)의 벽옥, 초(楚)나라의 변화가 박옥(璞玉:캐어 내어 아직 다듬지 않은 옥. )을 얻어 초 여왕(楚厲王)에게 바쳤으나 속였다 하여 왼발을 잘렸고 무왕(武王) 때에 또 바쳤다가 오른발을 잘렸는데, 문왕(文王)이 즉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그 박옥을 쪼아서 과연 보옥(寶玉)을 얻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말.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
  • [註 033]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日本國 玄蘇, 遺金光書曰:

余按《倭史》曰: "人皇第七代孝靈帝四十五年己卯, 始皇卽位。 旣而好仙, 就日本求長生不死藥。 日本又就求五帝三皇書, 始皇送之。 後二十五年, 始皇焚書坑儒, 故孔子全經, 存于日本爾。 余以謂, 日本所通用文字, 纔有四十八, 稱之曰假名。 國人先是, 未視中國書, 豈得輕下觜解意乎? 空韞櫝藏之而已。 後至應神帝時, 就百濟國, 求博士、傳經史, 無貴無賤, 通習中國文字、佛經、儒敎、諸代百家書, 次第相逐來, 人果知儒有五常, 佛有五戒。 日問月學, 遂作文明之國。 於是, 中國日本爲東方君子國, 寔也。 及其季運, 國屬艱虞,公戰私鬪, 抛文籍、業干戈者, 一百餘年于玆矣。 不知中國之貴, 不覺善隣是寶, 君子之國, 變作猛獸之國。 爪長牙利者, 興盛; 爪短牙鈍者, 喪亡。 可慙焉、可悲焉。 近來有平秀吉, 始不知何名, 身長田畝之間, 氣凌雲漢之外。 國王聞其爲人, 召換衣冠, 一日九遷, 領關白職, 而伐一百年不庭輩, 戰必勝、攻必取, 六十六州, 不日臣服矣。 於是南海諸嶼, 或遣使臣獻方物, 或付商客送地産, 可謂草木亦識威名者也。 一朝。 命義智曰: "聞昔朝鮮, 差信使過海, 前有後有, 人稱美二使曰: ‘使哉! 使哉! 事猶在耳。 可尙焉哉! 邇來日本差使, 朝鮮闕使者久矣。 汝超海誘使, 復舊可也。" 是以己丑, 義智身自超海, 余及調信亦從後, 廷議紛然, 不能速(訣)〔決〕 。 翌年庚寅, 以義智爲南鍼, 黃金許三使過海, 又其翌年辛卯, 余及調信, 護送三使超海, 同年秋八月歸國, 翌年壬辰, 果及大亂。 吁! 是誰愆乎? 二使過海, 而隣交不絶者久矣, 三使過海, 而隣交已變者速也。蓋所見如何如何? 今也孔子盜跖, 共塵埃, 不足强論可否, 束高閣焉。 吾槐門家康公, 任大閤秀吉遺命, 多年乞和於貴國, 貴國未示諾不諾之事, 只賜義智調信報章, 必好事緩、嫌事急。 想是以大器晩成也, 孰謂之非乎? 雖然, 義智調信, 決不知畢晩成功, 而爭得抑留猛獸超海乎? 其故何也? 拙匠剌指出血, 大器果不成。 成則義智調信,罪科難免。 足下久作客, 熟知日本時勢, 凡所見聞, 不遺一毫。 請稟諸閣老, 自作信使過海, 爲和交之驗。 乃是足下,忠于貴國者, 莫大焉。 余所思在玆。 但足下意, 祖二使耶? 祖三使耶? 倂在眼中而已。 古云聞淸商而謂之角, 非彈弦之過也, 聽者之不聽矣。 見和璧而名之石, 非璧之賤也, 視者之不明矣。 愼之愼之。吁! 人之與人戰者, 是重義而輕命也; 與禽獸戰者, 是非勇而忘逃也。 是亦能辨之。 余年近(者)〔耆〕 稀, 餘命有幾乎? 治亂興亡, 雖不關泉下人爲憂,兩固蒼生之憂, 而云爾。 憐察。 朴壽永鄕語未悉通, 因此手自錄呈床話, 煩靑眸。 且知年老眼昏, 慙汗。 李閣老全僉知, 共辱識荊於千里之外, 其亦以是言之。’ 【李閣老,乃李德馨也。 往在辛卯年, 爲宣慰使。 全僉知, 是全繼信也。 今爲慶尙虞候, 每賊使來, 必與之接遇者也。】


  • 【태백산사고본】 97책 17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572면
  • 【분류】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