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 165권, 선조 36년 8월 13일 병신 1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주역》의 명이괘를 강독하다

묘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갔다. 영사 유영경(柳永慶), 지사 윤근수(尹根壽), 특진관 조정(趙挺)·유희서(柳熙緖), 장령 이호의(李好義), 시독관 이덕형(李德泂), 헌납 신율(申慄), 시독관 권진(權縉), 가주서 송극인(宋克訒), 기사관 김대덕(金大德)·권혼(權昕)이 입시하였다. 상이 《주역》의 명이괘(明夷卦)를 강독하였는데, 전에 수강한 명이괘 구삼효(九三爻)의 ‘명이는 어두울 때 남쪽으로 사냥가서[明夷于南狩]’부터 ‘끝내 깨닫지 못한다. [終不悟也]’까지 소리내어 한 번 읽고 나서, 이덕형이 ‘육오는 기자가[六五箕子]’부터 ‘자리로 말한 것이다. [以位言]’까지 두 번 소리내어 읽고 한 번 새겨 진강(進講)하였다. 상이 새로 수강한 것을 한 번 읽고 새겼다. 덕형이 아뢰기를,

"첫 대문(大文)은 다른 괘를 보면 오효(五爻)를 임금 자리로 삼고 육효(六爻)를 허위(虛位)로 삼는데, 이 괘에서는 육효(六爻)가 ‘임금의 자리에 있고 오효는 육효에 가깝습니다. 대개 기자주(紂)의 구신(舊臣)인데 지극히 어두운 임금을 만나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겉으로는 어둡게 감추어 있더라도 안으로는 반드시 정정(貞正)하기 때문에 정(貞)함이 이(利)하다 한 것입니다. 다른 괘의 효사에서는 ‘간(艱)할 적에 정(貞)함이 이(利)하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간(艱)을 말하지 않은 것은, 기자에 대하여는 간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 뜻이 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른 효에서는 모두 ‘명이(明夷)’라고 하였는데 상육효에서는 ‘불명(不明)’이라고 한 것은 명이 이미 상하여 상할 만한 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하늘에 오른다. [初登于天]’ 함은 탕무(湯武)의 일이고 ‘마지막에 땅에 들어간다. [終入于地]’함은 걸주(桀紂)의 일입니다. 기자가 환난(患難)을 만났을 때에 가 깨닫게 될 것을 바라고 거짓 미쳐서 노(奴)가 되는 것도 피하지 않았으니 ‘불가질정(不可疾貞)’이라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불가질정’을 교정청(校正廳)의 풀이에는 ‘성급히 정(貞)하는 것을 하여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이번에 본관(本館)에서 교정할 때는 ‘형세가 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첫 대문의 소주(小註)에 ‘미자(微子)가 떠난 것은 도리어 쉽지만 비간(比干)이 줄곧 간(諫)하다가 죽은 것은 또한 도리어 색성(索性)하다.’ 하였는데, 색성이란 무슨 뜻인가?"

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이는 어록(語錄)에 너무 심하다고 하는 뜻과 같습니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미자가 떠난 것과 비간이 간하다가 죽은 것은 다 같이 비통한 마음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정(貞)하되 이롭지 못하였고, 기자가 수노(囚奴)까지 된 것만이 정한 것이 이롭게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사실 그렇지만 나는 색성의 뜻을 몰라서 물은 것이다. 소(素)자의 뜻이 아닌가?"

하자, 윤휘(尹暉)가 아뢰기를,

"고서(古書)에 ‘왕안석(王安石)은 색성한 소인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누구의 말인가?"

하니, 윤휘가 아뢰기를,

"신이 누구의 말인지 기억하지 못하나 이 말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중용》의 은벽한 이치를 찾아내고 괴이한 짓을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고, 영경은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심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자의 자손은 후세에 아는 자가 없으니 매우 서운하다. 기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였다는 것은 기자가 아니라 미자일 것이다. 기자무왕(武王)만이 함께 도(道)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홍범(洪範)138) 으로 그 도를 전하였을 뿐이고, 중국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은(殷)나라의 유민(遺民)을 거느리고 동으로 향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실로 무왕이 봉(封)한 것도 아니고 주나라에 조회했을 리도 없다. 헛말이 전승되고 잘못을 답습하여 드디어 후세에 전하였으니, 사서(史書)를 지을 때에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도간(陶侃)이 천문(天門)에 올랐다는 것과 범여(范蠡)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갔다는 것은 옛사람이 다 헛말이라 하였다. 도간유양(庾亮)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유양이 그 말을 꾸며 만든 것이고, 서시는 병란에 죽었는데 오호(五湖)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하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저 교동(狡童)의 노래도 기자의 말이 아닙니다. 나라를 잃은 뒤에 임금을 가리켜 교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느 중국 사신이 기자묘(箕子廟)에 알현하고, 시(詩)를 짓기를 ‘백수에 무왕 만나 봉지를 얻었으나, 황천 가서 성탕 볼 낯이 없구나. [白首有封逢聖武 黃泉無面見成湯]’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무식한 말이니, 따질 것도 없다." 【이것은 중국 사신 장근(張璜)의 시구인데, 전편은 다음과 같다. 】

당시에 충의로서 상왕에게 미움받고

참고 종이 되었으나 나라는 망하였네

백수에 무왕 만나 봉지를 얻었으나

황천 가서 성탕 볼 낯이 없구나

높은 산의 검은 안개 대동강에 서리고

평양의 거친 무덤 저녁볕에 비추네

천고의 세 어진이 영구히 전하거니

제사하고 파하니 내 마음 슬프구나

하였다. 근수가 아뢰기를,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

하자, 영경이 아뢰기를,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 삼한(三韓)이 국호이었으므로, 을 가리켜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공가(孔哥)·인가(印哥)·선우가(鮮于哥)도 다 기자의 후손입니다. 대개 기자의 작은 아들이 우(于)에 봉해졌으므로, 선우라 합니다. 고시(古詩)에 ‘기자의 후손에는 털북숭이가 많다. [箕子枝裔多髯翁]’ 하였는데, 대개 선우추(鮮于樞)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고, 윤휘는 아뢰기를,

"평안도에서는 선우가가 대대로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이 된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느 중국 사신이 기자묘를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역장(逆葬)이니, 너희 나라에는 반드시 기자의 자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하자, 영경이 아뢰기를,

"그것은 풍수설(風水說)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5책 16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51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註 138]
    홍범(洪範)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丙申/卯時, 上御別殿, 領事柳永慶、知事尹根壽、特進官趙挺柳熙緖、掌令李好義、侍讀官李德泂、獻納申慄、侍讀官權縉、假注書宋克訒、記事官金大德權昕入侍。 上講《(周昜)〔周易〕 《明夷卦》, 前受《明夷卦》, 自明夷于南狩, 止終不悟也, 音一遍訖。 德泂進講自六五箕子, 止以位言, 音二遍, 釋一遍。 上讀新受音釋各一遍。 德泂曰: "初大文, 以他卦觀之, 五爻爲君位, 六爻爲虛位, 而此卦, 則六二居君位, 五爻近六。 蓋箕子之舊臣, 遭至暗之君, 居至近之地, 外雖晦藏, 內須貞正, 故謂之利貞。 他爻言利艱貞, 此不言艱者, 箕子雖不言艱, 而其意自見故也。 他爻皆云明夷, 而上六云不明者, 明已傷矣, 無明可傷也。 初登于天, 之事, 終入于地, 之事也。 箕子當此患難之時, 欲庶幾悔悟, 至不辭佯狂爲奴, 不可疾貞, 意可見矣。 且不可疾貞, 校正廳釋云, 疾貞不可爲也。 今者本館校正時, 以勢不可爲之義, 釋之矣。" 上曰: "初大文小註, 有曰微子去, 却易, 比干一向諫死, 又却索性。 所謂索性, 何義耶?" 永慶曰: "此似語錄言, 其已甚之意也。" 德泂曰: "微子去之, 比干諫死, 同出於惻怛, 然貞而不利, 唯箕子, 至於囚奴, 乃能利貞也。" 上曰。 此言則(因)〔固〕 然矣, 予不知索性之義, 問之矣。 無乃素字之義乎?" 曰: "古書有曰: ‘王安石, 索性小人。’ 云。" 上曰: "此誰人之言耶?" 曰: "臣不能記憶誰人之言, 而此言明有之矣。" 德泂曰: "猶言索隱行怪也。" 永慶曰: "不然。 猶言已甚也。" 上曰: "箕子之子孫, 後世無知者, 殊可欠也。 箕子云者, 非箕子也, 乃微子也。 箕子以爲, 唯武王可與語道, 故只以《洪範》傳其道, 而不欲居中國, 率遺民, 東來于此。 實非武王之所封, 亦無朝之理。 承訛襲謬, 遂傳後世, 作史不可不愼也。 陶侃之上天門, 范蠡之載西施, 古人謂皆虛說。 庾亮, 不相能, 實構成其說。 西施死於兵, 五湖泛舟, 寧有是理?" 德泂曰: "彼狡童之歌, 亦非箕子之言也。 亡國之後, 豈可指君爲狡童乎? 古人以爲誤傳云。" 上曰: "有一天使。 謁箕子廟, 有詩曰: ‘白首有封逢聖, 黃泉無面見成湯。’ 此眞無識之言, 不足數也。 【此天使張瑾詩也。 當時忠義忤商王, 隱忍爲奴社稷亡。 白首有封逢聖武, 云云。 高山黑霧迷同水, 平壤荒墳對夕陽。 千古三仁傳不朽, 椒漿奠罷使人傷。】 根壽曰: "世傳淸州 韓氏, 乃箕子之後也。" 上曰: "何故?" 永慶曰: "有馬韓辰韓弁韓, 爲三韓國號, 故指箕子之後。" 根壽曰: "孔哥印哥鮮于哥, 皆是箕子之後。 蓋箕子之少子, 封於, 故謂之鮮于。 古詩有云: ‘箕子枝裔多髯翁。 蓋指單于樞也。" 曰: "平安道 鮮于哥, 相傳爲箕子殿參奉云。" 上曰: "有一天使, 見箕子墓曰: ‘此逆葬也。 汝國必無箕子子孫矣。" 永慶曰: "此則風水之說也。"


  • 【태백산사고본】 95책 16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51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