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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64권, 선조 36년 7월 23일 정축 1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주역》 진괘를 강하고 왜와 통호하는 일을 의논하다

묘정(卯正)에 상이 별전에 나아갔는데, 영사 이덕형(李德馨), 지사 한응인(韓應寅), 특진관 대사헌 송언신(宋言愼), 특진관 윤형(尹泂), 대사간 권희(權憘), 참찬관 유몽인(柳夢寅), 시강관 강첨(姜籤), 시독관 이덕형(李德泂)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전에 수강(受講)한 진괘(晉卦) ‘구사(九四)’부터 진선지도(盡善之道)’까지 한 번 읽고 한 번 새겼다. 강첨이 명이(明夷) ‘서괘(序卦)’부터 ‘진호은야(盡乎隱也)’까지 진강하였는데, 두 번 읽고 한 번 새겼다. ‘간항에 처하여도 잃지 않는다. [處艱亢而不失]’까지 새겼을 때에 상이 이르기를,

"항(亢)은 액(厄)이라 읽는가?"

하니, 강첨이 아뢰기를,

"《맹자(孟子)》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하였다. 상이 새로 수강한 것을 한 번 읽고 한 번 새겼다. 끝나고서 강첨이 아뢰기를,

"이 괘는 이(離)가 곤(坤)에 가리워져 밝음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의 일로 말하면 어두운 임금이 위에 있고 밝은 신하가 아래에 있어서 그 밝은 것을 시행할 수 없는 것인데,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라도 곧고 바른 덕(德)을 잃지 않으므로 ‘어려울 때에 곧은 것이 이롭다.’고 한 것입니다. 명이는 해·달로 말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해·달처럼 밝으나 욕심이 가리면 마음의 밝은 것이 쉽게 상하게 되므로 선유(先儒)가 이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주역(周易)》의 글은 괘의(卦義)로 미루면 만사 만물에 두루 적용됩니다. 이 괘는 명(明)이 땅속으로 들어가 그 밝음을 감춘 것인데, 문왕(文王)이 어려움을 당하여 안으로는 문명(文明)하고 밖으로는 유순하였고, 기자(箕子)가 내난(內難)을 당하여 미친 척하며 자신을 감추었으므로 그 뜻에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대개 밝은 임금이 어려움을 만나서 그 덕을 밝혀 어지러움을 다스려 바른 데로 돌이키면, 해·달이 어두웠던 가운데서 빛을 드러내는 것과 같아서 그 밝음이 넉넉히 천하를 비출 것입니다. 예전에 소강(少康)은 예착(羿浞)의 변을 만났으나 중흥(中興)을 이루었고,118) 선왕(宣王)은 쇠미한 운을 당하였으나 끝내 광복(匡復)을 이루었으니, 임금으로서는 이에 대하여 살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번 국운이 불운하여 1백 년 동안 없던 화를 당하여 의주로 피난하였던 일이 어찌 명이(明夷)의 간액(艱厄)일 뿐이겠습니까. 이 괘에는 주로 신하의 일을 말하였지만 미루어 적용하면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니, 위에서는 늘 어려웠던 지난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괘로 달을 가리키는가?"

하니, 강첨이 아뢰기를,

"태(泰)는 정월을 가리키고 대장(大壯)은 2월을 가리키고 쾌(夬)는 3월을 가리키고 건(乾)은 4월을 가리키고 구(姤)는 5월을 가리키고 둔(遯)은 6월을 가리키고 비(否)는 7월을 가리키고 관(觀)은 8월을 가리키고 박(剝)은 9월을 가리키고 곤(坤)은 10월을 가리키고 복(復)은 11월을 가리키고 임(臨)은 12월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음양이 소장(消長)하는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4월은 양이 극도로 이른 때이고 10월은 음이 극도에 이른 때입니다.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회복하는 것이니 극도에 이른 때에는 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하고, 강첨은 아뢰기를,

"이 괘는 이(離)를 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것을 잃지 않는 것은 미자(微子)·비간(比干)·기자(箕子)가 우열이 없으나 미자는 이롭되 곧지 않고 비간은 곧되 이롭지 않은데 기자는 곧고도 이로우니, 이것은 기자를 중히 여긴 것입니다."

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이덕형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전에 녹훈(錄勳)에 참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두 번이나 아뢰었으나 상께서는 신에게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신은 몹시 황공하여 다시 아뢰려 하였으나 사사로운 일로 잇따라 글을 올리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될까 염려하여 인접(引接)하실 때에 답답한 심정을 죄다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번 병 때문에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아뢰지 못하였는데, 혐의스런 마음에 잠시도 편하지 못하였습니다. 녹훈은 국가의 막중한 일이므로 공이 없는데 외람되이 참여된다면 신 자신이 비웃음을 당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전(重典)도 손상될 것입니다. 신은 서울부터 호종(扈從)한 무리도 아니고 왜적을 정벌하는 데에는 조금도 공이 없으니, 삭제하여 고치지 않으면 미치고 말 것입니다.

대저 국가의 상전(賞典)은 헛되이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상이 지나치면 명기(名器)가 가벼워지고 명기가 가벼워지면 바라는 자가 많아지고 바라는 자가 많아지면 포상하는 법이 권장하는 방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중전(重典)이 신으로 말미암아 가벼워진다면 어찌 성조(聖朝)의 큰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국가가 재조(再造)된 공적은 모두가 성상께서 사대(事大)하신 정성과 중국이 우리 나라를 돌본 덕으로 뭇 신하의 공은 포장(褒奬)할 만한 것도 못되는 터이겠습니까. 위에서 힘과 노고를 다한 자를 뽑아서 이에 보답하는 상을 주려고 하신다면 전진(戰陣)에서 뚜렷하게 공을 세운 자를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처럼 참여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구차하게 세운단 말입니까. 호종으로 논하면 서울부터 수가(隨駕)한 무리가 아니고 접반(接伴)으로 논하면 신 한 사람뿐이 아니니,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아도 끝내 기록할만한 공이 없습니다. 신의 성명을 먼저 삭제해야만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있고 신의 분수에도 조금은 편안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녹훈은 중대한 일인데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가. 뭇 사람의 의논이 이미 정하여졌는데 어찌 고칠 수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라."

하자, 덕형이 아뢰기를,

"호종의 공에 대해서는 지난해에 이미 감정(勘定)하였습니다. 신은 당초에 계하된 가운데에 기록된 자가 아니었는데, 뒤에 원훈(元勳) 이항복(李恒福)이 신이 맨 먼저 군사를 청하는 의논을 내었고 먼저 요동에 들어가 각 아문에게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하여 추록하기를 계청하였습니다. 신이 곧바로 참여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아뢰려 하였으나 뭇 사람의 의논이 정해지기 전에 미리 사면(辭免)하는 것은 사체(事體)에 어긋나므로 입다물고 아뢰지 않았습니다. 신의 사정이 매우 낭패스러우니 빨리 원훈에게 신의 이름을 삭제하도록 명하시어 명기를 중하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옛말에 ‘상줄 때에는 공이 따르는 자를 빠뜨리지 않는다.’ 하였다. 대저 공로를 보답하는 상전(賞典)은 헛되이 줄 수도 없고 헛되이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덕형은 대가(大駕)가 난을 피하여 서울을 떠날 때에 궐문(闕門)에서부터는 수행하지 못하였고 여러 날 뒤에야 뒤미처 이르렀는데, 뒤미처 이른 것을 호종이라 한다면 온 조정이 다 호종한 것으로 어찌 이덕형 한 사람뿐이겠는가. 호종과 왜적을 정벌한 일에 다 기록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여 참여하려 하지 않으니, 자신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근래 나라의 일이 어렵고 위태로운데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납니다. 경상도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되었는데 올해의 한재(旱災)는 고금에 없던 것으로 곡식이 죄다 말라서 추수할 가망이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풍변(風變)과 수재(水災)로 인해 나무가 뽑히고 집이 떠내려갔으며, 바다가 붉어진 재이가 그치기도 전에 날개미의 이변이 잇따라 들려서 천요(天妖)와 지괴(地怪)가 사책(史冊)에 끊임없이 적힙니다. 국사는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변은 이토록 심하니, 매우 두렵습니다. 왜적의 정세에 관한 일은 부질없는 논의만 오갈 뿐 끝날 날이 없는데, 방비에는 착실한 일이 보이지 않고 시세는 점점 염려스러운 기미가 많아집니다. 왜적의 일은 끝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 반드시 뭇 방책을 널리 물어서 좋은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 일이 급하게 된 뒤에는 잘 꾀하려 하더라도 계책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마도의 왜적을 기미(羈縻)하는 계책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적(夷狄)이 있는 것은 마치 음양(陰陽)과 밤낮이 있는 것과 같으므로 예전부터 제왕이 이적을 대우하는 데에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제 갑자기 끊으면 끝내 어떻게 되겠는가? 보루(堡壘)를 마주하여 서로 대치하는 때에 화호(和好)를 의논한다면 그르겠으나 평시에 있어서는 배척하여 끊기가 매우 곤란하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남방 사람들은 ‘국가가 대마도에 대하여 끝내 끊기 어려우니 빨리 화호를 허락하여 변방의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하고, 서울 사람들의 논의는 혹 ‘이적은 불공 대천의 원수인데 어찌 화호할 수 있겠는가. 한번 허락한 뒤에는 후환을 막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구차한 생각을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합니다. 밖의 의논은 이처럼 같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끊어도 끝내 무사하겠는가? 제왕이 이적을 대우하는 도리는 그렇지 않은 것인데 영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미열한 소신이 어찌 적의 정세를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대마도의 사세로 보면 국가가 끝까지 거절하기는 어렵겠습니다. 고려 말에 왜구가 날뛰었는데 국초에 비로소 통호(通好)를 허락하였고, 경오년(1510 중종 5년)에 삼포(三浦)의 왜노를 내쫓았으나 그뒤에 전과 같이 수호하였습니다. 이때부터 2백여 년 동안 변경이 편안하였던 것은 참으로 조종께서 회유하신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진년의 변에는 대마도가 선도하였으니 이들 역시 원수입니다. 그런데도 기미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우선 그들이 몰래 쳐들어올 걱정을 없애려는 것입니다. 일본은 대적(大賊)이므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쳐들어오려 한다면 대마도를 기미한다 해도 소용이 없겠습니다마는 눈앞의 사세를 보건대, 우선 기미하여 환난을 늦추면 기미하여 늦추는 사이에 방비를 수선할 수 있을 것입니다. 1년이면 1년 동안 조처하고 2년이면 2년 동안 조처하여 3∼4년이 지난 뒤에 우리의 세력이 조금 커지게 되면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그 말이 옳다. 그러나 일본과 우리 나라는 형세가 매우 다르다. 우리 나라의 힘이 일본을 대적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린 뒤에 기미하려 한다면, 이는 마치 모기나 등에가 범에게 대항하다가 끝내 대항하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힘이 일본을 대적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나라 안의 병력을 다하여 전심 전력 방비한다면 대마도의 왜적은 막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인심이 날로 해이해져 이토록 게을리 세월을 보내면서 국세(國勢)를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 버려두고서야 끝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권희(權憘)가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이 모두 우리 나라가 대마도와 수호하였다고 여기고 있는데, 심지어는 해상(海上)에서 개시(開市)하여 팔고 사며 서로 교통한다고까지 합니다. 이는 반드시 우리 나라가 임의대로 교통한다고 여겨서 이러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무슨 말인가? 거짓말이 어디로부터 멀리 퍼졌는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신이 왕년에 선위사(宣慰使)가 되었을 때 국가가 왜인을 대접하는 일을 보고 난 후(亂後)에 다시 부산에 가서 변방의 형세를 보니, 대마도의 왜인을 끝까지 거절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기미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정할 때에 잘 조치하지 못하면 뒷날 감당하기 어려울 걱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그렇다. 대마도와 통호(通好)를 허락한 뒤에 심처(深處)의 왜인이 앞다투어 통호하기를 요구해 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자, 덕형이 아뢰기를,

"외방에서 염려하는 것도 그 점입니다. 따르기 어려운 일로 계속 요구해 오면 후회스런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마도의 왜적은 중국군을 매우 두려워하니 한 위관(委官)이 와서 변방의 일을 맡는다면 그 위엄을 빌어서 잘 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위하여 이처럼 구차한 일을 하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권희가 아뢰기를,

"윤길(尹)을 요동에 들여보내는 일은 현재 논계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우리 나라 사람이 사사로이 국경을 넘어들어가 곡직을 대변(對辨)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요즈음 총병이 진강(鎭江)에 와 있고 고양(高洋)도 강상(江上)에 있는데,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일이 있으면 문득 화를 내므로 의주(義州)에 있는 관원이 이 때문에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이번에 윤길을 보내도록 요구하는 것은 조정이 이자한 일이 아니라 실로 유일환(劉一瓛)이 자신을 변명하려는 계책인 것입니다. 윤길이 옳더라도 위력으로 겁주면 반드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못할 것인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못한 채 돌아오면 저들이 무슨 말을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방금(防禁)이 한번 무너지면 뒤폐단이 무궁할 것입니다."

하니, 상에 이르기를,

"보내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을 듯하다. 다녀온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권희가 아뢰기를,

"이렇게 하여 마지않으면 반드시 의주부의 관원을 마음대로 잡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고, 언신(言愼)은 아뢰기를,

"지난 번 강주(姜籒)가 어사로서 의주에 있을 때에 중국 관원이 편지를 보내어 말을 전하기를 ‘윤길의 목을 묶어 데려오라.’ 하였다 하니, 이것은 매우 놀랍습니다. 이 길이 열리면 뒤폐단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람이 보내라고 이자하였는데 무슨 말로 끝까지 거절하겠는가."

하였다. 권희가 아뢰기를,

"여기에서 죄를 다스리겠다고 답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의 뜻은 죄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증(對證)하여 변명하려는 것이다. 첨의(僉意)에는 어떠한가?"

하자, 응인(應寅)이 아뢰기를,

"요즈음 듣건대, 중국 관원이 의주부의 관원을 노예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중국과 우리 나라가 차이가 있기는 하나 그 체면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일개 차관의 호소 때문에 관원을 독촉하여 보내는 것은 참으로 온편치 못합니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은 변방의 일이 급하고 황정(荒政)도 중대하므로 내년 봄에 요리할 일이 매우 많은데, 감사 이시발(李時發)의 개만(箇滿)이 멀지 않았습니다. 교체할 것이라면 미리 교체할 사람을 의논하여 그로 하여금 조치하게 해야 하겠고 그대로 두고 교체하지 않을 것이라면 구황이나 방비 등의 일을 조정에서 다시 신칙해야 하겠습니다. 본도의 일이 바야흐로 급한데 도주(道主)가 과만(瓜滿)이 되어 체임될 즈음에 혹 허술하게 될까 염려되어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의 뜻은 그대로 두려는 것인가, 체차하려는 것인가?"

하자, 덕형이 아뢰기를,

"이시발은 힘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기는 하나 국량이 좁아 그 그릇이 큰 직임에 적합하지 않으리라고 염려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으니, 일을 처리하는 것이 상세하여 백성의 고통을 없애고 연병(練兵)에 힘쓰고 수선에 부지런하므로 백성도 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지난 번 수질(水疾) 때문에 사직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그 직임을 수행케 하였습니다. 이경준의 수질은 이시발에 비하면 자못 가벼운데도 굳이 사직하여 체직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처사입니다. 대개 이경준이 일을 처리하는 것은 유형(柳珩)과 차이가 있습니다. 유형은 뜻을 날카롭게 하여 일을 살피되 급속히 하므로 변장들이 싫어하고, 이경준은 전의 폐단을 고치려 하되 조용히 하기에 힘쓰므로 변장들이 자못 좋아합니다. 다만 수질을 핑계로 체직되려 하니 오래 견디며 분려(奮勵)하는 방도에 매우 어긋납니다. 근래 각진(各鎭)의 방비가 허술할까 늘 걱정되니 경기와 양서(兩西)에 특별히 어사를 보내어 방비를 신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난 봄에 어사를 보내어 주사(舟師)와 내지(內地)의 연병(鍊兵)을 열시(閱試)하려다가 대신(臺臣)의 논계(論啓)로 인해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는데, 주사는 한 곳에 모여 있어서 징발하지 않아도 되니 어사가 순열(巡閱)한들 농사에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양남(兩南) 변진의 일도 매우 허술하니 양서의 예에 따라 특별히 어사를 보내어 주사와 연병의 정황을 순심(巡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권희가 아뢰기를,

"궁장(宮墻)을 물려 쌓는 일에 대해 지난 번 논계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는데 이제 듣건대, 공역(工役)이 매우 크고 궁장 밖에 새로 들어와 사는 백성들이 집을 헐려서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친다고 합니다. 나라 살림이 판탕되어 경비가 염려스러운데, 어찌하여 급하지 않은 역사(役事)를 일으키십니까. 더구나 이 시어소(時御所)는 오래 계실 곳이 아니니, 이 공역을 옮겨서 옛터를 수축(修築)하거나 종묘(宗廟)를 영건(營建)하는 것이 옳습니다. 천재(天災)와 시변(時燮)이 요즈음 심한데 지금이 어찌 백성을 부릴 때이겠습니까. 대내(大內) 서북쪽의 아주 좁은 곳은 그래도 괜찮겠으나 동남쪽의 조금 넓은 곳은 물려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나 물려 쌓지 않을 수 없다. 나도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임금이 구중(九重)에 깊이 거처하는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지난 번 담을 뚫고 돌을 던진 변고는 매우 놀랍다. 지척인 곳에서 이런 변고가 있었는데 무슨 꺼릴 것이 있겠는가. 예전에 궁성의 사면에 군영(軍營)을 설치하였던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군영이 있다 한들 무슨 군사로 지키겠는가."

하자, 덕형이 아뢰기를,

"병조에 군사가 없더라도 훈련 도감의 군사는 지금 부방(赴防)하는 일이 없으니 군영에서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유사가 살펴서 할 것입니다."

하였다. 권희가 아뢰기를,

"신이 서로(西路)에서 돌아올 때에 각 고을의 염초(焰硝)의 폐단에 대해 들었습니다. 큰 고을은 으레 40근을, 중간 고을은 30근을, 작은 고을은 15근을 달마다 장만하여 바칩니다. 각 도을에서는 구워 만들 수 없으므로 모두 면포(綿布)로 사는데, 1근 값이 2필이나 되어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도내(道內)에 포수(砲手)의 수는 적은 듯하고 염초의 수는 많은 듯하니, 수를 줄이더라도 대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 민폐에 관계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근래 변진(邊鎭)의 군기(軍器)가 점점 허술해지므로 비변사가 신칙하여 달마다 장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진에서는 정교하게 만들지 못하므로 혹 전결(田結)에 따라 쓰지 않는 궁전(弓箭)을 거두어들여 구차하게 채워 두니, 그 수는 많더라도 급할 때에 쓰기가 어렵습니다. 이 뒤로는 각진으로 하여금 솜씨 좋은 장인(匠人)을 모집하여 정교하게 만들고, 활에는 모두 장인의 성명과 고을의 이름을 쓰게 하여 정하고 거친 것을 살펴서 벌주고 근거로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권희는 아뢰기를,

"소신이 북경에 있을 때에 예부 낭중이 신을 불러서 ‘진헌하는 저포(紵布)를 난 후에는 으레 봉진하지 않는데 무슨 까닭인가? 유근(柳根)의 행차에 정녕히 말하였는데도 거행하지 않는다. 이 뒤로는 평시의 예에 따라 봉진하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말하였으니,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언신이 아뢰기를,

"공신(功臣)에 관한 일은 이덕형이 이미 아뢰었습니다. 신도 회복한 일은 오로지 성상께서 사대(事大)하시는 지극한 정성에 힘입은 것이니 신하에게 무슨 공이 있겠느냐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의 이름도 기록된 가운데 들어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마음 편히 외람되이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공이 없는데 이 부당한 자리를 차지하면 끝내는 재앙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뭇 의논이 감정(勘定)하였으니 어찌 사피할 수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언신이 아뢰기를,

"대마도에서 통호(通好)를 허락하더라도 끝내 환난을 면할 수 없다면, 차라리 군사를 정돈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방비를 완전히 하고 인심을 수습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알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밖의 의논도 많다고 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10년 동안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백 년 동안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천자가 다할 때까지도 끝내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인가? 이러한 일은 반드시 소견이 있어야 의논할 수 있는데 무슨 계책을 마련했기에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하였다. 언신이 아뢰기를,

"대마도와 통호하더라도 대적이 나오면 선린(善隣)에 이로울 것이 없고 끝내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의논만 하여서는 안 된다. 대적인 일본만 아니더라도 대마도나 일기도(一岐島)·오도(五島) 등이 병력을 합하여 나와서 변경을 차지하고 화호하자고 위협한다면 그때에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영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대마도는 우리 나라와 가깝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것은 우리 나라의 지맥(地脈)이 바다로 들어가서 섬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본디 경주(慶州)에 속하였다 하였으며 평명(平明)에 대마도에서 배를 띄우면 저녁에는 부산에 닿으니, 끝내 거절할 수 없는 형세입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허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 후환을 염려해서입니다. 요즘에는 왜인이 잇따라 나와서 수호하기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바다에 잠시 경급(警急)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왜인이 끝내 화호를 얻지 못하여 유감을 품고 흉독을 부려 군사를 동원해 곧장 쳐들어 온다면, 호남·영남 두 도는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미할 방책을 미리 꾀하지 않고 있다가 말썽이 일어나게 된다면 보루(堡壘)를 마주하고 서로 대치할 때에 화호하려 한들 되겠는가?"

하자, 덕형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인심은, 경급이 있으면 허둥지둥 놀라고 미리 겁을 내지만 잠시 무사하면 마치 태평스런 시절처럼 그럭저럭 세월만 보냅니다. 그리하여 쇠퇴가 날로 심해져서 마치 큰 언덕이 무너져 평지가 된 듯하니, 이런 때에는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난리 이후로 부역이 번거롭고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않아서 백성의 원망과 고통이 심한데 일을 맡은 자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다시 더 염려하여 인심을 수습한다면 나라의 일에 힘입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언신이 아뢰기를,

"《실록(實錄)》을 인출(印出)하는 일이 하루가 급한데, 공장(工匠)이 갖추어지지 않아 글자를 고르게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장인(匠人) 10명이 하루에 20장을 인출할 수 있는데, 지금 공신 도감(功臣都監)에는 장인이 많이 있으나 녹권(錄券)을 핑계로 옮겨다가 일을 돕지 못하게 합니다. 공신을 감정(勘定)할 시기가 아직 멀었으니 그전에 장인이 와서 인출하는 일을 돕게 해야 합니다. 또 청중(廳中)의 장인은 모두 훈련 도감에서 옮겨 왔는데, 도감에 있을 때에는 일이 한가하고 늠료(廩料)가 후하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8두(斗)의 늠료만 받으면서 해가 뜰 때 일하러 나와 해가 넘어가야 파하고 돌아가므로 모두가 괴롭게 여기고 있으니, 장차 도망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호조는 번번이 늠료를 줄이는 것만 능사로 삼고 장인의 괴로움은 헤아리지 않고 있으니, 즉시 호조로 하여금 늠료를 더 주게 하여 그들의 늠료를 후하게 하고 성과가 있기를 책임지워야 합니다.

그리고 인출하는 데에 쓰는 대내(大內)에서 하사한 활자와 평양자(平壤字)는 모두 경진년119) 에 만든 것이고 훈련 도감자(訓鍊都監字)는 을해년120) 에 만든 것이므로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달라 섞어 쓸 수 없습니다. 공신 도감에 경진자(庚辰字)가 있다고 하니, 을해자(乙亥字)와 바꾸어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윤형(尹泂)은 아뢰기를,

"와서(瓦署)가 폐지된 뒤로 기와 굽는 일을 오로지 공조가 책임지고 있는데, 와서에 속하였던 옹장(甕匠)들은 대부분 사간원에 이속되었습니다. 이에 본조에서 병조에 이문하였더니 병조가 계청하여 도로 이속시키려 하였으나 하리(下吏)가 거행하지 않습니다. 병조를 시켜 빨리 조치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4책 16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503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 과학-천기(天氣) / 외교(外交) / 무역(貿易) / 군사(軍事) / 행정(行政) / 공업(工業) / 건설(建設) / 출판(出版) / 물가(物價)

  • [註 118]
    소강(少康)은 예착(羿浞)의 변을 만났으나 중흥(中興)을 이루었고, : 중국 하(夏)나라 태강(太康) 때에 활을 잘 쏘는 예가 태강을 내쫓고 임금 자리를 빼앗고서 유궁씨(有窮氏)라 칭하였으나 백성을 돌보지 않았다. 이에 유궁씨의 재상인 한착이 예를 죽이고 임금이 되었는데, 하나라의 유신(遺臣) 미(靡)가 유격지(有鬲氏)로 달아났다가 유격지의 힘을 빌어 한착을 멸하고 소강(少康)을 임금으로 세워 하나라를 회복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4년.
  • [註 119]
    경진년 : 1580 선조 13년.
  • [註 120]
    을해년 : 1575 선조 8년.

○丁丑/卯正, 上御別殿, 領事李德馨、知事韓應寅、特進官大司憲宋言愼、特進官尹泂、大司諫權憘、參贊官柳夢寅、侍講官姜籤、侍讀官李德泂等入侍。 上讀前受自《晉卦》九四, 止盡善之道, 音一遍, 釋一遍, 進講自《明夷》序卦, 止盡乎隱也, 音二遍, 釋一扁。 釋至處艱, 亢而不失, 上曰: "亢讀爲厄乎?" 曰: "《孟子》亦以是書之矣。" 上讀新所受, 音一遍, 釋一遍, 訖, 曰: "是卦, 《離》《坤》之所掩, 而不得用明也。 以國事言之, 暗主在上, 明臣在下, 不能行其明也。 雖當艱難之際, 不失貞正之德, 故曰: ‘利艱貞。’ 《明夷》以日月爲言。 人心如日月之明, 而及其欲心蔽之, 則吾心之明, 易至於傷, 故先儒以此爲比矣。" 德馨曰: "《周易》之爲書, 以卦義推之, 則於萬事萬物, 無處不周。 此卦明入地中, 能晦藏其明, 文王之遭艱厄, 能內文明而外柔順。 箕子之當內難, 能佯狂自晦, 故其意無異矣。 蓋明君遇危亂, 而能明其德, 撥亂反正, 則如日月揚光於旣晦之中, 其明足以及天下。 昔少康, 遇羿之變, 而能致中興, 宣王, 値衰微之運, 而卒成匡復。 爲人君者, 所當省念於斯也。 頃者國運不幸, 値百年所無之禍。 龍灣窘急之事, 豈是明夷之艱厄也。 此卦, 雖主言人臣之事, 而推而用之, 無處不然也。 莫如自上, 念玆在玆, 無忘在。" 上曰: "以某卦, 指某月乎?" 曰: "《兌〔泰〕指正月, 《大壯》指二月, 《夬》指三月, 《乾》指四月, 《詬〔姤〕指五月, 《遯》指六月, 《否》指七月, 《觀》指八月, 《剝》指九月, 重《坤》指十月, 復指十一月, 《臨》指十二月也。 於此可見陰陽消長之理矣。" 德馨曰: "四月, 陽之極, 十月, 陰之極, 極則必復也。 極處所當深戒也。" 曰: "此卦《離》爲主, 故不失其正。 微子比干箕子, 不可優劣, 微子, 利而不貞, 比干, 貞而不利, 箕子則貞而且利。 此則歸重箕子之意也。 講訖, 德馨進曰: "小臣, 前以不當參於錄勳之事, 陳乞至再, 而聖敎不准。 以臣有可記之微勞, 臣不勝惶恐, 更欲上達, 而以私連章, 恐涉煩瀆, 只待引接之日, 欲盡悶迫之情。 頃以賤疾, 未赴召命, 遷延至今, 不能陳達, 而歉然之心, 無暫時之安矣。 錄勳, 乃國家莫重之事。 如無實效, 而冒參其錄, 則非但貽笑侮於臣身, 抑亦虧國家之重典。 臣旣非自京扈從之類, 其於征, 尤無分寸之勞。 若不鐫改, 必發狂疾。 大抵朝家賞典, 不可虛授。 賞僭則名器輕, 名器輕則希望者多, 希望者多, 則褒賞之典, 不足爲勸奬之方矣。 國家重典, 自臣而始輕, 則其不爲聖朝之大累乎? 況今邦家再造之績, 何莫非聖上事大之誠, 皇朝恤小之德? 群下之功, 無足可奬。 自上欲取宣力効勞者, 以爲酬賞之典, 則當取戰陣間表表著勳勞者, 爲之錄也。 何必以如臣不當參之人, 苟充乎? 論以扈從, 則非自京隨駕之類, 論以接伴, 則不獨臣一人而已。 百爾思之, 終無可錄之功。 臣之姓名, 爲先刪去, 然後庶可免後世之譏議, 臣之愚分, 亦少安矣。" 上曰: "錄勳大事, 欲之則爲, 不欲則不爲乎? 群議已定, 何可改也? 卿其安心。" 德馨曰: "扈從之勳, 先年已爲勘定。 臣則非當初啓下中應錄者也。 厥後元勳李恒福, 以臣爲首唱請兵之議, 而先入遼左, 告急於各衙門, 乃敢啓請追錄。 臣卽欲以不可參之意陳達, 而群議未定之前, 預爲辭免, 有乖事體, 悶默不達矣。 臣之情事, 極爲狼狽。 亟命元勳, 刪去臣名, 以重名器, 不勝幸甚。"

【史臣曰: "古語云, 賞不失勞。 夫酬勞之典, 報功之擧, 不可虛授, 亦不可虛受。 德馨, 當大駕去之日, 旣不能自闕門隨行, 累日而後, 緩緩追到。 若以追到爲扈從, 則擧朝皆然, 豈特德馨一人而已? 其於扈從征, 俱無可紀, 其固辭不參自知明矣。"】

近來國事艱危, 災異層出, 慶尙道, 蕩敗無形, 今年旱災, 古今所無, 稼穡卒痒, 無望西成。 近日則風變水災, 拔木漂屋, 海赤之災未止, 飛蟻之變繼聞, 天妖地怪, 史不絶書。 國事無一可恃, 而變異至此, 甚可懼也。 情一事, 但費論議, 究竟無日, 防備則未見着實之事, 時勢則漸多可虞之機。 此賊之事, 未知厥終。 必須廣詢群策, 得其良算若至於事急之後, 則雖欲善謀, 計無所出矣。" 上曰: "對馬島 賊羈縻之計, 則出於不得已也。 夷狄之不可無者, 如陰陽晝夜, 自古帝王, 待之有道。 今遽絶之, 終亦何爲? 若在於對壘相持之日, 而議和則非矣, 其於平時, 則斥絶甚難矣。" 德馨曰: "南方之人, 則以爲國家於對馬島, 終難絶之, 須速許和, 以安邊上之民。 洛中論議, 則或以爲: ‘此賊難共戴天, 豈容和好? 一許之後, 後患難防, 莫如初不爲苟且之計。’ 外議如是不同矣。" 上曰: "絶之而終將無事乎? 帝王待夷之道, 則不如是矣。 領相之意, 以爲何如," 德馨曰: "小臣迷劣, 豈能審知賊情? 第觀馬島事勢, 則國家終難拒絶矣。 高麗之末, 寇猖獗, 而國初始許通好。 庚午年, 驅逐三浦倭奴, 而厥後修好如前。 自是以降, 二百餘年, 邊境晏然, 實賴祖宗懷綏之化, 而至於壬辰之變, 本島爲之先導。 是亦讎賊之甚者, 而欲爲羈縻之計者, 將以姑戢其竊發之患也。 日本大賊, 若欲大擧以來, 則與馬島羈縻者, 必不關也。 但以目前事勢觀之, 姑與之羈縻, 以紓其難可也。 羈縻遷就之間, 修繕防備, 一年而做一年工夫, 二年而做二年工夫, 至於三四年, 然後我之勢力稍存, 則庶可以有爲矣。" 上曰: "領相此言, 正是矣, 但日本與我國, 形勢懸殊, 若待我國之力, 可以抵當日本而後, 欲爲羈縻, 則是何異蚊蝐奮敵虎之力, 而終無所成也。" 德馨曰: "以我國之勢, 雖不能抵當日本, 而若悉國中之兵力, 專事防備, 則馬島之賊, 足以禦之。 但人心日解, 玩愒至此, 置國勢於無可奈何之地, 終何爲哉?" 曰: "中原之人, 皆以爲我國旣與馬島修好, 至言開市海上, 買賣相通。 必以我爲任意相通, 故有此云云之說。" 上曰: "是何言也? 虛言何自而遠播乎?" 德馨曰: "臣昔年爲宣慰使時, 見國家待之事, 亂後復往釜山, 見邊上形勢, 則馬島, 終難拒絶矣。 但所患者, 羈縻定納之時, 若不能善處, 則必有後日難支之患矣。" 上曰: "予意亦然矣。 馬島許款之後, 深處之, 爭欲求好, 則將何以待之?" 德馨曰: "外間所慮者, 亦以此也。 若以難從之事, 要脅不工已, 則必多後悔矣。 且馬島, 甚憚天兵。 如得一委官, 來莅邊上, 則可以借重威, 而善爲之圖, 而天朝安肯爲下邦, 而爲此苟且之事乎?" 曰: " 入送遼東, 方爲論啓矣。 自昔我國之人, 無私相越境, 對辨曲直者也。 近者總兵來在鎭江, 高洋亦在江上, 少有違忤, 則輒生憤怒。 義州所住之官, 以此難支矣。 今之欲要 者, 非朝廷移咨之事, 實一瓛自明之計也。 雖直, 刦之以威, 則未必自直。 若不能自直而來, 則亦未知彼有何言也。 防禁一毁, 後弊無窮矣。" 上曰: "不送似曲, 往返何妨?" 曰: "若此不已, 則義州府官, 任意捉去必矣。" 言愼曰: "頃者, 姜籀以御史, 在義州時, 官以片札傳言, 項鎖前來云。 此甚驚愕。 此路若開, 後弊實多矣。" 上曰: "天朝之人, 移咨使送, 以何辭而固拒乎?" 曰: "答之以自此治罪, 則可矣。" 上曰: "彼意非欲罪之也, 乃欲對證辨明耳。 於僉意如何?" 應寅曰: "近聞官, 視義州府官, 猶視奴隷。 大國小邦, 雖若有異, 其爲體面, 豈若是也? 以一差官之訴, 督送官人, 實所未安。" 德馨曰: "嶺南邊事方急, 荒政亦重, 明春料理之事甚多, 而監司李時發, 箇滿不遠。 若遞則當預議其代, 使之措置, 仍而不遞, 則凡救荒防備等事, 自朝廷, 更爲申飭宜矣。 本道之事方急, 而道主瓜滿, 遞任之際, 恐或有踈脫之患, 故敢達耳。" 上曰: "然則卿意欲仍之乎? 遞之乎?" 德馨曰: "李時發, 盡力供職, 而局量不弘, 故或慮其器。 不周於大任矣, 近聞處事詳密, 除民疾苦, 又力於練兵, 勤於繕完, 百姓亦便云矣。 且統制使李慶濬, 頃以水疾辭免, 朝廷不許, 使之仍察其任。 慶濬之水疾, 視李時發, 則頗輕, 而必欲固辭遞免者, 過矣。 大槪慶濬之處事, 與柳珩有異, 柳珩銳意趨事, 而急速, 故邊將厭憚, 慶濬, 則欲矯前弊, 務在從容, 故邊將頗愛之。 但諉以水疾, 留意遞職, 甚非所以耐久而奮勵也。 近來各鎭防備之事, 常患踈虞, 故京畿及兩西, 別遣御史, 申飭防備可矣。 去春, 將遣御史, 閱試舟師及內地鍊兵, 而適因臺臣論啓, 中止不行。 舟師則聚會一處, 別無徵發之(契)〔弊〕 , 御史之巡閱, 何害於農? 兩南邊鎭之事, 亦甚虛損。 依兩西, 別遣御史, 巡審舟師及鍊兵形止可矣。" 曰: "宮墻退築事, 頃日論啓, 未得蒙允, 而今聞工役甚巨, 而墻外新入之民, 撤毁家舍, 怨苦騰天。 且國計板蕩, 經費可虞, 其何以興不急之役乎? 況此時御之所, 非久遠之地。 移此工役, 修築舊基可也, 營建宗廟, 亦可也。 天災時變, 近日爲甚, 是豈役民之時乎? 如大內西北面甚狹之處, 猶或可也, 東南稍闊處, 退築甚不關也。" 上曰: "然而不可不退築矣。 予亦非不念此, 而人君之深居九重, 其意有在。 往者穴墻投石之變, 甚爲驚愕。 咫尺之地, 致有此變, 有何所畏憚乎? 古者於宮城四面, 設置軍營, 其意微矣, 而今則雖有營, 以何軍守之乎?" 德馨曰: "兵曹雖無軍士, 訓鍊都監軍士, 時無赴防之事, 可以守衛於軍營。 此等事, 有司當察而爲之矣。" 曰: "臣自西路還來時, 聞各官焰硝之弊。 大邑則例奉四十斤, 中邑則三十斤, 小邑則十五斤, 逐月措備, 各官不能煮取, 皆以綿布貿換, 一斤之價, 多至二疋, 其勢難支矣。 大槪道內砲手之數, 則似少, 焰硝之數似多。 雖減其數, 可以繼用。 事係民弊, 故敢達耳。" 德馨曰: "近來邊鎭軍器, 漸至虛損, 備邊司申飭, 使之逐朔措備, 而各鎭不能精造, 或以田結, 徵出不用弓箭, 苟充留置, 其數雖多, 難爲緩急之用。 今後令各鎭, 募集善手匠人, 多數精造弓額, 皆書匠人姓名及郡邑之號, 査考精麤, 以憑賞罰宜當。" 曰: "小臣在北京時, 禮部郞中, 招臣謂曰: ‘進獻紵布, 亂後例爲闕封, 是何故也? 柳根之行, 丁寧言之, 而尙不擧行。 今後依平時封進云。 如是數言, 不得不爲矣。" 言愼曰: "功臣之事, 德馨已陳之。 臣意亦以爲恢復之事, 專賴於聖上事大之至誠, 臣下何功之有焉? 臣名亦在當錄之中, 臣豈敢偃然濫參乎? 曾無才效, 應此非據, 竊恐終有災殃也。" 上曰: "群議已爲勘定, 豈可辭避, 卿可安心。" 言愼曰: "對馬島, 雖許通款, 而終不得免於患, 則莫如治兵繕甲, 以完守禦之備, 收拾人心, 使知親死之義可也。" 上曰: "領相言, 外議亦多云。 欲其不許者, 將十年不許乎? 百年不許乎? 至於窮天地, 而終不可許乎? 如此之事, 必定有所見, 然後乃可議也。 設爲何策, 而欲不許乎?" 言愼曰: "雖與馬島通好, 而大賊出來, 則必無益於善隣, 而終有後患矣。" 上曰: "不可徒爲如是議論。 雖非日本之大賊, 對馬一歧等五島, 合兵共力, 來據邊上, 脅之以和, 則當此之時, 亦言其不許乎? 領相之意, 以爲何如?" 德馨曰: "馬島地勢, 與我國密邇, 距日本懸遠, 此我國地脈, 入海而爲島者也。 故《輿地勝覽》, 本屬於慶州, 而平明自馬島發船, 至夕乃抵釜山。 勢不可終爲拒絶也。 其曰不可猝許者, 慮其後患也。 近日則倭人, 連絡出來, 方求修好, 故海上姑無警急, 若使彼, 終不得和, 而懷憾肆兇, 動兵直擣, 則湖嶺兩道, 不能保矣。" 上曰: "若不預圖羈縻之策, 而至於開釁, 則對壘相持之日, 雖欲求和, 得乎?" 德馨曰: "我國人心, 如有警急, 則遑遑驚惑, 自相恇㤼, 暫時無事, 則玩愒姑息, 如在太平, 陵夷日甚, 有若大陵之頹爲平地。 當此之時, 收拾人心, 急先務也。 亂離以後, 賦煩役重, 澤不下究, 民之怨苦巳極, 而當事者, 亦置於無可奈何, 而不爲之致念。 自上更加惕慮, 收拾人心, 則國事庶有賴矣。" 言愼曰: "《實錄》印出之事, 日急一日, 而工匠不備, 均字極難。 若得匠人十名, 則可以日印二十丈矣。 今者, 功臣都監, 多有匠人, 而托以錄券, 使不得推移助役。 功臣勘定之期, 尙遠, 其前, 許令匠人來助印出之役, 宜當。 且廳中匠人, 皆自訓鍊都監移來, 而在都監時, 役閑而料厚, 今則只食八斗之料, 日出而赴役, 日沒而罷歸, 皆懷厭苦, 將有逃散之弊。 戶曹每(而)〔以〕 減料, 爲能事, 不量匠人之苦。 卽令戶曹, 加給其料, 使之厚其廩, 而責其效耳。 且印出之字, 自內下賜, (及)〔乃〕 平壤, 字, 則皆是庚辰所造, 而訓鍊都監字, 則乃乙亥所造, 故大小體樣, 略不相似, 不可混用。 竊聞功臣都監, 有庚辰字云。 以乙亥字換用何如?" 曰: "瓦署廢後, 燔瓦一事, 專責於工曹, 而瓦署所屬甕匠輩, 多屬於司諫院。 本曹移文于兵曹, 則兵曹將欲啓請還屬, 而下吏不爲擧行。 請令兵曹, 速爲處置何如?"


  • 【태백산사고본】 94책 16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5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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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 과학-천기(天氣) / 외교(外交) / 무역(貿易) / 군사(軍事) / 행정(行政) / 공업(工業) / 건설(建設) / 출판(出版) / 물가(物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