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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63권, 선조 36년 6월 26일 신해 2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원균의 등급에 대해 의논하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재삼 장계를 올려 부산(釜山) 앞바다에 들어가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극력 진달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원수가 윽박지르자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鎭)을 떠나 왜적을 공격하다가 드디어 전군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순국하고 말았다. 원균은 용기만 삼군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도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

당(唐)나라 때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치면서 동관(潼關)을 나섰다가 마침내 적에게 패전하게 되었고, 송(宋)나라 때 양무적(楊無敵)반미(潘美)의 위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싸우러 나갔다가 적에게 섬멸된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고금(古今)의 인물들을 성공과 실패만 가지고는 논평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전번에 영상이 남쪽에 내려갈 때 잠시 원균을 민망하게 여기는 뜻을 가졌었는데, 영상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공로를 논하는 마당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정운(鄭運)배흥립(裵興立)의 일 때문에 삭제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구원하러 가기를 의논할 적에 정운이 극력 찬동했었고, 왜적을 토벌할 때에도 정운의 공이 많았었다. 결국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으니 이는 정운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배흥립이 범람하다는 것 때문에 마땅히 녹공해야할 정운까지 아울러 삭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정운을 녹공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

회복(恢復)하게 된 공로가 오로지 중국군에게 있었으니, 청병(請兵)하러 가서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을 호종하지 않았다 해서 빠뜨릴 수는 없다. 심희수·유몽정이 이미 청병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은 버려 둘 수 없으니 다시 참작해야 한다.

홍여순(洪汝諄)은 처음부터 호종했었는데도 지금 빠졌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홍여율(洪汝栗)은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부터 직접 영정(影幀)을 지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보호했었다. 이러한 그의 공로도 역시 빠뜨릴 수가 없으니, 녹공의 합당 여부를 의논해서 아뢰라.

당초에 4등급으로 구분한 뜻을 알지 못해서 이봉정(李奉貞)을 원종(原從)에 녹공하라는 것으로 전교했었다. 지금에 와서 이 녹공된 사람들을 보건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이 아닌데도 역시 다른 공로로 참여된 사람이 있다. 이봉정의 경우는 승전색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아비의 상사를 듣고서 고향으로 돌아갔었으니 사사로이 스스로 물러간 것과는 다르다. 그는 본향(本鄕)인 용천(龍川)에서부터 다시 호종하고 의주까지 가느라 고초가 많았고, 주선한 일도 있었으니, 정훈(正勳)에 녹공하지 않을 수 없음이 또한 이러하다.

내가 비록 잘나지는 못했지만 어찌 감히 한 사람의 환시(宦寺) 때문에 경들을 턱없이 속여서 당연히 녹공해서는 안 될 사람을 함부로 여러 훈신들 사이에도 두려 하겠는가. 이봉정은 4등에 녹공해야 한다.

같은 등급 속에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므로 차례를 논할 수 없으면 당연히 직품에 따라서 기록했어야 할 것인데, 많은 사람이 바뀌어 놓여 있으니 좌차(坐次)에 있어서 온당지 못한 듯하다. 또 각 등급에 있어서의 상격(賞格)에 관한 전례를 알고 싶으니 모두 고찰해서 아뢰라.

산하대려(山河帶礪)의 훈공을 종정(鍾鼎)에 기록하는 것은 국가에 더없이 큰 일이니, 반드시 공평 정대하게 하여 공이 있는 사람을 빠뜨려서도 안 되며 공이 없는 사람을 함부로 써서도 안 된다. 우리 나라에는 전부터 친구 덕분에 공신이 되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이 말이 비록 맹랑하기는 하나 이로 인해 경계하기에는 좋은 말이니, 아무쪼록 조용하게 잘 살펴서 처리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이번의 공신은 원수(元數)가 너무 많으니, 전에는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좌명 공신(佐命功臣)과 정국 공신(靖國功臣)은 그 수가 이번보다 적었는데도 4등급으로 마련했었기에 이번에도 또한 이 예에 의해 마련했던 것입니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

정운은 수록하겠습니다만, 심희수유몽정은 청병하여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삭제하여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여순평양까지 호종했다가 북도의 요해지(要害地)를 파수하는 일로 명을 받고서 대가(大駕)를 배사하고 의주로 들어갔었고, 뒤에는 경기의 삭녕(朔寧) 등지에 나가 군사를 모집하다가 9월 초에야 비로소 의주로 들어갔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명이 당초부터 원훈들이 의논하여 결정하는 속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감히 제기(提起)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홍여율이봉정은 또한 마땅히 수록하겠습니다. 상격에 관한 전례는 문서가 없어서 사고(査考)할 여유가 없었으니 곧바로 고찰하여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위 헌공(衛獻公)이 망명했다가 위나라로 돌아올 적에 교외에 이르러 수종했던 사람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준 다음 들어오려 하자 유강(柳莊)이 말하기를 ‘만일에 모두가 사직을 지켰더라면 누가 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것이며, 모두가 따라갔더라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나라에 돌아와 사정(私情)을 쓰려 하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나누어 주지 않았었다. 환시는 나라 임금의 가노(家奴)로서 녹훈한 일은 고찰해 볼 데가 없다.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 【태백산사고본】 94책 163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497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備忘記曰: "元均, 錄于二等。 當賊變之初, 請援于李舜臣, 非舜臣自赴。 及其討賊, 以死自許, 每爲前鋒, 先登奮勇。 其捷獲之功, 與舜臣一體, 其所獲賊魁樓船, 反爲舜臣所奪焉。 及代舜臣爲統制, 再三狀啓, 力陳其釜山前洋, 不可入討之狀, 備邊司督之, 元帥杖之。 於是, 明知其必敗, 而離鎭擊賊, 遂全軍覆沒, 以身殉之。 是不但勇冠三軍, 智亦至矣。 昔哥舒翰, 撫膺出潼關, 卒爲賊所敗。 楊無敵, 爲潘美所脅, 揮淚出戰, 遂殲於賊。 何以異於此? 古今人物, 不可以成敗論之。 予嘗以爲: ‘元均智勇俱備, 憐其命與時乖, 功虧事敗, 心跡不明。 前於領相南方下去時, 暫有元均可悶之意。 未審領相記得否也。’ 今日論功之際, 反置之二等之中, 豈不冤哉? 元均之目, 且不暝於地下矣。 且鄭運, 以裵興立之故, 而幷與之削去焉。 方李舜臣之會諸將議往援也, 力贊之, 及其討賊, 之功居多, 終至於力戰而死, 則是, 以身殉國也。 不可以興立犯濫之故, 而幷去其當錄之也。 鄭運之可錄, 無疑矣。 且烣復之功, 全在於天兵, 則其請兵得請之人, 雖非扈從, 不可遺也。 沈喜壽柳夢鼎, 旣曰請兵, 則他人雖不參, 此人不可棄, 更可參酌。 且洪汝諄, 自初扈從, 而今乃見遺, 未知何故? 且洪汝栗, 當賊變之初, 自負影幀, (艱)〔間〕 關跋涉, 保護得全。 此其功, 亦不可遺, 可錄當否議啓。 且初未知分四等之意。 李奉貞, 錄于原從事, 傳敎矣, 到今觀此所錄人, 雖非終始扈從之人, 亦得以他功與焉。 奉貞, 承傳色, 自初扈從, 至平壤, 聞父喪, 歸于鄕, 非私自退去之比。 自本鄕龍川, 還爲扈從至義州, 多有勤勞, 又有周旋之事。 不可不錄於正勳, 亦如此。 予雖不淑, 何敢以一宦寺, 厚誣卿等, 使不當錄之人, 冒廁於諸勳臣之中乎? 奉貞, 可錄於四等, 且同等之中, 俱是一體之人, 如非有次第之可論, 則所當從其職品書之。 多數易置, 其於坐次, 或恐未穩。 且各等賞格前例, 欲知之, 幷考啓。 且山河帶礪, 記勳鍾鼎, 國家莫大事也。 必以公, 必以正, 有功者不可貴, 無功者不可濫。 我國自前有因友德爲功臣之誚。 此雖孟浪越言, 尤不害因越而知戒, 須從容詳處。" 回啓曰: "今次功臣, 元數太多。 在前未有如此數多之時。 佐命功臣、靖國功臣, 其數不及於此, 而磨鍊爲四等, 故今亦依此例磨鍊矣。 元均初以無軍將, 得參海上大戰, 而其後有敗衄舟師之失, 難可與李舜臣權慄幷列, 故降錄二等, 今承上敎, 陞置一等, 鄭運亦爲收錄。 喜壽夢鼎, 與請兵得請者, 有間, 終未免刪改也。 汝諄, 扈從至平壤, 以北道要害把截事, 受命拜辭, 大駕入義州後, 汝諄出來京畿 朔寧等處, 募聚軍兵, 九月初, 始入義州, 與終始扈從者有間, 故姓名初不出於元勳議勘之中, 不敢提起矣。 洪汝栗李奉貞, 亦當收錄。 賞格前例, 文書蕩失, 倉卒未易査考。 亦當隨後考啓。" 答曰: "知。"

【史臣曰: "衛獻公, 出奔, 反於, 及郊, 將班邑於從者而后而入, 柳莊曰: ‘如皆守社稷, 則孰執羈靮而從, 如皆從, 則孰守社稷? 君反其國, 而有私也, 毋乃不可乎? 弗果班。 宦寺, 國君之家奴也。 錄勳未有所考。 元均, 沈舟艦、散遣軍卒之罪, 甚大。"】


  • 【태백산사고본】 94책 163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497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