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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63권, 선조 36년 6월 10일 을미 4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함경 감사 한효순이 요충지에 보를 설치할 것을 아뢰다

함경 감사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남쪽과 북쪽의 요충이 되는 지역에다가 미리 가로막아 차단시킬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 하겠기에 남병사 정항(鄭沆)과 북병사 윤안성(尹安性)에게 신이 대면하거나 혹은 이문(移文)하여 의논해보니, 다들 하는 말이 ‘경성(鏡城)은 육진(六鎭) 쪽 적들이 침입하는 길의 요충지가 되고, 북청(北靑)은 삼수(三水)·갑산(甲山) 쪽 적들이 침입하는 길의 요충지가 되며, 함흥(咸興)은 별해(別害) 쪽 적들이 침입하는 길의 요충지가 된다.’ 했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 이 세 곳에다 이미 큰 진을 설치하여 감사와 병사가 진수하며 책응하는 곳으로 삼았던 것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할 것도 없습니다. 만일 여기에다 미리 군량과 군기를 조치해 놓고 군사들을 모아서 성과 호(壕)를 수축해 놓는다면 비록 갑작스러운 경보(警報)를 만나게 되더라도 족히 적봉(賊鋒)을 가로막아 끊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진에다가 방법을 강구하여 소금을 구워 군수(軍需)를 조치하게 한다면 그 폐단이 세 가지나 됩니다. 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 등의 고을은 모두 바다와 거리가 멀어서 6∼7식정(息程)이 되는 곳도 있고 8∼9식정이 되는 곳도 있습니다. 게다가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가 그 사이에 겹겹이 가로막혀 있어서 장마철이나 눈이 내려 빙판일 때에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널 적에 운반하는 인마(人馬)가 죽는 수가 많으니, 이것이 첫째로 불가한 점입니다. 오랑캐들 풍속은 평소에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매매하려고 들지 않으므로 비록 관(官) 소유의 소금으로 곡식을 무역하는 영을 내려도 호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득이하여 추장들을 불러모아 도거리로 주며 강제로 무역하게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약소한 오랑캐들이 침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원망과 비방이 마구 일어나게 니, 이것이 둘째로 불가한 점입니다. 을미년 무렵에 어떤 평사(評事) 한 사람이 이 일을 맡아보면서 내지(內地) 백성들을 동원하여 바닷가에서 땔감을 베게 하고, 민간의 가호(家戶)에서 쇠를 거두어 가마를 주조하여 소금을 구워가지고 온성 등 다섯 고을로 하여금 오랑캐들에게 가서 무역하게 했었지만 서민들과 오랑캐들 사이에 서로 도움이 되는 이로움이 없어 피차 좋게 여기지 않으므로 마침내 성공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셋째로 불가한 점입니다. 신이 들은 말만 이러했을 뿐 아니라, 전 병사 윤안성(尹安性) 및 육진 수령들의 의논도 모두 그러했습니다.

무산(茂山)에 진을 설치하고 개시(開市)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지난 번에 올린 장계에 이미 그 대략을 진달했습니다. 그리고 무산에서 산너머 여러 오랑캐들이 사는 부락과 거리는 60리 미만이어서 잠상(潛商)하는 폐단을 그전부터 금단하기 어려웠으니 그들의 요청대로 쾌히 허락해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묶는 것이 더 좋은 계책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두어 해 전부터 회령(會寧)에 진고(進告)해 오던 오랑캐들이 거의 모두 흩어져 버려서 오랑캐들의 동태를 오직 무산보 한 곳에서만 알고 있습니다. 즉각 형편대로 잘 처리하지 않고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이리같은 오랑캐들의 원망을 불러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진고하는 법례가 영구히 끊어져 버리게 되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 시기를 참작하여 개시를 허락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이 문제를 가지고 윤안성(尹安性)에게 의논해 보니 윤안성의 의견도 그러했고, 또 이용순(李用諄)에게 의논해 보니 이용순의 의견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다만 새로 창설하는 일이어서 뒷날의 이해에 대해서는 신도 모르겠으니, 조정에서 반복하여 참작해 보고 속히 지휘해주셨으면 합니다.

신이 보건대, 무산보는 조그마한 곳이고 만호(萬戶)는 낮은 관직입니다. 만일 이곳에다 개시를 하려면 특별히 당상관인 첨사를 두어 형세를 묵직하게 하는 한편 군병 및 정배된 사람을 많이 들여 진을 튼튼하게 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무산성 밖에다 가옥을 많이 지어놓고 여기에 와서 시장을 보게 하고 여기 사람들을 공궤하게 하면서 한 일에 따라 값을 주어 그들의 환심을 묶어 놓는다면 견양(太羊)같은 저들을 기미(羈縻)하는 계책도 이어서 나오게 되고, 제재하여 가라앉히고 공격하여 위협하는 계책도 이에서 나오게 되며, 양편이 원수처럼 지내는 것을 풀어버리는 계책도 이에서 나오고, 회령(會寧)의 번호(藩胡)를 다시 안도(安堵)시켜 모이게 할 계책도 또한 이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부터는 변방에 대한 근심거리가 조금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신의 망령된 추측입니다."

하였다. 이어 비변사가 아뢰기를,

"본도의 남북 형세는 과연 감사의 장계에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과 호를 수축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만둘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경성(鏡城)북청(北靑)의 경우 지난날 정언신(鄭彦信)임현(任鉉)이 병사로 있을 때에 성을 고쳐 쌓았기에 자못 견고하니, 지금 조처해야 할 것은 오직 군량과 군기뿐입니다. 두 병영의 물력이 하삼도(下三道)에 비하면 조금 넉넉하므로, 병사가 마음을 다해 조치한다면 방비하기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니, 감사로 하여금 각별히 신칙하고 십분 조치해서 후일 위급할 때 성을 지켜낼 계책을 삼게 해야 합니다.

함흥의 성은 낮고 허물어진데다 면적이 넓어서 3만∼4만 명의 군사가 아니면 지켜내기가 어렵습니다. 감사였던 사람들이 내성(內城)을 쌓고 싶어했었지만 공역이 거창하여 시행하지 못했었습니다. 이 일은 인력과 재력이 부족한 때에 선뜻 거행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후일을 기다렸다가 다시 의논해서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군량과 군기에 있어서도 제때에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감사로 하여금 십분 유의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소금을 판매하는 일도 과연 폐단이 있으니 구태여 시행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산보에 개시(開市)하는 일은 앞서 장계한 것에 따라 이미 준허하셨으니 만호를 승격시켜 첨사로 삼되 당상관으로 차출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본도는 본시 작고 토병(土兵)도 많지 않습니다. 첨사가 부임한 뒤에 즉시 개시하도록 하면, 호인들이 오갈 적에 군사의 위엄을 매몰하게 할 수 없으니, 북도 출신의 군사 및 여병(餘兵)을 분방(分防)하러 보낼 때에 본보에는 넉넉한 수효를 배정해 보내고, 원방 군사(元防軍士)로서 남도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각각 그 당번 때에 일제히 보내게 하여 한 명도 입번 때 빠지는 수가 없게 해야 합니다. 전배하는 사람을 부산(釜山)에 들여보내는 일로 조정의 명령이 있었으나 이후에는 해조로 하여금 적당하게 요량하여 본보에 나누어 정배하도록 하겠다는 것으로, 북병사에게 아울러 행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4책 163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492면
  • 【분류】
    정론(政論) / 군사(軍事) / 무역(貿易) / 수산업(水産業)

咸鏡監司韓孝純啓曰: "當南北形勢之地, 預爲遏絶之所。 南兵使鄭沆、北兵使尹安性, 臣或與之面議, 或移文相議, 則皆以爲: ‘鏡城, 爲六鎭賊路要衝之地, 北靑, 爲賊路要衝之地, 咸興爲別害賊路要衝之地。’ 祖宗朝, 於此三處, 已設大鎭, 以爲監、兵使鎭守策應之地, 更無可議者。 若於此, 預措糧械, 聚集軍兵, 修繕城壕, 則雖遇倉卒之警, 亦足以遏絶賊鋒, 而於六鎭, 設法煮鹽, 措備軍需, 則其弊有三。 穩城會寧慶源等官, 去海皆遠, 或有六七息程, 或有八九息程。 加以高山峻嶺, 重隔於其間, 霖潦凍雪之時, 踰越跋涉之際, 輸運人馬, 多有斃死者, 一不可也。 胡虜之俗, 非所厚之人, 不肯與之買賣。 雖有官鹽貿穀之令, 應之者絶無。 不得已招集酋長, 都給勒貿, 則小胡因以被侵, 怨讟因以胥興, 二不可也。 乙未年間; 有一評事, 主此事, 發內地之民, 刈柴於海汀, 收鐵民戶, 鑄盆煮鹽, 使穩城等五官, 和買於裏民夷之間, 俱失相資之利, 彼此不悅, 終不得成, 三不可也。 非但臣之所聞如此, 前兵使尹安性及六鎭守令之議, 莫不皆然。 茂山設鎭開市, 則臣於前日狀啓, 已陳其槪。 茂山距山外諸部落, 不滿六十里, 潛商之弊, 自前難禁。 不若因其請而快許之, 以結其心, 以爲得策之寧。 唯是數年以來, 會寧進告之, 散亡殆盡, 虜中動靜, 惟茂山一堡, 獨知之。 不卽隨宜善處, 一向牢拒, 則必激狠子之怨, 一則, 永絶進告之格, 所係非輕。 權時許市之擧, 在所不已。 臣以此議於尹安性, 則安性之意, 亦然。 又議於李用諄, 則用諄之意亦然。 第事係新創, 後日利害, 臣亦未知。 自朝廷, 反覆參酌, 速爲指揮。 臣見茂山, 小堡也, 萬戶, 微官也。 若於此地開市, 則似當特設堂上、僉使, 以重其勢。 又當多入軍兵及定配人, 以壯其鎭。 又於茂山城外, 多立屋宇, 通市於此, 供饋於此, 隨事贈給, 結其歡心。 羈縻犬羊之策, 在此, 制戢攻刼之策, 在此, 兩解仇讎之策, 在此, 會寧, 復得安集之策, 亦在此。 自是之後, 邊上之憂, 可以少除。 此臣之妄料也。" 備邊司仍啓曰: "本道南北形勢, 果如監司狀啓所陳, 但修繕城壕之擧, 在所不已, 而鏡城北靑, 則前日鄭彦信任鉉爲兵使時, 改築其城, 頗爲堅固。 今日所可措者, 唯糧餉器械而已。 兩兵營物力, 比諸下三道稍優。 兵使若盡心措置, 則不患難備。 令監司, 另加申飭, 十分措置, 以爲他日緩急城守之計。 咸興城子, 低殘闊遠, 非三四萬兵, 難以守禦。 曾爲監司者, 欲築內城, 而功役浩大, 未果施行。 此則當力渴之時, 猝難輕擧。 當俟後日, 更議處置。 至於糧械, 不可不及時措備, 令監司十分留意擧行。 販鹽一事, 果有弊端, 則不必强爲。 茂山堡開市, 則前因狀啓, 已爲准許。 萬戶陞爲僉使, 亦以堂上官差出, 但本堡本小, 土兵不多, 僉使赴任之後, 卽許開市, 則胡人往來之際, 兵威不可埋沒。 北道出身及餘兵分防之時, 本堡優數定送。 元防軍士之南道者, 各其當番, 一齊起送, 毋致一名之闕立。 定配人入送釜山事, 曾有朝廷命令, 今後, 令該曹, 量宜分配於本堡事, 北兵使處, 幷爲行移何如?" 傳曰: "允。"


  • 【태백산사고본】 94책 163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492면
  • 【분류】
    정론(政論) / 군사(軍事) / 무역(貿易) / 수산업(水産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