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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60권, 선조 36년 3월 14일 경오 1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별전에 나아가 《역경》 대장괘를 강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갔다. 영사(領事) 윤승훈(尹承勳), 동지사(同知事) 이호민(李好閔), 특진관 허성(許筬)·홍가신(洪可臣), 참찬관 이경함(李慶涵), 집의 이덕형(李德泂), 시독관 이광윤(李光胤), 기사관 권흔(權昕), 전경(典經) 민경기(閔慶基), 기사관 정호관(丁好寬)·배용길(裵龍吉)이 입시하여 《역경》 대장괘(大壯卦)의 초구(初九)에서부터 구삼(九三)의 상(象)까지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齧)의 음은 어떻게 읽는가?"

하니, 광윤이 아뢰기를,

"속음(俗音)은 설(雪)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음(挈音)이 아닌가?"

하니, 드디어 설음(挈音)으로 정하였다. 강이 끝나고 광윤이 아뢰기를,

"이 괘(卦)는 양(陽)이 장성(壯盛)한 것입니다. 초효(初爻)에 지(趾)를 말한 것은 모든 일은 시작을 삼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구와 구삼은 강(剛)이 지나치지만 구이(九二)가 양(陽)으로 음위(陰位)에 자리하여 강과 유(柔)가 중(中)을 얻었으므로 정(貞)하고 길(吉)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미(美)와 악(惡)을 같은 말로 해도 관계없다.’는 말은 《역경》에 있어서 알 가 없다. 《춘추(春秋)》에서는 포폄(褒貶)이 한 글자에 달려 있는데, 이렇게 말한 것은 아무리 그 설(說)에 대해 적당한 표현을 찾아도 찾을 가 없어서 억지로 한 말일 것이다."

하니, 허성이 아뢰기를,

"미와 악이 같다는 말이 아니라 속어(俗語)에 따질 것도 못 된다고 한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알 수 없는 말이다. 포(褒)는 포라하고 폄(貶)은 폄이라고 해야지 어찌 같은 말로 했을 리가 있겠는가?"

하니, 허성이 아뢰기를,

"불치(不治)로 다스린다고 한 것이 바로 깊이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 유의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목(綱目)》에서는 풍도(馮道)에 대해 관작(官爵)과 성명(姓名)을 갖추어 쓰고 졸(卒)하였다고 썼으니, 이는 구이효와 같은 것이다. 상정(常情)으로 말한다면 관작을 삭제해야 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이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제갈무후(諸葛武侯)곽분양(郭汾陽)과 비교하여 본다면 미악(美惡)이 절로 드러나는데, 어찌 관작과 성명을 함께 갖추어 썼다고 같게 볼 수 있겠는가. 이미 같게 보지 않았다면 포폄이 절로 정해진 것이다. 따라서 허성의 말은 역시 잘 알지 못한 것이다.

하니, 호민이 아뢰기를,

"미악(美惡)은 주야(晝夜)와 한서(寒暑) 같아서 억제하는 것은 가하지만 끊어서 없애는 것은 불가합니다. 주야와 한서를 분별하지 못할 것 같으면 반드시 역위(易位)하게 될 것이니, 미악을 참으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끊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허성은 아뢰기를,

"두 가지 모두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말이 같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을 일의켜 폄하는 것인 줄 알게 됩니다."

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벌레나 뱀 같은 것은 없어야 하는 것이지만 천지(天地)는 끝내 그것들을 없애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호민의 말은 어쩌면 그렇게 정견(定見)이 없는가. 반드시 성현(聖賢)들의 이야기에 유의(留意)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것이다. 이런데도 그와 함께 중흥(中興)하기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하고, 광윤은 아뢰기를,

"구삼효(九三爻)는 육효(六爻)에 응하여 삼효가 된 것인데 가로막혔기 때문에 그 상(象)이 숫양[羝羊]이 뿔로 울타리[藩]를 들이받는 격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貞)이라는 것은 굳게 지킨다는 뜻인가?"

하니, 허성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羸)라고 하는 것은 상해(傷害)의 뜻이 아닌가?"

하니, 허성이 아뢰기를,

"정(貞)하면 위태하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인(小人)은 장(壯)을 쓰고 군자는 망(罔)을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허성이 아뢰기를,

"불량한 사람이 제 뜻대로 하다가 패란을 당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예컨대 송 신종(宋神宗)이 초년에는 뜻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왕안석(王安石)을 신임하였으나 끝내 이 때문에 망하였으니, 이 효(爻)의 숫양과 같은 격입니다."

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구이(九二)의 정(貞)하여 길(吉)하다고 한 것은 정전(程傳)과 본의(本義)가 뜻이 다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숫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은 것에 대해 반드시 상(象)이 있을 것이다."

하니, 허성이 아뢰기를,

"울타리는 구사(九四)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상(象)의 설명은 견강 부회한 뜻이 있는 듯합니다. 의리로만 보면 좋은 것이니 상에 구애될 것 없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이 말은 옳은 듯하지만 그르다. 말은 근리(近理)하나 이미 의리를 정밀하게 연구하지 않았고 또 점상(占象)을 끝까지 탐색하지 않았으니, 남에게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가 있지만 자기 사업에 있어서야 어디 추호라도 보탬이 되겠는가.

하였다. 허성이 아뢰기를,

"상륙(上六)은 앞에 막힌 것이 없는데도 울타리를 들이받는 상이 있으니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지나치게 강한 것을 경계하는 뜻이다."

하자, 허성이 아뢰기를,

"《역경》의 대의(大義)는 모두 지나친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대개 이미 지나치게 되었으면 구제할 수 없으나 아직 지나치기 전에 경계하면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경(詩經)》에서 이른바 사무사(思無邪)라는 것 역시 이러한 뜻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壯)을 쓰는 것은 알 수 있으나 망(罔)을 쓴다는 망자는 알 가 없다. 망을 써서 기탄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의심스럽다."

하니, 허성이 아뢰기를,

"《역경》의 이치는 현묘합니다. 옛사람의 주석(註釋)이 지금은 전하지 않는데 정전(程傳)과 본의(本義)는 반드시 고주(古註) 가운데서 그 뜻을 가려서 썼을 것입니다."

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마땅히 《논어》의 ‘망지생(罔之生)’의 망자와 같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허성은 아뢰기를,

"‘발에 장(壯)함이다. [壯于趾]’한 것은, 유우석(劉禹錫)·유종원(柳宗元) 등이 뜻을 얻자마자 곧 패망한 상(象)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허성이 아뢰기를,

"천지의 정(情)을 크게 보았다는 것과 천지의 심(心)을 다시 보았다는 것은 같이 본 것입니다. 교정(校正)하는 일이 근년에도 계속되는데 그 중에 다 개정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다만 이미 구본(舊本)을 미진하다고 하여 지금 다시 교정한다면 형세가 병행할 수 없습니다. 구본과 신본이 둘 다 세상에 유용한다면 사자(士子)들이 따를 바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시관(試官)이 구본을 쓸 경우에는 신본을 쓰는 자가 실패하고 신본을 쓸 경우에는 구본을 쓰는 자가 실패할 것이니, 매우 우스운 일입니다. 일정한 명이 있어야만 될 것입니다."

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참고하여 본다면 방해로울 것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교정청(校正廳)은 마땅히 초본(草本)이 있을 것이니, 몇 권을 인출해 내도록 하라. 그러나 종이를 판출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니, 허성이 아뢰기를,

"인출을 한다면 사자로서 보고자 하는 자는 모두 인쇄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경》의 주석을 내가 1권만 얻었을 뿐이어서 매우 애석하다."

하니, 허성이 아뢰기를,

"제 4권은 다시 고칠 곳이 있었기 때문에 반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록 사사로이 인쇄하는 자도 나누어 가져가지 못하였는데 그만 산실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방의 일이 급하기는 하지만 서적을 널리 인출한 연후에야 문무(文武)의 선비들이 모두 적재 적소에 쓰일 수 있는 인재가 된다. 지금의 선비들은 반드시 서적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난리가 있기 전의 사람들은 서적이 없었던 것이 아닌데도 인재가 모두 아둔하고 지리멸렬하였다. 서적이 한우 충동(汗牛充棟)으로 많지만 글을 전공하는 자들이 힘들여 송독(誦讀)하여 본체에 밝고 응용에 적합한 실상으로 삼지 않고서 단지 글귀나 주워모아 진취(進取)할 계책이나 삼고 있으며, 무예를 익히는 자들은 글을 몰라서 문사(文士)에게 용납되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궁마(弓馬)를 일삼고 있으니, 이러고서도 이 세상을 구제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당장(唐將)과 왜장(倭將)은 문자에는 모자라지만 용병(用兵)에는 뛰어나다. 그러므로 성현의 전체 대용(全體大用)의 학문으로 자임(自任)하지 않고 함께 난망(亂亡)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서적의 존망(存亡)이 영향을 미치기에는 부족하다고 신은 생각한다.

하니, 호민이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지 이미 10년이 되었으므로 평시의 학자들이 모두 늙어 남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후진(後進)의 선비들은 누구의 집에 서적이 있다고 듣기만 하면 반드시 모두 책이 있는 자의 집에 모여서 한번 훑어보고 이내 끝내니, 자연히 숙독(熟讀)할 가 없습니다. 호조의 경비가 탕갈되어 공가(公家)에서 인출해 내기는 형세상 어렵습니다. 만약 사력(私力)을 합한다면 인출할 가 있을 것입니다. 하삼도(下三道)는 닥나무[楮]가 나는 곳이지만 그곳에서도 종이를 마련하기가 극히 어렵다고 합니다."

하였다. 허성이 아뢰기를,

"전조관(銓曹官)이 무사(武士)의 얼굴도 모르고 주의(注擬)하니 역시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근래 바야흐로 병서(兵書)를 시험보이는데 《황석공(黃石公)》·《오자(吳子)》 같은 책 역시 많이 얻을 수 없으니 더구나 사자(士子)들이 널리 보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무사의 경우에는 부거(赴擧)할 때 단지 한 가지 책만을 욀 뿐인데 난 후에 공사간(公私間)에 서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일찍이 읽었던 책으로 시험하지 않고 현존하는 책을 되는 대로 취하여 시험보이므로 무사가 책을 대하면 망연히 말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매우 가소롭습니다. 근래 변방의 일이 급한 듯하여 문적(文籍)에 힘을 기울일 여가가 없습니다. 《소학(小學)》을 인출하여 반포한 뒤에도 사자들이 서로 헐뜯고 모욕하므로 사풍(士風)이 불미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학》을 모욕하는가?"

하니, 호민이 아뢰기를,

"그 예문(禮文)이 번거로운 것을 꺼리는 것입니다. 지금의 사자(士子)들은 혈기로 과거에 급제하기 때문에 전혀 본 바가 없으니 사습(士習)이 어떻게 바로잡히겠습니까."

하였다. 덕형(德泂)이 아뢰기를,

"소각사(小各司)에 휴흠(虧欠)이 매우 많은데 이배적(李培迪)이 낭패당한 후로 각사가 두려워하여 회계(會計)하지 않으므로 호조가 일일이 뽑아내어 죄를 다스릴 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고식책(姑息策)만 쓸 뿐이라면 국계(國計)가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호조에 신칙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신원(信元)은 아뢰기를,

"수성(修省)하라는 말을 아뢰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만, 실제로 하고 겉치레로 하지 않아야 재변을 없앨 수 있습니다. 옛 임금 가운데 재변을 만나 공구 수성한 경우에는 흥하였고 교만 방자한 경우에는 망하였습니다. 주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도(道)가 몸에 있게 되면 인애(仁愛)스런 하늘의 보답은 메아리 같이 빨라 전화 위복(轉禍爲福)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한(漢)나라 승상 왕가(王嘉)가 ‘하늘이 재이(災異)를 보이는 것은 임금을 경계하고 신칙하여 스스로 깨달아 수성(修省)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인심도 기뻐할 것이고 천의(天意)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허성은 아뢰기를,

"신원의 말이 매우 절당(切當)합니다. 재이가 많더라도 공구 수성하면 흥하는 것이고 상서(祥瑞)가 있더라도 공구 수성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수 양제(隋煬帝) 때에는 놀랄 만한 재변이 없었는데도 끝내 망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상께서 이른바 ‘미와 악을 같은 말로 해도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양제 때 재이가 없었던 것은 하늘이 양제를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재이가 많은 것은 반드시 하늘이 전하를 인애(仁愛)함이 지극하다는 실증이니, 이는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왕옥(王獄)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죄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옥(典獄)에 갇힌 자로서 서귀남(徐貴男)·한호수(韓好守) 등은 신이 전라도에 있을 적에 그 족인(族人)들이 정소(呈訴)한 것을 보았는데, 모두 권용(權龍)의 얼굴을 보려고 하다가 갇힌 것으로 그 자신은 전혀 범한 것이 없으니, 가련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은 도망할 사람이 아니니 지금 우선 방송(放送)하였다가 권용이 현신(現身)한 연후에 다시 추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신이 근래 종부시(宗簿寺)의 제조로 있으면서 보건대, 사진(仕進)하지 않는 종실 가운데 혹 녹봉이 너무 박해서 의장(衣章)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사진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중법(重法)으로 다스리며 추고하는 일이 빈번히 있었습니다. 평상시 네 번 사진하지 않으면 추고하는 전례가 있어 왔으니, 법이 소홀하지 않은 듯한데도 두려워서 부지런히 사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께서는 종친을 친하게 여기는 인(仁)을 미루어 그들을 매번 놓아두고 묻지 않았습니다만, 지금부터는 번(番)을 나누어 사진하게 하면 아마도 의장과 기복(騎僕)을 빌어 입고 나올 수 있어서 사진하지 않는 책망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신 또한 외람되이 제조를 맡고 있는데 성(筬)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종부시는 바로 종실의 법사(法司)입니다. 전에 구사(丘史)를 감(減)하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고 시(寺)에는 늙은 아전 1인만 있습니다. 그가 담당하여 다스리는 것은 서얼이 적자를 능멸하고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능멸하는 일 따위인데 종실중에는 패려한 자가 매우 많아서 추치(推治)하는 번거로움을 한 늙은 아전이 감당해 낼 가 없습니다. 평소에 헌부가 쇄장(鎖匠)을 정송(定送)하여 하리(下吏)로 삼는 규칙이 있으니, 지금도 전례에 의해 쇄장을 정송한다면 아마도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요수(林堯叟)가 주(註)를 낸 《좌전》 외에 별본(別本)으로 비점(批點)을 한 것이 있다는데 경은 읽어 보았는가?"

하니, 호민이 아뢰기를,

"신의 집에 노모(老母)가 있으므로 겨우 과거(科擧)에 관한 문장을 하는 일 한 가지만 할 수 있었을 뿐, 신 같은 용렬한 재주로는 감당할 가 없었기 때문에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불의불닐(不義不昵)에 대한 설(說)이 두예(杜預)의 주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설을 알고 싶어서 물었을 뿐이다."

하였다. 호민이 아뢰기를,

"중국인들은 저술하기를 좋아하는데 저술하면 반드시 인출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엇으로 인출하는가?"

하자, 호민이 아뢰기를,

"흙을 사용하기 때문에 공역이 쉽습니다. 또한 《평림(評林)》·《평화(評花)》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책인가?"

하자, 호민이 아뢰기를,

"모두 초집(抄集)한 것입니다. 신도 사왔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예의 주와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호민이 아뢰기를,

"신은 그 우열(優劣)을 알지 못하므로 망령되이 논할 가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읽었던 《문선(文選)》 오신(五臣)의 주(註) 외에 또 별본으로 주 하나가 있었는데 상께서 인출해 보시고자 하였으므로 감히 집에다 주지 못하고 진헌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현재 다른 책을 인출하는 중이어서 힘이 미칠 겨를이 없으니, 경이 가져다 읽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기평림(史記評林)》을 경은 읽어 보았는가?"

하니, 호민이 아뢰기를,

"《한서평림(漢書評林)》《사한평림(史漢評林)》도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두 책을 합칠 것 같으면 권질(卷帙)이 필시 많을 것이다."

하였다. 호민이 아뢰기를,

"긴요한 곳이 있고 맹랑한 곳도 있으니, 총예(聰睿)한 자는 마땅히 섭렵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서적이 한우 충동(汗牛充棟)으로 많아서 다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보고 있는 서책에 힘을 들여 충분히 읽어서 그 중 좋은 것은 취하여 법을 삼고 좋지 않은 것은 버려서 경계로 삼는다면 반드시 일푼이나마 소득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가 일찍이 동인(東人)의 문자를 찬집하게 하였었다."

사신은 논한다. 오늘 경연에서 문장에 대해 언급한 것은 모두가 한가로운 쓸 데 없는 말들이었고 세상을 경륜하는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니, 양 무제(梁武帝)·진숙보(陳叔寶)의 경우와 다를 것이 거의 없다. 우리 유가(儒家)에는 절로 훌륭한 문장이 있는데 지금 군신 상하가 알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 사서(四書), 육경(六經) 등의 책은 바로 경천 위지(經天緯地)하는 문장인데 어찌하여 한 마디 언급이 없단 말인가. 이 책들의 내용을 자기 몸에 돌이킨다면 심신(心身)과 성정(性情)이 바르게 되고 이를 천하 국가에 미루어나가면 민물(民物)이 제 자리를 얻게 될 것이니, 조그마한 기예에 구구히 매달리지 않아도 이미 자신에게 있게 되어 발하기만 하면 글을 이루게 될 것이다. 《역경(易經)》에 ‘글을 짓는 것은 자기의 성의를 확립시키는 것이다.’ 하였고, 옛사람도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문자만 전공하는 따위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주자(朱子)는, 여자약(呂子約)의 병통은 태사공(太史公)이 빌미가 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나 또한 오늘날의 패망(敗亡)은 바로 문장과 잡서(雜書)가 빌미가 된 것이라고 여긴다.

하였다. 호민이 아뢰기를,

"신흠(申欽)이 일찍이 훌륭한 문자를 점출(點出)하여 신에게 주었었는데 이미 죽은 자의 문자도 모두 수습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내 뜻은 죽은 자의 문장만을 모으려고 했을 뿐 아니라 생존한 사람의 문자 또한 수집하고자 한 것이었다. 마침 중국 장수가 보겠다고 찾았기 때문에 초집(抄集)하게 했던 것이다."

하였다. 허성이 아뢰기를,

"성묘조(成廟朝)에 김종직(金宗直)·서거정(徐居正) 양인이 생존했을 때도 그들의 문자를 인출하도록 명하였었습니다."

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사람들의 문집 또한 구해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규방(閨房)의 문자와 상인(常人)이 지은 것 또한 수집해야 하지만 나의 소견이 어떤지 모르겠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승훈(尹承勳)은 영사(領事)로서 입시하여 끝내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물러갔으니, 이는 필시 말 때문에 뜨거운 맛을 본 것에 징계된 탓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바야흐로 종묘·궁궐을 짓기도 전에 대사(大舍)를 창건하여 주야로 쉬지 않고 있었으니 참으로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기어코 사람들의 말 때문에 영선(營繕)하는 역사를 가벼이 그만두지는 않았다. 이로써 논한다면 그는 국사를 자기 집일만도 못하게 여긴 것이니 곽거병(霍去病)에게 매우 부끄러운 바가 있다. 어떻게 하면 나라만 위하고 공사(公事)만 힘쓰는 사람을 얻어 경연에 시강하게 할 수 있을까. 한탄스럽다.


  • 【태백산사고본】 92책 16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455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語文學) / 출판(出版)

    ○庚午/上御別殿, 領事尹承勳、同知事李好閔、特進官許筬洪可臣、參贊官李慶涵、執義李德泂、侍讀官李光胤、記事官權昕、典經閔慶基、記事官丁好寬裵龍吉入侍。 講初九止九三象, 上曰: "齧音云何?" 光胤曰: "俗音雪。" 上曰: "非挈音耶?" 遂定爲挈音。 讀講訖, 光胤曰: "此卦, 乃陽壯之盛。 初爻以趾言者, 凡事謹始之義。 初九九三過剛, 九二以陽居陰位, 剛柔得中, 故貞吉。" 上曰: "如美惡不嫌同辭之說, 在《易》則未可知也, 《春秋》則褒貶, 在於一字, 而猶曰云云, 此必求其說而不得, 無所止泊, 而强爲之詞也。" 曰: "非以美惡爲同也。 猶俗語不足數之云也。" 上曰: "此不可知之說也。 褒曰褒, 貶曰貶, 豈有同辭之理乎?" 曰: "若治之以不治, 乃所以深治之類。" 上曰: "《綱目》(馮通)〔馮道〕 , 具官爵姓名而書卒, 與此九二爻同。 以常情言之, 當削其官爵可也。"

    【史臣曰: "此不難知, 與諸葛武侯郭汾陽, 比而觀之, 美惡自見。 豈以官爵姓名之同具, 而竝與其人, 而同觀耶? 旣不得竝觀, 則褒貶自制也。 然則之言, 亦未爲得也。"】

    好閔曰: "美惡與晝夜寒暑, 抑之則可, 絶之使無, 則不可。 若不能辨晝夜寒暑, 則必至易位。 雖眞知美惡, 亦不能絶矣。" 曰: "非曰兩者, 皆不可無, 辭同則人必致疑, 而知其爲貶也。" 好閔曰: "如蟲蛇者, 可無之物, 而天地終不能使之無。"

    【史臣曰: "觀人言語, 知其所存。 好閔之言, 何無定見耶? 必是不留意於聖賢說話者如此, 而能與之共圖中興乎?"】

    光胤曰: "九三應六, 而爲三所隔, 故其象爲羝羊觸藩。" 上曰: "貞者固守之義乎?" 曰: "然。" 上曰: "羸者, 非傷害之義乎?" 曰: "貞厲之義也。" 上曰: "用壯用罔, 何義?" 曰: "不良之人, 任意而致敗, 固其所也。 如神宗, 初年銳意圖治, 信任安石, 終以此亡, 與此爻羝羊同。" 好閔曰: "九二貞吉, 《傳》義不同。" 上曰: "羝羊觸藩, 必有其象。" 曰: "籓以九四言也。" 好閔曰: "象之說, 似有牽强之意。 但看得義理自好, 象不必泥。"

    【史臣曰: "此言似是而非。 言雖近理, 然旣不硏精義理, 又不窮索占象, 對人則猶曰云云, 於自己事業, 有何秋毫補裨?"】

    曰: "上六, 前無所隔, 而亦有觸藩之象, 不可知也。" 上曰: "大槪戒其過剛之義。" 曰: "《易》之大義, 皆戒過處。 蓋旣過, 則不可救, 戒於未過之前, 則可及矣。 《詩》所謂思無邪者, 亦此義。" 上曰: "用壯可知也, 用罔〔之〕 罔字, 不可知也。 用罔之爲無所忌極, 可疑也。" 曰: "《易》之理玄妙。 古人註釋, 今則不傳, 《傳義》, 必於古註中, 擇其旨者, 而用之。" 好閔曰: "當依罔之生也看好。" 曰: "壯于趾, 如劉禹錫柳宗元之流, 纔得志, 而旋敗之象。" 曰: "正大見天地之情, 與復見天地之心同看。 校正之擧, 陸續於近年, 而其中有未盡改正者。 但旣以舊本爲未盡, 而今更校正, 則勢不可竝行, 而舊本新本, 兩存於世, 士子莫適所從。 試官用舊, 則新者敗, 用新, 則舊者敗, 極可笑也。 須有一定之命, 然後可。" 好閔曰: "參看不妨。" 上曰: "校正廳當有草本, 印出數本可也。 但辦紙極難。" 曰: "若印, 則士子之欲見者, 皆印之。" 上曰: "《詩釋》, 予只得一卷, 極可惜。" 曰: "第四卷有更定處, 故非徒不及頒布, 雖私印者, 未得分去, 而散失矣。" 上曰: "邊事雖急, 當廣印書籍, 然後文武之士, 皆爲適用之材。 今之士子, 必不得書籍矣。"

    【史臣曰: "亂前之人, 非以無書籍, 而材皆鹵莾滅裂也。 書籍雖充棟汗牛, 而攻文者, 不致力誦讀, 以爲明體適用之實, 而但務抉摘句辭, 以爲進取之計, 業武者, 必目不知書, 不容於文士, 然後始事弓馬。 如此而能扶濟斯世之可冀耶? 將、將, 雖短於文字, 而長於用兵。 臣故曰苟不以聖賢全體大用之學自任, 而同就亂亡, 則書籍存亡, 不足爲輕重。"】

    好閔曰: "經亂已十年, 平時學者皆老, 其存者且無幾矣。 後進之士, 聞某家有書籍, 則必都會於有書者之家, 旋看旋罷, 自無熟讀之理。 戶曹輕費蕩然, 公家印出, 勢所難能, 若合私力, 則庶幾可印矣。 如下三道, 雖産楮, 辦紙亦極難云。" 曰: "銓曹之官, 不知武士面目, 而注擬亦似未穩。 近日方試兵書, 如《黃石公》《吳子》之類, 亦不可多得。 況士子雖欲博觀, 得乎?" 好閔曰: "如武士者, 赴擧時, 只誦一書而已。 亂後公私無籍, 故不試以渠所曾誦之書, 而泛取見存之書, 試之武士, 對卷茫然, 不知所謂, 極可笑也。 近者邊事似急, 無暇致力於文籍, 自《小學》印頒之後, 士子互相詆侮, 士風不美。" 上曰: "侮《小學》乎?" 好閔曰: "憚其禮文之煩也。 今之士子, 血氣取科, 全無所見。 士習何由而正乎?" 德泂曰: "小各司, 虧欠極多。 自李培迪見敗之後, 各司恐懼, 不爲會計, 戶曹不得一一抄發治罪。 若此姑息不已, 國計耗竭, 無以支堪。 請申飭戶曹擧行。" 信元曰: "修省之說, 啓之者必多, 然以實不以文, 方可弭災消孽。 古之人君, 遇災修省者興, 驕傲者亡。 若日夜兢惕, 道存於身, 則上天仁愛, 報之如影響, 轉禍爲福, 必不難矣。 王嘉曰: ‘天之見以災異, 所以戒勅人主, 使之覺悟而修省。’ 如此, 則人心悅, 而天意得矣。" 曰: "信元之言, 至切至當。 災異雖多, 恐懼修省則興, 雖有祥瑞, 不恐懼修省則亡。 如 煬帝時, 無可驚之災, 而終歸喪亡。 眞上所謂美惡不嫌同辭者也。 煬帝之無災異, 是天不恤煬帝也。 今日災異之多, 必上天仁愛殿下之至, 不可誣也。 王獄所囚之人, 必是有罪者也, 如移囚典獄者, 徐貴男韓好守等, 臣在全羅道, 見其族人呈訴, 都是欲見權龍面目而囚之, 渠身專無所犯, 可憐可憐。 渠非逃躱之人, 今姑放送, 待權龍見身, 然後更推何如? 且臣近忝宗簿寺提調。 宗室之不仕進者, 或祿俸甚薄。 衣章不備之致, 而繩以重法, 度度推考, 比比有之。 平時四度不仕者, 推考之例, 法似密矣, 而尙無畏懼勤仕之人。 自上推親親之仁, 每棄不問, 今後使之分番仕進, 則庶幾借得衣章騎僕, 得免不仕之責矣。" 好閔曰: "臣亦忝爲提調。 言甚是。 宗簿爲寺, 乃宗室法司也。 舊有減丘史之法, 今則廢矣, 寺有老吏一人而已。 所管治者, 孽陵嫡、卑陵尊之類, 而宗室中悖戾者甚多, 推治之煩, 非一老吏所能支。 平時, 憲府有定送鎖匠, 爲下吏之規。 乞依前定送鎖匠, 則庶可支矣。" 上曰: "林堯叟所註《左傳》外, 有別本批點者, 卿見之乎?" 好閔曰: "臣家有老母, 故僅得科擧文章一事。 非臣庸材所堪, 故臣不見矣。" 上曰: "卿不可出斯言。 不義不昵之說, 與杜預註不同。 欲知其說, 故問之耳。" 好閔曰: "中國好著書, 著必印出。" 上曰: "何物印出耶?" 好閔曰: "用土故爲功易。 亦有《評林》《評花》書。" 上曰: "何樣書?" 好閔曰: "皆抄集矣。 臣亦買來, 尙不得見。" 上曰: "與杜預註, 不同何耶?" 好閔曰: "臣未知其優劣, 不敢妄論。 臣曾讀《文選》, 五臣註外, 亦有別本一註。 上欲印看, 故不敢留于家, 曾進獻矣。" 上曰: "方印他書, 力不暇及。 卿其將去讀之。" 上曰: "《史記評林》, 卿見否?" 好閔曰: "亦有《漢書評林》《漢史評林》。" 上曰: "若合兩書, 卷帙必多。" 好閔曰: "有緊處, 有孟浪處。 聰睿者, 自當涉獵, 但書籍充棟汗牛, 不可遍觀。 須於所見書冊上, 着力熟讀, 取其善者而爲法, 舍其不善者而爲戒, 則必有一分所得。" 上曰: "卿言是。

    【史臣曰: "今日筵中, 談及文章, 都是閑謾底說話, 若其經世事業, 專未之及。 其異於 武帝陳叔寶者, 幾希。 吾儒家, 自有好文章, 恐今之君臣上下, 未之知耳。 何者, 《小學》《近思》、四書、六經等書, 乃經天緯地之文, 而何無一言及之耶? 斯書也, 反諸身, 則身心性情得其正, 推諸天下國家, 則民物得其所。 不必區區於小技, 而旣有諸己, 便發成文矣。 《易》曰: ‘修辭立其誠。’ 古人曰: ‘有德者必有言。’ 豈專攻文字之謂乎? 朱子呂子約之病, 爲太史公之祟。 臣亦曰、今日之敗亡, 乃文章雜書所祟。"】

    予曾令撰集東人文字。" 好閔曰: "申欽曾點出好文字, 付于臣。 已死者文字, 亦竝收拾乎?" 上曰: "然。 予意, 非止欲集死者之文, 生存人文字, 亦欲收集。 適有天將求見, 故曾令抄集矣。" 曰: "成廟朝, 金宗直徐居正兩人生存時, 命印其文字矣。" 好閔曰: "人家文集, 亦難得見。" 上曰: "閨房文字, (喪)〔常〕 人制作, 亦可收集, 但未知予所見如何?"

    【史臣曰: "尹承勳以領事入侍, 終無一言而退。 必懲熱羹而吹虀也。 然渠方創建大舍於宗廟、宮闕, 未營之前, 晝夜頟頟, 苟以此見斥於人。 必不以人言, 而輕輟營繕之役。 以此論之, 其視國事, 不如家矣。 有愧於霍去病甚矣。 安得國耳公耳之人, 而侍講於一筵耶? 可嘆。"】


    • 【태백산사고본】 92책 16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455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語文學) / 출판(出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