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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52권, 선조 35년 7월 10일 기사 2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함경 감사 한효순이 회령 등 오랑캐의 발호와 그 퇴치에 대해 보고하다

함경도 관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하기를,

"6월 29일 도착한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수(李璲)의 첩정(牒呈) 안에 ‘당일 신시(申時)쯤 부(府)의 성 밑에 사는 번호(藩胡) 벌이대(伐伊大)·막상개(莫尙介) 등이 와서 말하기를 「수상(水上)의 적호(賊胡) 노토(老土)의 아들 아로(阿老)여롱거(如弄巨)·왕견우(王見右) 등이 휘하에 말탄 오랑캐 1백 여 명을 모아 이날 날이 샐 무렵 고령(高嶺)독소부락(篤所部落) 및 회령부 경계 강 건너 15리쯤에 있는 사이이동(沙伊耳洞) 번호의 왕주부락(往主部落)을 함께 포위하고 공격했다. 」고 하기에, 보고를 받은 즉시 번호를 타일러 적이 다니는 요충지에서 적호를 잡도록 지시했다. 그랬더니 유시(酉時)쯤에 돌아와 고하기를 「왕주부락의 여호(女胡) 1명이 살해되고 그 나머지 인물(人物)은 산으로 올라 도망갔는데, 소 다섯 마리를 약탈해 갈 때에 독소부락의 번호 및 회령부 경내의 번호 등이 합세하여 보을하(甫乙下) 경계에서 금부동(金夫洞)에까지 추격하여 서로 싸우다가 돌아왔다. 」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뒤이어 도착한 고령 첨사(高嶺僉使)의 전통(傳通)에는 ‘고령진 경내의 번호 추장인 아을포(阿乙浦)·사능구(舍能仇) 등이 보고한 내용에 「독소부락에서 싸울 때 적호는 비단 여롱거의 군사만이 아니었다. 노토 명간로(明看老)의 아들 3인 및 보을하 경내의 소동개(所同介)의 아들 아양(阿陽)·김서(金鋤)·봉개(奉介) 등이 앞장서서 소리치며 나와 살상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번호인 모랑개(毛郞介) 등 남녀 도합 8명과 말 1필, 소 1두가 화살을 맞아 즉사했으며, 남녀 9명, 말 9필, 소 7두를 약탈해 갔다. 번호 등이 발분하여 추격해서 겨우 몇 사람을 빼앗아 왔으나 번호 5명이 다시 살상당했다. 」고 추가로 고했다.’ 하였습니다.

노토 명간로 등은 이미 무산보(茂山堡)에 투항하고서도 스스로 단속하지 않고 그들의 부하들을 제멋대로 횡행하게 하며, 심지어는 부 경내의 번호 부락을 몇 달 사이에 두세 번이나 공격하여 번호를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하니, 흉악한 계책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방비하는 일을 날로 새롭게 완비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효순은 사람됨이 나라 일에 부지런하고 장자(長者)의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


  • 【태백산사고본】 90책 15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396면
  • 【분류】
    정론(政論) / 외교-야(野) / 군사(軍事)

    咸鏡道觀察使韓孝純馳啓曰: "六月二十九日到付, 會寧府使李璲牒呈內, ‘當日申時量, 府城底藩 伐伊大莫尙介等來言曰:「水上賊 老土阿老如弄巨王見右等麾下, 聚衆騎百餘名, 當日欲明時, 高嶺 篤所部落及府境江越邊十五里許沙伊耳洞 往主部落, 合圍攻擊事」, 進告卽時, 藩開諭, 賊路要害處, 措捕事知委矣, 酉時量, 還來進告曰:「往主部落, 女一名殺害, 其餘人物, 則登山北走, 牛五首掠去之際, 篤所及府境藩等, 合勢追逐, 自甫乙下境, 至金夫洞, 相戰而還」 云。’ 追到付高嶺僉使傳通內, ‘鎭境藩酋長阿乙浦舍能仇等進告內, 「篤所部落相戰時, 賊非徒如弄巨軍也。 明看老土子三人及甫乙下所同介、子阿陽 奉介等, 首唱出來, 所殺傷甚衆, 藩 毛朗介等男女幷八名, 馬一匹、牛一頭, 中箭卽斃, 男女九名、馬九疋、牛七頭掠去, 藩等發憤追逐, 人物數口, 僅得奪還, 而藩五名, 則又被殺傷事。」 追告’ 云矣。 老土明看老等, 已於茂山堡納降, 而不爲自戢, 使其麾下, 縱恣橫行, 至於府境內藩部落, 數月之間, 再三攻擊。 使藩不得安接, 兇謀叵測。 在我防備, 日新備完, 以待不虞事。" 入啓。 【孝純爲人, 勤於國事, 有長者器度。】


    • 【태백산사고본】 90책 15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396면
    • 【분류】
      정론(政論) / 외교-야(野)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