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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52권, 선조 35년 7월 1일 경신 4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가례 도감에서 왕비의 의복에 관한 각종 의례를 상고 시행토록 건의하다

가례 도감(嘉禮都監)이 아뢰기를,

"적의(翟衣)133) 의 제도를 당초 상고할 곳이 없었으므로 단지 효경전(孝敬殿)에 봉안해 놓은 중국에서 하사한 적의의 제도에 의거하여 취품해서 제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서적 및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친왕비(親王妃)와 군왕비(郡王妃)의 관복 제도(冠服制度)를 상고해 보니 대삼(大衫)과 하피(霞帔)를 사용했는데, 대삼은 대홍(大紅)을 쓰고 하피는 진한 청색을 바탕으로 했으며 저사(紵絲)나 사라(紗羅)를 형편에 따라 사용했습니다. 사계오자(四䙆襖子)는 바로 배자(褙子)로서 도홍색(桃紅色)을 썼고, 국의(鞠衣)는 청색을 사용했는데 저사와 사라를 모두 각색(各色)으로 형편에 따라 사용하되 황색은 쓰지 않았습니다. 대대(大帶)는 청색실로 짰는데 가장자리를 선으로 둘렀으며 간혹 홍라(紅羅)를 사용하기도 했고, 옥곡규(玉穀圭)·옥혁대(玉革帶)·옥화채(玉花采)·결수옥패(結綬玉佩)·청말석(靑韈舃)을 구비했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전일 중국 조정에서 내려 준 적의는 미비한 물건이 많은 것인데 가지고 온 사신이 미처 깨달아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옥혁대·결수옥패·청말석이 구비되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구적관(九翟冠)이 있어야 그 제도가 완비된다 하겠는데, 지금 갑자기 마련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례의》에는 ‘적의에 수식(首飾)을 가한다.’는 문구가 있는데, 수식은 우리 나라 풍속에 따라 마련한 것이라면 적의 위에 부득이 대대(大帶)만 착용하고 예를 행해야 합니까? 제도가 완비되지 않아 매우 구차하고 간소한 듯한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회전(會典)》의 친왕비 예복조(親王妃禮服條)에 ‘대대는 옷 색깔을 따른다.’라고 했으니, 지금은 이에 따라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대명회전》에 부표(付標)하여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작은 일이 아니니 당초에 자세히 살폈어야 했다. 이번에 적의를 내전에 들이면서 대(帶)가 없다 하니, 어찌 예복에 대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문한 뒤에야 이런 말을 하는가. 지금 갑자기 준비하기 어려우니 어떤 색깔의 대이든 속히 마련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0책 15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39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의생활(衣生活)

  • [註 133]
    적의(翟衣) : 왕비의 의복.

○嘉禮都監啓曰: "翟衣之制, 當初未有所考, 但據孝敬殿奉安欽賜翟衣制度, 取稟製造矣。 今考諸書及《大明會典》, 親王、郡王妃冠服制度, 則大衫、霞帔, 衫則用大紅, 霞帔以深靑爲質, 紵絲紗羅隨用。 四䙆、襖子, 卽褙子, 桃紅色, 鞠衣, 靑色。 紵絲紗羅, 竝各色隨用, 惟不用黃。 大帶, 靑線羅爲之, 有緣, 或用紅羅、玉穀圭、玉革帶、玉花采, 結綬玉佩, 靑韈舃具備。 以此見之, 前日天朝欽賜翟衣, 多有未備之物, 而齎來使臣, 未及覺察也。 若備玉革帶、佩綬、襪舃, 則必有九翟冠, 然後方備其制, 而今難卒備。 《五禮儀》有翟衣加首飾之文。 首飾旣從國俗磨鍊, 翟衣之上, 不得已只用大帶, 而行禮乎? 制度未備, 甚似苟簡, 何以爲之? 《會典》親王妃禮服條, 大帶, 從衣色云。 今宜依此磨鍊, 《大明會典》, 付標以啓。" 傳曰: "不小事, 當初詳察事也。 今者翟衣入內, 而無帶。 豈有禮服而無帶之理乎? 下問之後, 乃有此言。 今難卒備。 某色帶, 從速磨鍊。"


  • 【태백산사고본】 90책 15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39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