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생 한효상 등이 성혼을 구제하는 상소를 올림
유생 한효상(韓孝祥) 등 10여 인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공론이 천하에 있는 것은 물이 땅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하루라도 없은 적이 없습니다. 조정에 있지 아니하면 여항에 있고, 여항에 있지 아니하면 후세에 있으니, 이는 이치가 그러한 것입니다. 신 등이 살펴보건대, 망신(亡臣) 성혼은 세상에 이름 높은 큰 유학자로 가정에서 잘 훈도되어 학문의 공효와 실천의 행실이 사림의 표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측한 누명이 죽은 뒤에 갑자기 가해져 현인을 좋아하는 전하의 성의로서도 조정의 의논에 흔들려 삭직하라는 명을 여러 차례 미루시다가 마침내 내리셨으니, 이와 같은데도 조정에 공론이 행해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론이 이미 조정에서 행해지지 않고 있는데, 여항에 있는 사람이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으면 이는 후세에 공론이 있게 하는 것이니, 신 등은 통분하게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사류(士類)를 해치고 나라를 텅 비게 한 경우 반드시 ‘당화가 참혹했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당고(黨錮)의 화063) 나 위학(僞學)의 금령064) 과 같은 데에서 당의 명칭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성명(聖明)의 시대에 어진이를 해치고 시기 모함하는 무리가 이런 당을 만들어 사림을 일망 타진하려는 계획을 꾀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사림을 일망 타진하려면 성혼을 죄주지 않고서는 안 되므로 성혼을 죄주는 데에 반드시 정철의 당이라고 구실을 삼은 것입니다. 신 등은 실로 정철의 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자신이 이미 죄를 받았는데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까지 화가 미친단 말입니까. 성혼은 정철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고 같은 마을에 산 정분이 있었으므로 항상 정철의 잘못을 꾸짖고 장점을 취하였으며, 정철 또한 성혼의 인품을 사모하고 의리에 감복하였으니, 성혼이 정철에 대해 어찌 교분이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정철과 사귀었다 하여 간당(奸黨)으로 지목하니, 이 점이 바로 국시가 전도되고 여정이 울분해 하는 이유입니다.
더욱 통분한 일은 임진 왜변이 갑자기 일어나 성상께서 서울을 떠나시던 날, 거가(車駕)의 거둥이 허둥지둥하여 원근에 도로를 청소하라는 영을 내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성혼의 집은 외진 동리로 한길에서 20리나 떨어져 있으니 그처럼 급할 때에는 형세상 반드시 달려갈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가 난리를 당하여 임금을 뒤로 했다는 말이 오로지 이로 말미암아 일어났습니다. 신 등은 그의 형적을 논할 겨를이 없으니 먼저 그의 마음가짐을 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혼은 어버이에 대한 효행이 본래부터 드러났으며 평생의 마음씨와 행동도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난리를 당하여 임금을 뒤로 함으로써 배운 바를 저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실정을 드러내어 밝히지 못함으로써 죄가 실로 애매하게 되었으니 신 등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대체로 유자(儒者)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므로 유도(儒道)의 흥망 성쇠에 따라 나라가 다스려지기도 하고 어지러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인심이 타락하고 사습(士習)이 경박하여 훌륭한 유학자를 죄의 그물에 빠뜨리므로 사기(士氣)가 꺾이고 유림(儒林)이 통분해 하니, 전하의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기시는 마음에 어떠하겠습니까. 신 등이 시휘(時諱)를 피하지 않고 번독스럽게 해드리며 전하를 감히 저버리지 못하는 것 또한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변변치 않은 말이라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국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너희들은 그의 도당(徒黨)들이 성혼을 구제함으로 인하여 이 소를 진달하였다만 그가 간흉과 교결한 정상은 너희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말은 비판을 받지 않고서도 와해될 것이니, 잘못을 덮으려고 하다가 더욱 드러난 것이다. 심지어 성혼을 큰 유학자라고까지 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치욕스러운가. 유자의 명칭은 진실로 하나만이 아니다. 설사 성혼을 장구(章句)를 대강 익혀온 유자로 지목한다 하더라도 이미 간흉과 합하여 일체가 되어 군부(君父)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마침내 임금을 원수인 적에게 항복하도록 인도하였으니, 이는 양주(楊朱)·묵적(墨翟)의 무리인 것이다. 옛말에도 ‘능히 양주·묵적을 막자고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는 말이 있다. 지금 조정에서 그의 죄를 성토하는 것은 모두 사람들의 이목에 숨길 수 없이 환희 드러난 것에 의거한 것이니, 이야말로 시비를 만세 뒤에까지 바르게 하려는 목적에서 한 것일 뿐 애당초 숨겨진 사특함을 찾아내어 실정 밖의 형률을 가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유생의 도리는 다만 학문을 닦고 글을 읽을 뿐이지 조정의 시비는 간여할 바가 아니다. 내 뜻을 알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8책 14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51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
- [註 063]당고(黨錮)의 화 : 당인(黨人)으로 지목하여 금고(禁錮)하는 재앙. 동한(東漢) 환제(桓帝) 초에 주복(周福)과 방식(房植) 두 집안이 각각 당을 부식하였는데 그것이 당화의 시초였다. 뒤에 환관이 전권하자, 진번(陳蕃)·이응(李膺) 등이 환관을 미워하였는데 환관의 무고로 이응 등 2백여 인이 당인으로 지목되어 수금되었으며 뒤에 풀려나기는 하였으나 종신토록 금고되었다. 《후한서(後漢書)》 권67 당고열전(黨錮列傳).
- [註 064]
위학(僞學)의 금령 : 송 영종(宋寧宗) 때 간신 한탁주(韓侘胄)가 전횡하며 도학(道學)을 지척하여 위학(僞學)이라 하고 조령(詔令)을 내려 엄금하도록 청하였는데, 주희(朱熹) 등이 죄를 얻어 선류(善類)가 거의 없어졌다. 《송사(宋史)》 권37 영종(寧宗). - [註 064]
○庚子/儒生韓孝祥等十餘人上疏曰:
伏以, 公論之在天下, 猶水之在地中, 未嘗一日無也。 不在朝廷, 則在委巷, 不在委巷, 則在後世, 亦理所然也。 臣等伏見, 亡臣成渾, 以名世宏儒, 服訓家庭, 學問之功, 踐履之實, 爲士林標的, 而不測之名, 遽加於旣骨之後。 以殿下好賢之誠, 亦不免廷議之所撓, 削職之命, 終下於累靳之後。 如是謂公論之行於朝廷可乎? 公論旣不行於朝廷, 而委巷之人, 終無一言, 則是使公論, 歸於後世, 臣等竊痛焉。 自古害士類, 而空人國者, 必曰黨。 慘矣, 黨之名也! 黨錮之禍, 僞學之禁, 在古, 而班班可見。 豈意聖明之下, 妨賢冒嫉之輩, 亦以此爲網打士林之計也? 網打士林, 非罪渾則不可, 而罪渾, 必以鄭澈爲言。 臣等實不知澈之罪何許, 而旣罪其身, 又及於相識也? 渾與澈, 生竝一時, 分有同閈, 渾常責澈之非, 而取澈之長, 澈亦慕渾之人, 而服渾之義。 渾之於澈, 豈曰非所交乎? 與澈爲交, 而目之以奸黨, 此國是之所以顚倒, 而輿情之所以憤鬱也。 尤可痛者, 壬辰之變, 起於倉卒, 而去邠之日, 車駕蒼黃, 淸道之令, 不遑於遠邇, 而渾家在僻巷, 去大路二十里, 則此必急遽之際, 勢有所不及, 而臨亂後君之說, 職此而由焉。 臣等不暇論其迹, 而先論其心可乎? 渾於其親, 家行素著, 平生心行, 不愧於古人, 則豈有臨亂後君, 而負所學之理哉? 情不暴白, 罪實黯昧, 臣等竊痛焉。 大抵儒者, 國家之元氣也。 儒道之興衰, 而國以之治亂。 近者人心陷溺, 士習澆薄, 而有一宏儒, 亦陷於罪苦之中, 士氣摧沮, 儒林增痛。 於殿下崇儒重道之心, 何? 臣等不避時諱, 冒瀆嚴威, 不敢以負殿下, 其亦不自量也。 殿下若不以言微而忽之, 則國家幸甚。
答曰: "爾等雖因徒黨之救渾, 有此陳疏, 而其交結姦兇之狀, 則爾等亦不能掩焉。 然則爾等之說, 不攻而自破, 欲蓋而彌彰者也。 至以渾爲宏儒, 何其辱哉? 儒之名稱, 固亦非一, 設使渾粗習章句, 目之以儒, 旣合姦兇爲一體, 視君父如弊屣, 終乃導厥君, 乞降讎賊, 則是乃楊、墨之類也。 能言拒楊、墨者, 聖人之徒也。 今朝廷之討其罪者, 皆據其已著之情狀, 在人耳目, 昭不可掩者, 正所以正是非於萬世, 初非拘摘隱慝, 加之以情外之律也。 大抵儒生之道, 但當藏修讀書而已, 朝廷之是非, 非所當預。 其知予意。"
- 【태백산사고본】 88책 14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51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