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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46권, 선조 35년 2월 15일 무인 9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헌부가 은기 등에 대해 아뢰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시장 백성들이 호소하는 정상을 가지고 극진히 논열하였는데 어제 받은 성상의 비답에 간곡한 교유(敎諭)가 지극하셨습니다. 다만 지금 시장 백성은 이미 재력이 없어 무역에 힘겨우므로 허다한 은자를 장만해낼 길이 없으니, 반드시 책임지우려 하면 장차 독촉하여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유망(流亡)하여 거의 다 흩어질 것입니다. 서울은 나라의 근본인데 시장 백성이 보전할 수 없게 되면 외방에서 누가 백성을 애절히 보살피는 성상의 인정(仁政)을 알겠습니까. 지금 이른바 오정배 장대(五呈杯長臺)가 과연 상께서 조사와 마주 대할 때 두목이 연청(宴廳)에 들어와 술 마실 때에 쓰는 것이라면 유기나 사기로 대용하는 것은 사실 미안합니다. 만일 전부 백금으로 쓰지 않고 도은(鍍銀)으로 쓰면 들어가는 은자가 이처럼 많지 않을 것으로, 시장 백성들이 반드시 일분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두목청의 향례(享禮)에 소용되는 그릇을 도은으로 대용할 것으로 해사로 하여금 다시 마련하게 하소서.

정철은 천하의 간흉인데, 성혼정철과 교분이 깊고 정이 친밀하여 한 몸이 되었으니 모든 모의에 참여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경인년 무렵에 정철이 중외에 통문을 내어 쌀과 포목을 수합하여 성혼의 아비 수침(守深)의 청송당(聽松堂)의 옛터에 큰 집 한 채를 지어놓고는 정철이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날마다 모여서 성혼의 지휘를 들으며 흉모를 자행하였으니, 성혼은 곧 정철의 모주(謀主)입니다. 또 신묘년044) 무렵에 정철강계(江界)로 귀양갈 때는 성혼파주(坡州)로부터 송도(松都)에까지 따라가서 이틀밤을 자며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임진년에 적이 경성에 접근했을 때는 성혼은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하로서 경기의 하룻길 거리에 있었는데도 변란의 소식을 듣고 달려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가(大駕)가 그가 사는 곳을 지나갈 때에도 나와서 뵙지 아니하였으니, 간인에게 편당하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이에 이르러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뒤 왕세자가 이천(伊川)에 머무를 때에 성혼이 멀지 않은 곳에 피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선소(宣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끝내 오지 않았고, 성천(成川)으로 이주(移駐)할 때에야 맨 나중에 왔습니다. 왕세자가 북쪽에 있는 적이 장차 장치(獐峙)를 넘어온다는 말을 듣고 용강(龍岡)으로 급히 옮겨가니, 성혼은 앞서거나 뒤쳐지거나 하여 모시고 가지 아니하다가 용강기성(箕城)의 적에 가깝다 하여 지레 의주로 향해 갔습니다. 당시 대신이 선인(善人)은 천지의 기강이라 하여 승질(陞秩)시키기를 계청하였는데 선인의 도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까. 이미 죽었다 하여 그 죄악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성혼의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소서.

어제 삼성 교좌(三省交坐)할 때에 위관(委官)이하가 일제히 모였는데 문사 낭청(問事郞廳) 등이 병을 핑계하고 오지 않으므로 부득이 다른 관원으로 개정하여 임시해서 일이 전도되게 하였으니, 매우 잘못 되었습니다. 추고를 명하소서.

국가에서 대간을 대우하는 체모가 매우 중대하므로 비록 봉명(奉命)하여 외지에 있는 신하라도 만일 대관을 제수하면 계청하여 불러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전일 김광엽(金光燁)은 일찍이 체찰부(體察府)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므로 남변(南邊)의 형세를 갖추 알고 있을 것이니 지평을 체차하는 것은 그대도 가합니다. 그러나 지금 지평 강홍립(姜弘立)은 종사관으로 계하한 지 오래지 않아 곧 본직045) 에 제수 하였는데 중요한 바가 본직에 있으니, 강홍립의 종사 관직을 개차하소서."

하니, 양사에 답하기를,

"성혼에 관한 일은 조정에서 시비가 올바로 가려졌으니 삭탈 관직할 필요가 없다. 은기(銀器)에 관한 일과 문사 낭청의 추고에 관한 일 및 강홍립을 개차하는 일은 윤허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8책 14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46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외교-명(明) / 식생활(食生活)

○憲府啓曰: "臣等將市民等號訴之狀, 論列已盡。 昨承聖批, 丁寧敎諭, 至矣盡矣。 但此時市民, 旣無恒産, 困於貿易, 許多銀子, 辦出無路。 必欲責之, 則將加督促, 而孑遺之民, 流亡殆盡。 京城, 國本。 市廛之民, 至於不保, 則外方孰知聖上如傷之仁哉? 今此所謂五呈杯、長臺等, 果是詔使相對, 頭目入宴廳時所用, 則代以鍮沙, 誠爲未安。 若不全用白金, 以鍍銀用之, 則所入銀子, 不至如許之多, 而市民等, 必蒙一分之惠矣。 請頭目廳享禮所用器皿, 代以鍍銀事, 令該司更爲(磨諫)。〔磨鍊〕 鄭澈, 千古之奸兇, 而成渾, 交深情密, 合爲一身, 凡所謀議, 無不與知。 往在庚寅年間, 乃出文中外, 收合米布, 於守琛聽松堂舊基, 搆一廈屋, 而率其徒黨, 逐日聚會, 聽指揮, 恣行胸臆, 則之謀主也。 且辛卯年間, 鄭澈竄謫江界, 則坡州, 追至松都, 信宿敍別而還。 及壬辰年, 賊逼京城, 則以宰列之臣, 在畿甸一日之程, 非徒聞變不赴, 當大駕經過其居之時, 亦不出覲。 其黨奸後君之罪, 至此而無所逃矣。 厥後王世子, 駐伊川之時, 聞避亂於不遠之地, 宣召非一, 而竟不來赴, 及其移駐成川, 最後始來。 旋聞北賊, 將踰獐峙, 王世子急移龍岡, 則乃或先或後, 不爲陪行, 以龍岡近於箕城之賊, 徑向義州。 當時大臣, 乃以善人, 天地之紀, 啓請陞秩。 善人之道, 固如是乎? 不可以已死而貰其罪惡。 成渾官爵, 請命削奪。 昨日三省交坐時, 委官以下齊會, 問事郞廳等, 稱病不來, 不得已改以他員, 致令臨時顚倒, 至爲非矣。 請命推考。 國家待臺諫之體貌甚重, 故雖已奉命在外之臣, 若授臺官, 啓請召來, 例也。 頃日金光燁, 則曾爲體府從事, 備諳南邊形勢, 持平遞差, 猶或可也, 今者持平姜弘立, 則從事官啓下未久, 而卽授本職。 所重在此, 請姜弘立, 從事官改差。" 答兩司曰: "成渾事, 朝廷之上, 是非歸正, 不須削奪。 銀器事、推考事、改差事, 允。"


  • 【태백산사고본】 88책 14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46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외교-명(明) / 식생활(食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