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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46권, 선조 35년 2월 3일 병인 3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대마도에 보낼 서찰 등에 관한 내용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마도에 사람을 보낼 때에 유정(惟政)의 이름으로 서찰을 만들어 보낼 것으로 이미 마련하여 계하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일은 비록 십분 비밀스럽게 처리하더라도 으레 드러나게 됩니다. 유정은 지난해에 부산에 있으면서 성을 쌓았고, 이제는 또 하양현(河陽縣) 산사(山寺)에 있습니다. 만일 데리고 가는 격군(格軍) 등이 조신(調信)·박수영(朴守榮)의 무리에게 매수당하여 실정을 드러내 말하면 사기(事機)가 염려스럽습니다. 지금 유정사승(師僧)020) 의 이름으로 서찰을 만들고 김효순(金孝舜)의 무리들도 또한 군문(軍門)의 사후 역관(伺候譯官)으로 일컬어서, 변장(邊將) 유형(柳珩)·이운룡(李雲龍)의 무리들조차도 이 일이 거짓이 없는 진실임을 믿게 한 뒤에 저들에게 들어가야 말이 새어나가는 염려가 없을 것이고, 또 다른날 유정이 적추(賊酋)를 볼 때의 조어(措語)도 마치 그 스승의 지휘를 받아서 한 것처럼 하면 이 또한 한층 더 좋을 것이며, 계책을 시행하는 데에도 편당할 듯합니다. 서찰의 사연을 다시 마련하여 아룁니다."

하였는데, 그 서찰은 다음과 같다.

"노석(老釋)은 본디 오대산(五臺山) 사람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곧 조인(祖印)을 찾아 중국에 들어가 영원 대사(靈元大師)의 의발(衣鉢)을 얻어 돌아와서 묘향산(妙香山)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지난 경인년021) 가을에 밤에 천상(天象)을 보니 동방에 병화(兵火)의 기운이 있는데 매우 참혹하므로 이곳을 피해 중국으로 돌아가 정처없이 구름처럼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동남 지방의 중생이 도탄에 허덕이는 것을 생각하고 가련히 여겨 세속을 구제할 뜻을 두었습니다. 마침 천태산(天台山)속에서 옥급 비서(玉笈秘書)를 얻었는데 말이 사뭇 기이하여 흔연히 석장(錫杖)을 짚고 동쪽으로 왔습니다. 요양(遼陽)에 이르러 경략(經略) 고 노야(顧老爺)022) 의 초빙을 받고 그대로 그 막중(幕中)에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 유 총부(劉摠府)023)팔거(八莒)에 군사를 주둔하고 군문에 게청(揭請)하여 나로 하여금 청정(淸正)에게 가서 타이르게 하였습니다. 노석이 생각하기를 ‘사람을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게 하고 분란을 풀고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고, 명령을 받들어 갔더니, 청정이 노석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마침내 도산(島山) 싸움에서 패배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들으니,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선조 무덤이 본국 동래(東萊) 경내에 있다 하였고 그 좌이(佐貳) 유천(柳川)이 본국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 정의가 반드시 박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그와 한번 담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 총병(劉摠兵)이 바야흐로 심 유격(沈遊擊)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노석이 스스로 이루기 어려워서 그만두었습니다. 그 뒤 일본이 책사(冊使)에게 무례히 굴므로 중국 조정에서 또 문죄(問罪)하는 군사를 대대적으로 출동하였습니다. 이에 군문(軍門) 형 노야(邢老爺)024) 가 동방의 일을 전담하니 사람들이 모두 심 유격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만일 귀도(貴島)가 하늘에 사무치는 성의가 없었다면 누가 귀국을 위하여 좋은 말을 하려 하겠습니까.

노석이 매양 숙원을 생각하여 항상 말하기를 ‘형 노야가 비록 화의를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나 비서(祕書)에 「헤어졌다가 다시 합한다」는 말이 있으니 세상 일은 운수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에 본국에 족하(足下)의 서찰을 형 군문에 전보(轉報)하였는데, 노석이 족하의 성의를 갖추 알고, 또한 피차가 의논하지 않고도 뜻이 같은 것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지금 만 노야(萬老爺)025)형 노야의 대임으로 승진하여 판부(判府)의 소임을 맡았는데, 족하들이 하는 일이 과연 성신(誠信)에서 나온 것이라면 요량하여 조처하려고 합니다. 이 의도를 깊이 살펴 잘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차인(差人)을 보내어 정의를 갖추 이르는 바이니, 족하의 의사가 과연 노석의 의사와 어긋나지 않는다면 차인이 돌아올 적에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일이 만일 잘되면 뒷날 노석이 족하와 면대하여 강구해서 두 나라를 화평시켜 함께 성명(盛名)을 후세에 전하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 【태백산사고본】 88책 146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38면
  • 【분류】
    정론(政論)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 [註 020]
    사승(師僧) : 서산 대사(西山大師)를 가리킴.
  • [註 021]
    경인년 : 1590 선조 23년.
  • [註 022]
    고 노야(顧老爺) : 고양겸(顧養謙).
  • [註 023]
    유 총부(劉摠府) : 유정(劉綎).
  • [註 024]
    형 노야(邢老爺) : 형개(邢玠).
  • [註 025]
    만 노야(萬老爺) : 만세덕(萬世德).

○備邊司啓曰: "馬島遣人時, 以惟政之名, 爲書齎送事, 已爲磨鍊啓下矣, 我國之事, 雖十分秘密處之, 例見透露。 惟政上年在釜山築城, 今又方在河陽縣山寺。 萬一帶去格軍等, 被調信朴守榮輩所賣, 而露出實情, 則機事可虞。 今以惟政師僧之名爲書, 而金孝舜輩, 亦稱爲軍門伺候譯官, 雖邊將柳珩李雲龍輩, 亦信此事眞實無假, 然後入彼中, 可無透言之慮。 且他日, 惟政見賊酋時措語, 有若承其師之指揮而爲之者, 然則是又出一層也。 其於行計, 亦似便當, 書辭更爲磨鍊以啓。" 其書曰: "老釋, 本五臺山人, 稚少出家, 便求祖印, 轉入中國, 得靈元大師衣鉢, 而還栖于妙香山。 往在庚寅秋, 夜觀天象, 東方有兵氣甚酷, 避之西歸, 雲遊無定, 私念東南衆生塗炭, 悶然有濟俗之意。 適於天台山中, 得《玉笈秘書》, 語頗奇異, 忻然振錫東來, 抵遼陽, 被經略顧老爺禮招, 因住其幕中。 會劉揔府住兵八莒, 揭請軍門, 令我往諭淸正。 老釋謂, 脫人苦海, 解棼息爭, 乃爲美事, 奉令前去, 則淸正不解聽老釋之言, 竟致島山之厄。 那時得聞對馬島主先墓, 在本國東萊境, 其佐貳柳川, 厚被本國之恩, 情義必不薄矣, 欲與之一談, 而劉摠府方與沈遊擊有隙, 老釋難自致而止矣。 其後, 日本無禮於冊使, 而中朝又大發問罪之兵。 於是, 軍門邢老爺, 專管東事, 人皆以沈遊擊爲戒。 若非貴島有格天之誠, 則誰肯爲下語哉? 老釋每懷宿願, 常謂邢老爺, 雖拒和甚峻, 秘書有離而復合之說, 世事終不能逃運數矣。 上年九月, 本國以足下之書, 轉報軍門, 老釋備悉足下誠款, 深喜彼此不謀而同志也。 幸今萬老爺, 代邢老爺, 陞任爲判府。 欲觀足下輩所爲, 果出於誠信, 有所裁處。 此意當審察善圖。 玆遣差人, 備諭情素。 足下之意, 果與老釋之意不違, 則人回, 詳示之。 事若可諧, 則他日老釋與足下面講, 以平兩國, 共遺盛名, 豈非幸哉?"


  • 【태백산사고본】 88책 146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38면
  • 【분류】
    정론(政論)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