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주역》을 강하고, 윤승훈·조익·김지남·이충원 등과 시국을 논하다
묘시 정각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였다. 시독관 조수익이 이괘(頤卦)를 진강하였는데 서괘(序卦)에서 양덕(養德)·양신(養身)·절무(切務)까지 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윤승훈(尹承勳)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은가(恩暇)를 받아 양주에 가서 소분(掃墳)할 때 경차관 이경운(李卿雲)이 양전(量田)하는 일 때문에 그곳에 있으면서 타량(打量)하려 하는데 위관(委官)·서리(胥吏)와 결복(結卜)을 속인 백성이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경운이 17일이나 머물러 있으면서도 타량하는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사 송응순(宋應洵)이 매우 민망하게 여겨 매면(每面)마다 설득하는 품관(品官)을 정하여 알렸으나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령 잘못된 곳은 죄로 다스린다 하더라도 국가에 기강이 있다면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명령(命令)과 정교(政敎)는 기강에서 나오는 것인데 기강이 이와 같고야 무슨 일인들 할 수 있습니까. 외방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경중(京中)도 그러합니다. 지난 번 염근한 사람을 선발하고 대제학을 권점할 때 대신은 이른 아침부터 와서 모였는데 재신(宰臣)은 오후에야 왔습니다. 여러 번 재촉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조정이 이러하니 외방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전에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보니 매양 좌기(坐起)할 때 낭청이 일제히 오지 않았는데 오늘 갑이 칭병(稱病)하면 내일은 을이 칭병하면서 돌려가며 나오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관부(官府)의 당상(堂上)이 출입할 경우에는 낭청이 지영(祗迎)하고 지송(祗送)하는 규칙이 있는데도 난후에는 소홀히 하여 폐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육조(六曹)가 이러하니 다른 관청은 알 만합니다. 세도(世道)의 능이(陵夷)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다시 회복할 수 없고 인심도 잘못되었습니다.
경상도 같은 곳은 본디 유자(儒者)가 많기로 이름나서 지난 날 상도(上道)에는 이황(李滉)이 있어 학문을 숭상하였고, 하도에는 조식(曺植)이 있어 절의를 높였기 때문에 풍속이 볼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곳 또한 잘못되어 간다고 합니다. 지금은 향중(鄕中)에서 풍헌(風憲)을 내는데 유사(有司)에게 조금만 혐의가 있으면 모함하는 것을 일삼는가 하면 정거(停擧)시키는 일도 임의로 하고 있다 합니다. 심지어 매우 미워하는 자에게는 살자(殺字)·유자(流字)·장자(杖字)를 써놓고 사람들이 모여 권점(圈點)을 치는데 살자의 점수가 많으면 사죄(死罪)로 얽어넣는다고 합니다. 유자와 장자도 이런 규정에 의거한다고 하니, 이는 모두 국가에 기강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토주(土主)는 말할 것도 없고 관찰사나 체찰사 등의 영문(營門)까지도 모두 기찰한다고 하니, 이런 조짐을 길러서는 안 됩니다. 영남은 인심이 순후하기로 이름이 났는데도 잘못되어 가는 것이 이러합니다. 관찰사와 체찰사가 모두 멸시당하고 있으니 조정도 따라서 멸시당하게 될 것입니다. 뒷날의 걱정이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장령 조익(趙翊)이 아뢰기를,
"고(故)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은 재행(才行)으로 관에 제수되었는데 정유년에 황석 산성(黃石山城)에 들어가 수성장(守城將)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林)과 함께 지키기로 약속하였었습니다. 그러다가 적이 들어오자 사림은 정병을 거느리고 성을 버린 채 먼저 달아났으나 곽준은 두 아들 한 딸과 그곳에서 함께 죽었으므로 남방 사람들이 지금까지 탄복하고 있습니다. 감사로 하여금 정표(旌表)하여 충렬을 포장하게 하는 것이 국가가 충절을 권장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문중(門中)에는 다만 사촌의 손자만 있다고 하니 특별히 파격(破格)하여 후사(後嗣)로 세워서 충혼(忠魂)을 제사지내게 해야 합니다."
하고, 정언 김지남(金止男)은 아뢰기를,
"근일 상께서 자주 경연에 나아가 신료(臣僚)들과 말씀하실 적에 문의(文義)에 대해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신료들이 보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 문의 이외에 다시 온화한 빛으로 받아들인다면 신료들의 책려(策勵)가 모두 진달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위의(威儀)를 배양하시는 것은 부족하지 않지만 개도(開導)하는 뜻이 적기 때문에 진계(陳啓)할 일이 있어도 소회를 다 진달하지 못하는 일이 많으니, 종용히 논하여 가부(可否)를 보인다면 성덕(聖德)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상께서는 침묵이 너무 지나치시어 신하들에게 하문하는 뜻이 부족한 듯합니다."
하고, 특진관 이충원(李忠元)은 아뢰기를,
"오늘 이괘(頣卦)를 강론하셨습니다. 상께서는 덕을 배양하는 것을 제일의 공부로 삼으시어 덕을 배양하여 훌륭한 자를 배양하는 데까지 미쳐야 하고, 훌륭한 자를 배양하는 이외에 군대를 양성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10년 동안 병패(兵敗)한 나머지에 처해 있지만 어찌 인력이야 모자라겠습니까. 다만 군병의 설시(設施)를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군병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한가히 노는 자가 많습니다. 소신의 생각에는 의당 먼저 팔도에 이문(移文)하여 호패법(戶牌法)을 만들어 누락된 인정(人丁)을 모두 파악, 사천(私賤)이라도 군병이 될 만한 자는 군병에 예속시키고 그 나머지에게는 모두 세포(稅布)를 거둔다면 징수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군병을 돕는 데에 쓴다면 군대가 모양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전(大典)》에 각도의 염분(鹽盆)과 어전(漁箭)에서 곡식을 무역하여 군자(軍資)에 보충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팔도 연해에는 모두 어염(魚鹽)이 나니 이것으로 대략 군량을 수습한다면 어찌 부족하기야 하겠습니까. 옛날에도 군흥(軍興)에 대한 일이 있으면 주세(酒稅)를 독점하여 받을 때도 있었는데 더구나 응당 행해야 할 일인 데이겠습니까. 둔전(屯田)에 있어서도 시행한다고는 하나 일을 맡은 자가 힘을 다하지 않고 폐단만 끼쳐 실효가 없으니, 군대를 양성하는 일은 경장(更張)을 한 뒤에야 할 수 있습니다.
신이 근래 조보(朝報)를 보건대 노추(老酋)가 나아와서 직첩(職帖)을 받고자 한다고 하니 분명히 우리를 엿보려는 계획입니다. 2∼3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우리 나라 서변을 침범하더라도 전혀 대항할 형세가 없으니, 특별히 대신을 시켜 각별히 군대의 양성에 대한 일을 의논하여 착실히 시행하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조수익은 아뢰기를,
"윤승훈이 아뢴 내용이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옳지만 말은 그릅니다. 이른바 기강이란 모두 군상(君相)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승훈은 자신이 정승 지위에 있으니 의당 기강을 확립시켜야 할 것인데, 성상 앞에서 폐단만을 진달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직위도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속담에 전하기를 ‘황희(黃喜)가 정승이 되고 김종서(金宗瑞)가 판서가 되어 있을 적에 일 때문에 종서에게 뜰에 내려가 조목(朝目)을 받게 하였다.’고 하니, 정승이 된 자가 아랫 재상으로 하여금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함은 모두 삼공(三公)이 검칙하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다. 조정에 기강이 있은 뒤에 외방에도 있게 되는 것인데 지금 하관(下官)은 상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인은 관원을 두려워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염피(厭避)하는 마음이 있으면 즉시 정고(呈告)하여 이것이 조보(朝報)에 기록되어 나오는데 없는 날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가 기강이 없어 그런 것입니다. 이충원이 근래 양성하는 일을 아뢰었는데 신도 소회가 있는 바 성공되기 어려운 줄을 알지만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 훈련 도감이 보인(保人)을 주는 한 가지 일을 해가 지나도록 조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감의 군사 숫자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많아도 3천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한 장관(將官)이 거느리는 군사도 이같이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인을 주지 못하니 외방 군사야 어떻게 모두 줄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에 10여 만의 군사가 없고서야 어떻게 모양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군사가 많으면 보인으로 주는 정부(丁夫)도 따라서 많아지게 되는데 지금 있는 한정(閑丁)들을 모두 쇄출해 낸다고 하더라도 충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소신의 우견(愚見)에는 사천법(私賤法)이 우리 나라에만 있습니다. 하늘이 많은 백성들을 낼 적에 부여(賦與)한 것은 균일한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귀천이 나뉘어진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법은 아무리 용렬한 자라도 선조(先祖)가 물려준 노비가 있기만 하면 편히 앉아 공후(公侯)의 즐거움을 누리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선유(先儒)들이 ‘정전법(井田法)은 천하가 대란(大亂)을 겪은 뒤에라야 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국세가 위기 일발의 처지여서 노비가 있는 자라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으니 중국의 법에 의거 재상 이상까지만 거느리는 가정(家丁)을 헤아려 지급하고 사천은 영원히 혁파하여 군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옛날 고려 때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둘 적에 중국 관원이 사천법을 묻고 혁파하려 하였는데 그때의 군상(君相)들이 못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용렬한 임금에 용렬한 재상의 소견이어서 의논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국운이 되돌아와 온갖 정사가 새로워지는 시기이니 전일의 잘못된 법규를 고수해서는 안 됩니다. 회복시키는 일을 어떻게 담소(談笑)하고 읍양(揖讓)하는 것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대대적인 거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변란이 발생한 지가 10년인데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외환(外患)은 없다 하더라도 내란(內亂)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더구나 노추(老酋)가 우리를 엿볼 계책을 세우고 있고 남쪽의 왜적도 다시 일어날 흔단이 있어 걱정이 많은데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다. 사시(巳時)에 파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6책 142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0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농업(農業) / 호구-호적(戶籍) / 신분-천인(賤人)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사상-유학(儒學) / 외교-야(野) / 역사-전사(前史)
○己丑/卯正, 上御別殿, 講《周易》。 侍讀官趙守翼, 進講《頤卦》, 自《頤》序卦, 止養德養身切務。 講畢, 領事尹承勳進曰: "臣受恩暇, 掃墳楊州地, 敬差官李卿雲, 以量田事, 時在其處, 方欲打量, 而委官書員及百姓之欺隱結卜者, 盡皆逃散, 卿雲留十七日, 而時未始役矣。 牧使宋應洵, 極以爲悶, 每面定開諭品官布告, 而亦不能禁矣。 假使差錯處治罪, 國家若有紀綱, 則何敢如此乎? 命令政敎, 出於紀綱。 紀綱如此, 何事能爲? 非徒外方, 京中亦然。 頃日廉謹更選及大提學圈點時, 大臣自早朝來會, 而宰臣則午後方到。 雖屢催促, 亦無奈何。 朝廷如此, 外方不須言矣。 臣前爲兵曹判書觀之, 每有坐起, 郞廳不肯齊到, 今日甲者稱病, 則明日乙者稱病, 輪回不來。 常時官府, 堂上若出入, 則郞廳有祗迎送之規, 而亂後苟簡, 盡廢不行。 六曹如此, 他各司可知矣。 世道陵夷, 如水就下, 不可復回。 且人心亦誤, 如慶尙一道, 素號多儒, 昔者上道, 則有李滉在, 以學問相尙。 下道則有曹植在, 以節義相高, 故風俗頗有可觀, 近聞亦爲誤入, 今則鄕中出風憲, 有司小有嫌怨, 以陷人爲事, 停擧等事, 任意爲之, 至於所甚惡者, 則書殺字、流字、杖字, 群會圈點, 若殺字點多, 則搆以死罪, 流字、杖字, 亦依此規云。 皆由國家無紀綱而然也。 土主則不須言, 觀察、體察等營門, 亦皆譏察云, 此漸不可長也。 嶺南頗號淳厚, 而誤入至此。 今者觀察、體察, 皆見蔑, 則朝廷必從而見輕矣, 他日之憂, 非細矣。" 掌令趙翊曰: "故安陰縣監郭䞭, 以才行拜官。 丁酉年入黃石山城, 與守城將金海府使白士霖, 約爲共守。 及賊來, 士霖率精兵, 棄城先走, 郭䞭與其二子一女, 同死其中, 南方之人, 至今嘆服。 令監司立表, 以旌忠烈, 豈非國家勵節之典乎? 且其門中, 只有四寸孫云。 特命破格立後, 以祀忠魂可也。" 正言金止男曰: "近日自上頻御經筵, 接語臣僚, 〔解得〕 文義, 則聖學高明, 臣僚固無以補益矣。 若自上文義之外, 更加雍容開納, 則臣僚策勵, 庶有盡達之路, 而養威儀, 則非不足也, 而但乏開導之意, 故雖有陳啓之事, 多有未盡所懷。 從容論說, 以示可否, 則聖德之裨益, 不小矣。 自上淵默過度, 延問臣隣之意, 似爲欠矣。" 特進官李忠元曰: "今日《頤卦》講論矣。 自上養德爲第一工夫, 養德以及養賢可也。 養賢之外, 次當養兵。 我國雖十年兵敗之餘, 豈乏人民? 但略不動念設施, 故人皆不樂爲軍, 我國閑遊者最多。 小臣之意, 當先移文八道, 爲戶牌之法, 盡得漏丁, 雖私賤, 可以爲軍者屬兵, 其餘盡皆收稅, 則所徵必不細矣。 以此皆爲助兵之資, 則庶可成形矣。 《大典》有各道鹽盆漁箭, 貿穀補軍資之規。 我國, 八道沿海, 皆出魚鹽。 若稍收拾兵糧, 亦豈至不足乎? 古者軍興, 至有榷酒沽之時。 況此應行之事乎? 至於屯田之事, 雖曰設行, 而任事者不能盡力, 只貽弊端, 而無實效。 養兵一事, 必須更張, 然後可以爲矣。 臣近見朝報, 老酋欲爲出來授職云, 顯有窺覘之計。 雖領二三千騎, 來犯我國西邊, 萬無抵敵之勢。 特令大臣, 各別論議養兵之事, 另加着實施行幸甚。" 趙守翼曰: "尹承勳所啓之辭, 其憂則是, 其言則非。 所謂紀綱, 皆出於君相。 承勳身居相位, 所當恢張紀綱可也, 但陳弊於 上前而已, 有若無位者然, 甚不可也。 俚諺相傳, 黃喜爲相, 金宗瑞爲判書, 以事下宗瑞于庭, 受朝目云。 爲政丞者, 使以下宰相, 不畏國法, 皆三公之不能檢飭而然也。 朝廷有紀綱, 然後外方有之。 今下官不畏上官, 下人不畏官員, 稍有厭避, 輒爲呈告, 書出朝報, 無日無之。 此皆無紀綱而然也。 李忠元陳養兵之事, 臣亦有所懷。 雖知其難成, 不敢不陳。 近來訓鍊都監, 以給保一事, 經歲不能爲。 都監之軍, 其數雖未詳知, 多不過三千矣。 中朝一將官所率, 亦不如此之少也, 而尙不能給, 外方軍士, 何能盡給乎? 國無十餘萬兵, 而何可以成形乎? 軍數若多, 則給保丁夫, 亦隨而多矣。 見存閑丁, 雖盡括出, 固難充給。 小臣愚意, 私賤之法, 只在我國。 天生蒸民, 賦與必均。 落地之時, 已分貴賤, 此甚無謂。 我國之規, 雖甚庸陋者, 祖先稍有奴婢, 則安坐而享公侯之樂, 安有此理? 先儒謂井田之法, 必於天下大亂後可行也。 今國勢一髮, 雖有奴婢者, 亦不敢言, 須以中原之法, 宰相以下, 量給所率家丁私賤, 永爲革罷, 爲軍可也。 昔在高麗, 置征東行省之時, 唐官問私賤之法, 欲罷之, 其時君相止之云。 此皆庸君、庸相之所見, 何足與議? 今則 國運向泰, 百度惟新之日, 不可固守前日謬規也。 恢復之事, 豈可以談笑揖讓爲之乎? 固大有爲可也, 而今變生十年, 無一可觀。 如此則雖無外患, 內亂可憂。 況老酋已生窺覘之計, 南寇亦有再肆之釁。 憂虞萬端, 而一無可恃, 極爲寒心。" 巳時罷黜。
- 【태백산사고본】 86책 142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0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농업(農業) / 호구-호적(戶籍) / 신분-천인(賤人)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사상-유학(儒學) / 외교-야(野)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