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 4월 25일 임진 11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탈출한 강사준과 여진덕 등이 일본의 내란 상황을 보고하다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하동(河東)의 교생(校生) 강사준(姜士俊)여진덕(余進德) 등의 초사(招辭)는 다음과 같다.

"대체로 적정(賊情)은 병신년부터 천재(天災)가 자주 있고 지진이 너무 심하여 공사(公私)의 가옥이 무수히 파괴되었고, 심지어는 산릉(山陵)과 천택(川澤)이 이동하고 균열되어 압살(壓殺)당한 민간과 가축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무술년 8월 18일에 평수길(平秀吉)이 병사(病死)하면서 그의 폐노(嬖奴) 석전 치부경(石田治部卿)·증전 우문승(增田右門丞)·장속 태장승(長束太臟丞) 등 3명에게 유언하기를 ‘너희는 어린 수뢰(秀賴)를 보좌하라. 나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또 내부 가강(內府家康)에게 ‘관동북(關東北) 33주(州)를 네가 진복(鎭服)시켜야 어린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 하고, 다음으로 중납언 휘언(中納言輝元)에게 ‘관서(關西)의 남쪽 30여 주에서는 네가 우두머리이니, 모름지기 나의 아들을 부탁하는 근심을 가련히 여겨 삼가 후사(後事)를 보존하도록 하라.’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가등청정(加藤淸正)과 갑비수(甲斐守) 등이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살았을 때에 석전 치부경이 권세를 잡고 자기들을 야박하게 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가강에게 아부하여 석전 치부경을 강주 좌우성(江州佐祐城)으로 내쫓았는데, 기해년 가을에 가강이 또 수뢰(秀賴)의 유부(乳父) 시전비전수(蒔田肥前守)를 가주(加州)로 내쫓고서 자신이 복견성(伏見城)으로 들어갔으며, 동년 9월에 수뢰를 문안한다는 핑계로 또다시 수뢰가 있는 대판성(大坂城)으로 들어가 그대로 웅거(雄據)하고 있으면서 군국(軍國)의 모든 일을 제맘대로 하였으므로 상하가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중납언 경승(中納言景勝)이란 자가 있는데 3주(州)를 거느린 장수로서 동북(東北) 지역에 있으면서 가강수길의 부탁을 배반한 것을 매우 싫어하여 비로소 가강을 따르지 않을 뜻을 두어 가강이 재삼 불렀으나 끝내 그에게 복속하지 않았습니다. 경자년 9월에 가강이 5∼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본진(本鎭)인 월주(越州)능등(能登) 지역에 달려가 그의 얼자(孽子) 삼하수(三河守)라는 자를 보내 5∼6만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아 경승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일곱 번 싸워 다섯 번 패하여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석전 치부경 등이 가강수길을 저버리고 국사를 제맘대로 농락하는 것을 증오하고, 병권(兵權)을 가지고서도 온유(溫柔)한 휘원(輝元)을 사모하여, 대소(大小)가 모두 휘원을 권하여 허점을 틈타 입성(入城)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증전 우문승으로 부장(副將)을 삼아 수뢰가 있는 곳에 머물도록 하고, 석전 치부경은 비전주 중납언(備前州中納言) 평수가(平秀家)소서행장(小西行長)·살마 도주(薩摩島主) 도진(島津) 등의 군대 4∼5만 병력을 거느리고서 중로병(中路兵)이 되어 미주(尾州)·농주(濃州) 지역 대원성(大垣城)으로 가서 진을 치고 장속 대장승(長束大藏丞)과 안국사(安國寺) 2인을 군총(群總)으로 삼아, 휘원(輝元)의 양자(養子) 예주 재상(藝州宰相) 수원(秀元)용장사(龍藏寺)·운주 시종(雲州侍從) 등의 4만 3천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우로병(右路兵)으로 삼아 이세주(伊勢州)로 가서 진성(津城)과 송오성(松鳥城)을 함락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가강에게 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군대를 농주(濃州)관원(關原)으로 이동시키고, 대전 형부경(大田刑部卿)이 산구인 번수(山口因幡守) 등의 7천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좌로병(左路兵)으로 삼아 월후주(越後州)에서 항전을 하였는데, 당시 가강과 같이 일을 도모한 왜장 시전비전수의 군대가 추격하였습니다. 3로의 군대가 농주 관원에서 합진(合陣)하여 가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강휘원이 이미 대판성에 입성하여 군대를 출동하여 항전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에게 붙은 8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야로 달려 농주(濃州)청원(靑原)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혹전갑비수(黑田甲斐守)란 자가, 휘원의 사위 축전주 중납언(筑前州中納言)과 휘원의 종제(從弟) 운주 시종(雲州侍從)이 속으로 휘원에게 붙으려 하지 않는 뜻이 본래부터 있음을 알고서 몰래 가강에게 내통하니, 가강이 즉시 갑비수를 시켜 반간계(反間計)를 사용하였는데, 축전주 중납언 등이 그 말을 달게 여기고 약속하기를 ‘9월 14일에 정예 기병(精銳騎兵)을 정돈해서 기습해 오면 우리는 거짓으로 3로의 선봉(先鋒)이 되었다가 되돌아서서 관원(關原)을 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과연 그 약속대로 하니 축전 중납언 등이 역시 약속대로 하여 주야로 연전(連戰)하였는데 관원의 3로병이 크게 패퇴하여 수가(秀家)와 대소 형부경(刑部卿) 등은 다 전사하고, 그 나머지도 모두 궤산(潰散)하였으며 가강은 승승장구하여 근강주(近江州) 세다교(勢多橋)에 도착하여 운주 시종(雲州侍從)이란 자를 불러 ‘너의 종형 휘원이 성문을 열고 스스로 물러가면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휘원이 속임수인 줄을 모르고 그 말을 믿고서 겁이나 성을 버리고 본진(本津)으로 물러가니 같은 달 27일에 가강이 다시 수뢰(秀賴)의 성으로 들어가 증전 우문승(增田右門丞) 등 자기를 배반했던 10여 인을 추격해서 체포하여 할복 자결하도록 하고, 또 석전 치부경(石田治部卿)평행장(平行長)·안국사(安國寺) 등 셋을 잡아다 도시(都市)를 돌면서 죄를 성토한 후 경동교(京東橋) 앞에서 효수(梟首)하였습니다. 그리고 휘원에게 협박하기를 ‘네 죄는 의당 죽여야 할 죄이나 너의 애첩(愛妾)과 자식 수취(守就)를 볼모로 보내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니, 휘원이 그 말대로 하였습니다. 가강은 그들을 볼모로 잡고서도 또다시 휘원의 식읍(食邑) 8주 중에 6주를 빼앗고 협박하여 중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경승(景勝)은 군대가 매우 강성하여 그 주변의 적추(賊酋) 6∼7인이 그에게 붙었고, 가강의 얼자(孽子) 삼하수(三河守)란 자도 역시 제 아비를 배반하고 경승에게 합세하였는데, 경승은 눈이 녹기를 기다려 대대적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하므로 이는 가강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며, 또 토좌 시종(土佐侍從)이란 자가 남경로(南京路)에 있는데, 가강에게 붙지 아니하고 있으며, 살마 시종 도진(薩摩侍從島津)이란 자는 휘원과 같은 무리인데 가강이 지난 10월에 그의 손자 사위인 청정(淸正)으로 장수를 삼아 4만 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도진(島津)과 싸우도록 하였으나 네 번 싸워 모두 패하자 군사를 퇴각시키고, 강화(講和)를 요청하였으나 도진이 병선(兵船) 70여 척을 준비해서 중국으로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친다고 합니다. 적의 속셈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도진가강과 서로 대치하여 변란을 대처하고 있으면서 필시 가강이 오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중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의지(平義智)가 우리가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이를 빙자하여 강화를 이루어 보려고 즉시 가강에게 의논하니, 가강이 허락하였습니다. 이어 강화를 요청하는 글을 지었는데, 의지가 거짓으로 말하기를 ‘지난 경자년081)강항(姜沆)을 내보내고, 포로로 잡혀온 사람을 많이 내보냈는데도 아직까지 강화를 허락할 의사가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남충원(南忠元)정창세(鄭昌世) 등 두 사람만 보내고 강화가 결정된 뒤에 포로들을 전부 돌려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의지는 지금 왜경(倭京)인 대판에 있는데, 가신(家臣) 유천하총(柳川下摠)을 시켜 청산 태수(靑山太守) 【남충원(南忠元)으로, 상의 얼매부(孽妹夫)이다. 】 등을 데리고 2월 29일 대마도로 내려오도록 하여 곧 나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임진년의 병화(兵禍)는 의지(義智)가 빚어낸 것으로 우리 나라의 허실(虛實)을 자세하게 말하여 위급한 변란을 일으켰다고 하기에 우리들이 ‘지난날 배은 망덕하고 군사를 청하여 침략했으니, 지금 아무리 강화하고자 해도 우리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의지의 휘하(麾下)가 말하기를 ‘전일 조선과 강화를 요구할 때는 땅을 분할해 줄 것을 요구했었지만 지금은 땅 분할 문제는 그만두고 교린(交隣)하여 상선(商船)만 서로 왕래하게 하자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강사준 등의 공초를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뒤를 이어 돌아온 사람들의 공초도 대개 같으니, 모두가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천도(天道)는 악한 짓을 하는 자에게 재앙을 내린다는 이치가 역시 거짓이 아니므로, 여기에 갖추어 기록한 것이다. 】


  • 【태백산사고본】 83책 13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237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왜(倭)

○被擄走回人河東校生姜士俊余進德等招內, "大槪賊情, 則自丙申, 天殃頻及, 地震太甚, 公私家舍, 無數破頹, 至於山陵川澤之移裂, 民物犬馬之壓殺, 不能盡記也。 戊戌八月十八日, 平秀吉病死, 遺言其嬖奴石田治部卿。 增田右門丞長束太藏丞三者曰: ‘汝須輔佐弱兒秀頼, 勿負予言。’ 又令內府家康者, 關東三十三州, 惟汝能鎭服, 可保弱兒云, 次敎中納言輝元者曰: ‘關西三十餘州, 汝可爲首, 須憐我托孤之憫, 謹保後事。’ 云。 同年冬, 淸正甲裴守等, 深惡石田治部卿, 在秀吉生時, 用事薄己之事, 阿附家康, 放逐石田治部卿于江州 佐祐城, 而己亥年夏, 家康又逐秀頼乳父蒔田 肥前州加州, 因自入伏見城, 同年九月, 托以問安秀賴, 又自入秀頼所居(大坂城)〔大阪城〕 , 仍爲雄據, 專擅軍國庶事, 上下離心。 有中納言景勝者, 領三州將也。 在東北隅, 深憚家康秀吉, 始有不附之意, 家康再三招致, 終不歸服, 庚子九月, 家康率五六萬兵, 馳到其本鎭越州 能登地, 乃遣其孽子三河守者, 領兵五六萬, 爲先鋒往攻景勝, 七戰五敗, 更不得下手之際, 石田治部卿等, 惡家康秀吉, 而擅弄國事, 慕輝元有兵權而溫柔, 大小共勸輝元乘虛入城, 仍以增田右門丞爲副, 留秀頼之居, 而石田治部卿, 領備前州中納言平秀家小西行長薩摩島島津等軍四五萬兵, 爲中路兵, 往陣于海州濃州大恒城, 長束大藏丞及安國寺兩者, 爲群總, 領輝元養子藝州宰相秀元龍藏寺 雲州侍從等軍四萬三千, 爲右路兵, 往伊勢州, 陷破津城松塢城, 以附家康之故也。 移兵濃州 關原, 大田刑部卿, 領山口玄蕃守等軍七千, 爲左路兵, 拒戰于越後州家康同謀 蒔田 前州守兵追逐, 而三路兵, 合陣于濃州 關原, 以待家康之來, 而家康輝元已入大坂城, 發兵拒戰之言, 領親附八萬餘兵, 晝夜馳至濃州靑原。 于時, 有黑田 甲裴守, 素知輝元之壻筑前州中納言及輝元從弟雲州侍從者, 內有不肯附輝元之意, 潛言家康家康卽令甲裴守, 乃縱反間, 筑前州中納言等, 甘聽其言, 因約以九月十四日, 整齊精騎, 出其不意, 則我輩陽爲三路先鋒, 而反衝關原云。 家康果如其言, 筑前中納言等, 亦如其約, 日夜連戰, 關原三路之兵, 大敗退北, 秀家大小刑部卿等, 皆戰死, 其餘皆潰散。 家康乘勝長驅, 至近江州 勢多橋, 招語雲州侍從者曰: ‘汝從兄輝元, 開城自退, 則可免其死’ 云, 輝元誤信其詐, 棄城㤼退於本津, 同月二十七日, 家康再入秀頼城中, 追捕增田右門丞等叛己者十餘人, 脅令刳腹授首, 而又捉石田部卿平行長安國寺三者, 以徇都市, 梟首于京東橋頭, 且㤼輝元曰: ‘汝罪當死, 然以汝愛妾及子秀就爲質, 則可免’, 輝元如其言。 家康旣受其質, 又奪輝元食邑八州中六州, 而㤼使爲僧也。 景勝兵勢大熾, 在其隣賊酋來附者, 幾至六七人, 而家康之孽子三河守者, 亦背其父, 且合景勝、而景勝待其雪消長驅云云, 此乃家康之所大憂也。 又有土佐侍從者, 在南京路, 不附家康, 且薩摩侍從島津者, 乃輝元之黨也。 家康去十月之間, 乃令其孫壻淸正爲將, 領四萬餘兵, 往戰于島津, 四合皆敗, 退兵講和, 而島津不肯, 故時未決和也。 風聞則島津治兵船七十餘隻, 聲言入云。 賊情雖未逆料, 愁島津方與家康相持待變, 必欲用於家康之來, 而假稱入也。 對馬島平義智, 漏聽我等之思歸, 欲憑請成, 卽議于家康家康乃許, 因裁請和書。 義智陽言曰: ‘今庚子年, 出送姜沆, 被俘人物, 亦多出送, 而尙無許和之意。今則只送南忠元鄭昌世等二人, 定和然後, (掃)〔歸〕 送被擄人云云。’ 義智, 時在大坂, 而令家臣柳川下揔, 領靑山太守 【南忠元, 上孽妹夫也。】 等, 二月二十九日, 下來于對馬島, 未幾出來云。 且聞壬辰之禍, 釀成於義智, 詳言我國虛實, 以致孔棘云, 故我等曰: ‘前者背恩忘德, 請兵入寇, 今雖欲和, 我朝必不許矣。’ 義智麾下曰: ‘前在朝鮮求和之日, 欲求割地, 今則不顧割地, 只欲交隣, 通商賈之船云云。’" 【姜士俊等之招, 雖不可盡信, 而從後逃還人之所招, 大槪一樣, 則不可謂虛爲不實, 而天道禍淫之理, 亦不可誣也, 故備錄之。】


  • 【태백산사고본】 83책 13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237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