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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36권, 선조 34년 4월 25일 임진 6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황제가 파주 양응룡의 반란을 토벌한 내용의 조서를 보내다

상이 조서(詔書)를 맞이한 뒤에 먼저 태평관(太平館)으로 나아가 막차에 들어갔다. 조서가 도착하니 상이 나가 맞이하고 배례(拜禮)를 행하였다. 조서를 다 읽고 나서 【조서는 아래에 보인다. 】 상이 의식대로 배례를 행하였다. 상이 재조관(䝴詔官) 두양신(杜良臣)과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원로에 오시느라 대인(大人)의 건강이 어떠합니까? 피곤하시지 않으십니까?"

하니, 두양신이 말하기를,

"조정의 큰 경사로 인하여 나오는데 무슨 피곤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일로(一路)가 잔파되어 아마 접대를 잘 해드리지 못하였을 것이니, 미안합니다."

하니, 두양신이 말하기를,

"좋았습니다. 국왕의 은덕을 많이 입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전일에 나오고 이번에 또 나오시니, 이 또한 황은(皇恩)이 망극합니다."

하니, 두양신이 말하기를,

"매우 감사합니다."

하였다.

황제의 조서는 다음과 같다.

"짐은 역대의 제업(帝業)을 이어받고 열성(列聖)의 법도를 받들어 모든 사람과 같이 살고자 하는 덕을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 그런데 8년 이래로 잠깐 군사를 출동한 일이 있었으나 천지(天地)·묘사(廟社)의 신령과 장상(將相)·신민(臣民)의 힘에 의하여 내외의 적을 물리침으로써 국위(國威)를 손상함이 없었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 너그럽게 타일러도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고 스스로 멸망의 길에 드니, 짐은 매우 민망히 여겨 즐겁지 못하였다.

이제 이 파주(播州)는 예로부터 양씨(楊氏)가 오랑캐의 군장(君長)으로서 우리의 문물을 받아 자손을 번성시켜 온 지가 오래이니 보살펴준 묘정(廟庭)의 은혜가 참으로 깊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몹쓸 자손 양응룡(楊應龍)이라는 자는 잔인 무도하고 대역 부도(大逆不道)함으로써, 그의 폐첩(嬖妾)이 처(妻)를 살해하도록 하는가 하면 형벌을 남용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한 지역을 못살게 굴어 7성(七姓)080) 을 잔약하게 하였다. 이에 모두들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짐은 차마 주륙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 별도의 법도가 있었음을 감안하여, 법대로 시행하지 않고 사죄(死罪)를 속(贖)하여 매우 큰 덕을 베풀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가 뉘우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하여, 감히 능욕하고 망령되이 거듭 틈을 엿보았다.

중경(重慶)으로 잡아왔으나 교묘히 속여 도망쳐서 마침내 제멋대로 날뛸 뜻을 결단하여 망명(亡命)한 자를 모으고 묘족(苗族)의 오랑캐와 결탁하고 선동하여, 양천(兩川)을 놀라게 하고 사해(四海)를 협박하였다. 그러나 짐은 오히려 깊이 용서하고 즉시 군사를 출동하지 않았는데, 적은 무마함을 이용하여 교만해지고 교만함을 인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안으로는 왕법(王法)을 무시하여 신하로서의 예가 없고, 밖으로는 물력(物力)을 과시하여 중국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서 미처 대비하지 못한 기강(綦江)을 엄습하고 호광(湖廣)의 길을 차단하였다.

신하로써 이러하니 그 누가 이를 참을 수가 있겠는가. 제왕의 도는 망하려는 자를 돕고, 보존하려는 자를 더욱 든든하게 해주는 것이니, 근래 동서(東西)의 일에서 보았지 않았는가. 이에 한 번 군사를 수고롭게 하여 사방에서 군량을 징발하니, 하늘이 도와 인력(人力)이 안개처럼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촉(蜀)·초(楚)·검(黔)·전(滇) 등의 토병(土兵)을 출동시키고, 진(秦)·진(晉)·오(吳)·초(楚)의 숲처럼 많은 군사를 내어서, 누산(婁山)·애문(崖門)의 험한 곳을 평지와 대로처럼 달리고 미담(湄潭)·하도(河渡)의 깊은 물을 하루아침에 건너니, 역적의 무리는 쥐구멍을 찾고 그들의 위사(僞社)는 불탔으며, 그들의 소굴을 유린하니 높은 곳으로 밀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저들 스스로는 ‘백길 중첩된 관문은 만 명의 군사를 혼자서도 대적해 낼 수 있고, 곤궁한 군사 1천 명은 한판 싸움으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이는 천심이 떠나면 지리(地理)의 험함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목숨을 바쳐 싸워도 안 되니 거짓으로 항복해 왔지만 통하지 않았다. 나는 새도 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이 포위되고 여러 방면에서 일제히 공격하니 절름발이 토끼처럼 옴짝달싹도 못하였다. 돌격대가 전멸하니 북소리는 힘이 없고, 오추마(烏騅馬) 나아가지 않으니 최후의 순간이 왔다. 저 양응룡은 죄악이 극에 달하였으니, 목매어 죽은들 한 번의 죽음으로 어찌 속죄가 되겠는가, 시체를 찢고 수급(首級)을 사방에 조리돌려서 하늘의 엄한 벌을 보이고, 그의 처자와 무리 70여 인은 궐하(闕下)로 잡아와서 중죄인은 사지를 찢고 경미한 자는 자갈을 씌워 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파주에 남아 있는 자는 근처의 옥에다 가두어 유사(有司)로 하여금 다스려 보고하도록 하였다.

천 년을 지켜온 땅이 하루아침에 빈터가 되었으니, 이는 실로 제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어찌 짐의 뜻이었겠는가. 아,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대대로 버려두었는 바, 오랑캐의 군장(君長)이니 백성이 편안하면 그도 함께 편안할 것인데 함부로 살상을 하였으므로, 나는 실로 백성을 위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역시 천지가 비록 넓지만 일월(日月)은 사사로움이 없어서, 멀다고 하여 추한 것을 소홀하게 두지 않으며, 작다고 하여 악을 보존하도록 두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진실로 포학하여 강상(綱常)과 기강(紀綱)을 멸시하거나 혼란시키는 자가 있으면 짐은 용서하려고 해도 하늘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중외(中外)에 천명하는 바이니, 영토와 신민을 지닌 군주들은 이를 전감으로 삼아 각자 앞으로 경계하도록 하라.

이제 사특한 기운이 갓 사라졌으나 토벌에서 상처입은 자가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다. 전쟁이 있는 곳이면 황폐되기 마련이어서 읍리(邑里)가 쓸쓸해졌으니 고독하고 궁핍한 백성을 위하여 애통해 하는 바이다. 무릇 촉(蜀)·초(楚)·검(黔)·전(滇)은 용병(用兵)을 하였으므로, 전량(錢糧)을 더 보내고, 일체의 밀린 구실을 연기해 줄 것이며, 경미한 죄는 모두 유사(有司)가 적절하게 살펴서 견감해 주거나 용서해 줌으로써 궁핍함을 구제해 주고 막힌 것을 진작시키며, 번다하고 가혹한 것을 말끔히 제거하고 모두 새롭게 함으로써 안락한 생업을 누리도록 할 것을 중외에 포고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 【태백산사고본】 83책 136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23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註 080]
    7성(七姓) : 5사(五司)와 7성(七姓)이 소속되었었음.

○上迎詔後, 先詣大平館, 入幕次。 詔書至, 上出迎, 行拜禮。 讀詔畢, 【詔見下。】 上行拜禮如儀。 上與齎詔官杜良臣, 行相見禮。 上曰: "大人遠路出來, 起居何如, 得無勞苦?" 杜良臣曰: "以朝廷大慶事出來, 何苦之有?" 上曰: "一路殘破, 恐不能盡敬接待。 未安。" 杜良臣曰: "好矣。 多荷國王之德。" 上曰: "前日來此, 今又出來, 是亦皇恩罔極。" 杜良臣曰: "多拜。"

皇帝詔曰: "朕嗣承歷服, 式奉先猷, 欲人竝生, 庶幾不擾, 八年以來, 俄煩兵革。 賴天地廟社之靈、將相臣民之力, 內攘外却, 無損國威, 然彼皆文告不來, 自投釁鑊, 朕甚悶之, 非爲快也。 惟此播州, 故有楊氏, 爲夷長率, 受我冠裳, 子孫之仍藉有年, 廟廷之覆露良深。 夫何其末冑應龍者, 安忍無親, 大逆不道? 當其嬖寵戕嫡, 淫刑禍民, 毒痡一方, 凶殘七姓, 人皆曰可殺, 朕心不忍加誅, 因其漢官, 疆以戎索, 曲從贖死, 爲德甚弘, 而乃下愚不移, 肆行無忌, 敢爲嫚辱, 妄意薦窺, 旣逋重慶之囚, 遂決跳梁之志, 收藏亡命, 構煽苗夷, 震駭兩川, 恫疑四海。 朕(犾)〔猶〕 時覃在宥, 未卽移師, 而賊因撫成驕, 因驕成亂, 內則僭越王章, 無復人臣之禮, 外則矜詡物力, 有輕中國之心, 掩不備於恭江, 梗塗道於。 爲臣若此, 孰其堪之? 帝王之道, 推亡固存, 邇者東西之故, 胡不聞焉? 是用一勞師徒, 四徵饋餉, 天休人力, 涌霧屯雲, 發土堵之兵, 下如林之甲, 婁山崖門之隘, 平地九衢, 湄潭河渡之深, 崇朝一葦, 賊徒鼠竄? 僞社颷焚, 穴擣塗窮, 登高塞向, 伊自謂重關百仞, 可敵萬夫, 困獸千群, 堪資一戰, 豈知夫天心旣吐, 地險何憑? 死鬪未能, 詐降不可? 百道圍而飛鳥絶, 九攻合而蹇兎蹄; 突士盡而鼓聲衰, 騅歌悲而艶妻訣。 夫應龍已極惡, 就經一死何贖? 是用剉屍傳首, 龔天嚴誅, 具妻孥黨與七十餘人, 檻來闕下, 重者分裂, 輕者鉗奴, 自餘在者, 下傳近獄, 有司報治, 千年守土, 一朝丘墟。 伊誰實然? 豈朕之意? 嗚呼! 封遠矣, 代有棄置, 蠻夷君長, 人安與安, 惟虔劉無度, 予一人, 實不忍於赤子亦明。 天地雖廣, 日月無私, 穢無遠而不疏, 惡無微而可蘊。 苟有昏暴淫虐, 蔑常亂紀, 朕雖欲赦, 如天不容其明。 中外有土有臣, 視爲前車, 各戒爾後。 氣慝初消, 瘡痍未起。 師之所處, 荊棘生焉。 邑里蕭條, 哀此煢獨。 凡, 有因用兵, 加泒錢糧及一切可緩積逋, 若詿誤輕條, 竝令有司, 酌量蠲宥, 救乏振滯, 蕩滌煩苛, 咸與維新, 安生樂業。 布告中外, 俾共聞知。"


  • 【태백산사고본】 83책 136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23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