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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 4월 1일 무진 8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경상도 암행 어사 조수익이 도내 실정을 서계하다

경상도 암행 어사 조수익이 서계하였다.

"수령들의 정사에 관한 실적과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신이 충주(忠州)에서 장계(狀啓)하였고, 신이 여염에 출입하면서 보고 들은 민정(民情)과 민사(民事)를 감히 조진(條陳)합니다.

남중(南中)은 풍년이 들어 곡식이 지천이나 민심은 확고하지 못하여 울타리나 집을 단속하지 않고 한 칸의 움막에 사방을 띠풀로 막고 살면서 외구(外寇)가 오면 도망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주거가 없이 가족들을 이끌고 짐을 꾸려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자가 노상에 즐비하니 급할 때 그들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또 호서(湖西)와 기전(畿甸)의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다가 조령(鳥嶺)을 넘어 남쪽으로 오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이는 필시 영남이 풍년이 든 데다 기전과 호서는 부역이 많기 때문일 것이니, 매우 불쌍한 일입니다. 그리고 도내에 소가 귀하여 농사철이 되었는데도 백성들이 땅을 갈지 못합니다. 종종 논밭에서 소 대신 사람이 몸을 구부리고 쟁기를 끄는데 10인의 힘이 소 1마리의 힘만도 못하니, 농사가 매우 염려됩니다.

수군(水軍)은 평시에도 다른 군역(軍役)보다 가장 괴로왔는데, 난을 겪은 후로는 더욱 심합니다. 육지에 있는 수군은 배 다루는 것을 전혀 몰라 번(番)이 되면 목포(木布)를 마련하여 해변에서 포작(鮑作)077) 하는 사람을 고용해서 대립(代立)시키는데, 그 포작하는 무리들도 모두 흩어져 도망가고 없어 그 전에는 1백 호나 되던 마을이 지금은 겨우 1∼2호밖에 남지 않아 값을 배나 요구하기 때문에 당번한 수군이 금년에는 송아지를 팔아서 대고 이듬해에는 전택(田宅)을 팔아서 내야 하니 결국에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고 맙니다. 밀양(密陽)에는 항왜(降倭)가 저희끼리 한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촌민(村民)들을 불러모아 저희의 울타리로 삼고 서로 비호하면서 사는데, 관(官)에서 사람을 차송하여 그들 민가에 나가면 떼거지로 달려들어 구타하여 접근을 못하게 합니다. 도산(逃散)한 무지한 백성들이 날로 그곳으로 모여들고 있으니, 후일 그들을 무마하고 제어하는 방도가 잘못되는 날이면 필시 사건을 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닷가 변성(邊城)은 바로 가장 먼저 적과 대치하는 지역인데도 무너진 성을 수리하지 못하고, 못은 메꾸어져 평지가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울산(蔚山)의 병영(兵營)은 주장(主將)이 진수(鎭守)하는 곳인데도 성지(城池)가 무너지고 메워졌으며 문에는 문짝도 없습니다. 지금 체찰사가 성안에 있는데 사나운 짐승이 넘어들어와 인마(人馬)를 살상할까 염려하여 성 위에다가 그물을 쳐놓았으니, 그 성의 높이를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합니다. 적이 물러간 지 겨우 1년밖에 안 되어 민력이 고갈되어 수리할 겨를이 없기도 하지마는 탕패되었다는 것을 핑계로 하여 점점 방심해져 힘쓰지 않게 되면 을묘년과 같은 미세한 변환(邊患)이 있어라도 적을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 민력으로는 곧바로 힘든 역사(役事)를 해내지는 못하겠지만, 이러한 점에 유의해서 미리 계획을 세워 민력이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또 동해(東海) 일대의 촌락은 쓸쓸한데,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국사의 중대함은 생각하지 않고 효경전(孝敬殿)해의(海衣)078) 를 진상하는 것에 대해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역시 민정(民情)에 관계되기에 황공하오나 감히 아룁니다."


  • 【태백산사고본】 83책 13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227면
  • 【분류】
    행정(行政)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농업(農業) / 수산업(水産業) / 호구(戶口)

  • [註 077]
    포작(鮑作) : 어포(魚鮑)를 떠서 말림.
  • [註 078]
    해의(海衣) : 김.

慶尙道暗行御史趙守翼, 書啓: "守令政迹賢否, 臣在忠州, 已爲狀啓矣, 抑臣出入村間, 民情民事, 有所聞見, 敢此條陳。 南中歲登穀賤, 而民心不固, 籬居不治, 一間之廬, 四壁障以草茅, 以爲寇至, 則去之之計, 且無定居, 東西徒徙, 扶携負戴者, 襁屬於途路。 其不可恃以爲緩急之用, 明矣。 湖西、畿(田)〔甸〕 之民, 流離轉徙, 踰鳥嶺而南者, 不知其幾。 此必嶺南豐熟, 而畿甸湖西, 賦役煩重故也。 甚可矜惻。 道內牛畜稀貴, 當此東作之時, 民不得耕, 往往畝畝中, 或秉耒傴僂, 或以人代耕, 十人功力, 不如一牛, 農事至爲可慮。 水軍自平時, 比他軍役最苦, 而亂後尤甚。 陸地水軍, 全不解操舟, 當番則責木布, 雇立海邊鮑作人, 而鮑作之輩, 亦皆散亡, 向來百戶之村, 今僅有一二戶, 索價倍重, 故今年賣犢, 明年賣田宅, 畢竟逃散而已。 密陽, 自爲一村, 招集村民, 作爲藩籬, 交相庇護, 官差過其民家, 則輒群聚(歐)〔敺〕 打, 使不得接跡, 無知逃散之人, 相率投入, 日後撫(禦)〔御〕 乖宜, 則必有生梗之患。 濱海邊城, 乃初面受敵之地, 而城頹不修, 池廢成陸, 如蔚山兵營, 乃主將鎭守之處, 而城池夷漫, 門無扉扃。 方體察使之在城中, 恐惡獸之踰入, 噉食人馬, 張網子於城上, 其城之高低可知, 誠可寒心。 賊退纔一年, 民力枯竭, 雖無暇修治, 而諉以蕩敗, 漸至玩愒, 則脫有邊患, 雖如乙卯之微細, 亦不能抵敵矣。 以今之民力, 雖不能卽擧重役, 亦當念及于是, 預爲規畫, 以待民力少紓, 恐或宜當。 東海一帶, 村落蕭條, 居民不念國事之大, 頗以孝敬殿海衣進上爲苦, 係是民情, 故惶恐敢啓。"


  • 【태백산사고본】 83책 13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227면
  • 【분류】
    행정(行政)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농업(農業) / 수산업(水産業) / 호구(戶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