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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33권,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1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체찰사 이덕형과 국방 문제 전반에 대해 논의하다

진시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겸사도 도체찰사(兼四道都體察使) 이덕형(李德馨)과 부사(副使) 한준겸(韓浚謙)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경상도로 내려가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새재[鳥嶺]길로 내려가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을 만나보고 변보(邊報)를 서둘러 통하게 할 일을 대강 조치한 다음 울산(蔚山)의 좌병영(左兵營)을 순시하고 그 길로 부산(釜山)으로 가서 주사(舟師)의 상황을 살펴보고 또 우병영(右兵營)으로 가 그곳 상황을 살펴본 후 전라 감사(全羅監司)·통제사(統制使)와 함께 남해(南海)하동(河東) 중간 지점에서 회의(會議)를 한 후 이어 그곳에 머물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 체찰사가 내려갈 때 변보에 대하여 각별한 당부를 하여 보내었는데 지금쯤 일을 다 마쳤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지금 어떻게 하였는지 알 수가 없으나 변보의 일은 매우 염려됩니다. 신이 지난 번 양 경리(楊經理)도산(島山) 역사에 종사하고 있을 때는 변보가 3일 안으로 도달되었으니, 파발(擺撥)은 꼭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쪽 지방 일은 임진년 변란 후에 흉적들이 8∼9년을 둔거(屯據)하고 있었고 정유년 재란 후에는 중국의 수군 육군이 10만 명이 또 오고 가고 머물고 하면서 민생에 많은 피해를 끼쳤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혈(膏血)이 이미 다 뽑혔습니다. 그 중 전라도가 조금 나았기 때문에 경상도 병영에서 오로지 전라도를 의지하였었는데 정유년 난리에 전라도마저 탕패(蕩敗)되었는데도 조정(朝廷)으로부터의 징책(徵責)은 예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소신이 비록 미열(迷劣)하오나 3∼4년에 걸쳐 양남(兩南)을 왕래하였기에 사정과 인심을 대강은 아는데 다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명을 받고 가기는 하나 극히 근심스럽고 절박한 심정입니다. 나라는 기강(紀綱)이 없어 모든 일에 장구한 계책이 전혀 없습니다. 양남은 국가의 근본인데 군정(軍政)·폐막(弊瘼)·보장(保障) 등의 일이 모두 일정한 규정이 없이 그렁저렁 날짜만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사(舟師)는 온 나라가 모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조치할 계책으론 별다른 방법이 없고 다만 연해(沿海) 각 고을의 모든 잡역(雜役)을 모조리 면제해주고 오직 주사에만 전념하여 세월을 끌다 보면 좋든지 싫든지 간에 무엇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주사를 마련할 길은 끝내 없습니다. 경상도는 이미 잡역을 모두 면제했는데 전라도는 지금까지도 징책을 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지난해에 그 문제를 상소하였고 이항복(李恒福)도 차자(箚子)로 논하였으나 모두 휴지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전라도의 잡역을 서둘러 면제해주어야만 비로소 주사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 이상하다. 지금 모두들 왜적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하여 변방 일들이 해이해지고 있는데 적이 오고 안 오고를 어떻게 미리 알겠는가. 마치 송(宋)나라 때 금적(金賊)이 겨우 물러가자 금방 서로 경축하던 일과 같다. 인심이 이러하니, 역시 변괴이다. 적들이 자중지란이 생겨 쉽게 발동을 못할 것이라고 하는 김대함(金大涵)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설사 자중지란이 있다 하더라도 대마도는 아주 가까워 배 한 번 타면 금방인데 건너오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우리 나라가 군대를 양성하여 방어를 잘하면 그만이고 구구히 말로만 득실(得失) 성패(成敗)를 논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나라 일이 자연적으로 이렇게 잘못되어 가고 있으니 금년이라고 적변(賊變)이 없을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30만∼50만은 그만두고 단 몇 만 명만 온다 해도 누가 당해낼 것인가. 서해도(西海道)의 한두 섬 같은 곳은 수만 병력이 금방이라도 집결할 수 있으니, 가을·겨울에는 오지 않는다는 말 역시 틀린 말이다. 우리 나라의 논의는 참으로 가소롭다. 을묘 왜변 후에는 전라도가 틀림없이 적의 침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임진년에는 적이 부산(釜山)으로부터 들어왔으니, 이것이 어찌 전례이겠는가. 육전(陸戰)에서 승리를 거두면 금방 육전에선 이길 수 있다 하고 수전(水戰)에서 승리하면 금방 수전에선 승리할 수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시속에서 말한 화살 떨어진 곳에다 과녁을 세우는 격이다. 용병(用兵)에 있어 만약 전례만을 인용한다면 매우 불가한 일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론(時論)이 이와 같으니, 부득이 수군(水軍)이라야만 왜적을 막을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전에 영상(領相)이 내려갈 때 나 또한 그렇게 말을 했다. 이기고 패하는 것은 병가(兵家)에 늘상 있는 일이다. 따라서 용병을 잘하는 자라도 혹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다. 가령 수병으로 막는다고 하나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1천 리가 넘는 연해(沿海)에 어느 곳이고 모두 방비해야 하기 때문에 병력도 곳곳에 나누어 두어야 하지만 어느 바다라고 못 건너며 어느 곳이라고 못 올 것인가. 그들이 비록 한 길로만 온다고 하더라도 꼭 이긴다고 기필할 수는 없다. 수병이 만에 하나 차질을 일으켜 적으로 하여금 뭍에 오르게 한다면 비록 용양(龍驤)의 1만 척이 바다에 떠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에 형세가 곤궁하고 힘이 다하여 막아낼 수가 없다고 한다면 모르지만 왜적이 틀림없이 경상도로 올 것이라는 말은 지나친 말이다.

왜국의 지도(地圖)를 내가 잘 안다. 제주(濟州)와 대마도의 사이에 오도(五島)가 있는데 그러한 섬들은 다른 데도 많다. 평소에 영적(零賊)들이 대부분 그곳에 살고 있는데, 그 중 한두 섬의 왜적만 침범하여 오더라도 누가 그들을 막아 내겠는가. 강진(康津)해남(海南) 사이는 물길이 두루 통하여 있으니, 어느 곳에서 변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대체로 형세가 좋지 않다. 우리같이 가난하고 작은 나라가 삼면(三面)으로 적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황해도 역시 적이 오지 않는다고 보장이 없다. 꼭 주사(舟師)라야 막아낼 수 있다고 하고 적이 꼭 경상도로 올 것이라는 말은 나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산성(山城)의 일은 힘이 부족하여 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옳지만 산성이 전혀 필요없다는 말은 잘못이다. 그 중에 어찌 지킬 만한 곳과 지킬 수 없는 곳이 없겠는가. 평지의 성은 적이 운제(雲梯)·비루(飛樓)를 이용하면 안을 엿볼 수 있다. 정유년 변란 이후 산성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자는 마치 월족(刖足)당하는 것을 보고 신발을 벗어버리는 자와 어찌 다르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말이 대개 이러하다. 당초 권율(權慄)행주(幸州)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는 산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다가 이순신(李舜臣)이 수전(水戰)으로 승전하자 그때는 또 반드시 주사라야 승리를 취할 수 있다고 하니,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싸워야 반드시 이긴다는 것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옛부터 적세(賊勢)가 어떠한가는 따질 것이 없고 우리쪽이 할 수 있는 방비(防備)만 잘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임진년에는 대적(大賊)이 부산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성상이 말씀하신 것처럼 부산이 적의 침입로의 첫머리라고 하였습니다. 대마도는 제포(齊浦)·거제(巨濟)와 서로 가깝고, 전라도와 이웃하고 있는 곳으로는 피란도(被蘭島)·살마주(薩摩州)·오도(五島) 등이 있는데 오도·살마는 농사는 힘쓰지 않고 오직 해적질만 일삼는데 조총(鳥銃)을 잘 만듭니다. 어떤 왜장이 말하기를 ‘의홍(義洪)·석만자(石蔓子)·심안도(沈安道)라는 자들이 오도·살마의 추장들인데 을묘년 변란은 살마의 왜적이 한 짓이며, 이대원(李大源)이 죽은 것은 오도의 왜적이 한 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내란(內亂)이 많이 일어나지만 해적질은 더욱 극심히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평수길(平秀吉)이 살아 있을 때는 66주(州)가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저들끼리 서로 진(鎭)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해적질하는 자들이 내란을 상관할게 뭐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춘신(春汛)이 이미 임박하여 전라도 보성(寶城) 이외에 혹 뜻밖의 경보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적은 1천∼2천 명의 군사만으로도 쳐들어 올 수 있는 데 반해 우리 나라 군대는 1만 명으로도 왜병 1천 명을 당하지 못한다. 설마 토평(討平)했다손치더라도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이길 것이라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계책으론 양장(良將)과 용사(勇士)를 얻는 것뿐이니, 언론이 아무리 좋은들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산성에 대한 일은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도산(島山)의 병영에도 방어 진지를 쌓고 많은 기계(器械)와 군량(軍糧)을 쌓아두었다가 급한 일이 있을 때면 그 성과 함께 성패를 같이하여 장졸(將卒) 모두가 안정된 뜻을 갖게 해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평소에 지키지도 못할 곳에다 진(鎭)을 쳐서 영(營)을 만들었다가 급한 때를 당해서 버리고 달아난다면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좌병영(左兵營)인 도산에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들어왔던 영이 있어서 병사(兵使) 이영(李英)이 내려갈 때 신이 지킬 만한 곳이라고 말하였더니 형세(形勢)를 보고나서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병영(右兵營)는 마산(馬山)인데 적루(賊壘)가 또한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산도 성을 쌓을 만한 곳인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소신이 마산을 가보지 않아 형세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의거할 만한 험한 곳이라면 우병사(右兵使)가 들어가 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산(釜山)에도 적의 영문이 있으니, 조련된 군대 몇 천 명으로 왜성(倭城)을 굳게 지키면 의거할 만합니다. 다만 고성(固城)·사천(泗川)·곤양(昆陽)·순천(順天) 등지에는 인가가 전연 없고 그 전면의 당포(唐浦)·사량(蛇梁) 사이까지 형편없이 비어 있어 매우 염려됩니다.

신이 호남(湖南)·영남(嶺南)을 가보니 인력(人力)만 허비한 산성들이 너무나 많았고 부득이하여 한 도의 중앙에다 장구한 계책을 위하여 설치할 곳까지 모두 버려져 있으니, 거기에 소모된 인력이 애석할 뿐만 아니라 당초의 계획 역시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형세와 힘이 모두 바닥이 나 주사(舟師)와 격군(格軍)의 식량을 변통해낼 길이 없으니 육지에다 설비하는 것은 형편이 미치지 못합니다. 만약 모처(某處)를 의거하여 계책을 정하려면 짧은 시일에는 아니되고 연차 계획으로 한다면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인심을 이미 잃었으니, 수령이 성을 지키려고 하나 백성들이 누가 즐겨 따르겠습니까. 인심을 위로한 후에야 위급할 때 함께 지킬 수 있습니다.

난리 후 10년 동안 백성들은 온갖 역사(役事)에 시달려 고혈은 이미 빠지고 목숨만 겨우 붙어 있습니다. 소신이 지난해 연해를 두루 다녀보니 백성들의 형편이 매우 가련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모든 잡역을 면제해주고 공물(貢物)까지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면 모두 감면의 혜택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손상 익하(損上益下)의 뜻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그들 마음이 조금 위안이 될 것입니다. 지금 비록 적은 물러갔으나 병영(兵營)·수영(水營)에서는 아직도 허위의 일들이 많아 민폐를 일으키고 있으니, 견제의 명령을 내려도 한 장의 휴지가 되고 말아 백성들은 실지의 혜택을 입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울에는 훈련 도감이 있을 뿐이고 군대 수도 겨우 몇 백 명인데 아직 급보(給保)하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온당치 않다. 지금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중국군 도망병이 분란을 일으키던 당시 훈련 도감의 군대만으로 호위하고 성을 지키게 하였으니, 만약 그 군대가 없었다면 병조가 값을 받고 대립(代立)시키는 군대만으로 서울을 지킬 수가 있었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근래 와서 전사(戰士)를 대우하는 방법이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무부(武夫)라면 반드시 호협하고 기개 있는 자를 골라야 하는데 어찌 그들에게 유사(儒士)와 같으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대우하는 방법이 너무 주밀하기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무사할 때는 유사를 쓰고 급할 때는 무부를 쓰라.’ 하였으니, 평일에 그들을 미리 배양(培養)해야만 급할 때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무장(武將)으로 명망을 쌓은 자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경급(警急)을 당했을 때 숫자만 채워 보낸다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족(奉足)을 주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시정(市井)의 재주 있는 무리들을 겨우 모아 연습을 시켰으므로 그때에 모두 말하기를 ‘국문(國門)도 나가기 전에 궤산(潰散)되고 말 것이다.’ 하였는데, 속오군(束伍軍)의 공은 실로 범연하지 않았습니다. 남북 방어에 있어 누차 그 공훈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속오된 지 이미 오래라서 그 중에는 정예(精銳)한 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 군대는 향곡(鄕曲)에서 소집한 사람들과 달라 각사(各司)나 혹은 시정에서 관절(關節)003) 을 받을 소지가 있으니, 그 군대를 영솔하는 자는 관절에 먹혀들지 않아야만 비로소 급보(給保)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국가가 대대적으로 군적(軍籍)을 시행하는 때가 아닌데 유독 훈련 도감이 충정(充定)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온갖 방법을 써서 빠져나가려 하니, 그 사이에 말을 만들어내는 일이 꼭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스스로 희망하는 보(保)에 있어서는 모두 이미 각도에 행이(行移)하였고 아직 보를 얻지 못한 자는 열읍(列邑)에다 관문(關文)을 보내 면향(免鄕)·면천(免賤)의 사람으로 보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일은 전적으로 한 사람에게 책임지워 사정을 완전히 배제하도록 해야 할 수 있습니다. 조탁(曺倬)은 낭청(郞廳) 중에서 가장 책임 있는 사람이고 정사호(鄭賜湖)는 당상(堂上)인데 일 처리에 매우 신밀한 사람입니다. 도망병을 체포하긴 하였으나 아직도 누락자가 많을 것이니, 도망병과 급보(給保)에 관한 일 등을 모두 이 두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겨 빨리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적으로 급보를 아직도 하지 못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미처 망정(望定)을 못한 자가 많습니다. 우리 나라는 기강이 없고 작은 공사(公事)가 많아서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훈련 도감은 항상 존속시키긴 어려운 형세이니, 일정한 규정을 두어 처리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소신이 몇 해 전에 상차(上箚)하였으나 신의 뜻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여, 도감이 말이 많기 때문에 혁파하고자 한다고 하였으니, 매우 황공하였습니다. 도감은 원래 임시 설치한 기관이니, 병조와 호조에다 전책임을 주어 중국의 제도대로 관리하게 하고 또한 1명의 대신을 시켜 그 직무를 겸대(兼帶)하게 하면 오래갈 수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뜻은 알고 있다. 내가 전일에 남북 신책군(神策軍)에 대하여 말하였다. 병조·호조에서는 자기들 맡은 분야도 다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도감의 임무까지 겸할 수 있겠는가. 설파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더라도 우선 도감은 그대로 두었다가 다음에 훈련원(訓鍊院)으로 이관하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내가 우선 두자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규모가 확정된 뒤에 다른 부서로 이속(移屬)해야 한다. 이 뜻이 어떠한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규모를 확립하기 전에 다른 부서로 이속시킨다면 허술해질 염려가 있습니다. 전일에 이원익이 변방을 채우는 일, 군대 훈련의 일 등으로 탑전(榻前)에서 명을 받고 갔다고 들었는데 그 후 들으니, 변경 천 리에 사람은 없고 우거진 풀만 하늘을 가리우고 있어 변방을 채울 만한 다른 계책이 없어 부득이 바닷가를 따라 떠도는 사람들을 추쇄(推刷)하여 입주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변방에서 내지(內地)로 들어온 사람을 추쇄한 것인가? 그 관리는 사도(四道)가 하는가, 다른 도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 일은 부득이한 일이라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자를 쇄환(刷還)하기 때문에 한 고을의 백성도 쉽게 들어가지 않아 민간이 소동스러운 듯합니다. 어떻게 다 추쇄(推刷)할 수 있겠습니까. 동래·울산·창원 등지는 조호익(曺好益)을 장수로 정하여 인(印)을 주어 소모(召募)하게 하였는데, 동래에는 이미 들어온 군사가 3백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적의 배가 정박했던 곳은 비록 식량을 대주면서 들어가라고 권하여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관에서 추쇄한다고 하면 누가 즐겨 들어가려 하겠습니까. 변방에 염분(鹽盆)·어전(魚箭) 등을 할 만한 곳이 아직도 많고 고성(固城)·사천(泗川) 등지는 토지도 비옥하니, 그곳에 들어가 사는 백성들을 5∼6년간 복호(復戶)시켜주고 관에서 모든 것을 일체 간여하지 않으며 심지어 전세(田稅)까지도 바치지 말게 하고 체찰사나 순찰사가 첩문(牒文)을 주어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하였다가 그들 생활이 다소 안정된 뒤에 군적을 만들고 토병(土兵)으로 삼는다면 유사시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변(武弁) 중에서 누가 장재(將材)인가? 통제사(統制使)를 어찌 한 사람이 오래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소신이 이미 진달(陳達)하였지만 무장(武將)은 미리 양성하여 일단 다른 곳에다 기용해서 그의 재능을 시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꼭 궐원(闕員)이 생겼을 때만 자급(資給)에 따라 의망(擬望)한다면 군정(軍政)이 다스려지지 않고 수륙(水陸)의 일이 모두 걱정스럽게 됩니다. 우선 장수다운 인재를 얻어야만 점차 수습이 될 것인데 인재가 이렇게도 없으니, 더욱 민망스럽고 염려스럽습니다.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은 육전(陸戰)에서 돌격(突擊)은 잘하는데 주사(舟師)에는 익숙지 못하여 변지 사람들이 그것을 단점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를 대신할 만한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령 체개(遞改)한다면 인재가 없다 하여 차출하지 않을 것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소신이 무술년 왜교(倭橋)에 갔을 때 권율(權慄)과 상의한 바 있었는데, 우선 수사(水使)를 시켜 통제사의 명망을 키울 만한 자가 누구인가고 여러 장수들에게 두루 물어보았더니 모두 말하기를 ‘이운룡(李雲龍)이 수전(水戰)에 익어 적당하기는 하나 다만 시골 사람으로서 발신(發身)한 지가 오래지 않아 호령(號令)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통제사로 적당한 자는 누구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만약 십분 합당한 인물이 없다면 직질(職秩)로 보아 수사가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경준(李慶濬)·이수일(李守一)은 어떤가? 경이 지금 멀리 가게 되었으니 충분히 논의하여 나로 하여금 알게 해야 한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소신이 왜교에 갔을 때 적이 물러간 것을 듣고 이수일이라면 그 뒤를 잘 수습할 것 같아서 망령되이 장계하여 우병사(右兵使)로 삼게 했는데, 마침 서 급사(徐給事)의 행차로 나국(拿鞫)하였다가 현재는 극변(極邊)에 가 있습니다. 거기가 더 소중한데 어떻게 나오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일이 중하다면 나오게 하는 것이야 뭐 어렵겠는가. 나도 일찍이 그 사람을 본 일이 있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수일이 만약 병사가 되면 우도의 인심이 만족해 할 것이니, 일찍이 좌수사로 있을 때 선치(善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경준(李慶濬)은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있으면서 몸가짐이 깨끗하였고, 무술년에 남원(南原)에 주둔하고 있을 때는 군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남방 사람들이 그가 일처리를 잘하고 군졸을 사랑한다고 일컬으니, 그 두 사람을 남방에다 쓰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다만 이경준은 배멀미를 하여 주사(舟師)에는 맞지 않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쓸 수 없으니 불행한 일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경준이 비록 주사 경력은 없지마는, 그가 재직한 곳에서 모두 현명하다고 칭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 알기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이경준·이시언(李時言)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을 때 대간(臺諫)들은 그들이 키가 작다고 논하여 태거(汰去)하였는데, 그때 웅위(雄偉)한 사람들은 모두 성공한 것이 없는 반면 논박을 당한 자는 오히려 그와 같았으니, 대체로 겉모양으로만 사람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무반 중에 나이 젊고 이름이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소신은 옛날 병판(兵判)을 지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인물들뿐입니다. 그 밖의 나이 젊은 사람들도 많기는 하지만 그들의 실적을 시험해 본 후에야 기용할 만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나 변장(邊將)을 시켜 관찰해 보면 반드시 상당한 인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하관(堂下官) 중에서도 병사가 될 만한 자를 골라 미리 양성하였다가 불차탁용(不次擢用)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무장(武將)들은 문자(文字)를 몰라 병서에 대한 지식이 없다. 왜놈들은 비록 글은 몰라도 평생 전쟁에 종사하여 할아비와 아비 때부터 서로 전수하면서 익혔기 때문에 무재(武材)가 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문자를 배우지 않기 때문에 비록 지려(智慮)는 있어도 모두 저들 같이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다. 전번에 병서(兵書)를 배워 익히도록 한 바 있는데, 밖에서 들으면 비웃을 줄 나도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오늘 배우지 않으면 내일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비록 훈상(訓上)을 정하더라도 누가 서도(書徒)가 되어 자제를 가르치듯 하겠는가. 중이 불경 외우듯 한다면 익혀질 리 없겠지만,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두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중국 장수들은 문장(文章)이 매우 좋아 오 도사(吳都司)의 게첩(揭帖)을 볼 때마다 나는 먼저 찬탄을 하게 되는데, 어쩌면 그와 같이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대책(對策) 같은 것도 그렇게 짓는다고 하던가?"

하니, 도승지 윤돈(尹暾)이 아뢰기를,

"소신이 오 도사와 직접 얘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붓을 잡으면 즉시 써내려갔습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왜적들은 병서로서 《손자(孫子)》·《오자(吳子)》·《육도(六韜)》·《삼략(三略)》을 왜말로 번역하여 읽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은 글을 전혀 모른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왜말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들 풍속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비록 노예라도 백 석(百石)에서 만 석(萬石)까지 먹게 하고, 패하면 비록 만 석을 먹던 자라도 다시 노예가 되며 저들끼리 술을 마실 때에 팔목에 상처가 있으면 싸움을 잘하는 자라 하여 먼저 마시게 하고, 등 뒤에 상처가 있으면 도망을 잘가는 자라 하여 마시지 못하도록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정(人情)이 각각 다를 뿐 아니라, 마치 우리 나라에서 동자(童子)로 글 잘하는 자를 취택하듯이 어릴 적부터 반드시 그러한 사람을 고른다고 하는데 그들 풍속은 아주 다릅니다.

금년 봄에는 대마도에서 반드시 사람을 보내와 요시라(要時羅)가 간 곳과 강화(講和)에 관하여 물을 것입니다. 지난 번에는 중국 장수가 영내에서 접대를 하였으므로 우리 나라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사(舟師) 이운룡(李雲龍)이 영솔할 배가 10척도 채 못되니 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만약 뭍에 내리면 저들이 지어둔 집이 있다고 하니, 그곳에서 접대하고 먹여야 합니까? 만약 조정의 회신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면 그 사이에 갖가지 불편한 일이 많을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작하여 하라. 그러나 상륙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상륙하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주사가 허술한데 올라가서 보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면 오랫동안 바다에만 떠 있게 하여 상륙시키지 않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변방에다 절병(浙兵) 모양처럼 꾸며 2∼3천 명 정도를 주둔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성원을 보내게 하면 좋을 듯합니다. 지금 남방의 일은 비록 능력자를 시켜 조치하더라도 반드시 몇 년 후에나 될 일인데, 더구나 신과 같은 자로서는 손을 댈 곳이 없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양계(兩界)에다 영(營)을 설치할 때 감사(監司)를 각별히 뽑았었는데, 지금은 양남(兩南)이 급하므로 감사를 골라 임명하여 오래도록 재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이 물러간 후에 양계에서 했던 예와 같이 영을 설치하라는 공사(公事)를 연전에 대간(臺諫)이 논하였으나 갑자기 도로 파기되고 말았는데, 하삼도(下三道) 감사에 있어서 예전의 공사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국가에는 논의가 많아 비록 이미 검토를 거쳐 결정한 일도 단 한 사람이 불편하게 여기면 금방 정파(停罷)하니, 그렇게 하면 양남을 수습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균(元均)이 전쟁에서 패한 후로 사람들이 그를 헐뜯고 있으나 나는 원균 같은 자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자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는 누가 한 가지 일을 잘 하면 모두 칭찬을 하고 한 가지 일을 실패하면 모두 비난한다. 원래 영웅(英雄)은 성패(成敗)를 가지고 논할 수 없다. 원균을 내가 보지는 못했으나, 당초 임진년에 이순신(李舜臣)과 마음을 함께하여 적을 칠 때 싸움이 벌어지면 반드시 앞장을 섰었으니, 그가 용감히 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한산(閑山) 싸움에서 패전한 것으로 다투어 그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그를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기 때문이다.

그의 서장(書狀)을 보면, 안골포(安骨浦)가 그 앞에 있어 금방 들어갈 형세가 못되니 육군으로 하여금 먼저 적을 몰아내게 한 다음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원수(都元帥)가 잡아들여 곤장을 치자,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과연 그가 스스로 패한 것인가?

후에 들으니, 이억기(李億祺)최호(崔湖) 등이 조정에서 빨리 들어가라고 재촉한 것을 듣고는 서로 말하기를 ‘명령을 어기면 우리 세 사람이 죽을 것이고 들어가면 나라를 욕되게 함이 작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하니, 패군한 죄에 비하면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내가 평소에 매우 온당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외부의 공론은 어떠한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외부의 공론은 모릅니다. 신이 지난해에 남방을 왕래하면서 그 고장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개는 모두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전에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로 있으면서 전쟁에 임했을 때, 사람들이 달려가지 않으면 칼로 그들을 쳤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원균 수사(元均水使)는 미련하다고 했지만, 그는 일에 임해선 강직했기 때문에 이순신을 잡아온 후 그를 임명하여 보냈습니다. 그런데 주위 제장(諸將)이 모두 이순신의 막하(幕下)여서 서로 의논하지 않아 원균의 세력이 고립되었습니다. 그때 한효순(韓孝純)이 체찰사(體察使)에게 보고하여 조치하려고 했는데 미처 못하고 원균이 패전한 것입니다. 제장들의 말은 비록 믿을 수 없으나 격군(格軍)의 말은 믿을 만도 합니다. 부산(釜山)에 가서 공격할 때 우리 나라 주사 90척이 곧바로 적을 행해 돌진하자 부지기수의 적선이 바다에 가득히 떠 오니, 우리 나라의 수효가 적은 주사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어 한산을 행해 후퇴하는데 격군들은 밤낮없이 노질하여 춘원포(春原浦)에 닿았습니다. 적군들이 밤을 이용하여 정면으로 공격해 오는 바람에 힘이 지친 나머지 갑자기 당하는 변이어서 싸움도 하지 못하고 물이 마르듯이 다 도망쳐 1명도 전사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서(陣書)》에 ‘대장(大將)이 죽으면 차장(次將)을 참수한다.’ 하였는데, 원균이 이미 싸움에 패하여 죽었으니 그 휘하들을 비록 다 죽이지는 못할지라도 사실을 밝혀 군율에 의하여 처리해야 옳다. 지금 원균의 후인(後人)으로서 고관 대작(高官大爵)이 된 자가 많은데도 그 싸움에 패한 죄를 유독 원균에만 돌린다면 원균의 본심이 후세에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구천에 있는 그의 넋도 어찌 자기 죄를 승복하여 억울하게 여김이 없겠는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근래에 군공자(軍功者)·납속자(納粟者)들이 치우치게 고통을 당합니다. 그 중 훈련정(訓鍊正)과 첨정(僉正) 이상은 군공인 경우 방수(防戌)를 면제해주거나 요역(徭役)을 감면해줍니다. 그러나 납속자인 경우는 그들이 군역(軍役)을 면제받기 위하여 재산을 모두 팔아 바쳤는데도 4품(品) 이하는 도로 군역을 하게 되어 납속을 않고도 제 집에서 편히 누워 있는 교생(校生)만도 못합니다. 지금부터 납속한 자들의 부류를 뽑아내어 문적(文籍)을 만들어서 기록해두고 혹 포사(砲射)를 익히게 하거나 하여 별도로 조치하여 방어에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대해 비변사로 하여금 상의하게 하여 우선 신이 관할하는 도부터 시험삼아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것은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할 것이다. 4도(道)의 일은 일체 경에게 맡겼으니, 경이 내려가거든 나랏일을 선처하도록 하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비록 군무(軍務)가 아니더라도 모두 말하고 가라."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소신은 용렬하여 재주가 짧고 식견도 얕은데 적임자가 없어 대신 내려가기는 하지마는, 끝내 나라를 저버리까 염려되어 밤낮으로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지방의 일은 반드시 일을 잘 주선하는 자가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이 먼저 기강을 세워 정신과 혈맥(血脈)이 유통되어야만 모든 일이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남(兩南)은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 모든 것이 조정에 매여있습니다. 조정이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의 정책을 다하고 인재 등용에 있어서도 유사(儒士)를 널리 구하여 인심을 열복시키며, 민생의 휴척(休戚)에 관한 일은 묘당(廟堂)이 별도로 계획하여 비록 부산(釜山) 같이 먼 곳이라도 정신이 자연히 감통(感通)하게 한다면 거의 난국을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 난리를 치른 뒤 백성의 안보(安保)변비(邊備)의 정돈에 대해서 듣지 못했으니, 모두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는 현상이 이렇게 심합니다. 상께서 정신을 가다듬으시고 백성을 교화하여 한번 호령이 내려지는 사이에 인심을 감동시킨다면 위 아래가 서로 힘쓸 것이니,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요즘 세월만 보내면서 사람들이 모두 손을 놓고 있으니, 시사(時事)가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신이 평상시에 항상 민망하고 절박하게 여겼던 것이므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우선 눈 앞에 닥친 일로 말한다면 적이 가까이 육박해 올 경우 경은 소탕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남쪽 사정은 상께서도 잘 아시는 바이니, 국가의 홍복(洪福)입니다. 무사히 지나가면 다행이거니와 불행히 급보가 있으면 매우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 들어 무(武)를 익힌 사람은 전혀 취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군사들이 이름만 군부(軍簿)에 있지 활과 화살을 다룰 줄 모르는 자가 많습니다. 소신이 내려가서 재주도 훈련시키고 활쏘기도 시험하여 활 잘 쏘고 기구를 갖춘 자는 군부에 그대로 두고 활을 쏘지 못하는 자는 주사(舟師)에 소속시키면 권징(勸懲)이 될 듯합니다.

지난 번 변양걸(邊良傑)의 공사(公事)로 인하여 관계없는 일로 대간(臺諫)과 서로 맞섰으니, 사체를 손상한 듯합니다. 대장(大將)을 차출(差出)할 때에 우연히 서계(書啓)했는데, 상께서 ‘험악하도다. 오늘날의 인심이여!’라고 하교하시자, 신은 실로 황공하였습니다. 당초 변양걸심열(沈悅)과 함께 힐난했던 사실을 소신은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다만 심열은 나이 젊은 관원으로서 아직 사체를 모르기 때문에 서계에 우연히 언급하였던 것인데, 대간은 그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신이 말하기를 ‘무장(武將)과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이 서로 힐난하는 것이 어리석기는 하나 그 정상은 취할 만하고, 대간의 논박은 역시 체모와 관계가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그러하셨으니 그 잘못이 모두 신에게 있어 너무도 미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경이 둘 다 구제하려는 뜻이다. 변양걸·심열의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다만 두 번째 계사는 매우 좋지 않았다. 대간은 비록 직절(直截)한 것을 숭상한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은 격노하여 한 말인 듯하였다. 내가 점잖은 체면을 손상할까 염려된다고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 변양걸이 죄가 있으면 바른대로 말하고 대장이 합당치 않으면 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장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체모를 지켜줘야지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일개 무부(武夫)를 탄론(彈論)한 일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늘날은 병(兵)과 민(民)의 근본을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옛사람이 ‘농상(農桑)을 권하라.’ 하였고, 고시(古詩)에서도 ‘나라를 근심하여 풍년이 들기를 바란다.’ 하였다. 농사를 힘쓰지 않아 빈핍(貧乏)한 지경에 이르면 적을 막을 수 없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힘쓰고 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한서(漢書)》에 ‘관중(關中)에서는 1묘(畝)에서 벼 1종(鍾)을 수확한다.’고 하였습니다. 남쪽 지방은 토지가 비옥하여 청도(淸道)·밀양(密陽)·고성(固城) 등지 같은 데는 소출이 다른 도에 비하여 10배나 됩니다. 한(漢)나라 때도 역전과(力田科)004) 가 있었으니 큰 난리를 겪고 난 오늘에 조세(租稅)를 특별히 면제해주고 관(官)에서 침해하지 않고 집안 일만을 돌보게 한다면 남쪽 지방 백성들이 반드시 갑절이나 농사에 힘써 마침내 부서(富庶)의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守令)들이 각기 자기 백성을 권장하면 될 것이다. 감사(監司) 이하의 출척(黜陟)이 경에게 달려 있다. 우리 나라는 포장(褒奬)하는 일이 혹 허문(虛文)으로 끝나는데 수령들이 하는 일 없이 청정(淸淨)한 것은 좋으나 직임(職任)을 전혀 돌보지 않고 있다. 지금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한다면, 관가(官家)가 무너져도 수리하지 않고 창고(倉庫)가 비어 있어도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그러면 백성에게는 편리하겠지만 나랏일이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저 실질을 힘쓰고 명성을 힘쓰지 않으며, 맡은 바 직사를 제대로 수행하고 전야(田野)를 묵히지 않는 수령을 살펴서 포상해야 할 것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현묵(玄默)을 숭상하자 당시 사람들이 남의 과실에 대해 말하기를 부끄러워했다고 하는데, 천 년 전의 그 기상을 상상해 보면 풍속이 순후했던 것입니다. 성묘조(成廟朝) 때 나이 젊은 문관(文官)이 관서(關西)에 내려갔다가 상중(喪中)에 기생과 간통했다는 일로 한때 대간이 논했었는데, 성묘가 그 언근(言根)을 캤더니 당시 대사헌(大司憲) 아무개는 평양 판관(平壤判官)에게서 들었다고 하였고, 판관은 기생에게서 들었다고 하여 결국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논계(論啓)했던 자를 영불서용(永不敍用)했고, 오래된 뒤 처음으로 서계(書啓)했더니 어필(御筆)로 그 사람 성명을 지우고 이르기를 ‘남의 앞길을 막는 자는 부모를 죽인 것과 같다.’ 하셨습니다.

요즘에는 나이 젊은 사람들이 잘못 보고 듣고는 남의 행동에 대하여 너무 과중(過重)하게 논평하여 한번 누명을 입으면 천지간에 자립(自立)할 수 없게 됩니다. 예컨대 김유(金瑬)가 자기 아버지가 전사한 장소에서 기생과 놀았다는 것과 김의원(金義元)이 자기 어머니 삼년상(三年喪)에 한번도 상차(喪次)에 가보지 않았다는 것과 【김의원이 어머니 장례를 마친 후 자기 처가(妻家)에서 병조리를 하였다. 복을 마치고 종사(從仕)하면서 한번도 자기 어머니 궤연(几筵)이 있는 곳을 가보지 않아 논박을 당하였는데 비록 과중한 것 같으나 어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 김두남(金斗南)이 상중에 있을 때 고기를 먹었다고 그의 동생이 속인 것 등은 모두 놀랄 일입니다. 비록 소관(小官)들의 일이나 사실이 아닌 말로 인하여 일생 동안 영원히 폐인이 되어버린다면 어찌 성대(聖代)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마땅히 조정에 물어 별도로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들이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그 사람들 일에 대하여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대개 남의 허실(虛實)은 알기 어렵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이제 중국을 배워 부언(浮言)을 잘 만들어내는가. 자세히 살핀 다음 말을 해야 한다. 만약 잘못이 분명하다면 남의 과실을 말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 하여 말하지 않아서도 안 될 일이다. 마치 부옹(婦翁)을 때렸다는 말005) 처럼 사실이 아닌 말들이 옛날에도 있었다. 대간(臺諫)은 반드시 사실인 일을 논하여야만 인심이 복종하고 기강도 서지만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어찌 대간의 말이라고 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인대가 끝난 다음 상이 소관(小官)을 명하여 각자에게 궁시(弓矢) 1부씩을 하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1책 133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86면
  • 【분류】
    사법-치안(治安)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교통-육운(陸運) / 교통-마정(馬政) / 군사-통신(通信)

  • [註 003]
    관절(關節) : 뇌물.
  • [註 004]
    역전과(力田科) : 한대(漢代)의 관리 임용 과목(科目) 중의 하나. 농사에 근면한 자에게 역역(力役)을 면제해주고 관리에 등용하여 농사를 권장시켰다.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 [註 005]
    부옹(婦翁)을 때렸다는 말 : 허위의 누명을 씌우는 경우를 말한다. 한(漢)나라 때 직불의(直不疑)는 형이 없었는데도 형수를 간음했다는 참소를 받았고, 제오윤(第五倫)은 세 번이나 고아인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인을 구타했다는 비난을 받은 고사에서 유래한다. 《신론(新論)》 상참(傷讒).

○丙辰/辰時, 上御別殿, 兼四道都體察使李德馨及副使韓浚謙引見。 上曰: "今下慶尙道乎?"李德馨曰: "由鳥嶺一路, 往見監司及守令, 邊報急通之事, 大槪處置後, 巡審蔚山左兵營, 仍往釜山, 見舟師形止, 又往右兵營, 見形止, 而與全羅監司及統制使, 會議於南海河東居中處, 仍爲留住矣。" 上曰: "前體察使下去之時, 邊報之事, 別告而送, 今已爲之乎?" 德馨曰: "今未知何以爲之, 邊報之事, 極爲悶慮。 小臣曾隷楊經理 島山之征。 其時邊報, 三日內得達, 擺撥, 不可不設矣。 南方之事, 壬辰年變後, 兇賊屯據八九年, 丁酉之後, 天兵水陸十萬, 又往來留住, 而擾害民生, 膏血已竭矣。 全羅道稍完, 故慶尙兵營, 專靠於全羅, 而丁酉之亂, 全羅亦爲蕩敗, 朝廷之徵責如舊。 小臣雖迷劣, 三四年往來兩南, 事勢人心, 稍已知之。 更無可爲之事, 而今日受命而去, 極爲悶迫。 國無紀綱, 凡事頓無持久之計, 而兩南乃國家根柢也。 如軍政弊瘼保障等事, 皆無定規, 悠泛度日。 今此舟師, 擧國皆謂不可不爲, 而措置之策, 別無他道。 沿海諸郡, 一應雜役, 盡爲減除, 一意舟師, 持以歲月, 則善不善間, 猶可及爲, 不然則舟師終無可辦之路矣。 慶尙則雜役已爲蠲除, 而全羅徵責, 至今未已。 小臣往年陳疏, 李恒福亦爲箚論, 而皆爲一張休紙矣。 全羅雜役, 急急蠲除, 然後庶得專意於舟師矣。" 上曰: "大槪殊常。 皆云倭賊不來, 而邊事或至解弛, 之來否, 何以預知? 正如時, 金賊纔退, 動色相慶。 人心如此, 是亦變也。 金大涵之言, 以爲自中生亂, 未易發動云者, 予則不信矣。 設使自中生亂, 對馬至近, 一葦可抗, 渡來何難? 我國養兵, 以爲防禦, 則善矣, 區區言論得失, 成敗有何關乎? 自然國事失悞如此, 安知今年, 無賊變乎? 不必三十五十萬, 雖數萬來之, 誰敢當也? 如西海道一二島, 數萬兵, 不日可集, 而秋冬不來之說, 亦悞矣。 我國論議可笑。 乙卯年變後, 謂全羅道必受賊兵。 壬辰年, 則賊自釜山而來。 此豈前例乎? 或以陸戰勝, 則謂陸戰可勝, 或以水戰勝, 則謂水戰可勝。 正俗所謂矢落處立的, 用兵, 若援前例, 則甚爲不可。" 德馨曰: "上敎至當。" 上曰: "時論如此, 不得已以水軍禦云, 故前領相下去時, 予亦言之, 勝敗, 兵家常事。 雖善用兵者, 或有勝敗。 設使禦以水兵, 百戰百勝, 何可必乎? 沿海千餘里, 無所不備, 故無所不分, 何海不渡, 何處不來? 雖或由一道而來, 未知其必勝也。 水兵萬一蹉跌, 使賊登陸, 則雖龍驤萬〈■〉, 浮海何益? 如謂勢窮力竭, 無以禦之, 則可謂慶尙道必來之說, 過矣。 倭國地圖, 予詳知之。 濟州對馬島之間, 五島, 而如此島者, 亦多, 常時零賊, 多生於此處。 雖一二島之來犯, 誰可禦者? 康津海南之間, 水路遍通, 不知何地, 定爲生變。 大抵形勢不好, 如我貧小之國, 受敵三面, 黃海道, 亦安知賊不來乎? 必謂之舟師可禦, 而慶尙賊來之說, 予尤以爲過矣。 山城之事, 力不足而不可爲之, 則是矣, 專謂山城不可之說, 亦非矣。 其中豈無可守與不可守者乎? 如陸地之城, 則雲梯飛樓, 賊必窺之。 丁酉變後, 山城不可之云者, 何異見刖廢屨者乎? 我國之言, 大抵如此。 當初權慄 幸州戰勝之後, 以爲山城可守。 李舜臣水戰勝捷之後, 以爲舟師必勝。 不知何戰可以必戰乎?" 德馨曰: "自古不問賊勢之如何, 自治在我之防備。 壬辰年, 大賊自釜山而來, 故人皆以爲釜山, 賊路初程者, 誠如上敎。 對馬島薺浦巨濟相近, 而隣於全羅者, 如被蘭島蕯摩州五島, 而五島蕯摩則不務耕種, 唯事作賊, 而能造鳥銃。 倭將或謂義洪石蔓子沈安道者, 爲五島蕯摩之主, 而乙卯之變, 蕯摩, 李大源之死, 五島之云。 內亂雖多, 作賊則愈甚矣。" 上曰: "何謂也?" 德馨曰: "平秀吉生時, 六十六州, 不得動兵, 而今則自相爲鎭。 本來作賊者, 何關內難? 臣之愚意, 春汛已迫, 全羅 寶城以外, 恐有意外之警。" 上曰: "一二千可以衝突, 而我國一萬, 不能當倭兵一千。 終雖討平, 所傷不貲, 而其勝, 亦何可必乎? 爲今之計, 莫若得一良將勇士而已。 言論雖善, 何用?" 德馨曰: "山城事, 上敎至當。 島山兵營, 不可不設險, 而多儲軍糧器械, 有急則與此城同成敗, 使將卒, 皆有定志, 然後可以有爲矣。 若平時, 於不可守之處, 作鎭爲營, 而臨急必棄, 果何益乎? 左兵營島山, 有淸正入處之營, 故兵使李英去時, 臣喩以可守之意, 則曰: ‘見形勢然後, 當爲之云, 而右兵營, 則馬山賊壘, 亦有之矣。" 上曰: "馬山可以築城乎?" 德馨曰: "小臣不見馬山, 不知形勢矣。 若可據險, 則右兵使可以入處。 釜山亦有賊營, 鍊兵數千, 堅守倭城, 則可以據險, 但固城泗川昆陽順天等處, 人烟一空, 前面唐浦蛇梁之間, 虛棄無形, 極爲悶慮。 臣往見湖、嶺二南, 則山城虛費人力處甚多, 不得已一道中央, 爲久遠計處, 竝棄之, 非徒人力可惜, 計亦(悞)〔誤〕 矣。 今勢力俱竭, 舟師格軍糧餉, 辦出無路, 則設備於陸地, 勢所不及。 如據某處, 以爲定計, 則日計不足, 歲計則有可爲之事矣。 但人心已失, 守令雖欲守城, 誰肯從之? 不得已慰勞人心, 然後緩急可與共守, 亂來十年, 民固於百役, 膏血已盡, 命脈僅存。 小臣頃年, 歷見沿海之間, 民事可矜。 今宜蠲除雜役, 至如貢物, 不至大段, 則竝爲減下, 損上益下之意, 使民曉然皆知, 然後庶可慰其心矣。 今雖賊退, 兵、水營尙多虛僞之事, 以起民弊。 蠲除之令雖下, 不過爲一張虛紙, 而民不蒙實惠矣。" 上曰: "京中, 只有訓鍊都監, 其軍僅數百, 給保尙不爲之, 甚爲未便。 今以已過不關之事言之, 逃唐兵作挐之時, 只以其軍, 扈衛守城。 若無此軍, 則兵曹以受價代立之軍, 能守京城乎?" 德馨曰: "近來待戰士之道, 有所未盡。 武夫必取豪俠有氣者, 而豈可責之如儒士乎? 待之之道太密, 故失望者頗多。 古書曰: ‘緩則用儒士, 急則用武夫。’ 平日必培養, 然後臨急, 可賴其力。 今則武將養望者絶無, 卒遇警急, 苟充以送, 則其能成功乎?" 上曰: "奉足給之乎?" 德馨曰: "當初市井油滑之徒, 僅聚鍊習, 而其時皆以爲, 未出國門, 先爲潰散。 束伍之功, 實非偶然。 南北防禦, 屢見其效。 今則束伍已久, 其中亦不無精銳者。 但此軍非如鄕曲收合之人, 或各司, 或市井, 一關節得捧之勢, 則皆有之。 領其軍者, 必不行關節, 然後乃可給保。 國家非大擧軍籍之時, 而獨訓鍊都監, 欲爲充定, 故人皆百計圖免, 其間作言之事, 安保其無也? 其自望之保, 則皆已行移各道, 其不得保者, 通關於列邑, 以免鄕免賤之人爲之矣。 大槪此事, 專責於一人, 掃除人情, 庶可爲之。 如曹倬, 郞廳中最務句管, 鄭賜湖爲堂上, 處事縝密, 而逃軍雖捕, 遺漏者或多。 逃軍給保等事, 竝令此兩人專掌, 使爲速成宜當。" 上曰: "大槪給保, 有未及爲乎?" 德馨曰: "有未及望定者多矣。 我國無紀綱, 小公事多, 而未得爲之。 訓鍊都監, 勢難常存, 而有規矩處置之事, 然後可以長久, 故小臣年前上箚, 辭未達意, 以爲都監多言, 故欲罷云爾, 則至爲惶恐。 都監本是權設, 莫如專責於兵、戶曹。 依中朝之法, 使之句管, 亦令大臣一人兼帶, 則可以經久。 臣之愚計然矣。" 上曰: "卿意則知之。 予於前日, 以南北神策軍事言之。 兵、戶曹, 其所掌, 且不能察, 都監之務, 其兼辦乎? 設使不可不罷, 姑存都監, 而他日移訓鍊院, 則可也。 故其時, 予以姑字言之。 然規模立, 然後或可移屬於他處。 此意如何?" 德馨曰: "不立規模而移屬, 則恐致虛疏矣。 前日李元翼, 以實邊鍊兵等事, 榻前承 命而去云。 其後聞之, 則千里無人, 萑莾蔽天, 實邊之策, 他無善謀, 不得已邊海流移之人, 使之推刷以入之矣。" 上曰: "邊方人入內地者, 推刷云乎? 其管四道乎? 他道乎?" 德馨曰: "此事出於不得已, 故以他處流移者, 爲之刷還。 雖一邑之民, 猶不易入, 閭閻之間, 似爲騷動, 推刷之事, 豈可盡爲乎? 東萊蔚山昌原等處, 曹好益定將給印, 使之召募, 東萊已入之軍, 數三百云矣。 賊船來泊之處, 雖給糧以勸入, 民必不從。 若謂自官推刷, 則其誰肯入? 邊上鹽盆魚箭之處尙多, 而固城泗川等地, 土地肥饒, 入居之民, 五六年復戶, 官家不得侵一事, 至如田稅, 亦不輸納, 體察或巡察, 給牒使之放心居生, 生理稍定, 然後以之成籍, 作爲土兵, 則緩急可用矣。" 上曰: "武弁中, 誰可將者? 統制使, 豈可一人而長爲乎?" 德馨曰: "小臣已爲陳達矣。 武將預爲培養, 先用於某處, 試其能可也。 若待有闕, 循資擬望, 則軍政不得理, 而水陸之事, 可憂矣。 得將然後漸可收拾, 而無人如此, 尤爲悶慮。 統制使李時言, 只善於陸戰突擊, 而不慣舟師, 邊上之人, 多有短之者。 得其代, 然後可矣。" 上曰: "設若遞改, 則以爲無人, 而不出乎?" 德馨曰: "小臣戊戌年倭橋之行, 與權慄相議, 姑爲水使養望, 統制使者誰也? 遍問諸將, 則皆以爲, 李雲龍, 習水戰可合, 而但以鄕人, 發身未久, 號令不猛云。" 上曰: "然則統制使, 誰可當爲?" 德馨曰: "如不得十分恰當人, 則職秩中爲水使者, 可爲矣。" 上曰: "李慶濬李守一何如? 卿當遠去, 須講論, 使予知之。" 德馨曰: "小臣於倭橋之行, 聞賊退, 以爲李守一, 似可收拾, 妄意狀啓, 爲右兵使, 適以給事之行拿鞫, 今在極邊。 所重在彼, 何可出來?" 上曰: "南方若重, 則出來何難? 其人予曾見之矣。" 德馨曰: "守一爲兵使, 則右道人心洽然。 以曾爲左水使, 善治之故也。 李慶濬平安兵使時, 持身簡約, 至於戊(成)〔戌〕 年, 南原駐軍時, 愛恤軍卒, 故南人, 以善處事、愛軍卒稱之。 此兩人, 用於南方, 則最可, 但慶濬爲水疾, 不合舟師云。" 上曰: "若然則不可用, 不幸也。" 德馨曰: "慶濬, 雖不經舟師, 曾所履歷, 皆稱其賢矣。" 上曰: "人不可易知。 李慶濬李時言, 爲宣傳官時, 臺諫以身體短小, 論之汰去。 當時雄偉之人, 皆無成功。 被論者如此, 凡人, 不可以容貌取之也。 武弁中, 年少有名者誰也?" 德馨曰: "小臣昔年爲兵判, 故只知其時所見之人。 其餘年少之人, 不爲不多, 試其實迹, 然後可知其適用。 或以守令、或以邊將觀之, 則必有其人, 而堂下中, 可爲兵使者, 預爲培養, 不次擢用, 可矣。" 上曰: "我國武將, 不識文字, 未知韜略矣。 倭人雖不知書, 平生事業, (雖)〔惟〕 在戰伐, 自祖父傳來, 習而成之。 我國之人, 不學文字, 雖有智慮, 皆不如彼之習戰矣。 前者, 使之學習兵書, 予知其爲外人所笑, 然今日不學, 則明日漸遠, 雖定訓上, 誰能爲書徒, 如敎子弟之事乎? 如誦僧經, 必無成習之理, 然何可置而不爲乎? 天將則文章甚好, 都司揭帖, 予每見之, 先發開口之笑, 何以如是乎? 至如對策, 亦爲云然乎?" 都承旨尹暾曰: "小臣與都司親語, 操筆立就。? ?德馨曰: "賊兵書, 六韜三略, 以語飜譯讀之云。" 上曰: "淸正行長, 目不知書矣。" 德馨曰: "以語學習矣。 倭俗, 戰勝則雖奴隷, 使之食百石, 以至萬石, 而敗則雖食萬石者, 還爲奴隷。 自中飮酒時, 臂面有傷, 則以善戰者, 故先飮, 背後有瘡, 則以善走者, 故擯不得飮。 非徒人情各異, 自少時必取如此之人, 如我國之取童子能文者。 其風俗殊常矣。 今春則對馬島, 必送人來問要時羅去處及講和之事矣。 其時則天將營下接待, 我國不知。 今則舟師李雲龍所率, 不滿十隻, 不可使見, 而若下陸, 則渠之所作之家有之云。 其處接置而食之乎? 若待朝廷回下, 則其間種種齟齬之事甚多。 何以爲之?" 上曰: "斟酌爲之, 然下陸似難。" 德馨曰: "下陸誠難。 舟師齟齬, 亦不可使之上見, 而浮海久不下陸亦難。 邊上如浙兵模樣, 留駐二三千, 以爲聲勢, 則似乎得矣。 南方之事, 雖使能者措置, 必在數年之後。 況如臣者, 無着手處矣。 祖宗朝, 兩界設營之時, 別擇監司。 今兩南爲急, 不可不擇差監司, 使之久任, 而賊退之後, 依兩界例, 設營事爲公事。 年前爲臺諫所論, 遽爲還罷。 下三道監司, 依前公事, 施行何如? 今國家多議, 雖已講定之事, 或一人之意未便, 則輒至停罷。 如此則兩南收拾極難。" 上曰: "元均戰敗後, 人方非議, 然予意則如者, 勇智人也。 我國之論, 能一事則皆稱之, 敗一事則擧陷之, 英雄, 本不可以成敗論也。 則予不得見之, 當初壬辰年, 與李舜臣同心討賊, 戰必先登, 其勇戰可知。 以閑山敗後之故, 爭歸咎焉, 此非渠之所爲, 乃朝廷使之促入也。 觀其書狀, 則以安骨浦在其前, 勢不可快入, 使陸兵, 先驅出賊兵, 然後可以入去, 則都元帥捉來決杖。 渠雖知其必敗, 而勢不得不入。 此果渠之自敗者乎? 後聞李億祺崔湖等, 聞朝廷使之促入, 相與言曰: ‘違命則吾三人死, 入去則辱國非細云。’ 若比於覆軍之罪, 則似有間矣。 予平日甚以爲未便, 故言之。 外議如何?" 德馨曰: "外議則不知, 臣往年往來南方, 聞其處人言, 則大槪皆以爲, 死於國事之人也。 前爲慶尙右水使, 赴戰之時, 人有不赴, 則以劍擊之, 皆曰元水使迷惑, 而臨事强項, 故李舜臣拿來後, 以差送, 則諸將皆舜臣幕下, 不與相議, 而勢孤立。 其時韓孝純, 報體察使, 將爲處置, 未及而見敗。 諸將之言, 雖不可取實, 格軍之言, 似有可信。 往釜山攻擊之時, 我國舟師九十隻, 直衝賊路, 則賊船不知其數, 蔽海而來。 以我國眇眇舟師, 勢不能當, 退向閑山, 格軍連晝夜櫓役, 來到春原浦, 則賊乘夜直擣, 困悴之極, 卒遇其變, 故不得相戰, 水涸逃散, 無一人死者云。" 上曰: "陣書有之, ‘亡大將, 斬次將。’ 旣敗死, 其麾下雖不能盡誅, 査覈依律可也, 而之後人, 爲高官大爵者多矣。 獨以此敗罪, 則予恐之心, 不白於後世, 而九地之下, 安能服其罪, 而無冤乎?" 德馨曰: "近來軍功, 納粟者偏苦, 而如訓鍊正及僉正以上軍功, 則免防, 或在家, 減除徭役, 納粟者, 則欲免軍役, 盡賣家財以納, 而更以四品以下, 還爲軍役, 反不如不納粟校生之高臥其家也。 今宜抄出納粟之類, 成籍置簿, 或習砲射, 別樣處之, 以爲防禦之用事, 令備邊司商議, 臣所管之道, 試爲施行何如?" 上曰: "啓辭當議處。 四道之事, 一委於卿。 卿下去, 則國家事, 自當善處。 如有所欲言, 則雖非軍務, 盡言而去。" 德馨曰: "小臣庸劣, 才識短淺, 承乏下去, 恐終負國, 夙夜憂懼, 不知所爲。 自古外方之事, 必待辦事之能者, 然朝廷先立紀綱, 精神折衝, 血脈流通, 然後凡事庶可擧行矣。 兩南根本, 皆係於朝廷。 朝廷盡內修外攘之策, 用舍之際, 廣收儒士, 悅服人心, 民生休戚之事, 廟堂別爲籌度, 雖釜山之遠地, 精神自然感通, 則庶可收拾, 而大亂之後, 未聞百姓之安保, 邊備之修飭, 架漏度日, 若此之甚, 自上奮勵陶甄, 一號令間, 感動人心, 則上下交修, 何事不辦? 但近來悠悠泛泛, 人皆解手, 未知時事, 何以至此? 小臣平日, 每有悶迫之懷, 故不敢不達。" 上良久曰: "卿言宜矣。 以目前事言之, 若賊兵來迫, 則卿可掃除乎?" 德馨曰: "南方之事, 自上洞知。 以國家洪福, 無事而過則幸矣, 不幸有警, 甚難矣。" 上曰: "慶尙道, 時習誤入, 業武之人, 專不取之云。 其習不可不改。" 德馨曰: "軍士, 只名存軍簿, 而不解弓箭者多矣。 小臣下去, 鍊才試射, 善射有器具者, 仍存軍簿, 不能射者, 屬於舟師, 則似有勸懲之路矣。 頃者以邊良傑公事, 不關之事, 與臺諫彼此相激, 似傷事體。 至於大將差出之時, 偶然書啓, 而聖敎曰: ‘險矣哉, 今之人心也!’ 臣實惶恐。 當初良傑, 與沈悅相詰之事, 小臣專不知, 大槪沈悅, 年少之官, 不知事體, 故書啓中, 偶爾及之, 臺諫則以爲, 其言太過矣。 臣嘗言之, 武將與吏曹郞官相詰者愚, 而其情則可取。 臺諫之論, 亦是風采所關, 而聖敎如此, 其失專在於臣, 不勝未安。" 上曰: "此卿兩救之意也。 良傑沈悅之事, 予何以知之? 但再番啓辭, 最不好矣。 臺諫雖以直截爲尙, 此則似是激怒而言。 予以爲恐傷雅度者, 此也。 良傑有罪, 則直言之, 大將不合, 則當論之可也, 至於待大將之道, 當存體貌, 不必如是矣。 然一武夫彈論之事, 何關? 今日兵民之本, 不可不務。 古人曰: ‘勸農桑。’ 古詩又曰: ‘憂國, 願年豐。’ 不力農而至於貧乏, 則敵不可禦矣。 我國之人, 其能力農乎?" 德馨曰: "《漢書》曰: ‘關中收秔畝一(鍾)〔種〕 。’ 如南方土地沃饒, 淸道密陽固城等地, 所出比他道十倍矣。 時亦有力田科。 今當大亂之後, 別爲蠲除租稅, 而官不侵暴, 使之專顧其家, 則南方之民, 務農必倍, 終見富庶之效矣。" 上曰: "守令各勸其民則可矣。 監司以下黜陟, 在卿。 我國褒奬之事, 或涉虛文。 守令淸淨無爲, 固好矣, 職任則專不顧察。 今以一事言之, 官家頹廢而不修, 倉庫空虛而不收, 則雖便於百姓, 於國事何補? 大抵務實, 不務名, 職事修擧。 田野開闢之人, 察而褒奬可矣。" 德馨曰: "上敎至當。 尙玄默, 而其時恥言人過。 千載想像, 則風俗厚矣。 成廟朝, 有一年少文官, 下去關西, 喪中奸妓事, 一時臺諫論之。 成廟詰其言根, 則大司憲某, 以爲聞於平壤判官, 判官則以爲聞於女妓云, 卒無事實, 故其論啓之人, 遂爲永不敍用。 年久之後, 始爲書啓, 則以御筆, 塗抹其姓名曰: ‘廢人前程, 如殺父母。’ 近間年少之人, 聞見失實, 以實行論人過重。 一被累名, 終無以自立於天地間。 金瑬之挾妓於其父戰沒之所, 金義元之母(喪), 三年一不歸喪次, 【金義元葬母之後, 調病於妻家, 至於服闋從仕, 一不歸其母几筵處, 被論, 雖似過重, 烏得無罪?】 金斗南之在喪, 同生欺以啗肉之說, 皆爲可駭。 雖小官之事, 以無實之言, 永廢平生, 則是豈聖代之事乎? 宜問於朝廷, 別爲處置矣。" 上曰: "其事無實乎? 予不知此人之事矣。 大槪人之虛實難知。 我國之人, 學得中原, 善造浮言乎? 十分詳察而言之可矣。 若分明過失, 則不可諉諸恥言人過, 而不言也。 人言之失實, 則如(檛)〔撾〕 婦翁之言, 古亦有之。 臺諫必以實事論之, 則人心服、紀綱立矣, 如或失實, 則豈可以臺諫之言, 而不爲是非乎? 對訖, 上命小官, 賜弓矢各一部。


  • 【태백산사고본】 81책 133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86면
  • 【분류】
    사법-치안(治安)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교통-육운(陸運) / 교통-마정(馬政) / 군사-통신(通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