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131권, 선조 33년 11월 16일 병진 5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평안도 관찰사 서성이 중강 개시의 폐단과 그 대응책을 아뢰다

평안도 관찰사 서성(徐渻)이 치계하기를,

"의주부(義州府)는 중국과 접경하고 있어서 조금만 통제를 잘못하여도 반드시 사단을 야기시킵니다. 신이 경리(經理)를 따라 의주에 가서 10여 일을 머무는 동안 부윤(府尹) 허욱(許頊)과 상의하였는데, 허욱의 말이 ‘중강 개시(中江開市)는 세월이 흐르다 보니 폐단이 발생하였다. 당초 개시했을 당시에는 한낮에 모였다가 해가지면 파하여 양쪽이 공평하게 교역했으므로 별로 다툴 일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으레 해가 질 때에 회시(會市)하였다가 날이 깜깜해서야 파하여 서로 약탈하곤 하니 이러한 행위를 금지시키지 않는다면 처치하기 곤란한 사태가 머지 않아 발생할 것이니 조정에 계청(啓請)하여 아주 엄하게 금단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내린 유지(有旨)의 사의(事意)는 실로 변신(邊臣)이 먼 장래를 염려하는 뜻을 먼저 터득한 것이니 【10월 19일에 중강(中江)에 금시(禁市)하도록 하는 밀지가 있었다. 】 마땅히 즉각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견해로 사리를 헤아려 볼 때 대단한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지난날 임진년의 변란 때 종사(宗社)는 잿더미가 되고 거가(車駕)는 서쪽으로 파천하여 나라의 위급한 형세가 조석을 보장할 수 없었는데 성상께서 평소에 중국을 정성껏 섬겨왔던 덕분에 성천자가 우리 나라를 보살펴주는 갸륵한 은혜를 입어 강토를 회복하고 종사를 보존할 수 있었으니, 오늘 이후로 국가의 천만 년의 업적은 실로 중국 조정에서 내려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군사가 적으면 군사를 청하고 군량이 다 되면 식량을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중국 호부·병부의 아문(衙門)에서는 번방(藩邦)의 무례한 요청이라 하여 거절하지 않고 부탁만 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들어주었으니, 보내준 병사가 몇십만 명이고 나누어 준 은(銀)이 몇백만 냥이며 운반해다 준 곡식이 몇천만 석이었는지 모릅니다.

한(漢)·당(唐) 시대에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던 일이 있긴 하나 황조(皇朝)의 은전(恩典)을 우리 조선만큼 후하게 입은 적은 없습니다. 전일에 저축되었던 곡식이 다하자 개시를 하였는데 이것은 천조가 억지로 시켰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대병(大兵)은 철수하였지만 장관(將官)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고, 각 아문의 차관(差官)도 왕래하는 자가 있으며, 파강 위관(把江委官)도 아직 돌아가지 않았고 수세 차관(收稅差官)도 아직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먼저 모든 장사를 쫓아버리는 영을 내려 개장(開場)하는 날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한다면 사고 파는 자가 화내며 이상히 여길 뿐만 아니라 파강 위관(把江委官)이나 진강성 유격(鎭江城遊擊)의 무리들도 필시 괴상히 여기며 노여워할 것이고 혹은 우리 나라가 중국 장수들이 구원해준 큰 은혜를 잊고 저버린다 할 것입니다. 또 은이나 수달피[獺皮] 등은 법 이외의 금물(禁物)이지만 중국 사람들이 모두 우리 나라의 소산(所産)임을 아는데 갑자기 엄금하는 것도 미안할 듯합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내년 봄 수병(水兵)이 모두 철수하기를 기다렸다가 중강 개시에서 사단이 야기되는 폐단을 낱낱이 열거하여 요동 도사(遼東都司) 및 무안 아문(撫安衙門)에 이자(移咨)하여 자상한 윤허를 얻고 나서 정지한다면 정리로 헤아려보더라도 체모를 얻을 것 같습니다.

이어 생각하건대, 의주(義州)로부터 이산(理山)에 이르기까지의 강변 일대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중국 사람이 집을 지어 놓고 밭을 경작하고 있습니다. 8∼9월의 황삼(黃蔘)을 캐는 계절이 되면 달빛이 깜깜하고 인적이 뜸한 때를 틈타 조그만 배를 타고 은밀한 곳으로 가서 몰래 매매하는데 그 폐단을 방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에는 수상(水上)에서 하는 잠상(潛商)을 엄중히 금지하고 금령을 범한 자를 잡으면 국경에서 효시(梟示)하여 사람들에게 보고 듣게 하고 모두 중강의 개시로 돌아가게 한 다음에 이어 정지하는 것이 사세에 또한 편리하고 이익될 것 같습니다. 신이 이미 이런 뜻을 가지고 부윤 허욱에게 통의(通議)하였으니,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이 아뢴 바를 특별히 비변사에 내리시어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비변사가 장계대로 시행하기를 아뢰니,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9책 13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50면
  • 【분류】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사법(司法) / 외교-명(明) / 무역(貿易)

    平安道觀察使徐渻馳啓曰: "義州爲府, 實與上國接界, 少失堤防, 必致惹事之患。 臣跟隨經理到義州, 留十餘日, 與府尹許頊相議, 言: ‘中江開市, 日月已久, 弊端已生。 當初開市之際, 日中而會, 日昃而罷, 兩平交易, 別無鬪爭之事, 近日以來, 例於日沒時會市, 日黑而罷, 互相攘奪。 若此不已, 則難處之患, 必在一日之內, 當啓請朝廷。 痛加禁斷矣。’ 今此有旨內事意, 實爲先獲邊臣慮遠之情, 【十月十九日, 有中江禁市密旨。】 所當劃卽施行, 而愚臣所見, 揆之事理, 深有所未安。 曩者壬辰之變, 宗社灰燼, 車駕西遷, 國勢岌岌, 莫保朝夕, 而賴聖上平日事大至誠之效, 特蒙聖天子欽恤下國之至恩, 興復疆域, 保有宗社。 自今以後, 國家千萬年之業, 實是天朝所賜。 至於軍少則請兵, 餉竭則請糧, 天朝戶、兵衙門, 不以藩邦猥屑之請, 閉關絶之, 有請必從, 無願不遂, 不知調遣幾十萬兵, 放散幾百萬銀, 漕轉幾千萬穀。 之際, 雖設都護, 而特被皇朝恩典者, 無如我朝鮮之厚且大矣。 頃日蓄積蕩然, 創立開(布)〔市〕 , 則非天朝勒令爲之者矣。 今者大兵雖撤, 將官尙有未盡回者, 各衙門差官, 尙有往來者, 把江委官, 尙未叫回, 收稅差官, 未及撤還, 而我國 先下一切逐商之令, 及其開場之日, 了無形影, 則不但買賣者瞋怪, 把江委官。 鎭江城遊擊輩, 必且怪怒, 或將謂我國, 忘天將生死肉骨之大恩, 而輕負之也。 且法外禁物, 如銀子獺皮等物, 天朝之人, 皆知産於我國, 而一朝嚴禁, 亦似未安。 臣之妄料, 待明春水兵盡撤之後, 陳列中江開市惹起事端之弊, 移咨于遼東都司及撫安衙門, 得其詳允而後, 因之停罷, 則揆之情理, 似爲得體。 仍念江邊一帶, 自義州至于理山, 隔江相望之地。 唐人等築室墾田, 八九月黃蔘採取之節, 則乘其月黑人斷之時, 互騎小船, 潛相買賣於隱密之處, 弊不可防。 今日當先嚴水上潛商之禁, 捕得犯禁者, 梟示境上, 使人有所聞見, 皆歸於中江之市, 然後仍以停罷, 事勢亦恐便益。 臣已將此意, 通議于府尹臣許頊。 伏乞聖明, 以臣所陳, 特下備邊司, 更議施行。" 啓下備邊司, 依狀啓施行, 啓依允。


    • 【태백산사고본】 79책 13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50면
    • 【분류】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사법(司法) / 외교-명(明)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