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충무위 사직 정구가 대행 왕비의 묏자리에 대해 아뢰다
행 충무위 사직(行忠武衛司直) 정구(鄭逑)가 아뢰었다.
"신은 무식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성상에게서 직사(職事)의 은총을 입었는데, 나랏일이 매우 위급한 때이므로 감히 분수를 헤아려 사직을 청하지 못하고 오직 노고를 다해 힘을 바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깊은 병중에서도 지팡이를 휘두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닌 지가 어언 20일이 되었습니다. 기내(畿內)의 동서 가까운 산천(山川)을 두루 답사하여 열력(閱歷)한 곳만도 거의 30여 군데인데 아직 합당한 곳을 한 군데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겹겹으로 둘러쌓인 유수(幽邃)한 곳은 참으로 바랄 수도 없지만 빙둘러 쌓여 바람을 가리울 만한 곳도 또한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다섯 달이 거의 지났으므로 온 나라의 신민들은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신처럼 재주 없는 사람도 이미 유사의 자리에 참여하였으니 침식조차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애태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술관들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서 외인(外人)과 중국 사람을 아울러 참여시켰기 때문에 의견이 하나로 합치되지 못하고 각기 달라 일찌감치 결정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는데, 사실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기운이 오롯이 모아진 진룡(眞龍)198) 의 길지(吉地)란 참으로 드물다고 생각 합니다. 경사(京師)를 빙둘러 싼 1백여 리 지역에 이미 안장된 조종(祖宗)의 원침(園寢)이 10여 곳이 넘으니, 땅이란 한정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매번 아주 합당하여 우리 나라의 술관들이나 외인(外人) 및 중국 사람들의 눈에 부족한 점이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수없이 그 가운데에서 각기 소견대로 고집하여 결정하려 하는 까닭에 내가 좋다고 하는 곳은 저 사람이 흠이 있다 하고, 저 사람이 좋다고 하는 곳은 내가 그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너무 트인 곳이 아니면 반드시 촉박하고, 가파르게 드러난 곳이 아니면 반드시 낮고 미약하였습니다. 신이 전후로 본 바에 의하면 결단코 신민들이 모두 군친(君親)의 진택(眞宅)199) 으로 흡족해 할 만한 곳은 있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미 본 것을 가지고서 아직 보지 못한 곳들을 추측해 보건대, 단정코 길지를 얻기가 어려우니, 신이 어찌 민망하고 답답한 심정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전일에 대신들이 담당 관원들과 서로 모여 종일토록 의논하다가 끝내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서 밤중이 다 되어서 빈손으로 파하였습니다. 신은 사실(私室)로 물러가 있노라니 더욱 더 답답하고 민망한 심정만 더하여 잠자리에 들어서도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어떻게 해야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에 감히 천려일득(干慮一得)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대략 두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아룁니다.
신이 처음 명을 받들어 산을 보기 시작한 날로부터 신평(新坪)을 본 사람들이 매번 새로 볼 산에 이르러서 반드시 말하기를 ‘신평을 버려두고서 이곳을 와 본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곳이 어찌 신평의 심수(深邃)한 것만 하며, 신평의 장풍향양(藏風向陽)한 데에 비길 수 있겠으며, 울창하여 마치 무엇인가를 간직하고 있는 듯한 것과 같겠는가.’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그곳은 처음 동구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개운하게 하고 솟구치게 하여 마치 무엇인가 얻은 것이 있는 것처럼 기쁘게 한다.’ 하였습니다.
신평을 신이 아직 한번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제 생각으로는 반드시 근래에 본 여러 산들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신이 감히 일부러 장황하게 말씀을 드려 성명(聖明)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전후로 사람들에게서 들은 바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이 이미 20일간이나 돌아다니며 산이란 산은 모두 보았으나 좋은 곳을 구하지 못해 탄식만 했으니, 근심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 ‘신평이 참으로 합당한 곳인데도 처음에는 박자우(朴子羽)의 요망한 말에 기인되고 거듭 섭정국(葉靖國)의 황당한 말 때문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버림을 당하여 연일 형국(形局)도 갖춰지지 않은 곳을 배회하게 되었다. 이문통(李文通)은 중국 사람 중에서도 지리(地理)에 가장 밝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칭찬하여 마지 않았고, 심지어는 「신평을 나쁘다고 헐뜯는 사람은 고약한 심보이다. 」라고 꾸짖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서 이런 뜻을 가지고 성총(聖聰)을 번거롭힙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신만의 생각이겠습니까. 사람마다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공하여 감히 여쭙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국모(國母)를 위해 좋은 땅을 가려 봉안하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천리(天理)와 인정상 당연한 것입니다. 어제 상께서 아래로 묘당의 여러 신료들에게 물으시기를 ‘대행 왕비의 묘산으로 신평보다 나은 곳을 얻을 수 없지 않겠는가.’ 하셨으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의당 단번에 그 말을 따라 곧 대사(大事)를 진척시켰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계한 말은 ‘이미 버린 곳을 쓸 수는 없다.’라고 한데 불과했습니다. 신으로서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당초 버렸던 것이 과연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입니까, 아니면 천의(天意)200) 에서 나온 것입니까? 요망한 말이 한번 나오자 화복(禍福)을 계교하는 데 동요되어 성명(聖明)의 뜻은 아직 의심을 내지 않고 있었는데도 자꾸 다른 곳을 속히 찾아보자고 여러 차례 청해 마지않았으니, 이미 인심이 복종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이미 여러 달이 지났으나 아직까지 길지(吉地)를 얻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신평을 이미 버린 곳이라고 핑계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미 버린 곳을 제쳐놓고 다른 곳 중에 이미 버린 곳보다 나은 데가 있습니까? 저의 의혹스러움은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하여집니다. 원컨대 전후로 산을 살핀 여러 신료들에게 특별히 물으소서. 그러면 공론은 바로 결정지어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대사를 속히 결단하여 온 나라의 신민들로 하여금 시원히 이 근심속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참으로 《주역(周易)》에서 말한 ‘멀지 않아 뉘우치니 후회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다.’란 뜻일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지금 만일 신평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을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인 것으로 다른 것들은 족히 따질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곳을 얻지 못하여서 끝내 그보다 못할 경우 수십만의 인력을 헛되이 버리게 될 것입니다. 한겨울의 추위를 당해 시들시들 병들어 있는 백성을 거듭 동원한다면 얼음과 눈이 쌓여 있고 흙과 돌들이 모두 얼어 붙어서 정성을 바칠 길도 없을 것이며 백성들만 피로에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국가의 화복(禍福)이란 백성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또한 어찌 깊이 염려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상께서 측은스럽게 여겨 전교를 내리시기를 ‘불행하게도 이런 변고를 만나 이미 우리 백성들의 힘은 모두 바닥이 났다. 비록 좋은 곳을 얻게 되더라도 장차 우리 백성들이 거듭 곤궁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내가 차마 할 수 있겠는가. 신평이 만일 아주 못 쓸 곳이 아니라면 나로서는 다시 길흉를 따지지 않고 그대로 그곳으로 정하여 외롭게 남은 백성들을 안정되게 해주고자 한다.’라고 하면, 어느 누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한 나라의 끝이 없는 복이 되는 것이니 아마도 청오자(靑烏子)201) 가 선택한 더할 수 없이 좋은 곳이라도 이것과는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어리석은 신하의 피눈물로써 호소하는 간절한 정성을 유념하여 주소서.
옛사람들은 장례를 지낼 때에 반드시 소목(昭穆)을 사용하였으니, 이는 친친(親親)의 서열을 올바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생전에 한 집안에 모여 사는 것이 즐거운 것이라면 죽었다고 해서 어찌 인정과 멀겠습니까. 이것은 옛사람의 지극한 뜻입니다. 황조(皇朝)202) 에서 여러 능을 천수산(天壽山)에다만 모시는 것은 필시 고황제(高皇帝)203) 의 유명(遺命)에서 나온 것으로, 그 높은 탁견은 참으로 고인(古人)들과 꼭 맞으니, 이 어찌 만세의 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들으니, 당초 상께서 하교하시기를 ‘아주 궁벽지고 혈(穴)이 많아서 훗날 가족들의 장례를 지낼 만한 곳으로 택하고자 한다.’ 하였기에, 신은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생각하기를 ‘성상의 이 마음은 바로 고황제의 마음이며 또한 우리 선조 선왕들의 마음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술자(術者)들은 혹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집에는 두 사람의 높은 사람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산이라 하여 어찌 두 개의 혈(穴)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기필코 한 줄기로 뻗은 산맥의 단혈(單穴)을 구해 현택(玄宅)204) 을 적막하고 고독한 곳에 모시려 하니, 인정으로 헤아려 보더라도 아마 마땅한 바가 아닌 듯합니다. 이제 전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셨으니 여러 신하들은 의당 찬동해서 우리 동방에 전고에 없었던 아름다운 거조를 열었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전하의 덕망 아래에서 면대하여 아뢰었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으니, 신은 몹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주 좋은 일이란 행하여지는 것이 귀중하니, 어찌 옛날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있겠습니까. 기왕 새로운 명당을 얻지 못하였으니 특명을 내려 선왕들의 원릉(園陵) 안에서 풍후한 곳을 찾도록 한다면, 반드시 새로운 산을 잡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는 성명(聖明)의 효성스런 마음을 다하고 선왕의 유령(遺靈)을 위로해 드리는 바가 될 것이니, 인정상으로 보나 이치상으로 보다 조금도 흠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크게 영광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이상이 신의 이른 바 두 가지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두 가지 가운데에서 채택하라는 분부를 내리신다면, 실로 막대한 경사이며 지극한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신평이 비록 안온한 선왕의 원릉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동쪽에 처해 있어 여러 능침과 서로 가깝고, 더구나 태릉(泰陵)205) 과 강릉(康陵)206) 두 능침이 있어 서도(西道)의 먼 해곡(海曲)에 비하여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데이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하늘에 계신 대행 왕비의 혼령께서도 은연중 이것으로 위로를 삼지 않을까 싶습니다. 때문에 신은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신평으로 정하는 것이 당연히 우선하고 그렇지 않다면 선왕의 원침 안에서 구하는 것보다 좋은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신평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직 잊혀지지 않았고 공을 들인것도 거의 마무리 단계이며 전하의 마음에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미 버린 곳이라고 하는 말을 무시하고 특별히 택한다면 의심의 구름은 저절로 걷혀져 태양처럼 활짝 빛날 것이니, 대성인(大聖人)이 하시는 바가 어찌 보통 사람보다 만갑절이나 뛰어나지 않겠습니까.
신은 매우 어리석고 식견이 용렬하나 군주를 사랑하는 정성만은 천성에서 타고나 감히 잠깐일망정 마음속에서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에 부월(斧鉞)의 위엄을 피하지 않고 뇌정(雷霆)의 두려움을 무릅쓰며 우러러 호소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글을 올리자니 눈물만 흐르며 슬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성명의 재택(裁擇)이 있기만을 바랍니다."
- 【태백산사고본】 79책 130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33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198]진룡(眞龍) : 산세가 꼭 맞게 된 자리.
- [註 199]
진택(眞宅) : 꼭 알맞은 자리.- [註 200]
천의(天意) : 임금의 뜻.- [註 201]
청오자(靑烏子) : 황제(黃帝) 때의 사람. 팽조(彭祖)의 제자로 지리학(地理學)에 정통했었다. 후세에는 그의 이름 자체가 곧 지리술(地理術)의 대명사로 통하였다. 《포박자(抱朴子)》 극언(極言).- [註 202]
황조(皇朝) : 명나라 조정.- [註 203]
고황제(高皇帝) : 명 태조(明太祖).- [註 204]
○行忠武衛司直鄭逑, "伏以臣以無識, 猥蒙恩使, 當國事至急之日, 不敢爲揣分請辭之計, 唯以殫勞効力爲幸, 振策癃疾, 黽勉馳驅, 今二十日矣。 踏遍畿內東西近程所閱歷, 幾至三十有餘所, 而未見有一可合處。 重疊幽邃, 固不敢望, 而回抱藏風之地, 亦不易得, 日月流邁, 五月將盡, 擧國臣民之遑遑, 固不暇言, 而臣之不侫, 旣側有司之後, 其憂煎渴涸, 食息不能自寧者, 臣豈有紀極哉? 人有言曰: ‘旣不專任術官令人, 與唐人幷參。 所以議論各異, 不得歸一, 而不能早定。’ 此亦固然矣。 然臣意則以爲, 眞龍吉地, 實所罕鍾。 環京師百有餘里, 而自祖宗園寢已安, 迨過十有餘焉, 則地固有限矣。 安得每有盡善恰當, 無不慊於我國術官與外人與唐人之所見哉? 不得不就其中, 各隨所見, 執而爲定, 故我之所當然, 彼以爲病, 彼之所是, 我以爲非, 非曠蕩則必迫促, 非峭露則必卑微。 以臣前後所見, 斷未有臣民所共恰然於君親之眞宅者。 以臣所已見, 推其所未見, 則決有未可得之理, 臣豈勝悶迫焉? 前日大臣與該官相聚, 終日媕婀, 竟未有得, 夜分空罷。 臣退伏私室, 益增鬱憫, 寢不能寐, 不知所以爲國獻忠, 敢將一得之愚, 略條二事, 冒萬死而仰稟焉。 自臣從初奉命看山之日, 人之見新坪者, 每到新見之山, 必曰: ‘捨新坪, 而來相此地, 豈不乖哉?’ 曰: ‘此豈若新坪之深邃哉, 新坪之藏風向陽哉, 鬱鬱蔥蔥, 如有所蘊蓄者哉?’ 曰: ‘初入洞口, 不覺使人神爽氣竦, 欣然如有得。’ 夫新坪, 臣未嘗一見, 而人言如是, 雖未見, 而竊意其必優於近來所見諸山也。 臣不敢故爲張皇, 以誣天日, 臣之前後所聞於人人者, 如是矣。 臣經涉兩旬, 旣有山盡目窮之嘆, 則不勝憂迫, 以爲設使新坪, 眞爲可合, 則初緣朴子羽之妖言, 重被葉靖國之荒說, 至於無故見棄, 而連日徊徨於不成形局之地。 李文通, 唐人中最號曉解, 而稱道不已, 至有以惡心腸, 斥罵誣毁之人, 而人不能解惑, 豈不冤哉? 臣不自揆, 欲將此意, 申瀆聖聰。 此豈獨臣心哉? 人皆有此心, 而惶恐而不敢焉, 蓋爲國母, 思欲擇善地而奉安者, 實天理人情之所不容自已也。 昨者上問下及, 廟堂諸臣, 爲大行王妃, 旣不得有勝於新坪者, 則臣之愚意, 謂宜渙然將順, 亟就大事, 而所回啓者, 不過曰已棄之地, 不可用也。 不知當初所棄者, 果出於人心否? 天意否? 妖言一發, 不免爲計較禍福之所動。 天心未之生疑, 而輒以速卜他地, 累請不已, 已非人心之所厭, 今旣累月矣, 尙未得吉地, 猶諉彼以已棄之地。 臣不知捨已棄之地, 更有他勝已棄之地否? 微臣之惑, 到此滋甚。 伏願特訪前後看山諸臣, 則公論卽定矣。 庶幾速斷大事, 使一國之臣民, 釋然脫此憂虞, 則實《大易》 ‘不遠復, 無秪悔’ 之義也。 且伏念此時, 若得加新坪一分之地, 則誠幸矣。 他不足計, 旣不得加焉, 竟出其下, 而虛棄數十萬人力, 當此寒冱之日, 重發(彫)〔凋〕 瘵之民, 氷雪交亂, 土石俱凍, 旣無以盡誠信之道, 而民且困頓顚隮矣。 國家禍福, 未有出於邦本之外, 則亦豈不深可慮哉? 若自上惻然垂敎, 以爲不幸而遭此變故, 已殫我民力, 雖得好地, 將至重困吾民, 豈予心所忍? 新坪如不至不可, 予不欲更問吉凶。 宜仍用其地, 以紓我孑遺之民, 則孰不感激涕泣, 爲殿下欲死哉? 斯其爲一國無疆之福, 恐非靑烏子極吉善地, 所能換得也。 伏願聖明, 有以留念於愚臣瀝血之懇焉。 古人葬, 必用昭穆, 所以序親親也。 明旣有同堂之樂, 幽豈獨遠於人情? 此古人之至意, 而皇朝之奉諸陵於天壽一山者, 想必出於高皇帝之遺命, 則其高卓之見, 實同符古人, 豈不爲萬世法程哉? 竊聞當初, 自上下敎曰: ‘欲得深僻穴多, 他日可爲族葬者。’ 臣不勝感激, 以爲聖上此心, 卽高皇帝之心, 亦我先祖先王之心也。 術者或以爲: ‘天無二日, 家無二尊, 則山豈有二穴?’ 必求單壠獨穴, 必欲使玄宅之居, 寂寞孤獨。 揆之人情, 恐非所宜。’ 今者聖慮及此, 正宜群臣贊而成之, 以開我東方無前之美擧, 而未聞有以警咳於聖德之下, 臣竊痛之。 盡善之事, 貴於得行, 何間前後? 旣未有以新得矣, 特命於先王園寢內, 占得豐厚之原, 則宜必愈於新山之卜, 而所以極聖明之孝思, 慰先王遺靈者, 其於情理, 尤無以間然矣。 豈不甚光顯哉? 伏願聖明之有以留意焉。 此臣所謂二事者也。 倘蒙命擇於斯二者, 則實爲莫大之事, 至幸也。 新坪雖非園寢親切之比, 而旣在東道, 與諸陵相近。 況復有泰、康兩陵, 譬諸西道海曲之遠, 其不相懸矣乎? 臣竊惟大行王妃在天之靈, 豈不隱然有慰於斯哉? 故臣以爲, 今日之計, 新坪當先, 不然則莫如求先王園寢之內。 蓋新坪則人心未忘, 而用力垂畢, 睿斷不疑, 特取於人謂已棄之地, 則雲陰自消, 天日赫然。 大聖人所作爲, 豈不出於尋常萬萬哉? 臣甚愚陋, 唯有愛君之誠, 出於天性。 不敢以少須臾, 而弛憂於中心, 故玆不避鈇鉞之嚴, 用仰冒於雷霆之下。 伏紙淚下, 不勝忉忉。 伏惟聖明, 有以裁擇焉。"
- 【태백산사고본】 79책 130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133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