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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29권, 선조 33년 9월 2일 임인 2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대행 왕비의 장지에 대해 전교하다

비망기로 윤근수에게 전교하였다.

"섭정국(葉靖國)이 지리(地理)에 통달하였다 하니 이같은 사람은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다. 궁궐의 포치(布置)와 형세를 묻고자 하여 경리(經理)에게 머무르게 해 주기를 청하였더니, 경리가 곧바로 머무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섭정국은 ‘나는 군문(軍門)의 관할하에 있으니 경리가 만류할 바가 아니다. 군문을 따라 서쪽으로 가고자 한다.’ 하였다. 그러니 경이 그에게 가서 머물러 주기를 청하는 나의 간절한 뜻을 전해 주라.

또 술관들이 자기들이 가진 재주를 뽐내려고 서로 시비를 벌이고 있는데 누가 까마귀의 암수를 가려 내겠는가. 나는 항상 우리 나라에는 본래 술사(術士)가 없는데 어찌 지맥(地脈)에 능통한 자가 있겠느냐고 여겨왔다. 이제 술관들이 서로 다투는 말을 가지고 섭정국에게 가서 물어보고, 친히 인산(因山)할 곳의 형세를 가 살펴보도록 청한다면 길흉과 시비를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경은 섭정국과 서로 지면이 있고 또 중국말도 잘하니 직접 문답할 수 있을 것이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176) 산릉은 나라의 큰일이다. 당연히 공경스럽고 조심스럽게 해서 감히 일호라도 미진한 일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산맥이 휘감아 돌고 물이 굽이쳐 흐르며 북풍을 가리고 남쪽을 향하는 곳으로 조금도 결점이 없는 곳을 가려야 쓸 수 있는 것이다. 방위(方位)나 물이 들고 나는[去來] 것의 길흉과 연월일시의 구기(拘忌) 따위는 단지 지엽적이고 거짓된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빈천과 부귀가 모두 하늘에 달려 있으니, 풍수설을 가지고 복을 구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더구나 국조(國祚)의 길고 짧음과 왕실의 융성과 쇠퇴가 과연 어떤 일인데 구구하게 모든 것을 풍수설에 맡겨 기어코 방위나 거래나 연월일시 등이 합치한 다음에 쓰겠단 말인가. 과연 국조가 연장되고 왕실이 융성할 수 있다면 반드시 성인이 앞서 자세하게 그것을 말하였을 것이다. 우리 성상은 총명과 예지가 천고에 뛰어나신 분으로 송종(送終)의 예에 있어서는 반드시 법도대로 다하였다. 이번 국휼(國恤)에서도 이미 대신과 예관(禮官)에게 명해 분주히 살펴서 산맥이 휘감아 돌고 물이 굽이쳐 흐르며 북풍을 가리고 남쪽을 향하는 조금도 결점이 없는 곳을 가려 정하였다. 그런 다음 팔도의 역군을 징발해서 역사(役事)에 나아가도록 독촉하여, 그 동안 죽고 다친 자가 70명이나 되고 5천여 명이 40일을 넘게 일해 일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대체로 박자우라는 자는 조금 문자를 알기는 하나 그가 지리를 통달하였다는 말은 사람들이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몇 줄의 상소를 올리자 대신과 예관은 놀랍고 두려워서 감히 말을 못하였고, 상은 그 말을 믿어 다시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괴망스러운 박상의란 자가 당초 묏자리를 간심할 때 참여하지 못했던 까닭에 자우의 설에 부회하니, 여러 술관들이 서로 힐난하고 다투며 자기의 설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도 대신과 예관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어느 설이 옳은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청오경(靑烏經)》이나 《금낭경(金囊經)》 같은 술법은 본래 이해하기가 어렵고 이치로서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이다. 포천(抱川)의 묏자리는 산은 휘감아 돌고 물은 굽이쳐 흐르며 북풍을 가리고 남쪽을 향한 곳으로 조금도 결점이 없었으니, 참으로 국장(國葬)을 쓸 만한 곳이었다. 난리를 치른 뒤로 민력이 남김없이 소진되었으니 5천여 명이 40일 동안 공들인 곳을 어떻게 헛되이 버릴 수 있겠으며, 다섯 달의 기한은 넘길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들어 힘껏 간청해야지 후일의 화복(禍福)을 마음 속으로 따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선왕조 때 간신들이 산릉(山陵)의 일을 가지고 죄를 얽어 살육한 것만을 생각한 까닭에 입을 다문 채 한결같이 예재(睿裁)만을 품하였고, 위에서도 또한 이치로 결단하지 못하고 섭정국이문통(李文通) 등에게 와서 간심해 주기를 간청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다섯 달의 기한이 어느새 지나갔고 중외의 인심이 흉흉해졌다. 심지어는 세 곳에 터를 잡아 일을 시작하였다가 바로 그만두기까지 하였으니, 천하 만고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과연 공경스럽고 조심스럽게 하여 일호의 미진한 점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구(鄭逑)의 상소는 충성을 다 바쳐 숨김이 없었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훌륭한 상소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채용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 【태백산사고본】 78책 12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121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재정(財政)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사학(史學)

  • [註 176]
    사신은 논한다. : 이 기사 뒤에 정구의 상소에 관한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월 4일(갑진) 정구 상소 뒤로 옮겨야 마땅할 듯하다.

○備忘記, 傳于尹根壽曰: "葉靖國, 通解地理。 如此之人, 得見爲難。 欲問宮闕布置形勢, 措辭請留經理, 則經理卽令留之, 而也自以爲, 我乃軍門管下, 非經理所挽留, 欲隨西下云。 卿宜往見, 致予請留繾綣之意可矣。 且此術官等, 爭其術, 互相是非, 誰知烏之雌雄者? 但予則常以爲我國, 本無術士, 寧有曉達地脈哉? 今宜以術官相爭之言, 往質於之前, 請親往看因山之形, 其吉凶是非, 自可知矣。 卿與相知, 且善語, 可以親自問答, 故如是言之。"

【史臣曰: "山陵, 國之大事也。 所當致敬致謹, 不敢有一毫未盡之事也。 必擇其山脈之縈回, 水勢之屈曲, 藏風向陽, 無空缺處, 乃可用耳。 若其方位去來之吉凶, 年月日時之拘忌, 特末也、僞也。 凡匹婦匹夫, 有命定於初服, 而貧賤富貴, 無非在天, 難可以徼福於風水之間矣, 而況國祚長短, 王室隆替, 此何等事, 而區區專諉於風水, 而必合方位去來年月日時, 而後用之乎? 若果是國祚可延, 王室可隆, 則聖人必先詳說之矣。 我聖上, 聰明睿智, 天縱冠古, 其於送終之禮, 必盡禮文, 而今玆國恤, 已命大臣禮官, 奔走審定, 擇其山脈縈回, 水勢屈曲, 藏風向陽, 無空缺處, 而徵發八道之軍, 監董就役, 死傷者幾七十人, 而五千餘名, 役過四旬, 而功已就矣。 夫朴子羽者, 粗識文字, 而曉解地理, 則人無聞者, 而且逞己能, 遽進數行之疏, 大臣禮官, 愕眙惶駭, 而不敢言, 自上信惑, 而命下更議也, 怪妄之朴尙義, 自以當初, 不與於看審之時, 故附會子羽之說, 而諸術官, 相與爭詰, 互相矛盾, 而大臣禮官, 相顧看面, 無以決定其說。 靑烏。 錦囊之術, 固難得解, 而此亦可以理斷。 抱川之山水, 則縈回屈曲, 藏風向陽, 無少空缺, 眞國葬可用之地矣。 亂後民力, 竭盡無餘, 五千名四十日之役, 豈可空棄, 而五(日)〔月〕 之期, 不可踰越, 以此力爭, 而他日禍福, 則有不可計較於心中矣。 皆以先朝, 奸臣構陷殺戮於山陵之役, 故含糊循默, 一稟睿裁, 而自上亦不能以理決斷, 懇請葉靖國李文通等, 往來看審, 而莫適所從, 五月之期, 倐然已過, 而中外人心, 洶洶不定, 至於三處, 就役而旋棄, 天下萬古, 寧有是事耶? 果可謂致敬致謹, 無一毫未盡之事耶? 善乎鄭逑上疏, 竭忠無隱, 眞可謂鳳鳴朝陽, 而不得見用, 良可惜哉!"】


  • 【태백산사고본】 78책 12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121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재정(財政)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