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사도 도체찰사 겸 도원수 의정부 좌의정(四道都體察使兼都元帥議政府左議政) 이항복(李恒福)이 남방에서 올라왔다. 상이 별전(別殿)에서 인견(引見)했는데 동부승지 민중남(閔中男), 가주서(假注書) 변응벽(邊應壁), 기사관(記事官) 2인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남방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라·충청 두 도를 순심(巡審)하였으나 경상도는 소명(召命)이 계셨으므로 미처 순심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주사(舟師)를 보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에 이순신에게 있을 적에 보았는데, 그때엔 배의 수효는 많았으나 병사의 수가 부족하여 격군(格軍)을 충정한 배가 많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누어 배치된 것이 일정한 수효가 있고 격군의 충정도 잘 정제되어 있는 듯하였습니다만, 원수(元數)가 단약한 것이 우려됩니다. 조정을 떠나던 날 전교하신 봉수(烽燧)에 관한 것을 말씀드리면, 양남(兩南) 연해 지방의 봉수가 간격이 너무 먼 것 같아서 지금 두 곳을 더 설치하게 하고 잘 거행하도록 신명(申明)하였으니, 설령 사변(事變)이 있더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성(京城) 근처는 어렵습니다. 또 금년의 삼도(三道) 농사는, 밭곡식은 충실치 못하였습니다만 흉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논농사는 앞으로 7∼8월 사이에 풍재(風災)만 없다면 결실이 잘 될 듯한데 성패(成敗)는 바로 여기에 달렸습니다. 혹 풍년이 든다면 백성들이 그래도 의지할 바가 있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 비가 많지 않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폭우가 내린 적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오면서 본 것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냇물이 넘치거나 논밭이 무너져 떨어져 나간 것은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간(開墾) 상태는 어떠했는가?"
하니, 답하기를,
"작년은 재작년보다 나았고 금년은 작년보다 낫습니다. 다만 남방의 물력(物力)이 매우 모자라는 형편임을 지난번에 이미 차자를 올려 아뢰었는데 이번에 소미(小米)를 포(布)로 바꾼 것이 8백 동(同)이나 되니, 판탕이 극심한 이런 때 징수(徵收)가 이러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와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심과 방비에 대한 일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방비는 시원치 않았으나 이미 마친 일은 그래도 두서(頭緖)가 있었습니다. 충청도의 인심은 전라도 같지는 않았습니다. 전라도 사람은 본디 성질이 강한(强悍)하고 쉽게 동요될 뿐 아니라 물력(物力)을 쓰는 것이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만이 요역(徭役)이 갑절인가?"
하니, 답하기를,
"하삼도(下三道)는 평시에도 부담이 많았지만 임진년 난리에 전라도만 무사했던 까닭에 서로(西路)의 모든 요역이 오로지 이 전라도 지방에 부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세가 대족(世家大族)이 이 지방에 많기 때문에 군량미 등을 거둘 때도 있는 힘을 다 기울였는데 정유년 이후 변란이 끝난 뒤에도 차역(差役)이 여전하므로 물력(物力)이 고갈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흉적이 온다면 어떻게 방어하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소규모로 온다면 방어할 수 있겠지만 대규모로 온다면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왜적은 천하에 대적하기 어려운 적이다. 임진 왜란 때 천하의 힘을 동원하였지만 어디 당하겠던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전선(戰船)은 어찌해서 패몰한 적이 있었는가?"
하니, 답하기를,
"배 위에서 무력을 쓸 수 없기 때문에 패한 것입니다. 신은 용맹한 장수를 수군의 장수로 삼았으면 합니다. 오로지 익숙한 사람이라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데, 각진(各鎭)의 첨사(僉使)나 만호(萬戶)가 타는 배에는 숙련된 뱃사공을 돌려가며 교체시키기 때문에 이내 서툴게 됩니다. 아무리 병선(兵船)이 있더라도 진실로 뱃사공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성패는 여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統制使)는 어떤 사람이던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본디 그 사람을 알고 있는데 영민하고 비범하며 날카로운 기상이 있습니다. 다만 처음엔 사졸들이 물에 익숙하지 못하여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그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자못 진정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장수는 수군 장수로서의 재능과 육군 장수로서의 재능이 각기 달랐는데, 이시언(李時言)은 수전(水戰)에도 능한가?"
하니, 답하기를,
"이시언은 육전(陸戰)을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는 용맹을 믿기 때문이다. 지난번 사직을 청하였는데, 지금은 병이 없는가?"
하니, 답하기를,
"심하게 아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바닷가에 오래 있게 되면 반드시 상독(傷毒)을 받기 마련입니다. 신이 경도(鯨島)·노량(露梁) 등지에 며칠 동안 있어 보았는데 바다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으며 옷이 다 젖었습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을 얻게 됩니다. 또 양남(兩南)의 해안은 거리가 매우 멀어 동래(東萊)에서 해남(海南)까지 거의 1천여 리가 되는데 그 사이의 진소(陣所)가 개의 어금니처럼 서로 엇물려 있으므로 부산(釜山)·경도·고금도(古今島)가 아득하여 서로 접속되지 않음은 물론 적이 오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비하지 않는 곳이 없고 분치(分置)하지 않는 곳이 없게 하라. 부산에서 진도(珍島)·비인(庇仁)·남포(藍浦) 등지에 이르기까지는 대부분 적이 쳐들어 올 만한 곳이니 모두 요해처(要害處)를 골라서 방어하라. 또 대마도에서는 부산이 매우 가까우므로 밤에 바다를 건너와 몰래 습격한다는 말이 전부터 있어 왔다. 공갈하는 말이지만 대마도는 뱃길로 한나절 거리라고 하니, 순풍(順風)을 만난다면 기습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지금 수종(水宗)을 정탐하는 사람이 연락 부절이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정탐(偵探)할 수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대담한 자가 없으면 어렵습니다. 강항(姜沆)이 나왔으니 틀림없이 적의 실정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어떻게 알겠으며 그의 말을 어떻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답하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은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하문하였으나 동병(動兵)의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정원이 들은 바는 어떠하였는가?"
하니, 승지 민중남(閔中男)이 아뢰기를,
"형편으로 보아 동병하지 않을 듯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민중남이 답하기를,
"왜적 중 가강(家康)이란 자가 있는데 청정(淸正)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잘 모른 것이다. 왜적의 간사한 꾀는 그 부하 졸개도 오히려 모르는데 강항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왜적들은 은밀하게 맹세하면 부자 형제 사이라도 누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를 훈련하는 일은 반드시 없을 것이지만 그 백성들은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군사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할 것이요, 적의 움직임 따위는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의 형편으로 말하건대, 그들이 이것으로 그칠 것이라는 말은 기필코 그럴 리가 없다. 내년에 나온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어찌 끝내 결말(結末)이 없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지난날 많은 무리를 동원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사망자를 냈고 수길(秀吉)도 이미 죽었으며 나라의 물력(物力)도 많이 고갈되었으므로 스스로 중지할 계획이거나 아니면 자체에서 서로 틈이 생겨 스스로 도모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어서 당장 군대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마도의 왜적은 자구 침구하여 올 것이니 남쪽 국경이 반드시 시끄러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들이 기를 쓰고 있다니 매우 큰 걱정이다. 그러나 스스로 굳건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그래도 믿을 수 있겠다."
하니, 답하기를,
"백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배는 80척에 지나지 않고 육군은 겨우 6천 명인데 경상도는 육전(陸戰)의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군이 원수(元數)도 매우 적은데 산성(山城)의 요새에 의지할 계획은 아예 하지도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
"적이 해안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적이 대규모로 온다면 접전(接戰)하면서도 병력을 나누어 해안으로 상륙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80척의 전선(戰船)을 믿고 육전(陸戰)에 쓰이는 기계들을 준비하지 않으니, 적이 마구 휘몰아쳐 공격해 온다면 어찌하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마치 분을 바르듯이 가까스로 군량을 공급하는 형편이어서 약간의 군대가 있다 하더라도 군량을 계속 댈 길이 없습니다. 안위(安衛)도 지금 두어 달 먹을 군량도 없어 장차 버티어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반드시 한 곳에 힘쓸 필요가 있다. 전자에 산성은 지킬 수 없다고 하여 모두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지킬 만한 곳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옳다. 단지 산성을 싫어할 줄만 알뿐 그것에 의지해서 지킬 줄을 모른다면 이는 구토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
하니, 답하기를,
"전라 병사 안위는 금성(金城)을 지키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듣기로 금성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지금 병사의 장계를 보건대 좋지 않다고 하였다."
하니, 답하기를,
"담양 산성(潭陽山城)은 크고도 튼튼하여 평양성(平壤城)보다 낫습니다. 힘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5분의 2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안위는 어찌하여 좋지 않다고 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성은 큰데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태조(太祖)께서 운봉(雲峯) 싸움에 승리하셨을 때 변안렬(邊安烈)에게 정병 5천 명을 주면서 ‘만일 차질이 생기거든 물러나서 금성(金城)을 지키라.’고 하셨고, 아기발도(阿只拔都)는 일찍이 ‘말은 금성에서 길러야 한다.’고 했고 주(註)에 ‘금성은 광주(光州)에 있는데 광주와 남원(南原)두 곳으로 나뉘어졌다.’고 하였는데, 생각건대 바로 이곳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기발도가 금성에 갔었는가?"
하니, 답하기를,
"운봉을 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들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변장 가운데 송희립(宋希立)·소계남(蘇繼男) 등은 다 쓸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수령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처음 지방에 도착했을 적에 매우 잘못 다스린 자는 이미 6∼7인을 아뢰어 파직시켰습니다만, 그 뒤에 역시 적격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혹 장벌(杖罰)을 가하여 견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를 체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고 전조(銓曹)가 잘 가리지 않은 탓이고 또 수령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남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상길(李尙吉)은 어떻게 정사를 다스리기에 봉명 사신(奉命使臣)들이 한결같이 그의 선정(善政)을 일컫는가?"
하니, 답하기를,
"상길은 처사가 상세하고 부역(賦役)이 균평합니다. 또 홍주 목사(洪州牧使) 우복룡(禹伏龍)도 참으로 잘 다스리는 수령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 가운데 작은 것에는 능하지만 큰 것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 상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감사(監司)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니, 답하기를,
"그 사람을 살펴보면 말은 안하지만 일을 당하면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대개 수령을 포장(褒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처음엔 잘 다스리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예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치적이 제일 좋은 자를 골라서 포상하고 그 나머지는 포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금년의 급무는 전결(田結)을 상정(詳定)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들이 마음을 쓰지 않은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난리 뒤에 원정수(元定數)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하자, 답하기를,
"수령들이 상정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요역(徭役)들을 반드시 전결(田結)에 의거하여 분정(分定)하기 때문에 사실대로 하는 고을은 부역이 매우 무겁게 되어 민원(民怨)이 한이 없게 되므로 수령들이 백성을 위하여 전결의 상정을 간략하게 합니다. 팔도(八道)가 다 똑같이 된 뒤에야 부역이 고르게 되고 백성들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노고가 매우 많다. 전에 있던 병세는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신은 본시 담증(痰症)을 앓았는데 노상(路上)에서 더위를 먹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안색을 보니 전보다 매우 좋지 않다. 이는 필시 국사 때문에 노심 초사한 탓일 것이다."
하니, 항복이 일어나 배사(拜謝)하고 아뢰기를,
"신이 올라오는 도중에 들었는데, 지난날 홍여순(洪汝諄)이 탄핵받을 때 장관(將官) 최한(崔漢) 등이 상소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지금 옥에 갇혀 형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곡절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형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죄범이 가볍지 않다. 경은 어찌하여 이 일을 말하는가? 장관들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상소하는 일이 있을 터이니 지금 경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발호할 조짐이 있게 될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발호할까 의심하시는데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지(無知)해서 저지른 망령된 행동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단한 일이건 대단치 않은 일이건 간섭해서는 안 될 일을 저들이 간섭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터이므로 통렬히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한두 사람이 집집마다 찾아다닌다고 하여 그 말을 따르겠습니까. 각사(各司)가 다투어 서계(書啓)하는 것을 보고 망령되이 사람들을 따라서 하려 한 일인데 형장을 맞다가 죽는다면 성대(聖代)의 누가 될지 모릅니다. 설령 탈루(脫漏)되는 폐단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이르기를,
"남쪽 지방에서는 무사(武事)를 단련하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전라도엔 훌륭한 인재가 많은데 경상도엔 전혀 무사(武事)를 단련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또 우리 나라엔 말이 없는데 무사(武士)는 반드시 말을 탄 뒤에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두 준비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것이 진실로 우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에도 포수(砲手)와 살수(殺手)가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수령이 간혹 단련하려고 하지만 충총(衝銃)과 염초(焰硝) 등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살수는 백성들이 기예(技藝)에 서툴기 때문에 숙달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유생들은 독서를 업으로 삼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남방의 폐습이 논의(論議)는 좋아하지만 학업에는 힘쓰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민중남(閔中男)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을 적에 이웃한 몇몇 고을이 해도(海島)에서 대나무를 많이 베어 왔는데 가을이 되면 더 많이 벨 수 있습니다. 전결(田結)에 대한 일은 수령들이 상정(詳定)하려고 하더라도 세입(稅入) 외에 쌀을 거두는 등의 일을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결이 많으면 사람들이 원수처럼 보므로 양전(量田)을 쉽사리 할 수 없습니다. 상명(詳明)한 수령을 가려뽑아 5∼6 고을을 전담시켜 결부(結負)를 자세히 살피게 한 뒤에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죽(箭竹)은 충청도에도 있다고 하니 베어서 써도 된다. 또 선왕조(先王朝) 때부터 전죽을 북도(北道)에 옮겨 심은 것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경기와 황해도 등지에 옮겨 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6책 126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77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외교-왜(倭) / 재정(財政) / 교통-수운(水運) / 농업(農業) / 사상-유학(儒學)
○四道都體察使兼都元帥議政府左議政李恒福, 自南中入來, 上引見于別殿。 同副承旨閔中男、假注書邊應壁、記事官二員入侍。 上謂李恒福曰: "南方之事何如?" 對曰: "臣巡審全羅、忠淸兩道, 慶尙則有召命, 未及巡審矣。" 上曰: "卿見舟師乎?" 對曰: "臣前於李舜臣時見之, 舟雖多, 而軍數不足, 充格之船無多, 今則分置有數, 充定格軍, 似爲整齊, 而元數單薄, 此可慮矣。 辭朝之日, 傳敎烽燧事, 大槪兩南沿海烽燧處, 相去似遠, 故今者添設兩處, 申明擧行, 雖有事變, 可以易知, 而京城近地, 則難矣。 且今年三道農事, 田穀雖不實, 亦不至於凶年, 水田則若無七八月風災, 似可登熟。 成敗在此, 倘得豐稔, 民猶有所賴也。" 上曰: "今年雨水, 無乃多乎?" 對曰: "無惡水矣。" 上曰: "一路所見如何?" 對曰: "川飜浦落, 不至甚矣。" 上曰: "開墾如何?" 對曰: "前年勝去年, 今年勝前年, 但南方物力甚耗, 曾於上箚已達。 今次小米換布, 多至八百同。 板蕩之時, 所徵如此, 民甚苦之。" 上曰: "人心及防備事如何?" 對曰: "防備則雖爲孤弱, 已完之事, 猶有頭緖。 忠淸人心, 似不至於全羅, 而全羅之人, 素强悍, 易爲搖動, 且用物力爲甚矣。" 上曰: "徭役獨倍於湖南乎?" 對曰: "下三道, 自平時亦多倚辦, 而壬辰年, 全羅獨完, 故西路凡百徭役, 專委於此道, 而世家大族, 多在於此, 故如軍糧收合, 盡力爲之。 丁酉之後, 雖經變亂, 猶依前差役, 故物用已盡矣。" 上曰: "兇賊若來, 則何以禦之乎?" 對曰: "若小來, 則猶可禦之, 大來則難矣。" 上曰: "此賊, 天下難當賊也。 如壬辰之亂, 則雖以天下之力, 何可當也?" 李恒福曰: "丁酉年蔚島、明梁島、倭船蔽海之時, 安衛以一板屋進戰, 而賊不能破。 蓋賊船小, 故易敵云耳。" 上曰: "然則我國戰船, 何以有敗沒之時乎?" 對曰: "船上不能用武, 故致敗耳。 臣請以勇將, 爲舟師之將。 唯閑習人, 可以試勇, 而各鎭僉萬所乘船能櫓軍, 更相遞代, 故旋爲生手。 雖有兵船, 苟無操舟人, 則成敗在此矣。" 上曰: "統制使, 何如人也?" 對曰: "臣素知其人, 英邁有銳氣。 但士卒, 初慮不解水事, 今則久在其處, 頗鎭定矣。" 上曰: "古之爲將者, 各有水將陸將之才。 李時言, 猶可以水戰乎?" 對曰: "李時言欲爲陸戰矣。" 上曰: "恃其勇故也。 頃爲辭狀, 今無病乎?" 對曰: "不知其甚病, 大槪瘴海久居, 必傷之道也。 鯨島、露梁等處, 臣留數日, 海霧晦冥, 咫尺不辨, 衣袖盡濕。 若不慣熟, 則必得其病矣。" 又曰: "兩南沿海, 相距甚遠, 自東萊至海南一帶, 幾至千里, 其間犬牙相入陣所, 則釜山、鯨島、古今島, 漠然不相接, 賊之來否, 不可知矣。" 上曰: "無所不備, 無所不分, 自釜山至珍島及庇仁、藍浦等處, 皆多受敵之所, 當擇其要害處防之。 且自對馬島, 至釜山甚近, 前有夜渡海潛襲之言。 此雖恐喝之說, 馬島乃半日程云, 若因順風, 則何難掩襲乎?" 對曰: "今者水宗偵探, 連絡不絶云矣。" 上曰: "我國亦可爲偵探乎?" 對曰: "無膽大者, 難矣。 姜沆出來, 必知賊情矣。" 上曰: "姜沆何能知之, 其言亦何盡信乎?" 恒福曰: "異於愚民之所聞。" 上曰: "問之, 則動兵與否, 不能知之云。 政院所聞如何? 承旨閔中男曰: "以勢觀之, 似不動兵云。" 上曰: "勢者何謂也?" 閔中男對曰: "賊有家康者, 與淸正相異云矣。" 上曰: "沆不能知矣。 彼賊奸謀, 其下卒, 猶不知, 姜沆何能知乎?" 李恒福曰: "賊中爲密盟, 則雖父子兄弟間, 亦不漏洩云。" 上曰: "治兵之事, 則必無矣, 其民皆兵, 只待傳令而已, 大槪當盡我事, 彼賊動否, 不須論也, 而以事情言之, 彼猶止於此而已, 則必無其理。 明年出來, 則雖未可知, 而豈有終無結末乎?" 恒福曰: "前日動大衆, 入我國, 或多死亡。 秀吉已斃, 其國物力亦竭, 故爲自止之計, 或自中相隔, 自謀不暇, 今不動兵, 而對馬島 倭, 則恐或數爲來寇, 南邊必擾矣。" 上曰: "彼賊務勝, 深有隱憂。 但自守之固, 則猶可恃也。" 對曰: "百分無一可恃。 舟師不滿八十隻, 陸軍僅六千, 而慶尙道, 全無陸戰計矣。" 上曰: "陸軍元數甚少, 山城據險, 亦不謀定奈何?" 對曰: "不使賊登岸, 未可必也。 賊若大來則一邊雖接戰, 必分布登岸矣。" 上曰: "是誠可笑事也。 以八十隻戰船爲恃, 而不治陸戰器械, 賊若長驅, 則奈何?" 恒福曰: "比如塗粉, 艱備供糧。 雖有若干之軍, 頗無繼餉之路。 安衛, 時無數月糧, 將不支濟云。" 上曰: "我國必致力於一處。 前者以山城不能守, 故皆以爲不關云。 自今以後, 宜擇形便可守處, 堅守則可矣。 徒知惡山城, 而不修據險節次者, 是因噎而廢食, 不可之甚也。" 對曰: "全羅兵使安衛, 欲守金城矣。" 上曰: "前聞金城最好, 而今見兵使狀啓, 不好云矣。" 對曰: "潭陽山城, 大而益壯, 優於平壤城, 不容人力而可守處, 五分之二矣。" 上曰: "然則安衛, 何謂不可乎?" 對曰: "城大而人少故也。 我太祖 雲峰之戰勝捷時, 以精兵五千, 授邊安烈曰: "萬一蹉跌, 當退保金城、阿只拔都嘗曰: ‘當牧馬于金城,’ 註曰: ‘在光州。’ 光州、南原, 分爲二地, 意者此也。" 上曰: "阿只拔都過金城乎?" 對曰: "未逾雲峯矣。" 上曰: "南方守令邊將何如?" 對曰: "邊將中如宋希立、蘇繼男, 皆可用者也。" 上曰: "守令何以不得人乎?" 對曰: "臣到界之初, 太甚不治者, 曾已啓罷六七人, 而其後亦不得人, 故或杖罰而責之, 不能盡遞矣。" 上曰: "此非他, 銓曹不擇之故也。 且求爲守令者, 不樂於南邊, 故如此矣。 光州牧使李尙吉, 何以居官, 而前後奉使之臣, 皆稱善治乎?"對曰: "尙吉, 處事詳密, 賦役均平。 且洪州牧使禹伏龍, 亦眞善治守令矣。" 上曰: "古人或有能小不能大者。 尙吉, 予未知其人, 亦可合監司者乎?" 對曰: "觀其人, 則言若不出口, 而至於當事, 則略不撓動。 大槪守令, 褒奬未穩矣。 初雖善治, 鮮克有終, 當擇聲績最著者褒賞, 而其餘則不須爲之。" 上曰: "不可無興起之道矣。" 恒福曰: "今年急務, 在於田結之詳定。" 上曰: "爲守令者, 不致意而然耶? 亂後無元定數而然耶?" 對曰: "守令非不知詳定, 而大小徭役, 必以田結分定, 故從實之官, 賦役極重, 民怨無窮, 爲守令者, 爲民從略。 必也八道同, 然後役可均, 而民可安矣。" 上曰: "卿甚勞苦。 前證如何?" 對曰: "臣素患痰證, 而路上重得暑疾。" 上曰: "觀卿容色, 大不如前, 此必以國事勞心故也。" 恒福起拜謝, 仍曰: "臣來路得聞, 前日洪汝諄被論時, 將官崔漢等, 以欲爲上章事, 方繫獄受刑云。 臣雖未詳曲折, 以未然之事, 至於受刑, 無乃過乎?" 上曰: "此輩罪犯非輕, 卿何言之〔易〕 ? 將有將官率軍陳疏之事乎! 今不懲治, 恐有跋扈之漸。" 對曰: "若以跋扈疑之, 則大不然。 此不過無知妄作, 豈是大叚事乎?" 上曰: "大段小段中, 渠輩不干之事, 如是爲之, 此必有敎誘爲之者, 故欲爲深治矣。" 對曰: "此則不然。 安有一二人家道戶說, 而從之者乎? 彼見各司交章, 妄欲隨衆而爲之。 若或杖斃, 則恐爲聖代之一累。 雖有脫漏之弊, 寬貸幸甚。" 上不答而言他曰: "南方有業武事乎?" 對曰: "全羅則多有善才者, 而慶尙道, 則全不業武云。 且我國無馬。 武士必騎馬而後, 可以試勇, 而一朝勢難皆辦, 此誠可慮。" 上曰: "南方亦有砲、殺手乎?" 對曰: "守令或欲鍊習, 而如衝銃、焰硝等物, 難以措備, 故不能爲之。 殺手則民短技藝, 無善手者矣。" 上曰: "南方儒生, 其讀書做業乎?" 對曰: "南方弊習, 好議論, 不務學矣。" 閔中男曰: "臣前爲洪州牧使時, 傍近數郡, 多斫竹於海島中。 及秋, 可以多斫矣。 田結事, 守令雖欲爲之, 稅入外收米等事, 民不堪之。 田結若多, 則視同讐斂, 故量田不可容易爲之, 而宜擇詳明守令, 專管五六邑, 細察結負, 然後遣敬差官看審可矣。" 上曰: "箭竹於忠淸道, 亦有云, 可斫取用之。 且自先王朝, 移種箭竹於此道者, 深意有在。 今或移栽於京畿、黃海等地可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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