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관찰사 윤승훈이 오랑캐를 토벌한 시말과 전과를 보고하다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尹承勳)이 치계하였다.
"호적(胡賊)을 분탕한 과정을 군관 이희길(李希吉) 등이 싸움터에서 돌아왔기에 신이 상세하게 물어보고 또 들은 것을 참고하니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어유간(魚游澗)에서 가는 길은 적지가 가장 멀기 때문에 좌위병(左衛兵)이 적지까지 들어가는 데 이틀이 걸렸고 풍산(豊山)에서 가는 길은 왼쪽 길보다 조금 가까운 까닭에 우위병(右衛兵)이 적지에 들어가는데 하루가 걸렸으며, 무산(茂山)에서 가는 길은 다른 길보다 더욱 가까우므로 중위병(中衛兵)은 이달 【4월이다. 】 14일 초저녁에 출동하였습니다.
15일 평명(平明)에 세 갈래로 간 군사가 일시에 나아가 약속대로 좌우병은 초면(初面) 부락 뒷산에 매복하여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중위병과 우위병은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도 역시 중위병(中衛兵) 속에 있었습니다. 앞뒤에서 합세하여 적들이 일망타진될 듯하였는데 차유령(車踰嶺) 아래와 기우동(祈雨洞) 어귀에 호적(胡賊)이 보낸 복병(伏兵) 4∼5명이 있다가 우리의 척후병을 보자마자 즉시 달아났습니다. 이는 평소에 우리들이 공격해 올까 두려워서 의례적으로 매복한 것으로, 이번에 우리들의 출동 시기를 미리 알아서 매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복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군사 행동이 누설되어 각 부락의 적들은 일시에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세간살이와 가축 및 잡물 등은 미처 갖고 가지 못했습니다. 당초에 신이 각 진영에 영(令)을 전하여 군중에서 노획한 잡물 등은 노획한 자에게 각각 나누어 주고 장관(將官)이 갖지 말도록 하였으므로 모든 장관들은 하나같이 약속대로 하였습니다.
그 밖의 잡곡이나 각종 기구들은 불을 놓아 태우도록 하였는데 호적들의 집은 흙을 발라 매우 견고하여 지붕에 이는 개초(蓋草)는 다 타도 사방 벽은 불에 타지 않았으므로 영을 내려 군졸 가운데 도끼를 가진 자가 때려 부수고 다시 태워 한 칸도 남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장주 부락(張主部落)에서 마을외 부락(亇乙外部落)까지 무려 1천여 집을 한꺼번에 태워버리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고 사기는 배가되었습니다. 적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남녀 노소가 모두 흩어져 산 위로 올라가 바라보고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움 속에 묻은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이미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城寨)도 다 불태웠습니다. 이 호적(胡賊)은 강성(强盛)하여 장주 부락으로부터 마을외 부락까지 40여 리에 좌우로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그 안은 아주 넓습니다. 토지는 비옥하고 그 가운데로 큰 냇물이 흐르며 모든 부락들은 그 물을 끼고 살고 있습니다. 집들이 즐비하고 살림의 넉넉함은 물 아래 있는 다른 호적들과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다 쓸어버리고 빈터를 만들고 나니 보기에 장쾌했습니다.
분탕을 끝내고 군사들을 거두어 진을 치니 해가 이미 저물었습니다. 적중(賊中)에서 밤을 지내다가는 뜻밖의 변이 있을까 염려되어 삼위(三衛)를 잇달아 회군하도록 하여 곧장 풍산(豊山)으로 향해 회군하는데 10 여 리를 오니 해가 지고 달도 없어 캄캄한데 호적의 기병(騎兵)이 벌써 우리 뒤를 바짝 따라왔습니다. 경포수(京砲手)와 정예(精銳)한 토병(土兵)을 뒤로 돌려 그들과 싸우면서 행군하다 보니 회군의 속도가 빠르지 못하여 밤새도록 계속 행군하였습니다.
16일 유시(酉時)에야 비로소 풍산보(豊山堡)에 도착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적병은 돌아가지 않았으며 이날도 두세 차례 접전(接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적병은 애당초 추격하기 위해 모아진 군사가 아니고 우리가 소탕할 때 산속에 숨어 있던 여러 종족들이 우리들이 회군하는 것을 보고 여기저기서 나와 우리의 뒤를 쫓는 자들로,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군이 포를 쏘고 싸우려고 하면 물러나고 우리가 군대를 거두어서 행군하면 즉시 뒤쫓아 올 뿐 별로 큰 교전이 없었기에 사상자가 많이 나지 않았는데, 출신(出身) 3인과 포수 4명이 전사했습니다.
대체로 이번 싸움은 포수가 아니었다면 전승(全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니 그 공이 가장 많으며 그 다음은 사수(射手)입니다. 어유간에서 마을외까지와 마을외에서 풍산까지의 3 백여 리를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횡행(橫行)했으며 각 부락의 종족들은 넋을 잃고 멀리 도망쳤을 뿐 아니라 이웃 부락의 적들과 이미 배반했던 회령 번추(會寧藩酋)까지도 요즈음 와서 모두 항복하려고 하니, 이는 실로 도(道) 전체의 행운입니다.
참괵(斬馘)한 수를 말씀드리면, 창황중에 베어 형제가 분명치 않은 것을 제외하고 좌위(左衛)가 59괵(馘)이고 중위(中衛)가 18괵과 생포가 1명이며, 우위가 33괵이고 병사(兵使) 관하(管下)가 5 괵인데, 병사가 이미 올려보냈습니다. 각 위(衛)의 군공(軍功)은 곧 뒤따라 마련해서 계문(啓聞)하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76책 125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68면
- 【분류】인사(人事) / 군사(軍事) / 외교-야(野)
○咸鏡道觀察使尹承勳馳啓曰: "賊胡焚蕩節次, 大槪臣軍官李希吉等, 自戰場回還, 臣詳細訪問, 參以所聞, 則魚游澗之路, 距賊境最遠, 故左衛之兵, 入虜地, 經二夜, 豐山之路, 比左路稍近, 故右衛之兵, 入虜地, 經一夜。 茂山之路, 尤近於他路, 故中衛之兵, 本月 【四月也。】 十四日初昏行師, 十五日平明, 三路兵一時俱進如約。 左衛兵設伏於初面部落後山, 把截遁歸路, 中右兵馬, 自前面入攻。 兵使李守一, 亦在中衛, 前後合勢, 似無網漏之賊, 而車踰嶺底及祈雨洞口, 賊胡所送伏兵, 各有四五名, 見我斥候, 便卽北走。 此則在平時, 畏我加兵, 例設伏路之兵, 非預知師期, 而設伏者也。 緣此伏兵, (世)〔泄〕 漏兵機, 各部之賊, 一時登山, 家藏雜物及頭畜, 未及帶去。 當初臣, 傳令于各陣, 軍中所獲雜物, 各其獲者分給, 將官毋得自取, 故諸將一依約束。 其他雜穀各樣器具, 縱火焚燒, 胡家塗土甚固, 屋上苫蓋雖燒, 四壁則例不付火, 故令軍卒中持斧者, 打破再燒, 無一架遺存, 自張主部落, 至亇乙外部落, 無慮千餘家, 一時焚蕩, 烟焰漲天, 士氣自倍, 賊不敢近, 壯弱男女, 散登山上望見, 號哭而已。 至於埋窖穀物, 亦皆撥開燒火, 已種之田, 盡行踏損, 亇乙外城寨, 亦爲焚燒。 此賊强盛, 自張主部落, 至亇乙外部落, 四十餘里, 左右有高山絶壁, 其中寬敞, 土地膏沃, 中有大川, 諸部夾水而居, 房屋櫛比, 家家富饒, 非水下諸胡之比, 而俄頃之間, 掃地一空, 所見壯快。 焚蕩旣畢, 斂兵結陣, 日已晡矣。 經宿賊中, 慮有意外之變, 三衛鱗次回軍, 直向豐山, 行到十餘里, 日沒月黑, 賊之追騎, 已躡其後, 以京砲手及精銳土兵捍後, 且戰且行, 故不得快回, 以致達夜, 十六日酉時, 始到豐山堡, 賊兵終始不退, 此日亦再三接戰。 但此賊, 非自初聚兵, 必欲追擊者, 當其焚蕩之時, 諸種散伏山間, 見我回軍, 處處竊發追躡, 其數不多, 故我兵放砲欲戰, 則退去, 收兵而行, 則旋卽追來, 不至大段交戰。 以此得免死傷之患, 而出身三人, 砲手四名戰亡。 大抵今此之戰, 非砲手未能全勝, 其功最多, 射手次之。 自魚游澗, 至亇乙外; 自亇乙外, 至豊山, 其間三百餘里, 橫行無礙, 各部諸種, 禠魄遠遁, 至於隣部之從賊者, 會寧藩酋之已叛者, 近日皆欲納降, 實是一道之幸也。 斬馘之數, 則除蒼黃所斬無輪郭者外, 左衛五十九馘, 中衛十八馘, 生擒一名, 右衛三十三馘。 兵使管下五馘, 兵使已爲上送, 各衛軍功, 隨後磨鍊。 啓聞。"
- 【태백산사고본】 76책 125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68면
- 【분류】인사(人事) / 군사(軍事)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