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이산해와 남방 방비책·마정·군공·봉화법·도적 대책·관왕묘 건립 등의 문제를 논의하다
좌의정 겸 도원수(左議政兼都元帥) 이항복과 영의정 이산해를 인견하였다. 【도승지 유희서(柳熙緖), 가주서(假注書) 이욱(李稶)·권태일(權泰一), 겸 춘추(兼春秋) 이이첨(李爾瞻), 봉교(奉敎) 김선여(金善餘)가 입시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좌상의 병은 무슨 증세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어떠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처음 담증(痰症)이었는데 지금은 상기(上氣)가 주가 되었기 때문에 심기(心氣)가 허약해지면서 정충증(怔忡症)이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여러해 동안 국사를 위해 힘쓰느라 질병이 난 것이다. 내려갈 적에 의관(醫官)을 데리고 가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의관의 숫자가 적은데다가 정부 약방(藥房)에 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의술(醫術)을 모르니 데리고 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능숙한 의원을 데리고 가라. 외사(外司)에 약(藥)이 없으면 내약(內藥)을 가지고 가라. 전라도로 먼저 가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먼저 호남으로 갔다가 보리가 익은 다음 영남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성식(聲息)이 있는 곳이 있으면 즉시 책응(策應)해야 하기 때문에 예정(豫定)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들은 바에 의하면 남방의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을 얼마나 조치했다고 하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바다를 방어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있는데 전선(戰船)은 3도(道)를 합쳐 모두 80여 척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80여 척이 모두 판옥선(板屋船)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판옥선입니다. 소선(小船)은 정수(定數)가 없기 때문에 판옥선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선 하나마다 소속되는 소선의 수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판옥선은 아무리 작아도 속선(屬船)이 2척은 있어야 되는데 1척도 없는 실정입니다.
지난번 육군을 조발하여 벌목(伐木)하느라고 많은 공역(功役)을 허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재(船材)는 바닷가의 모든 섬에 무한히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선재는 이제 머지 않아 죄다 없어질 형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전죽(箭竹)은 닥나무와 같아서 벨수록 무성하여지지만 선재(船材)는 50∼60년이 아니면 성장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남(兩南)의 연해에는 벌레가 먹기 때문에 더욱 쉽게 썩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도 들었는데 그 벌레의 모양이 어떠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모양은 굼벵이와 같고 진액은 콧물같은데 연기를 쐬면 조금 덜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겠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이는 1∼2인의 하루 역사(役事)에 해당되는데 자주 하면 벌레먹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80 척에 격군(格軍)의 숫자가 다 충원되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정착하여 사는 집이 없어서 짐을 싸놓고 앉아 있는데 이들을 격군으로 삼았기 때문에 임진년 이후 전라도 연해에 사는 백성의 원고(怨苦)가 제일 극심합니다. 그래서 격군이 되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비변사에서는 3번으로 나누어 하면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사사로이 보내온 통문(通文)을 보니 초운(初運)은 교체시킬 수 있어도 2∼3운(運)으로 갈수록 점점 교체시키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동궁(東宮)께서 갑오년056) 에 남방에 계실 적에 연해를 순심(巡審)하시다가 충청 수영(忠淸水營)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그날 한밤중에 온성에 통곡 소리가 진동하였으므로 사연을 물어보니, 한산도에서 소식이 왔는데 죽은 사람이 83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처자가 모두 통곡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이 이렇게 많기 때문에 기필코 사력을 다하여 모피(謀避)하려 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격군이 고통스러움을 느끼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용동(聳動)시키는 일을 거행해야 하는데 춘신(春汛)이 이미 박두하여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항복이 아뢰기를,
"더욱 극심한 것은 격군입니다. 사부(射夫) 포수(砲手)에 있어서도 일체 수군에 편입시켜 집을 돌아볼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연해의 무사들이 모두 서울로 도피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격군뿐만이 아니라 군량 등에 대한 일도 조판(措辦)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화포(火砲)가 제일 필요한데 주조(鑄造)하여 만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왜선(倭船)은 작은데 우리의 배는 크다고 한다. 저들이 우리처럼 큰배를 만들어 대포를 싣고 오지는 않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황윤길(黃允吉) 등의 말을 들으니 우리의 배보다 큰 적선(賊船)이 매우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진년 이후 접전처(接戰處)에서는 큰 배를 못보았는데 황신(黃愼)이 판옥선(板屋船)을 타고 바다를 건너갔을 적에 왜인들이 그 제도를 보고 좋아하였으나 느리고 무거운 것을 싫어하여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지난번 패전 때 우리의 배가 적에게 나포되어 간 것이 많고 포로로 잡혀 간 우리 백성 가운데 배를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이 또한 많으니, 과연 상의 분부처럼 지극히 우려 된다고 하겠습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배를 부림에 있어 우리는 삼풍(三風)을 쓰는데 저들은 일풍(一風)을 쓸 뿐 횡풍(橫風)은 쓰지 않습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지금은 필시 배웠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사(將士)들에게 힘써 싸울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군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임진년의 경우에는 견고하고 치밀한 대선(大船)이 있어도 믿고 싸울 수가 없었는데 힘을 다하다가 패하였다는 말은 못들었습니다. 배 안이 황란하여 한쪽이 비게 되면 저들이 우리 배로 뛰어 올라와 공격했기 때문에 아군이 매번 패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각기 힘을 내어 싸울 수만 있다면 배를 탔을 때는 육지와 달라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적이 대거 침입하여 오면 막기가 어렵겠지만 대마도의 노략질하는 왜적이라면 제제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의 장수가 어떤지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군함이 다소 있기는 하지만 대패(大敗)한 뒤이어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인심이 임진년 때만 못한 것인데,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이런 농사철에 아문(衙門)이 많이 내려가면 백성들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부득이한 일 이외에는 모두 농사철 뒤에 하도록 하라."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봄보리는 때를 놓치면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농가에서는 보리로 여름을 넘기는 밑천을 삼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방어하는 일 때문에 가는가, 조정의 명 때문에 가는가, 무슨 일로 가는가? 그곳에 가게 되면 반드시 폐단이 있게 되어 백성들이 지탱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남방뿐 아니라 온 나라가 이미 고갈된 상태입니다. 적이 육지에 상륙하면 방어하기가 해중(海中)에서보다 더 어렵습니다. 아군은 말을 타야 싸울 수 있고 보병으로는 작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판출할 국력이 없습니다. 목장의 말들은 모두 모축(耗縮)되어 한 목장에 50∼60필이 있는 곳도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목장의 말이 유명무실하다는 것은 세시(歲時)의 우마적(牛馬籍)에 의거하여 위에서도 알고 있다. 한 섬에 단지 암말만 있어 소무(蘇武)가 숫양을 기르던 것과 같으니057) 어떻게 번식시킬 수가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국초(國初)에는 목장이 2백여 군데나 되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평일 내가 그 장부를 보았는데 지금은 그 숫자가 줄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국초에는 목장의 말이 7만 필이었고, 중종조(中宗朝)에는 3만 필이었으며, 명종조(明宗朝)에는 1만 필이었습니다. 감목관(監牧官)을 처음 설치할 적에는 1만 8천여 필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목관은 유익한가, 아니면 용관(冗官)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처음 설치했을 적에는 매우 효험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복시(司僕寺) 관리의 말에 따르면 그때 번식시킨 것이 5∼6천 필에 이른다고 합니다. 말이 없으면 무사들이 전장에서 무용(武勇)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 평시에도 국력이 중국처럼 사서 지급해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다만 값을 싸게 하면 사람들이 쉽게 살 수 있을 것인데 지금은 말 값이 매우 뛰었습니다.
평안도의 경우, 포살수(砲殺手)와 수하(水下) 무사들을 시재(詩才)할 때의 장계를 보면 논상을 한 적이 있는데, 남방은 없습니다. 소신이 내려간 다음 시재를 위하여 가지고 간 물품이 없이 상만으로 시재를 더 실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직부전시(直赴殿試)058) 하게 하면 남방 사람들이 용동될 것입니만,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내려가서 인재를 선발할 적에 국사에 마을 다하는 자가 있거든 작은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구애하지 말고 각별히 포장(褒奬)하도록 하라."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군관(軍官)으로 유치(留置)시키겠습니다. 그러나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공을 많이 세우면 군진(軍陣)을 떠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에 이것이 도리어 민망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재의 권장에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수령들 가운데 현부(賢否)가 뒤섞여 있는지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 무사 가운데 장수가 될 만한 자가 반드시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이것이 경이 제일 힘써야 될 일이다. 국사에 마음을 다한 사람이 도리어 죄구(罪咎)를 받으니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은 관재(官災)를 당하는 근본이다.’라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분언(憤言)인 것이다. 반드시 농사에 힘을 쓴 뒤라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농사에 힘쓰지 않으면 양장 경솔(良將勁卒)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싸울 수가 있겠는가. 경은 감사와 수령을 계책시키라. 농사는 때가 있는 것이니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인재를 권장하는 것은 소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반드시 위에서 특명(特命)을 내린 뒤에야 용동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외에 다른 조항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공(軍功)에 거짓이 많게 되면 공이 있는 사람이 도리어 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말은, 상은 반드시 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요 거짓된 자를 지적하여 추개(追改)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당초에 마련한 곡절을 신이 제일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진(各鎭)의 거짓을 어떻게 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훈정(訓正) 이하는 유사가 하고 당상(堂上)은 위에서 가자(加資)하십니다. 서로(西路)에는 순안진(順安鎭)이 제일 크고 접전도 제일 많아서 군공도 다른 곳보다 많습니다. 처음 수문장(守門將)에 제수한 것은 적을 사살(射殺)했다는 이유에서였는데 그뒤에는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직접 전장(戰場)에 나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하(管下)에서 수급을 베면 불러모은 것을 공으로 직(職)을 제수하였는데, 그뒤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적을 사살한 사람도 수급 하나를 벤 경우에 해당시켜 승직(陞職)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제장(諸將) 가운데에는 인정(人情)이 오가는 즈음에 4∼5명을 사살한 경우에도 다 주었던 까닭에 백신(白身)으로 훈정에 이른자가 있었습니다. 그뒤 관하에서 벤 수급을 제목(題目)으로 가선 대부에 오른 자도 있었고, 한 명의 왜적을 사살하지 않고도 훈정에 이른 자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살한 일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했었지만 내가 매번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전장에 임하여 수급을 베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장(賊將)을 사살할 수 있다면 이는 옛말에도 있듯이 ‘세 개의 화살로 천산을 평정하고, 한개의 화살로 승부를 결정했다. [三箭定天山一箭決勝負]’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국가에서 논공(論功)할 때 이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사살했다고 하여 논공한다면 허위만 조장시킬 뿐이다.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의논한 바 있었는데 아직까지 하지 않았는가? 《여지도(輿地圖)》를 보건대, 우리 나라에 사당을 세운 것이 외방에 많이 있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전조(前朝)에서는 원충갑(元沖甲)의 사당을 세웠었고, 진주(晉州)에는 김천일(金千鎰)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민간에서 사사로이 세운 사당은 있지만 국가에서 명하여 세운 것은 없다. 이 일에 대해서는 문견(聞見)을 헤아려서 하라."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이 내려가는 것은 단지 군무(軍務)를 위해서인데 시폐(時弊)의 측면에서 말씀드린다면 패군(敗軍)에 관한 율(律)은 늦추고 머뭇거린 죄는 엄하게 할 작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째서인가?"
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적과 싸우다가 패한 자는 군대를 복멸시켰다는 죄를 받고, 군대를 거두어 도망간 자는 군대를 온전케 했다는 것으로 벌을 면하였습니다. 지금은 머뭇거린 데 대한 율을 무겁게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경이 절제하기에 달려 있다. 적을 헤아린 다음에라야 변에 대응할 수가 있을텐데, 양남(兩南)의 병세(兵勢)와 형세 그리고 도로에 대해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대마도에서 배를 타고 진시(辰時)에 출발하여 순풍을 만나면 오시(午時) 말에는 부산에 닿을 수 있습니다. 바람이 순하지 않더라도 미시(未時)나 신시(申時) 사이에는 부산에 도착할 수 있는데, 정동풍(正東風)이 순풍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주즙(舟楫)에 서툴다는 말은 나도 들었다. 주즙이 그들의 장기인데 어찌 우리 나라만 못할 리가 있겠는가. 믿을 수 없는 말이 아닌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이 말은 신이 익히 들은 것이어서 믿을 만합니다. 저들이 전라도를 향한다면 순풍이라 하더라도 한 번 돛을 올려 가지고는 도달할 수 없고 중간에 바다에서 유숙(留宿)을 해야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도(鯨島)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순천(順天) 앞바다에서 멀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충청도로 향하면 전라도에서 알 수 있지만, 전라도의 적을 충청도에서도 알 수가 있는가?"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서해(西海)에는 해로가 하나 뿐이니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우리 나라의 포작한(鮑作干)을 많이 잡아갔기 때문에 해로의 형세에 대해 허실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인데, 먼저 충청도를 침범하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적은 필시 전라도를 먼저 침범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적이 중국을 침범하려면 산동(山東)의 제(齊)·노(魯) 지방을 이곳에서 모두 갈 수가 있다."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중국을 침범하려면 충청도에서 가는 것이 쉽습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창성 부사(昌城府使) 오정방(吳定邦)이 금주위(金州衛)의 수로와 해랑도(海浪島) 및 충청도 수로에 대해 역력히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랑도라고 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바로 중국의 판적(版籍)에 들어 있는 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은 무슨 할 말이 있거든 좌상에게 말하라."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소신은 미열하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소신은 눈이 흐려 한쪽 눈은 소경과 같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담(痰)이 위로 치솟아 병세가 가볍지 않습니다. 항복이 내려가고 소신 혼자 있게 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항복이 있을 적에 복상(卜相)하여 들이도록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매우 합당한 말이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요시라(要時羅)와 전후의 왜인을 군문(軍門)이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왜인이 또 오면 대답할 적에 어긋나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인이 우리 나라에 오지 않고 중국 장수에게로 갔기 때문에 요리사를 군문이 데리고 갔고 전후 왜인도 군문이 데리고 간 것이다. 뒤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요시라는 중국에서 복주(伏誅)되었는데 이는 군문이 포로로 바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자, 희서(熙緖)가 아뢰기를,
"군문이 요시라를 평정성(平正成)이라고 속여 바쳤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리한 말이다. 요시라는 분명히 살해되었다. 그뒤 서간을 가지고 온 왜인도 군문에게 보냈는데 어떻게 조처했는지 모르겠다. 좌상은 그 곡절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응변(應變)할 일이 있게 되면 ‘중국으로 입송시켰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모른다.’라고 해야 된다. 그리고 ‘중국의 아문이 모두 우리 나라에 있다.’고 하면 위세(威勢)가 있게 될 것이다. 도원수(都元帥)가 내려가면 군대가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군대가 없습니다. 아병(衙兵)이 1천 명도 못되어 보잘것없기가 따로 떨어져 있는 별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뜻밖의 변보(邊報)가 있을 경우 중간에서 지체될 걱정이 없지 않으니, 따로 군관을 정하여 올려보내라."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임진년의 경우에는 계본(啓本)이 3일이면 서울에 도착했었습니다만, 지금은 역말이 없으니 반드시 군관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보가 매우 긴급할 경우 도원수에게 먼저 알릴 필요가 없다. 다른 장수라도 반드시 군관을 차임하여 올려보내므로써 중간에서 계달하지 못하는 걱정이 없게 하라."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관하(管下)에 수십 필의 말을 세우고 싶습니다."
하였다. 산해가 아뢰기를,
"급히 보낼 변보가 있을 경우 반드시 각 고을에 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막하(幕下)의 말 하나로는 진달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변보를 알아야 책응(策應)할 수 있으니 심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군령을 엄히 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산해가 아뢰기를,
"봉화(烽火)를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우리 나라의 봉화법을 고쳐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나의 분언(憤言)이다."
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봉화가 허사로 된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울산(蔚山)에서 보성(寶城)까지 6∼7백 리 연해에 있는 봉화는 평소에도 허사가 아니었으니, 지금 구법(舊法)을 거듭 엄히 한다면 경상도에 적변이 있을 경우 전라도에서 알게 되고, 전라도에 적변이 있을 경우 경상도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사면(四面)으로 적의 침입을 받고 있는 위치인데, 불행히도 시사(時事)가 이렇게 되었다. 지난번 통보를 보니, 노추(老酋)의 아비 조씨(早氏)가 요동에서 죽었으므로 매양 일어나 복수하려 한다 하는데 어찌 우리 나라에 노략질하지 않겠는가? 조정에서는 잊어서는 안 된다. 남방에 걱정이 있어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사건이 발생한 뒤에는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하니, 희서가 아뢰기를,
"임진 왜란 때에 겉으로는 돕는 체 하면서 은근히 해를 끼쳤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성한 서적(西賊)이 우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경내(境內)의 도적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중국군이 일단 철수하면 수백 명의 토적(士賊)일지라도 주군(州郡)에서 체포할 수가 없습니다. 소신이 갑오년에 호남에 가 있었는데 5∼6월 사이에 한 걸음만 잘못되었어도 큰 변이 발생할 뻔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무슨 말인가? 나는 듣지 못하였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사람마다 도둑이 되었기 때문에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전적으로 토적을 토벌하였는데도 고부(古阜)가 다시 포위되었습니다. 관군(官軍)이 가서 토벌하였으나 번번이 패퇴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곤궁함이 극도에 이르면 황소(黃巢)·방납(方臘)059) 같은 자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중국 조정의 아문이 우리를 침책(侵責)한다 해도 진압시킨 것은 저들의 공로인 것이다. 중국군이 일단 철수해 버리면 경성(京城) 40리의 치첩(雉堞) 또한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포수를 증오하고 있는데 이는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액(軍額)이 매우 적어서 신역은 고달픈데도 늠료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하는 것이다. 군대란 잘 먹여 기르고 그들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해야하니, 모두에게 보솔(保率)을 후히 지급하여 임무를 맡겨야지 관가의 돼지 배 앓는 격060) 으로 해서는 결코 안 된다. 평시 금군(禁軍)에게는 모두 보솔을 지급하여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들을 부양하는 즐거움을 이루게 하여 왔으니, 지금도 이를 본받아 흥기하게 해야 한다. 군액이 부족하면 더 모집하여 경성으로 하여금 은연(隱然)한 형세를 구축하게 해야 한다."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난후(亂後)에 조련한 군사 중에서 포수가 제일 유익하니, 행행(幸行)할 때에도 이들로 모양을 갖추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울의 일은 영상이 비변사와 함께 힘을 기울여서 하겠지만, 외방의 일은 적을 방어하는 것 외에도 곤궁한 백성을 진무(鎭撫)하여 도적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갑오년과 을미년 사이에는 각 고을에 별장(別將)이 있었으므로, 경상도의 박기백(朴己百)은 늙었지만 오히려 도적을 잡았습니다. 지금은 병사와 수사 외에는 군사가 없으니 별장을 두루 배치하여야 합니다. 전라도에는 안위(安衛), 충청도에는 박명현(朴名賢), 경상도에는 김응서(金應瑞)가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위는 쓸 만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용감하고 힘껏 싸울 뿐만 아니라 자질도 총명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나이는 젊지만 토적(土賊)을 많이 체포하였습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이몽학(李夢鶴)의 변란 때 박명현이 세운 공을 지금도 호서(湖西)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명현이 홍주(洪州)로 들어가자 적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중국군이 철수한 뒤에는 토적이 우려스럽습니다. 이들이 만연되면 도모하기가 어려우니 계책을 써서 제거하도록 감사에게 은밀히 하서하여 각별히 체포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도에도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근일 전라도가 제일 걱정됩니다."
하니, 산해는 아뢰기를,
"모질게 하면 적이 되는 것이고, 보살펴주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하서할 적에 내용을 잘 만들라."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출신(出身)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디 출신을 말하는가?"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호남 출신은 정유년에 가업(家業)을 잃은 사람이 많은데 전주(全州)가 더욱 극심합니다. 그들은 모두 연소하고 활을 잘 쏘는데, 끝내 제대로 안정되지 못하자 점차 위언(危言)을 퍼뜨리고 있으니,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대해서는 한 가지 계책이 있다. 그들이 도적이 된 것은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쓸 만한 사람이 있거든 직(職)을 제수하라."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군관(軍官)에 차임하여 궁전(弓箭)을 지급해 주어서 데리고 다닌다면 차비(差備)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들을 수용(收用)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싶다. 이는 모두가 좌상(左相)이 지휘하기에 달려 있다. 지금은 국가가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중국군이 철수하면 서울이 공허해지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규획(規劃)과 조처를 비변사는 소홀히 하지 말라."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군량이 매우 곤란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훈련 도감은 폐치(廢置)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량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봄에 씨를 뿌려야 가을에 수확할 수가 있다. 그러니 감사와 수령을 계칙하여 반드시 농사에 힘쓰게 해야 한다. 진실로 군량을 계속 대지 못하였으므로 제갈양(諸葛亮)도 퇴군(退軍)했었다.061) "
하였다. 산해가 아뢰기를,
"관왕묘(關王廟)의 역사(役事)가 매우 거창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왕묘는 어찌하여 아직껏 완성하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희서가 아뢰기를,
"공역이 너무 거창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역이 남관 왕묘(南關王廟)와 같은가?"
하였다. 희서가 아뢰기를,
"남묘(南廟)의 역사에 비해 훨씬 거창합니다. 농사철이 다가왔으니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문(衙門)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중지하기는 어렵다. 남묘는 내가 가보았는데, 뒤에 들으니 소상(塑像)을 헐고 다시 만든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가?"
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소상이 작기 때문에 다시 고쳐 만든다고 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역사를 정지시킬 것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武將)은 말할 것도 없고 경리(經理)도 알성(謁聖)을 하지 않는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중국군이 향교(鄕校)의 전중(殿中)에서 유숙하고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힐문하니 ‘전쟁 중이라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천(端川)에 사람을 보내는 일을 대신은 알고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폐(流弊)가 단천에까지 이르렀는데 저지시키면 반드시 노할 것이다."
하니, 희서가 아뢰기를,
"경리의 차관(差官)은 폐단을 끼치니, 우리 나라 사람을 차송(差送)하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곡절을 알아야 한다. 황옥(黃玉)으로 술잔을 만드는 것이야 본래 관계가 없지만 단천에서 옥이 난다는 것을 저들이 어떻게 알았는가. 나의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지만 단천에서 은이 생산되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아는 일이니 은광(銀鑛)을 찾으려는 것은 아닌가? 중국 조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 은향(銀餉)을 독책할 것이다. 그리고 태감(太監)을 보내어 전조(前朝) 때처럼 국(局)을 설치하고 채련(採鍊)하게 하면 어찌하겠는가. 막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옥을 캔다고 칭탁하면서 은을 캘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가게 되면 반드시 은이 생산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접반사(接伴使)는 정의(情意)가 서로 통하니 접반사로 하여금 주선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은 잘 갔다오라. 훈업(勳業)을 죽백(竹帛)에 전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으니 잘 갔다오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4책 12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4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註 056]갑오년 : 1594 선조 27년.
- [註 057]
소무(蘇武)가 숫양을 기르던 것과 같으니 :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뜻. 옛날 한(漢)나라 때 소무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는데, 그때 흉노가 소무에게 양을 기르게 하면서 "숫양에게서 젖이 나면 돌려보내겠다." 한 데서 온 말.- [註 058]
직부전시(直赴殿試) : 권무과(勸武科)나 외방 별과(外方別科)에 합격한 사람이 곧 전시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 전시는 최종 시험으로 임금이 친림(親臨)한 가운데 급제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임.- [註 059]
황소(黃巢)·방납(方臘) : 황소는 당(唐)나라 말기의 난신(亂臣)으로 왕선지(王仙之)의 난에 호응하여 장안(長安)을 함락시키고 제제(齊帝)라 일컫다가 이극용(李克用)에게 패하여 자결하였음. 방납은 송(宋)나라 때 마니교(魔尼敎)를 숭봉하던 사람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인하여 봉기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여러 고을을 함락시켰으나, 뒤에 관군(官軍)에게 패배당하였음.- [註 060]
관가의 돼지 배 앓는 격 : 근심이 있어도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끙끙 앓는 것을 가리키는 속담임.- [註 061]
군량을 계속 대지 못하였으므로 제갈양(諸葛亮)도 퇴군(退軍)했었다. : 군량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맹장과 모사가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임. 촉한(蜀漢) 때 제갈양이 조위(曹魏)를 치기 위해 출동했다가 군량이 부족하여 기산(祈山)에서 후퇴한 고사가 있는데, 여기서 온 말임.○甲戌/引見左議政兼都元帥李恒福及領議政李山海。 【都承旨柳熙緖、假注書李稶、權泰一、兼春秋李爾瞻。 足足奉敎金善餘入侍。】 上曰: "左相所患, 未知何證, 今則何如?" 恒福曰: "初患痰證, 今則上氣爲主, 心氣虛弱, 怔忡尤重。" 上曰: "卿積年盡瘁, 致生疾病。 下去時, 醫官率去乎?" 恒福曰: "醫官數少, 政府藥房有一人, 而不知醫術, 故不爲帶去。" 上曰: "事知醫率去, 外司無藥, 則內藥齎去。 全羅道先去乎?" 恒福曰: "先向湖南, 麥熟後往嶺南, 有聲息處, 卽爲策應, 未能預定。" 上曰: "以卿所聞, 南方防備諸事, 措置幾何云耶?" 恒福曰: "朝廷以防海爲先務, 戰船通三道, 八十餘隻云矣。" 上曰: "八十餘隻, 皆板屋船乎?" 恒福曰: "板屋船也。 小船無定數, 故只言板屋。" 上曰: "一船所屬小船, 必有其數。" 恒福曰: "板屋雖小, 一船屬者, 小不下二船。 往者調發陸兵伐木, 故多費功役。" 上曰: "船材, 海中諸島, 無限有之乎?" 恒福曰: "船材今則可爲, 不久將盡。" 上曰: "不是細事。" 恒福曰: "箭竹, 如楮, 伐之愈茂, 船材則非五六十年, 不成。 且兩南沿海, 則蘇食故尤爲易朽。" 上曰: "予亦聞之, 其狀若何?" 恒福曰: "形如蠐螬, 溢如鼻涕, 烟燻則小歇。" 上曰: "然則易矣。" 恒福曰: "此一二人, 一日之役, 頻數爲之, 則不食矣。" 上曰: "八十船格軍, 數盈乎?" 恒福曰: "民無定家, 荷擔而坐, 以此爲格軍, 故壬辰後, 全羅沿海之民最怨苦, 以爲必死之地。 備邊司以爲: ‘分三番, 則民不苦之, 而見巡察使韓孝純私通, 則初運可以交遞, 二三運, 則漸難交遞云矣。 東宮, 甲午在南方, 巡審沿海, 入忠淸水營, 夜半滿城哭聲起, 問之則閑山消息來, 死者八十三人, 故其妻子皆哭云。 死者如此之多, 故必至死謀避。" 山海曰: "格軍, 不苦其身, 使不至太苦。 聳動之事可爲, 而春汛已迫, 似難及矣。" 恒福曰: "尤甚者, 格軍至於射夫、砲手, 一綴於舟師, 則不得顧家, 故沿海武士, 皆逃避于京中。" 上曰: "非徒格軍, 糧餉等事, 亦爲措辦乎?" 恒福曰: "火砲最關於用, 而鑄成甚難。" 上曰: "人言倭船小, 我船大。 彼無乃作吾大船, 載大砲來乎?" 恒福曰: "聞諸黃允吉等語, 賊船大於吾船者甚多云, 而壬辰後接戰處, 則不見大船。 黃愼渡海, 乘板屋船去。 倭人好其制度, 而厭其遲重, 不爲作之云。" 山海曰: "頃日戰敗時, 我船多爲賊搶去, 我民被擄中, 操舟者亦多, 果如上敎, 極爲可慮。" 恒福曰: "使船, 吾用三風, 彼用一風, 不用橫風。" 山海曰: "今則必學之。" 上曰: "大抵將士, 有力戰心。 不然則舟師不可恃。" 恒福曰: "若如壬辰, 則雖大船堅緻, 亦不足恃戰, 而力竭而敗者, 未之聞焉。 舟中慌亂, 一邊空, 則彼跳入我船擊之, 故我軍每敗。 眞能人各爲戰, 則乘船時, 與陸異矣。" 山海曰: "賊若大擧, 則難禦, 若馬島竊發之倭, 可以制之。 但未知今之將帥何如耳。" 恒福曰: "軍船之多少, 大敗之餘, 不能成形。 最悶者, 人心大不及壬辰, 愈久愈甚。" 上曰: "此農時, 衙門多數下去, 民必不堪。 不得已事外, 餘皆農後爲之。" 恒福曰: "春牟失時, 則西成不可望。 農家以麥爲過夏之資。" 上曰: "以防禦事去乎? 以 朝廷命去乎? 何事去乎? 往彼, 必將作弊, 民不能支。" 恒福曰: "非但南方, 擧國已爲殫竭矣。 賊若下陸, 則防禦難於海中。 我兵乘馬乃戰, 步兵則不能用武, 而國力難辦。 牧場馬皆耗縮, 一場五六十匹者, 亦無之。" 上曰: "牧場馬, 有名無實。 歲時牛馬籍, 自上知之。 一島只有雌馬, 如蘇武牧牴, 何能(孽息)〔孶息〕 ?" 恒福曰: "國初牧場, 二百餘處。" 上曰: "平日籍子, 予見之, 今則數縮矣。" 恒福曰: "國初場馬七萬匹, 中廟朝三萬匹, 明廟朝萬匹。 監牧初設時, 一萬八千餘匹。" 上曰: "監牧官, 有益乎? 冗官乎?" 恒福曰: "初設時, 甚有效驗, 至今司僕吏言, 其時(孽息)〔孶息〕 , 至五六千匹云矣。 無馬, 則武士不能賈勇於戰場。 平時國力, 亦不能如中國之買給。 但使價賤, 則人可易賣。 今則馬價極其騰湧, 如平安道, 則砲、殺手及水下武士試才時, 狀啓曾爲論賞, 而南方, 則無之。 小臣下去後, 試才無所持物。 若但賞以加設, 則不關矣。 直赴殿試, 南人聳動, 而自下不敢擅便。" 上曰: "卿下去, 甄拔人才, 有盡心國事者, 雖有小過, 不計, 各別褒奬。" 恒福曰: "可用者, 留置軍官。 但盡心國事, 戰功多, 則難於離陣, 故反以爲悶矣。" 上曰: "勸奬人才, 不可不致力, (令守)〔守令〕 賢否混淆, 亦必察爲。 武士中堪爲將者, 想必有之, 最卿致力處。 盡心國事者, 反速罪咎。 諺曰: ‘爲國事者, 官災之本。’ 此是憤言也, 必務農後, 他事可爲。 不務農, 則良將勁卒, 亦何能爲? 卿其戒飭監司。 守令, 農事有時, 不可不致念。" 恒福曰: "人材勸奬, 小臣亦思之, 但無可爲之事。 必自上特命之事, 然後可以聳動, 此外無他條矣 上曰: "軍功多冒濫, 有功者反不蒙賞。 此言亦欲賞必當功, 非指冒濫者, 而欲追改之也。" 恒福曰: "當初磨鍊曲折, 臣最詳知。 各鎭冒濫, 則何能盡防? 蓋自訓正以下, 則有司爲之, 堂上則自上加資矣。 西路順安鎭最大, 接戰最多, 軍功多於他處。 初授守門將, 則用射殺, 其後則不計。 渠雖不親赴戰, 管下斬級, 則以召聚功授職, 而厥後, 則不如是, 射殺者亦當一級而陞職。 諸將人情間, 射殺四五, 咸給, 故白身至訓正者有之, 後又以管下斬爲題目, 陞至嘉善者有之, 或未嘗斬射一倭, 而至訓正者。" 上曰: "射殺事, 前亦言之, 予每笑之。 臨戰雖不能斬首, 若能射殺關係賊將, 則三箭定天山。 一箭決勝負者, 古亦有之, 然國之論功, 不可以此。 今以射殺論功, 徒長虛僞矣。 李舜臣立祠事, 曾已議之, 今不爲乎? 見《輿地圖》, 則我國立祠者, 外方多有之。" 恒福曰: "前朝(元冲早)〔元冲甲〕 立祠, 晋州 金千鎰亦立祠。" 上曰: "民間私自立祠則有之, 自國家命立, 則無之。 此事聞見量爲。" 恒福曰: "小臣下去, 只爲軍務。 以時弊言之, 緩敗軍之律, 嚴逗遛之罪。" 上曰: "何也?" 福曰: "交鋒而敗者, 以僨軍有罪, 斂兵而遁者, 以全師免罰。 今宜重逗遛之律。" 上曰: "卿言是也。 在卿節制中矣。 料敵然後可以應變。 兩南兵勢及形勢道路, 衆以爲何如?" 恒福曰: "自馬島乘船, 辰時遇順風, 則午ㆍ未可泊釜山, 風雖不順, 未ㆍ申間則可到釜山。 正東風, 爲順風矣。" 上曰: "彼短於舟楫之言, 予亦前聞。 舟楫爲其所長, 豈有不如我國之理? 無乃不可信之言乎?" 恒福曰: "此言臣熟聞之, 爲可信矣。 彼若向全羅, 則雖順風, 一帆不能達, 中間經宿於洋中。" 上曰: "鯨島何在?" 恒福曰: "在順天前不遠。" 上曰: "賊向忠淸, 則全羅知之, 全羅之賊, 忠淸亦知之乎?" 山海曰: "西海惟一路, 可知矣。" 上曰: "賊多擄我國鮑作干等, 海路形勢, 虛實已知之。 先犯忠淸, 則又奈何?" 恒福曰賊必先犯全羅。" 上曰: "不然。 賊欲犯中國, 則山東、齊ㆍ魯地方, 皆可去。" 山海曰: "若欲犯上國, 則自忠淸道去, 易矣。" 恒福曰: "昌城府使吳定邦能言。 金州衛水路、海浪島及忠淸道水路, 歷歷知之。" 上曰: "海浪島乎?" 恒福曰: "乃中原版籍中人也。" 上曰: "領相如有某事, 左相處言之。" 山海曰: "小臣迷劣, 有何所言? 小臣眼昏, 一眼如盲, 小動則痰上, 病勢非輕。 恒福出去, 小臣獨在, 如不在。 恒福在時, 請卜相入之。" 上曰: "甚當。" 恒福曰: "幺時羅及前後倭人, 軍門帶去云。 倭若又來, 則對答時, 恐有牴牾。" 上曰: "倭不來我國, 來于天將處。 幺時羅軍門帶去, 前後倭人, 軍門帶去。 後聞幺時羅, 被誅於天朝。 乃軍門獻俘云。" 熙緖曰: "軍門以時羅, 假稱平正成而獻之。" 上曰: "無理之言也。 幺時羅, 則分明殺之。 其後持書倭, 亦送于軍門, 不知何以處之。 左相知其曲折, 如有應變之事, 曰將入送于天朝, 我國不知云’, 可也。 且曰天朝衙門, 皆在我國云, 則有威勢矣。 都元帥下去, 有軍乎?" 恒福曰: "無軍。 衙兵不滿千人, 草草如一別星。" 上曰: "不意有邊報, 則不無中間遲滯之患, 別定軍官上送。" 恒福曰: "壬辰則啓本, 三日上京, 今無驛馬, 必使軍官。" 上曰: "邊報太緊, 則不必都元帥先知。 雖他將必差軍官上送, 俾無中間不達之患。" 恒福曰: "營下欲立數十匹馬。" 山海曰: "邊報急來, 則必各邑有馬。 以幕下一馬, 不能達。" 上曰: "必先知邊報, 乃可策應, 不可尋常, 必以嚴軍令處之。" 山海曰: "烽火, 今則如何?" 上曰: "予以爲我國烽火可革。 此予憤言也。" 恒福曰: "烽火之爲虛事已久, 而自蔚山至寶城六七百里, 沿邊烽火, 則自平時不是虛事。 今亦照舊申嚴, 則慶尙有賊變, 全羅知之, 全羅有賊變, 慶尙知之。" 上曰: "我國四面受敵, 不幸時事如此。 頃見通報, 則老酋父名早氏, 死於遼東, 每欲起復, 豈不能作賊於我國乎? 廟堂不可忘也。 憂在南方, 力有未及, 然不可棄置。 事發之後, 不可說也。" 熙緖曰: "壬辰之變, 欲陽助陰噬。" 上曰: "不但西賊盛强爲可憂, 域中盜賊, 亦不可不慮。" 恒福曰: "天兵一撤, 則雖數百土賊, 州郡不能捕。 小臣甲午年, 在湖南, 五六月間, 蹉一足, 則生大變矣。" 上曰: "此何言? 予未聞也。" 恒福曰: "人各爲賊。 李鎰爲巡邊使, 專討土賊, 而古阜再被圍, 官軍往討, 輒爲所敗。" 上曰: "窮困極, 則黃巢、方臘, 何謂無之? 天朝衙門, 雖侵責, 乃彼鎭壓之功。 天兵一撤, 則京城四十里雉堞, 亦不可守矣。 人皆憎砲手, 此計短也。 訓鍊都監軍額甚少, 役苦而不得廩料, 故怨苦耳。 兵必養之, 使得其樂。 厚給保率而任事者, 如官猪腹痛, 決不可如是爲也。 平時禁軍, 皆給保率, 俾遂仰事俯育之樂, 今宜法之, 使之興起。 軍額不足則加募, 使京城有隱然之勢。" 山海曰: "亂後操練, 惟砲手最有益, 行幸時, 亦以此成模樣。" 上曰: "京中事, 領相與備邊司致力。 外事非但禦侮, 鎭撫窮民, 俾不爲盜。" 恒福曰: "甲午、乙未年間, 別將在列邑, 慶尙道 朴已百, 雖老, 猶能捕賊。 今則兵、水使外無兵, 宜列置別將。 全羅道 安衛, 忠淸 朴名賢, 慶尙 金應瑞何如?" 上曰: "安衛可用乎?" 恒福曰: "勇敢力戰, 性且伶俐。" 山海曰: "年少, 多捕土賊。" 恒福曰: "李夢鶴之變, 朴名賢之功, 湖西人言之。 名賢入洪州, 賊乃喪膽。" 山海曰: "天兵去後, 土賊可虞。 蔓則難圖, 可以計去之。 秘密下書于監司, 各別捕捉。" 上曰: "他道亦有之乎?" 恒福曰: "近日所憂者, 全羅道爲甚。" 山海曰: "虐則爲賊, 撫則爲民。" 上曰: "下書時, 善爲措辭。" 恒福曰: "出身, 離根着者多。" 上曰: "何出身耶?" 恒福曰: "湖南出身, 丁酉年, 多失家業, 全州尤甚。 他皆年少能射, 終不能安。 漸有危言, 誠爲可慮。" 上曰: "此則有一策。 其爲人爲賊, 非本心, 如有可用者, 授職。" 恒福曰: "若以軍官饋之, 給弓箭帶率, 則與無差備異矣。" 上曰: "予欲收用, 以安其心, 此皆左相指揮中爾。 今日國事, 不成模樣, 天兵撤去, 王都空虛。 規畫措置, 備邊司勿爲忽略。" 恒福曰: "糧餉甚難, 山海: "曰訓鍊都監廢(馳)〔弛〕 "上曰: "糧餉不能自生, 春種乃能秋收。 戒飭監司。 守令, 必使之務農。 苟兵糧不繼, 諸葛亦退師。" 山海曰: "關王廟之役甚鉅。" 上曰: "關廟, 何至今未成乎?" 熙緖曰: "工役甚鉅故也。" 上曰: "工役如南關王廟乎?" 熙緖曰: "比之南役, 尤爲浩大。 農作近, 不如且止。" 上曰: "衙門不許, 則難止矣。 南廟, 則予見之後, 聞之, 則毁塑像, 更爲之云。 何也?" 恒福曰: "像小, 故改爲云。" 山海曰: "停役事, 不可不請。" 上曰: "武將不必言, 經理亦不謁聖。" 恒福曰: "天兵, 止宿於鄕校殿中, 人或問之, 則曰 "兵戈中, 故如是云’ 矣。" 上曰: "端川送人事, 大臣知之乎?" 恒福曰: "聞之。" 上曰: "流弊至於端川。 搪塞則必怒。" 熙緖曰: "經理差官貽弊, 故欲以我國人差送。" 上曰: "大臣, 當知曲折。 黃玉作盞, 本是不關。 且端川出玉, 彼何以知之? 予過慮, 則端川産銀, 天下知之, 無乃欲尋銀鑛耶? 若朝廷聞之, 則必責餉銀於我邦, 且遣太監採鍊, 若前朝設局之爲, 則奈何? 無乃搪塞之爲可乎。" 恒福曰: "托以伐玉採銀, 則姑未可知, 若去則必知銀出。" 上曰: "然則奈何?" 山海曰: "接伴使情意相通, 令接伴使, 周旋爲之。" 上曰: "左相好往來。 勳業垂竹帛, 在此行, 好往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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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