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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21권, 선조 33년 1월 26일 신미 4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지중추부사 이일이 북쪽 오랑캐에 대한 대책과 의병의 포상·진관법 등에 관해 아뢰다

지중추부사 이일(李鎰)이 차자로 아뢰기를,

"여러번 북방의 소임을 맡았던 신의 입장에서 삼가 변방의 사정(事情)을 살펴보건대, 조종조(祖宗朝)에서 북쪽 오랑캐를 회유하기 위해 규획(規劃)한 것이 매우 극진하였습니다. 봄 가을로 연향(宴享)을 베풀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하면 운(運)047) 을 나누어 상경(上京)시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노략질하는 것을 막기 어려운 걱정이 있어 왔습니다. 지금은 난리를 겪은 뒤이어서 중외(中外)가 씻은 듯하므로 미욱한 무리들이 국가에서 길러주는 은혜를 받지 못한 지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따라서 그들이 도리어 사납게 주인을 물 것은 사세로 보아 필연적인 일인데 지난 봄부터 더욱 방자하게 독기를 부리고 있으니, 이번에 문죄(問罪)하는 거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남방의 근심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고 농사철도 이미 박두하였는데, 군사를 징발하여 북방으로 올라갔다가 마침 화풍(和風)이 부는 지금 만일 철수하여 돌아갔던 왜적이 다시 바다를 건너기 편리한 점을 이용해 나아온다면 이쪽 저쪽을 대응함에 있어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군대가 항상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은 위태로운 길인 것입니다. 한번 거사하여 그들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하여 버린다면 진실로 더 없이 좋은 일이지만 만에 하나 차질이 있게 되면 육진(六鎭)의 일이 매우 한심스럽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불리한 점을 이용하여 벌처럼 떼 지어 저돌적으로 공격하여 온다면 마구 휘몰아 밀고 내려올 걱정이 없다고 꼭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무산보(茂山堡)는 바로 요해처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가까이는 정승(政丞)·파오달(破吾達)·허수라(虛水羅) 등의 부락(部落)이 있고 멀리는 박가(朴加)·홍귀(洪貴)·홍단(洪丹) 등의 제호(諸胡)가 모두 이곳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만호(萬戶)를 승급시켜 당상(堂上)의 첨사(僉使)로 삼아 수병(戍兵)을 더 첨가하고 이곳에다 관시(關市)를 개설해서 원근의 호인(胡人)들로 하여금 어염(魚鹽)의 이익을 받게 한다면, 사납고 탐욕스러운 무리들이 순순히 복종하여 따를 것은 물론이고 산외(山外)의 적들도 틀림없이 점차 잠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종조로부터 보을하(甫乙下)에서 매매 유통하는 것을 금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어서 진실로 함부로 개설하여 경솔히 허락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제부(諸部)의 추장들을 모집하여 ‘노토(老土)명간로(明看老)를 체포하여 항복해 오는 자가 있으면 이 보을하보(甫乙下堡)의 납관(納款)을 허락하고 관시를 통행시키겠다.’고 하소서. 그러면 이익만을 추구하는 무리들이어서 은밀히 도모할 리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성문(聲聞)이 한번 전파되면 틀림없이 서로 의심을 일으키게 되어 크게는 괴수(魁首)를 잡아 전형(典刑)을 보일 수가 있고 작게는 부종(部種)들을 이탈시킴으로써 도적질을 멈추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남방의 첩보(牒報)를 자세히 탐지하고 북방의 변(變)을 세밀히 관찰해야 합니다. 만일 변경이 안정되었는데도 오랑캐가 뉘우치지 않는다면 가을을 이용하여 문죄(問罪)하는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결단하는 것이 사세로 헤아려 보아 온편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 난리를 겪은 군병을 이끌고 호랑이 굴로 진격하였다가 눈이 녹아 흘러 창일하고 도로는 진창이 되며 앞에는 높은 이 가로막고 뒤에는 굽이도는 물이 가로 막아 기병과 보병의 행보(行步)가 어렵게 되면, 다행히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때아니게 군병을 움직였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텐데, 더구나 승리를 기필할 수 없는 데이겠습니까?

신이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있을 적에 관하(管下) 풍산보(豊山堡)에 누차 노략질하는 일이 있었는데 보(堡)의 지경에 사는 호인 가운데 본보(本堡)에서 통시(通市)하게 해 줄 것을 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즉시 이해(利害)를 논하여 순찰사(巡察使) 정언신(鄭彦信)에게 신보(申報)해서 소원대로 개시(開市)하였더니, 그뒤로 노략질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남도(南道)의 혜산(惠山)·가을파지(加乙波知) 등처에도 근년부터 납관(納款)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는 사세가 하도 급박해서 그렇게 한 것이기는 하지만 허락해 준 후에는 점차 경급(警急)한 일이 없어졌으니, 이야말로 전후의 명백한 증험인 것입니다. 더구나 무산(茂山)·양영(梁永) 등처에서는 잠상(潛商)을 금하고 있지만 숲에 숨었다가 밤에 다니기 때문에 실로 그 간세(奸細)를 영원히 근절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근래 다시 금령을 엄히 하는 바람에 성내(城內)에 사는 한잡인(閑雜人)들이 이익을 보는 근원을 잃어서 거의 다 도망하여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만약 관시를 개설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자들이 다시 모일 뿐만 아니라 변민(邊民) 가운에 말리(末利)를 추구하는 자들이 반드시 서로 이끌고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중(城中)의 인호(人戶)를 쇄입(刷入)시키지 않아도 점차 조밀하게 될 것이고 이미 묵은 산전(山田)도 따라서 개간하게 되어 부령(富寧)의 읍거(邑居)가 이로 인하여 점차 실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 변방에 있을 적에 부령 사람이 모두들 이 보(堡)에 통시(通市)시켜 줄 것을 원했는데, 잠상(潛商)의 길을 막기가 저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의견으로는 우선 임시 방편으로 한번 관시를 열어 호인들의 욕구를 맞춰 준다면 그들의 마음을 위열(慰悅)시킬 수가 있고 회유하여 진정시킬 방도를 얻게 될 것이니, 농사철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과 견주어 본다면 현격한 차이가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전에 명을 받들어 조목조목 진달할 적에 다 상달하지 못했기에 이 구구한 의견을 감히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비변사로 하여금 편부를 상의하여 조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육진(六鎭)의 번호(藩胡)가 오래도록 상경(上京)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의 서운함이 극도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지금의 형세로는 일단 상경시킬 기약이 없으니, 우선 함흥(咸興)에다 연향소(宴享所)를 설치한 다음 각진(各鎭) 호인들을 상송(上送)하는 운액(運額)을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반으로 감하고 상물(賞物)과 봉록(俸祿)도 감하여 계속 이어대기 어려운 걱정이 없게 하는 한편, 저들로 하여금 본부(本府)에 왕래하는 상인(商人)과 함께 토산물을 매매할 수 있게 하소서. 그렇게 되면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라 다시 점차 서울로 올라올 수 있는 길을 기대하게 되어 변(變)이 있어도 반드시 중지시킬 것입니다. 신이 북방을 왕복한 지가 여러 해였는바 이는 실로 천려 일득(千慮一得)의 계책입니다.

그리고 임진 왜란 때에는 군적(軍籍)에 들어 있던 병사들이 때를 틈타 무너져 흩어졌던 까닭에 다시 통령(統領)할 수 없었는데, 다행스럽게 의거(義擧)한 무리들이 곳곳에서 규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관병(官兵)과 의병(義兵)이 성세(聲勢)를 의지하여 서로 돕는 형세를 이루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시 권장, 기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유 왜란 때에는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권면하는 데 대한 방도가 없었던 탓입니다. 난이 발생한 처음 의병을 창도한 사람에 대해 공로를 헤아려 거두어 기용함으로써 뒷사람을 권장했더라면 도움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진관법(鎭管法)을 이미 신명(申明)시킨 이상 수령들로 하여금 경내(境內)의 사람을 초출(抄出)하게 하되 정군(正軍)·공천(公賤)·사천(私賤)·향리(鄕吏)·역리(驛吏)를 막론하고 나이 17세 이상 40세 이하는 모두 조발(調發)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관(文官)·무관(武官)·음관(蔭官)을 막론하고 경내에 감당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가려내어 부(部)를 나눠 장수로 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긴급한 일이 발생할 때 수령이 통솔하고 달려가게 한다면 분궤(奔潰)되는 걱정을 막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무관심하게 시행하지 않은 채 치지도외하고 있으니, 한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난리가 발생하기 전 수년간 배양했던 무인(武人) 가운데 정헌 대부(正憲大夫)에서 당상(堂上)에 이르기까지 사망한 사람이 30여 명이나 니, 진실로 미리 양성하지 않으면 안을 호위하고 밖을 방어할 길이 없게 됩니다. 무사(武士) 가운데 재략(才略)이 있어서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평시의 예에 따라 십분 배양하여 앞으로의 쓰임에 대비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스런 계책임을 알겠다. 비변사와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4책 121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29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註 047]
    운(運) : 많은 수의 사람들을 몇 명씩 나누어 조(組)를 짠 것을 말함.

○知中樞府事李鎰以箚子啓曰: "臣累膺北任, 伏見邊上事情。 祖宗朝, 羈縻北虜, 規畫甚至, 春秋宴享, 以悅其心, 分運上京, 以中其欲。 然而鼠竊之發, 猶患難防。 今則經亂之後, 中外蕩然, 犬豕之不得蒙國家豢養之恩, 將至十年。 其狺然反噬, 勢所必至, 而自去春益肆蠆毒。 此問罪之擧, 不得不爾者也。 第念南憂未殄, 農月已迫, 徵兵北上, 適當風和之節。 脫或卷歸之賊, 復乘帆櫓之便, 則彼此措應, 實爲狼狽, 而兵無常勝, 戰是危道。 如使一擧而蕩其巢窟, 則固其善矣, 若或有蹉跌之變, 六鎭之事, 極可寒心, 而乘我不利, 蜂屯豕突, 則長驅之患, 難保其必無。 臣之愚意, 以爲茂山一堡, 正當要害。 近則政丞破吾達虛水羅等部落, 遠則朴加洪貴洪丹等諸, 皆其所控制。 今若陞萬戶爲堂上僉使, 稍加戍兵, 設關市於此堡, 令遠近胡人, 擧蒙魚鹽之利, 則狼貪之輩, 復將弭耳以趨, 而山外之賊, 必至少寢矣。 然自祖宗朝, 斷自甫乙下, 通其買賣者, 其意有在, 固不可妄開而輕許之。 當募諸部酋, 有能捕老土明看老而納降者, 方可於此堡, 聽款而通行關市云, 則惟利是趨之徒, 不無潛圖之理, 而聲聞一播, 則將必自相疑貳, 大可以購魁孽、示典刑, 小可以離部種。 弭狗偸。 然後詳探南報, 密觀北變, 如其虜不悔禍, 而嶺(繳)〔徼〕 稍定, 乃決乘秋問罪之擧, 則(癸)〔揆〕 之事勢, 似爲便當矣。 此之不爲, 而欲經亂之兵, 進轉虎穴, 雪水之汎漲, 道路之泥濘, 峻坂回溪, 前遮後蔽, 騎步之行, 俱失其便。 雖幸而勝, 猶未免動衆之非時, 矧乎其未可必者乎? 臣曾爲會寧府使時, 管下豐山堡, 屢有零賊, 而堡境胡人, 有願於本堡通市者, 卽將利害, 申報巡察使鄭彦信, 依願開市, 自後無竊發之憂。 南道惠山加乙波知等處, 亦自頃年, 許以歸款。 是雖因事勢之迫, 而旣許之後, 稍無警急, 此實前後之明驗也。 況茂 等處, 雖有潛商之禁, 草伏夜行, 固難永杜其奸細。 近因申嚴禁令, 城內居閑雜人等, 失其利源, 幾盡逃移。 若設關市, 則非徒已散者還集, 邊民逐末者, 必將相率而趨之, 城中人戶, 不勞刷入, 而漸至稠密, 已陳山田, 亦從而開墾, 富寧邑居, 因之以稍實矣。 臣頃在邊上, 富寧之人, 咸願於此堡通市, 而潛商之路, 如彼其難防, 故臣意以爲: ‘姑從權宜, 一開關市, 以中胡人之欲, 則庶可以慰悅其心, 得羈縻鎭定之道, 而其視農月興師, 爲有間矣。’ 前於承命條陳之日, 未盡上達, 區區有懷, 不敢終默。 令備邊司, 商確便否, 而處之何如? 且六鎭藩胡, 久未上京, 其爲缺望極矣。 今日之勢, 已無上京之期, 姑於咸興, 創爲設享之所, 各鎭胡人上送運額, 據《大典》減半, 其賞物祿俸, 亦加節省, 俾無難繼之患, 而使彼得與本府往來商人, (變)〔換〕 賣土物, 則喜(人)〔利〕 之輩, 冀復有漸次朝京之路, 雖有變, 將必中止。 臣往復北方, 積有年紀, 此實一得之愚也。 且壬辰之變, 在籍之兵, 乘時潰散, 無復統領, 而頗賴擧義之徒, 在在糾合, 官兵、義兵, 聲勢相倚, 以成輔車之資, 而厥後不復奬用, 故丁酉之亂, 一未聞義兵之起。 此無非勸勉之無方也。 亂初倡義之人, 量功收用, 以奬後人, 不爲無助矣。 且鎭管之法, 旣爲申明, 則使守令等, 各抄境內人, 勿論正軍、公、私賤、鄕、驛吏, 年十七以上, 至四十以下, 一一調發, 勿論文武及蔭官, 擇境內可堪之人, 部分定將, 凡有緩急, 守令統押以赴, 則庶防奔潰之患, 而玩愒不行, 置之相忘, 極爲寒心。 亂前積年培養武人, 自正憲至堂上, 死亡者三十餘輩, 苟不預養, 則無以衛內而禦外。 凡武士之有才略, 可堪爲將者, 依平時十分培養, 以備將來之用何如?" 傳曰: "足見憂國忠謀。 當與備邊司議處。"


  • 【태백산사고본】 74책 121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29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외교-야(野)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