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전에서 대신을 인견하다. 이원익이 홍여순·민몽룡·변방·양식 등의 일을 아뢰다
오시(午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중국 장수들을 접대하느라 일이 많았고 몸에도 병이 있어 오래도록 대신을 보지 못하다가 이제 영상(領相)을 보니, 진실로 ‘대인을 만나 봄이 이롭다[利見大人].’는 격이다."
하니, 이원익(李元翼)이 아뢰기를,
"소신은 지식도 없는데 외람되이 천은(天恩)을 입어 이토록까지 발탁되었으니 황공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은 어떤 일을 말하려고 하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이 여러 차례 차자로 전달하였으나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는데 성비(聖批)가 엄준하시어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전교를 받든 뒤로는 정신이 나간 상태여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일 성비 가운데 ‘물러나고자 한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신하로서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영상은 어떤 말을 진달하려 하는가?"
하니, 원익은 아뢰기를,
"군부(君父)가 옳다고 여기지 않고 조정의 논의에도 용납될 수 없다면 신자의 의리로서는 진실로 물러가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구구한 뜻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기에 소신의 대체적인 사정을 이미 전날의 차자에서 진달하였습니다. 근일 조정이 날로 잘못되어 나랏 일은 차지도외한 채 오직 분당(分黨)으로 업을 삼고 있으므로 소신은 마음 속으로 늘 통민하게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소신을 두고 편당(偏黨)을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하신다면 죽어도 죄가 모자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대신에게 편당을 위해 그런다고 했겠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삼가 전날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니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만 시대 풍조가 이 모양이므로 국사(國事)를 치지도외할까봐 대신으로 하여금 선처(善處)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어찌 대신도 이와 같다고 한 것이겠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신이 심정을 쉽게 진달하지 못하겠기에 전날 군부에게 대면하기를 청하였으니,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 사대부의 시비를 위해서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대개 시비와 공론이 조정에서 이루어지니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조정에서의 의논이 제(齊)·초(楚)의 전장(戰場)을 방불케 하며 서로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으므로 나랏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근래의 제목(題目)으로 말하건대, 당초에 동론(東論)·서론(西論)이 있었는데 이른바 서론은 이미 물러갔으나, 동론 중에서 또 남인(南人)·북인(北人)으로 갈라졌고, 이 가운데 북론(北論)이 또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갈려졌습니다. 그리하여 당론(黨論)이 분분해져 더욱 심하게 구별이 지워졌으니 장차 나랏 일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이른바 ‘지난번 한 떼의 사류(士類)’라고 한 것이 어찌 유성룡(柳成龍)의 한패거리를 모두 사류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래도 국사를 염려하였기 때문에 한꺼번에 배척하여 축출하는 것은 또한 조정의 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진정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뒤로는 시습(時習)이 점점 부박해져서 나랏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으므로 신이 항상 통민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홍여순(洪汝諄)과 임국로(任國老)의 경우는 오로지 사당(私黨)만을 심고 있을 뿐 공론은 생각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소북(小北) 쪽은 편당의 습속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유자(儒者)의 명칭을 붙일 만한 인사가 그 속에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근래에는 김신국(金藎國)과 남이공(南以恭)을 화두(話頭)로 삼고 있는데 이것 또한 조정의 욕이라 하겠습니다. 이공이 전에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홍여순을 배척했는데, 이 때문에 홍여순을 구제하려는 사람들이 항상 김신국과 남이공을 수창(首倡)한 자로 여기고 있으니 진실로 통탄스럽습니다. 여순은 도처에서 탐욕을 부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외방(外方) 사람들까지도 여순을 등용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탄식하기를 나랏 일을 알 만하다 하였으니, 여순이 인심을 잃은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임국로는 소신과 육촌(六寸) 친척이 되는데 부자(父子)가 호종(扈從)하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은 모두 실절(失節)했다고 여겨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홍여순의 당에 아부하면서 나랏 일은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기에, 전날 차자에서 그 두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여 신의 소회(所懷)를 진달드리려고 했던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근일에 민몽룡(閔夢龍)이 한번 간장(諫長)이 되자 사류(士類)들을 모두 배척하는 등 그 경색(景色)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자기들끼리 서로 시비하는 논의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탑전(榻前)에 들어온다고 해서 어찌 소인의 정태(情態)가 된단 말인가. 대신은 밖에 있으니 필시 선처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신과 같은 자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죄지우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관을 진퇴(進退)시키고 인물을 용사(用舍)하는 것이야말로 대신의 직책인데 어찌 추양(推讓)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신과 같이 용렬한 자는 백집사(百執事)의 직임(職任)을 맡아도 오히려 감내하지 못할텐데 무슨 재덕(才德)이 있다고 이런 지위를 차지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이상은 감히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정영국(鄭榮國)의 상소에 비답하면서 ‘커지면 장차 스스로 무너진다[厚將自崩].149) ’ 하였는데, 이 말은 공도(公道)에 해당한다. 과연 편당을 한다면 필시 그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어진 이를 진출시키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는 것은 임금의 일입니다. 아무리 대신의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천단(擅斷)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근 국가의 정세를 보건대 시비(是非)가 결정된다 하더라도 필시 보전되지 못할 형편이다. 대개 나라가 있은 다음에 시비도 있는 것인데 왜적이 한번 움직일 경우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니, 조정에서 근심할 것이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삼가 상교(上敎)를 받드니 감격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나랏 일의 위급한 형세에 대해서야 어찌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방이 일이 지극히 염려스럽다. 왜적이 다시 발동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군의 양식도 계속 지탱할 형편이 못되지만 나라가 망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해보아야 하겠다."
하니, 원익이 아르기를,
"나랏 일이 위태롭기는 하나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릴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양식에 대한 일만은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됩니다."
하고,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저번 날 유격(遊擊) 모국기(茅國器)가 이 황주(黃州)에 있을 때 양식이 떨어져서 하마터면 변이 일어날 뻔했다고 합니다. 소신이 전일 해서(海西)에서 들어갔는데, 해서 지방은 경기에 비해 조금 완전합니다면, 기전은 모두 텅 비었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무거워서 백성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백성을 보호하는 책임은 수령에게 있으니, 혹 어사(御史)를 파견하기도 하여 탐문(探問)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절박하고도 안타까운 사정에 대해서는 저번 차자의 비답 가운데에서도 언급하였다. 나는 평소 질병이 많은데다가 젊어서부터 많은 상환(喪患)을 겪어 왔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뒤로는 정신과 기력이 더욱더 쇠약해져서 하루라도 물러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오늘날은 중국 장수들이 성 안에 가득하므로 자유롭게 할 수가 없지만, 중국 장수가 철수하고 나면 한번 거행해 볼까 한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상의 춘추가 한창이신데 이런 전교를 하시니, 인신(人臣)으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말씀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와 대신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이인데 내가 어찌 허언(虛言)을 하겠는가. 세종 대왕 만년에 문종(文宗)께서 섭정(攝政)을 한 일 또한 본받을 만하다. 나는 요즘 중국 장수들을 접대하느라 정력이 더욱 손모(損耗)되었고 경연(經筵)을 오래 폐지한 관계로 전에 배운 것도 모두 잊어버렸으니, 하루에 처리해야 할 만 가지 일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안타깝고 절박한 사정을 대신에게 말하면 처치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갓 불안한 마음만 품고 있으니 종사(宗社)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이런 전교를 하시니 소신은 망극하여 죽고 싶어도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조정에 관한 일은 대신이 진정(鎭定)시키기에 달려 있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은 다만 마음속의 생각을 상달할 뿐입니다. 무슨 덕량(德量)이 있어서 조정을 지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원수(都元帥)의 병세는 아직 낫지 않았는가? "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의 병세가 점점 차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도원수는 병 때문에 체직되었다고 하더라도 부원수(副元帥)는 그대로 해낼 수 있겠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에 문관(文官)으로 차정(差定)하고자 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그렇더라고 도원수 또한 차출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양남(兩南)의 주사(舟師)와 격군(格軍)을 얼마나 조치하였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남방(南方) 사람들은 도망하여 흩어진 자가 반이나 된다고 합니다. 대개 백성을 보호한 뒤에 나라의 형세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인데, 수령이 훌륭하면 백성들이 안정될 것입니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소신이 전에 봉산(鳳山)에 있을 적에 보니 갖가지 민폐를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때 보호해야 할 대상은 백성들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거해야 할 민폐는 감제(減除)해야 한다."
하였다. 미시(未時)에 파하고 나왔다.
- 【태백산사고본】 73책 11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10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註 149]커지면 장차 스스로 무너진다[厚將自崩]. : 세력이 커지면 오만 방자해져 결국은 멸망을 자초한다는 뜻. 춘추 시대 정 장공(鄭莊公)이 자기 아우 공숙단(共叔段)을 두고 한 말임. 《춘추(春秋)》 은공(隱公) 원년(元年).
○辛未/午時, 上御別殿, 引見大臣。 上曰: "予以天將接待多事, 身亦有疾, 久未見大臣。 今見領相, 眞是利見大人。" 元翼曰: "小臣無所知識, 濫蒙天恩, 擢拔至此, 不勝惶恐。" 上曰: "領相欲言何事耶?" 元翼曰: "小臣屢陳箚子, 辭不達意, 而聖批嚴峻, 爲臣子所不忍聞也。 伏承傳敎以來, 精神喪越, 欲死不得矣。" 上曰: "何言?" 元翼曰: "前日聖批中, 欲退之語, 臣子何忍聞乎?" 上曰: "大槪領相, 欲陳何言?" 元翼曰: "君父不以爲是, 而其於朝論, 亦不得容, 臣子之義, 則固當退在, 而區區之意, 不得不已。 大槪小臣情事, 已盡於前日之箚, 而近日朝廷日非, 置國事於度外, 唯以分黨爲業, 小臣心嘗痛悶。 若以小臣爲偏黨, 則死有餘罪。" 上曰: "予豈以大臣爲偏黨乎?" 元翼曰: "伏見前日箚子批答, 不勝惶恐。" 上曰但時習如此, 恐國事置之度外, 欲使大臣善處矣。 豈以爲大臣, 亦如此乎?" 元翼曰: "臣之情事, 未易陳達。 前日請對於君父之前, 死有餘罪。" 上曰: "朝廷士大夫是非, 自上何知? 大槪是非公論, 在於朝廷, 予豈知之?" 元翼曰 朝蓍間議論, 有若齊楚戰場, 互相飜覆。 國事日非, 自上豈得知之乎? 以近來題目言之, 當初有東西之論, 而所謂西則旣退矣, 而東論之中, 又分爲南北之人, 北論之中, 又分爲大北ㆍ小北之人, 黨論紛紜, 區別尤甚, 未知國事, 置於何地乎? 臣之所謂頃者一隊士類云者, 豈以爲柳成龍一隊, 皆是士類也? 但其時之人, 則猶以國事爲念, 故一時斥逐, 亦非朝廷之福。 臣之愚意, 良以此也。 其後時習, 漸入澆漓, 其於國事, 專不顧念, 臣常痛悶焉。 至於洪汝諄、任國老, 則專植私黨, 不恤公論, 而小北則雖有偏黨之習, 猶可謂儒名之人, 或在其中焉。 且近來, 以金藎國、南以恭爲話頭, 此亦朝廷之辱也。 以恭前在銓郞時, 排斥汝諄, 故救洪之人, 每以金、南爲首倡, 誠可痛哉! 汝諄則到處貪婪, 爲人所惡, 至於外方之人, 及聞汝諄登庸, 則皆歎曰。 國事可知,’ 汝諄之失人心久矣。 任國老, 則小臣之六寸親也。 壬辰之亂, 其父子不爲扈從, 故識者, 皆以爲失節, 而棄之矣。 今又阿附洪黨, 不念國事, 以此前日箚子之中, 擧其二人之名, 欲達臣之所懷而已。 近日閔夢龍, 一爲諫長, 盡斥士類。 景色如此, 良可寒心。" 上曰: "大槪自中互相是非之論, 予豈知之, 入於榻前, 豈爲小人情態乎? 大臣在外, 必有好處之道矣。" 元翼曰: "如臣者, 何敢輕重於其間乎。" 上曰: "進退百官, 用舍人物, 大臣之責也。 豈有推讓之理乎?" 元翼曰: "如臣庸劣, 雖百執事之任, 猶且不堪。 有何才德, 而至於此地乎? 忝在此地, 不敢不達。" 上曰: "前日鄭榮國上疏批答之書。 ‘厚將自崩。’ 此言則公也。 若果爲偏黨, 則必爲厚將自崩。" 元翼曰: "進退賢邪, 人主之事。 雖在大臣之位, 何敢自擅乎?" 上曰: "近觀國勢, 是非雖定, 必不保全。 大槪有國, 然後有是非。 若倭賊一動, 則國必亡。 朝廷之憂, 其不在玆乎?" 元翼曰: "伏承上敎, 不勝感激。 國事危急之勢, 何可盡達乎?" 上曰: "邊方之事, 極可慮也。 賊若再動, 何以爲之? 天兵糧餉, 亦無支繼之勢。 但當國亡而後已。" 元翼曰: "國事雖危, 豈可坐而待亡乎? 糧餉一事, 極爲悶慮。" 張晩曰: "頃日茅遊擊, 在黃州時糧餉之絶, 幾生變矣云。 小臣前日自海西入來。 海西之地, 比於京畿, 則稍完, 而畿甸則皆空虛矣。" 元翼曰: "賦煩役重, 民不聊生。 保民之責, 在於守令, 或遣御史探問爲當。" 上曰: "予有悶迫之事, 亦及於前箚批答之中矣。 予素多疾病, 自少多遭喪患ㆍ經亂之後, 精神氣力, 益復衰耗。 願得一日退休, 今日天將滿城, 不得自由。 若天將撤回, 欲爲一擧措矣。" 元翼曰: "自上春秋鼎盛, 有此 傳敎, 凡在人臣, 所不忍聞也? 上曰: "予與大臣肝膽相照, 予豈爲虛言? 世宗晩年, 文廟攝政, 此亦可法之事也。 予近以天將接待之故, 精力益損, 經筵久廢, 舊學全忘。 一日萬機, 何以堪爲? 悶迫情事, 言于大臣, 則非但不爲處置, 徒懷不安之心, 其於宗社何?" 元翼曰: "有此 傳敎, 而小臣罔極, 欲死不得。" 上曰: "大槪朝廷之事, 在於大臣鎭定矣。" 元翼曰: "小臣, 則只上達心事而已。 有何德量, 鎭定朝廷乎?" 上曰都元帥病勢, 尙未差復乎?" 元翼曰: "其病漸差云矣。" 上曰: "都元帥, 雖以病遞, 副元帥, 可以仍爲乎?" 元翼曰: "前以文官, 欲爲差定者, 以此也。" 上曰: "雖然, 都元帥亦不可不出。" 上曰: "兩南舟師格軍, 幾何措置乎?" 元翼曰: "南方之人, 逃散者爲半云矣。 大槪保民而後, 國勢可保。 若守令賢, 則人民安接。" 張晩曰: "小臣前在鳳山時, 種種民弊, 不可形言。 此時可愛者民也。" 上曰: "民弊可除者, 則減除可矣。" 未時, 遂罷黜。
- 【태백산사고본】 73책 11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10면
- 【분류】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