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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15권, 선조 32년 7월 17일 갑자 6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비변사가 중국 장수와 왜의 글에 대처할 방안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흉적의 공갈하는 말을 들으니 실로 통분합니다. 유격(遊擊) 모국기(茅國器)가 급히 온 일은 그 의도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신 등의 억측으로 헤아려 보건대, 연전에 유격이 남방에 있었을 때 유 제독(劉提督) 【*. 】 과 함께 은밀히 가정(家丁)을 일본에 보내 남몰래 강화하는 일을 유도하였는데 그 당시에도 들어서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 들어갔던 중국인이 왜자(倭子)와 함께 나왔으니, 유격이 여기에 온 이유는 그 정적(情迹)이 탄로나서 중국 조정의 논란을 야기시킬까 염려한 나머지 경리(經理)와 의논하여 그 사단을 미리 미봉해 보려고 하는 데에 불과할 뿐입니다. 유격이 이미 경리와 함께 여러 차례 사람을 물리치고 밀담을 나누었는데, 지금 경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를 두루 살펴 알아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듣건대 왜서(倭書) 1통이 경리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하니 이번에 우리에게 온 왜서의 내용을 전혀 알리지 않더라도 무슨 내용인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개 경리에게 주선하는 일은 반드시 접반사를 시켜 해야 하는데, 심희수(沈喜壽)가 가자(加資)된 후에 아직까지 숙배(肅拜)하지 않고 있으니, 속히 나오도록 명초(命招)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그리고 경리가 왜자를 잡아오라고 이미 행문(行文)했다 하니 머지 않아 들어올 것입니다. 적으로 하여금 내지(內地)를 경유하여 우리 나라의 속사정을 환히 알게 하는 것은 매우 놀랄 일입니다. 이 뜻을 또한 접반사로 하여금 속히 잘 말하게 하여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왜서에 대한 회답은 다만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시켜 하게 하되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고, 그저 ‘천장(天將)이 지금 군사를 나누어 중외에 가득 주둔해 지키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절제하고 있으므로 본국은 여기에 모두 간여할 수가 없다. 아무리 예조(禮曹)에 계달하더라도 반드시 조처할 수가 없었기에 감히 전달하지 않았다. 전일에 보내온 선주왜(船主倭) 및 요시라(要時羅) 등은 그때 천장(天將)의 차관(差官)이 즉시 천조로 보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사실만 들었을 뿐이다.’고 말을 만들어야 할 듯인데, 첨사가 보낼 이 답서는 예조로 하여금 지어 보내게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겠습니다.

대개 이 일은 극히 중대한 관계가 있어 신 등 몇 사람의 의견으로는 경솔하게 조처할 수 없으니, 휴가 중인 여러 대신들에게도 각자 의견을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시임 대신(時任大臣) 또한 수일 내에 들어온다고 하니 우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려 의논해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름은 정(綎), 자(字)는 성영(省英)으로 강서성 남창부 위읍(江西省南昌府衛邑) 사람이고, 정식 관명(官名)은, 제독 한토 관병 어왜 총병관 우군 도독 첨사(提督漢土官兵禦倭總兵官右軍都督僉事)이다. 계사년 간에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는데 호령이 자뭇 엄숙하고 분명하였으며 지나게 되는 군읍에 조금도 해를 끼치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장수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돌아갈 때에는 본국의 창기(娼妓) 하나를 데리고 가서 자식을 낳기까지 하였으므로 심히 덕에 누(累)가 되었다. 무술년에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나와서는 날이 갈수록 더욱 교만 방자해져 군문(軍門) 이하를 멸시하면서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고 요구하는 물건이 다른 아문(衙門)에 비해 배나 되었으므로 도감(都監) 또한 제대로 지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강력히 강화를 주장하여 평행장(平行長)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그들의 뇌물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행장을 놓아주고 끝내 토벌하지 않음으로써 흉추(凶醜)로 하여금 의기양양하게 바다를 건너 온전히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도리어 적이 물러간 것을 자신의 공로라고 중국 조정에 거짓 보고하였으니, 어찌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


  • 【태백산사고본】 71책 11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64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備邊司啓曰: "伏見兇賊恐喝之言, 誠爲痛憤。 遊擊急來之事, 其情誠所難測。 以臣等臆意料之, 則年前遊擊在南方時, 與劉提督 【名綎, 字省英, 江西 南昌衛人, 提督漢土官兵禦倭總兵官右軍都督僉事。 癸巳年間, 領兵出來, 號令頗似嚴明, 所過郡邑, 少無擾害之事, 人皆稱其賢將。 及其還也, 帶去本國一娼, 以至生子, 累德甚多。 戊戌率大軍復來, 驕恣日甚, 蔑視軍門以下, 略無所憚, 求請之物, 倍於諸衙門, 都監亦不能支。 且力主講和, 與平行長潛通, 多受其賂, 故縱行長, 終不致討, 使兇醜揚揚渡海, 全師而還。 反以賊之退去, 自爲己功, 瞞報天朝, 可勝痛哉!】 密遣家丁, 潛誘講和之事, 其時人或聞知, 而今者入去唐人, 與子出來, 遊擊此來, 不過恐其情迹敗露, 致惹天朝論議, 欲圖於經理, 彌縫罅隙而已。 遊擊已與經理, 屢度辟人密語, 未知卽今經理, 作何意思, 不可不周旋詗知, 而且聞書一通, 又直來于經理, 今此書所云, 不待轉告, 而已知之矣。 大槪經理前周旋之事, 必令接伴使爲之, 而沈喜壽加資後, 尙未肅拜, 命招速出宜當。 且聞經理已行文, 拿致子, 將不久入來。 使賊經由內地, 洞知我國心腹, 極爲可駭。 此意亦令接伴使, 急速善辭, 勿令上來宜當。 書回答, 只令釜山僉使爲之, 而不必多費辭說, 當以天將今方分兵屯守, 盈滿中外, 大小節制, 本國皆不得預。 雖具達禮曹, 必無處置, 玆不敢轉達。 前日所送船主要時羅等, 其時天將差官, 卽送天朝, 時未出來。 只此聽得之意, 爲辭似當, 而僉使答書, 令禮曹修送亦當。 大槪此事, 所關極重, 以臣等數三人之意, 未可輕易處之。 請令在告諸大臣, 各自獻議, 時任大臣, 數日內又入來云, 姑待其來, 議處似當。 敢啓。" 答曰: "依啓。"


  • 【태백산사고본】 71책 11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64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