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 115권, 선조 32년 7월 14일 신유 5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윤근수가 사당 건립 장소를 정했음을 아뢰다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사람됨이 경망하고 위의가 없으며 다만 문장으로 겉치레만 하였다. 】 아뢰기를,

"신이 어제 저녁에 들으니 동지(同知) 한초명(韓初命)과 중군(中軍) 손방희(孫邦熙)동대문(東大門) 밖에 나아가 다시 사당을 건립할 위치를 보려고 한다 하기에, 오늘 아침에 신이 박상의(朴尙義)를 데리고 먼저 그곳에 도착하여 다시 산맥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때 박상의가 말하기를 ‘앞서 본 과전(瓜田) 북쪽은 바로 영민정(永民亭)과 마주치고 동구(洞口)의 후면이 빈 것 같으니 약간 과전(瓜田)의 동쪽으로 다섯 장(丈) 쯤 옮겨 사당의 터를 잡아야 하겠다. 그러면 후면이 높은 산맥과 바로 연결되고 또 조산(造山)과 가까와 수구(水口)가 막힌 곳이 되니 매우 좋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뜻으로 한 기패(韓旗牌)에게 먼저 말해 주었는데, 조금 뒤에 동지와 중군이 일시에 나오기에 표헌(表憲)으로 하여금 ‘소국이 도읍을 처음 정할 때에 지리(地理)에 능통한 사람이 말하기를 「동쪽이 허한 것 같다. 」고 하였다. 이 때문에 가산(假山)을 만들고 산 위에 나무를 심기까지 하여 기필코 수구가 막히게 하려고 하였는데, 전란으로 나무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지금 천조(天朝)가 소국을 위해 사당을 세우는데, 온 나라 상하의 뜻이 모두 조산(造山) 곁에 세워 수구를 막았으면 한다.’ 하게 하고 이어 다시 터 잡은 곳을 알려 주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동지와 중군이 모두 말하기를, ‘국왕이 사당을 세우고 싶어하는 곳에 세우는 것이 실로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동지와 중군이 막차에서 나와 새로 잡은 곳을 보고는 ‘이곳이 매우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모두 나간 뒤 신이 또 기패에게 말하기를 ‘전일에 터를 닦을 때에는 후토(后土)에 고유하는 제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날 고유제를 지내야 하겠는가?’ 하니, 기패가 말하기를 ‘17일이나 18일 중에 행할 것인데 오늘 경리(經理)에게 여쭈어 결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기패가 간 뒤에 신이 박상의로 하여금 좌향(坐向)을 정하게 하였더니, 상의가 말하기를, ‘이곳은 과전(瓜田)과 향배가 약간 다르니 해좌 사향(亥坐巳向)을 써서 안정굴참(安靜窟岾)으로 안산(案山)을 삼아야 하겠다. 그러면 수파(水破)는 을지(乙地)에 사록파(四祿破)가 되니 과전에 비해 더욱 수구가 잘 막혀 매우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당터를 원했던 곳에 정했는데 이는 표헌이 주선한 덕택이었습니다. 이 뜻을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는 청오(靑烏)102)금낭(錦囊)103) 같은 풍수지리서와 망기(望氣)나 보산(步山) 같은 술법을 알지 못하는데, 경이 이처럼 자세히 살피니 족히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마음을 알겠다. 참으로 감탄해 마지 않는다. 나는 국도(國都)의 청룡(靑龍)이 낮고 동편이 허하다는 말만 들었는데, 유 원외(劉員外)가 나를 면대하여 말하기를 ‘동문 밖에 묘우(廟宇)를 세워 진압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관묘(關廟)를 세우게 되었으므로 반드시 동문 밖에 세울 것을 요청하였는데 경이 또 이처럼 충성스럽고 근실하게 처리하였으니 이는 곧 만세토록 힘입을 큰 공로라 하겠다. 다만 듣건대 박상의란 자는 그 술법이 자못 괴이하다 하니 그 말을 충분히 믿을 수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그곳이 남산(南山)에서 뻗은 맥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백호(白虎)에서 뻗은 산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회계(回啓)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1책 115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645면
  • 【분류】
    외교-명(明) /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102]
    청오(靑烏) : 한(漢)나라 청오자(靑烏子)의 《장경(葬經)》.
  • [註 103]
    금낭(錦囊) : 진(普)나라 곽박(郭璞)의 술서.

海平府院君 尹根壽 【爲人輕妄無威儀, 只以文藻緣飾。】 啓曰: "臣昨夕聞韓同知孫中軍欲往東大門外, 同相更卜之地, 今早臣率朴尙義, 先到其處, 更相山脈。 朴尙義因言: ‘前相瓜田之北, 正當永民亭, 洞口後面似虛, 須稍移於瓜田之東五丈許, 以卜廟址, 則其後面, 正連高崗山脈, 且近造山, 極是關鎖水口之地’ 云。 臣以此意, 先說與韓旗牌, 俄而同知、中軍一時出來, 令表憲告以小邦建都之初, 能解地理人謂東邊似虛。 以此至造假山, 山上樹以林木, 期欲關鎖水口, 兵亂時, 樹木無存。 今天朝爲小邦建廟, 一國上下之意, 皆欲建於造山之傍, 以鎖水口。 仍告更卜之地, 則同知、中軍皆曰: ‘國王欲建廟處建之, 實當’ 云。 同知及中軍, 自位幕, 出看新卜之地曰: ‘此地極好。’ 俱出後, 臣又告旗牌曰: ‘前日卜地開基時, 曾有告后土之祭。 今則當於何日告祭?’ 旗牌曰: ‘十七八兩日中行之, 今日當稟定於經理’ 云。 旗牌去後, 臣令朴尙義, 審定坐向, 則尙義曰: ‘此地與瓜田, 向背稍異, 須用亥坐巳向, 以安靜窟岾爲案山。 水破, 乙地四祿破, 比瓜田尤能關鎖, 水口甚吉’ 云。 廟地定於所願之處, 此則表憲周旋之力。 此意惶恐敢啓。" 答曰: "予不知《靑烏錦囊》之書, 望氣、步山之術, 卿詳審至此, 足見爲國盡忠, 無任感歎。 予但聞國都, 靑龍低而東方虛, 劉員外面說於予曰: ‘東門外須建廟以鎭之。’ 適會有關廟之建, 故所以必於東門外是請, 而卿又忠勤如此, 萬世永賴, 是乃功矣。 第聞朴尙義者, 其術頗怪, 其言似不足信。 且其處, 謂之南山走脈則可, 何以謂之白虎走脈乎? 更爲回啓。"


  • 【태백산사고본】 71책 115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645면
  • 【분류】
    외교-명(明) /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