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사 한응인의 서장과 황제의 칙서
사은사 한응인(韓應寅)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신들이 형 군문(刑軍門)에게 나아가 행례(行禮)를 하고 나서 평수정 등 61인을 해송(解送)하였습니다. 황상(皇上)이 오문(午門)에 친히 나아와 포로들을 바치는 일이 끝난 뒤 하례를 받았는데, 신들도 하례의 반열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관원을 보내 교(郊)와 종묘에 제사지내 고하였습니다. 황상이 구중 궁궐 깊이 거처하며 정양하느라 신민을 접견하지 않은지 10여 년 이나 되었는데, 지금 심 각로(沈閣老)의 주청에 따라 억지로 나아오니, 뜰에 있던 군교(軍校)들 중에는 용안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축수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예부가 신들에게 상품을 의례적으로 하사할 것을 주청하니, 황상이 특별히 별지(別旨)를 내려, ‘국왕에게 마땅히 답례하는 하사품이 있어야 하니, 너희 부가 조사해보라.’ 하였습니다. 예부가 비로소 전례를 참고하여 다시 황상의 결재를 품하고 또 칙서를 줄 것을 청하여 곧이어 성지를 받았습니다. 당초에 예부에서는 만력 31년에 흠사(欽賜)한 예를 상고해서 아울러 성지를 품했어야 옳을 것 같았는데, 방치해두고 살피지 않은 채 단지 배신 등에게 상품을 하사할 것만 청한 것은 크게 결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해보라는 명이 특별히 성은에서 나왔으니, 본국을 돌아보고 생각하시는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평수정 등 포로를 바친 사유를 가지고 천하에 조서를 반포하였고, 신들은 흠사(欽賜)한 망의(蟒衣)와 채단(彩段)을 예부에서 받았습니다. 칙서를 올려 보냅니다."
칙서는 다음과 같다.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유한다. 근자에 왜노 평수길(平秀吉)이 부도한 짓을 자행하고 간교하게 국토 확장의 야욕을 품고는 군대로 그대 나라를 유린하여 편안한 곳이 없었다. 짐은 왕이 대대로 조공한 것을 생각하고 깊이 가련하게 여긴 까닭에 이 7년 동안 날마다 이 적의 섬멸을 일삼으면서 처음에는 정벌하고 이어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다가 마침내는 격멸해버리고 말았다. 죽이지 않는 것이 곧 하늘의 마음인데 군대를 동원한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국토를 편안하게 하고 난리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탕평해야 했기 때문인데 신은 흉악함이 극도에 이른 것을 미워하여 은밀히 괴수를 죽였고 대병력이 그 기회를 타고 추격하여 패배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포악한 흉적들이 섬멸되어 바닷가가 맑아졌으니, 승첩이 보고되면서 나의 근심도 비로소 풀렸다.
지금 왕이 배신으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받들고와 사례하여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은덕을 고마와하는 뜻을 잘 알게 되었는데 특별히 칙서를 내려 권장하고 이어서 채단과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배신으로 하여금 가지고 가게 하여 충성에 답하니 잘 받으라. 그리고 일찍이 무고당한 것을 탄원했었을 때 짐은 마음으로 살펴 알고 본디 왕에게 의심이 없었다. 조정 신하들도 모두 의논하면서 왕에게 반드시 딴 뜻이 없음을 갖추어 아뢰기에 이미 별지를 내려 누명을 씻어주었으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생각건대 왕이 옛 강토를 되찾았다고는 하나 실지로는 새 국가를 창설하는 것과 같으니, 쇠약한 것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하는 데 배나 되는 노력을 기울이라. 왜적이 달아나긴 했으나 그 족속은 살아 있으니, 다시 침략할 마음을 먹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에 경략 상서 형개(邢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둬 개선하게 하는 한편, 경리 도어사 만세덕(萬世德) 등은 남아 있게 하여 일부 군대를 분포함으로써 왕을 위해 방어하게 하였다. 왕은 군략(軍略)을 자문하여 선후책(善後策)을 함께 상의하고 와신상담하여 전의 수치를 잊지말라. 검소하게 생활하고 영구한 계책을 크게 도모하라. 재용을 힘써 마련하고 농사를 권장하여 근본을 깊이 심으라. 죽은 자를 조문하고 외로운 이를 위문하여 사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라. 문교를 숭상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오로지 유약한 유도(儒道)에만 힘쓰는 것은 또한 난리를 구원하는 밑받침이 못된다.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하다고 하는 것은 옛사람이 심각히 경계한 바이다.
우리 장수와 사졸은 귀국하기를 생각하고 군량 보급도 불편하니 조만간 철수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빨리 도모하여 왜적으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서 감히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하고, 또 침입한다 하더라도 다시는 걱정이 없게 하라. 동해 바닷가가 우뚝 금성 탕지의 요새가 되어 길이 국가 보위의 안녕을 누리고 번방(藩邦)으로서의 정성을 바치라. 충성과 효도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야 할 것이니, 왕은 힘쓰고 힘쓰며 공경하라. 이에 유시한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113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623면
- 【분류】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무역(貿易)
○辛未/謝恩使韓應寅書狀有曰:
臣等進行, 見禮邢軍門, 解送平秀正等六十一人。 皇上親御午門, 獻俘訖, 仍受賀, 臣等亦參賀班。 同日遣官, 祭告郊廟。 皇上深居靜攝, 不接臣民, 至於十餘年之久, 而今因沈閣老揭請, 勉强出御, 在庭軍校, 瞻望龍顔, 或有垂涕祝壽者。 禮部題請, 例賜臣等賞物, 皇上特下別旨曰: "該國王宜有回賜, 爾部裏査擬來看。" 禮部始乃參考前例, 更稟聖裁, 且請給勑, 仍奉聖旨。當初禮部, 似當考據萬曆三十一等年欽賜之例, 竝爲稟旨,而置而不察, 只請題給陪臣等賞賜, 大是欠典, 而査擬之命, 特出於聖恩, 其顧念本國, 可謂至矣。 將平倭獻俘之由, 頒詔天下, 臣等受欽賜蟒衣彩段于禮部。
勑書有曰:
皇帝勑諭朝鮮國王。 比者, 倭奴 平秀吉, 肆爲不道, 懷狡焉啓疆之心, 以兵蹂躪爾邦, 蕩無寧宇。 朕念王世(共)〔供〕 職貢, 深用悶惻, 故玆七年之中, 日以此賊爲事, 始行薄伐,繼示兼容, 終加靈誅。 蓋不殺乃天之心, 而用兵非予得已。 安疆靖亂, 宜取蕩平, 神惡兇盈, 陰殲魁首, 大師乘之, 逭奔逐北。 鯨鯢勠盡, 海隅載淸, 捷書來聞, 憂勞始釋。 今王令陪臣, 奉表稱謝, 貢獻方物。 且悉王懷德之意, 特降勑奬勵, 仍賜彩幣、表裏, 就令陪臣齎去, 以答忠誠, 只可收領。 先曾陳籲所誣, 朕以心體亮, 本無疑于王。 廷臣雜議, 又具言王必無他, 已有別旨昭雪, 想能知悉。 惟念王雖還舊物, 實同新造, 振彫起弊, 爲力倍艱。 倭雖遁歸, 族類尙在, 生心再逞, 亦未可知。 玆命經略尙書邢玠, 振旅旋歸, 量留經理都御史萬世德等, 分布編師, 爲王戍守。 王可咨求軍略,共商善後, 臥薪嘗膽, 無忘前恥, 蓽(蕗)〔路〕 藍縷, 大作永圖。 務材訓農, 厚樹根本, 弔死問孤, 以振士卒。 尙文雖美事, 而專務儒緩, 亦非救亂之資。 忘戰必危, 古之深戒。 吾將士思歸, 輓輸非便, 行當盡撤。 爾可亟圖, 務令倭, 聞聲不敢復來, 卽來亦無復慮。 東海之表, 屹如金湯, 長垂襟衛之安, 永奠藩維之厚。 惟忠惟孝, 纉紹前休, 王其懋之, 懋之欽哉! 故諭。
- 【태백산사고본】 70책 113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623면
- 【분류】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