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형조 좌랑 강항이 상소하다
전 형조 좌랑(刑曹佐郞) 강항(姜沆)이 상소하였다.
"전 형조 좌랑 신(臣) 강항은 목욕재계하고서 백번 절하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면서 삼가 주상전하(主上殿下)께 상언(上言)합니다. 생각하건대, 신은 지난 정유년에 분호조 참판(分戶曹參判) 이광정(李光庭)의 낭청으로 있으면서 양 총병(楊摠兵)의 군량을 호남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었습니다. 군량을 거의 모았는데 적의 선봉이 이미 남원(南原)에 박두하자 이광정 역시 서울로 떠났고 신은 순찰사의 종사관인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띄워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더니 나라를 생각하여 모인 자가 겨우 수백 명이었는데 그나마 자기 가족들을 생각하여 곧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신은 어쩔 수 없어 배에다 아비·형·아우·처자를 싣고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갈 계획을 했었지만, 뱃사공이 서툴러 제대로 배를 운행하지 못하다보니 바닷가에서 맴돌다가 갑자기 적선(賊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은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가족들과 더불어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었는데, 배를 매두는 해안이므로 물이 얕아 모두 왜놈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고 오직 신의 아비만이 딴 배를 탔기 때문에 동시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모면하였습니다.
분호조에서 양곡을 모으기 위한 공명 고신(空名告身) 수백 통을 모두 물 속에 빠뜨렸으니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여 위로 조정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더욱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적은 신을 사족(士族)으로 인정하고 신 및 형과 아우를 같이 선루(船樓)에 묶어놓았는데 밧줄이 닿았던 곳에 의복과 손이 모두 찢겨져 3년이 지났는데도 흔적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적은 급히 배를 돌려 무안현(務安縣)의 어느 해안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적의 선박들이 몇 리(里)에 걸쳐 가득차 있었고 우리 나라의 남녀가 왜놈과 거의 반반이었으며 이 배 저 배에서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습니다. 순천(順天) 좌수영(左水營)에 당도하자 적장 한 사람이 신과 신의 형 강준(姜濬)·강환(姜渙), 그리고 처부(妻父) 김봉(金琫) 등과 여러 가속(家屬)들을 한 배에 실어 왜국으로 압송해 갔습니다. 왜국에 도착하였더니, 남해도(南海道)·이예도(伊豫道)와 대진성(大津城)에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 사로잡혀간 자들이 무려 수천 명이나 갇혀 있었는데 그들이 결국 왜놈에게 시살(廝殺)되었습니다. 새로 붙잡혀 온 사람은 밤낮으로 울부짖고 일찍 온 사람은 간혹 왜적에게 귀화되어 돌아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이 이현충(李顯忠)이 뛰쳐 나가 남쪽으로 달아난 일로 깨우쳐 보았으나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듬해 4월 그믐에, 서울 죽사동(竹肆洞)에 살던 사람으로 임진년에 사로잡혀간 자가 왜적의 서울로부터 이예도로 도망해 왔는데 왜의 말을 잘 하기에 신이 서쪽으로 달아나자고 회유하였더니, 그는 드디어 함께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왜어를 전혀 모르므로 통역[舌人]을 대동하지 아니하면 촌보(寸步)도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5월 25일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통역이 되어 야음을 틈타 서쪽으로 도망쳤는데, 처자는 이예(伊豫)에 버려두고 두 형은 풍후(豊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므로 신을 따르는 사람은 통역과 처부(妻父) 김봉(金琫)뿐이었습니다. 길을 떠난 3일 만에 바닷가에서 몰래 쉬고 있었는데, 대숲 사이로 보니 나이가 60여 세쯤 되어 보이는 한 왜승(倭僧)이 폭포에서 몸을 씻고 바윗돌 위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통역이 가만히 신들이 오게 된 뜻을 알리자 그 중은 슬퍼하며 두세 번 탄식하더니 배로써 신들을 풍후까지 건너주겠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통역이 주머니 속에서 은전(銀錢) 4개를 꺼내어 값을 치루었습니다. 신들은 너무도 기뻐 중을 따라 내려왔는데, 10보(步)도 채 못 와서 나루터를 지키던 부곡(部曲)의 도병(道兵)이 왜졸(倭卒)들을 거느리고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이들은 신들이 도망가는 줄을 알아차리고 대진성(大津城)으로 강제 송환하였는데 이후부터는 방비와 단속이 한층 엄격하였습니다.
금산(金山) 출석사(出石寺)의 중 호인(好仁)이란 자가 있었는데, 자못 글자를 해독할 줄 알 뿐더러 신을 보고 애석하게 여겨 예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자기 나라의 제판(題判)079) ·방여(方輿)·직관(職官)을 보여주었는데 언문(諺文)으로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기에 신이 곧바로 등사하였습니다. 또 왜승 일운(日雲)의 집에 그 나라의 여도(輿圖)를 간직하고 있는데 매우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하기에 통역을 시켜 교환해 오도록 하고 다시 목격(目擊)한 형세를 가지고 우리 나라 조정의 계획이 옳고 그른 것을 참작시키고 중간에 어리석은 신의 천(千)에 하나 적중할지 모르는 생각을 곁들여 논의해 보았습니다. 아, 패군(敗軍)한 장수는 용맹을 말할 수 없는데 더구나 신은 포로가 되어 적의 소굴에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로서 감히 붓을 놀려 분수를 모르고 일을 논한다는 것이 극히 참람한 일로 그 죄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옛사람 중에 시간(尸諫)까지 하여 죽음에 임박해서도 임금을 잊지 아니한 사람이 있었으니, 참으로 국가에 이익되는 일이 있다면 또한 죄인이라 하여 마침내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만리 바다 밖에 있고 전하께서는 구중궁궐 위에 계시니, 혹 이 왜노(倭奴)의 실정을 통촉하지 못하시는 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후 사신들의 왕래에 있어서는 다들 오가는 데 바쁠 뿐만 아니라 저들의 경계가 엄밀하여 모든 것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고 사로잡혔다가 탈출하여 돌아간 사람은 대부분 하천배로서 숙맥과 다름없는 자들이므로 듣고 본 것이 혹 확실치 못할 듯하기 때문에 이에 감히 죄를 무릅쓰고 전달합니다. 왜승이 준 제판(題判) 가운데 왜의 언서(諺書)로 쓰여진 곳을 신이 곧바로 우리 나라의 언서로 등주(謄注)하였습니다. 울산(蔚山) 사람 김복(金福)이란 자가 말하기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집 종으로 계사년 가을에 사로잡혀 역시 이예주(伊豫州)로와 있으면서 많은 돈으로 왜선(倭船)을 임대하여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하므로 신이 즉시 등록(謄錄)한 것을 그에게 부쳤는데 만에 하나 성상께서 보실 수 있게 된다면 일본이란 나라가 비록 동떨어진 바다 밖에 있다 할지라도 이 왜인들의 속셈이 성상의 안전에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니, 온갖 방법으로 거짓을 꾸미는 왜놈들이 필시 만리 밖을 환히 내다보는 신(神)으로 생각할 것이고 방어하고 대응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적이 그해 8월 8일에 신을 대판성(大坂城)으로 옮겼는데 배로 거의 한 달 가량 운행하여 비로소 대판에 도착하였습니다. 대판성은 왜의 서경(西京)인데 머문 지 수 일 만에 또 신을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겼는데 복견성은 왜의 새 서울이었습니다. 적의 괴수가 이미 죽자 왜놈들의 정상이 예전과는 아주 달라졌습니다. 신은 우리 조정의 조처와 개수(改守)가 혹 적에게 기회를 줄까 두려웠습니다. 이리하여 사로잡혀 온 자로서 왜의 서울에 있는 동래(東萊) 김우정(金禹鼎), 하동(河東) 정창세(鄭昌世)·강천추(姜天樞), 진주(晉州) 강사후(姜士後), 이산(尼山) 송정수(宋廷秀) 등과 함께 아침 저녁의 쌀을 모아 각기 은화(銀貨) 1전씩 사들이고 이어 통역으로서 왜어를 잘하여 다른 나라 사람임을 분간할 수 없는 자를 뽑아 노자와 배삯을 제공하여 강역(疆域) 밖에 도달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미처 발송하지 못했는데 왜인들은 이미 철수하였습니다. 신은 온갖 방법으로 돌아가려고 꾀했으나 수중에 한 푼의 돈이 없기에 부득이 왜인들에게 글씨품을 팔아 은전 50여 개를 얻어 몰래 배 한 척을 사고 장사(壯士) 10여 인과 은밀히 결탁하여 동래 김우정(金禹鼎) 등과 같이 서쪽으로 돌아갈 것을 모의했습니다. 신의 형 강준(姜濬)은 뱃사공과 통역을 거느리고 금년 3월 12일에 먼저 배가 있는 곳에 갔고 신의 형 강환(姜渙) 및 처부 김봉(金琫)과 김우정 등은 기동하지 않았는데 바닷가에 살던 왜인이 몰래 이곳을 지키는 왜놈집에다 고발하자 왜놈이 졸개들을 풀어 체포하였습니다. 20여 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오래 지난 다음 풀려났습니다. 통역[舌人] 2명은 참사(斬死)당했습니다. 아, 계책이 궁하고 재간도 부족하여 천만 가지 생각이 모두 허사가 되었으니 아마도 신이 임금을 위하는 정성이 천지를 감동시키기에는 부족하여 이러한 온갖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진(秦)나라가 예(禮)를 버리고 공(功)을 숭상하자 노중련(魯仲連)은 동해(東海)로 가려 하였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인(仁)으로써 포악한 이를 쳤는데도 백이(伯夷)는 서산(西山)에서 주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왜적은 얼마나 추악한 놈들이며, 이 땅이 얼마나 동떨어진 곳이며, 우리 나라 신민(臣民)들에게 어떠한 원수를 진 놈들입니까. 또한 신의 가계(家系)를 따진다면 국초(國初)에 순문사(巡問使)인 신(臣) 강회백(姜淮伯)으로부터 강석덕(姜碩德)·강희안(姜希顔)·강희맹(姜希孟)을 거쳐 강귀손(姜龜孫)·강학손(姜鶴孫)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아들·손자·형제 4세(世)가 공경(公卿) 장상(將相)이었고, 그 중에 일명(一命)도 받지 못한 사람은 단지 신의 조부와 신의 아비일 뿐입니다. 신의 종형(從兄)의 형제 40여 인은 글을 한 줄도 모르지만 모두들 훈신(勳臣)의 후손이라 하여 화살을 지고 종군(從軍)하는 노역을 면제받았으니 이는 마치 울창한 숲과 무성한 풀이 백년 우로(雨露)에 젖은 것과 같았습니다. 신 또한 한남(漢南)의 포의(布衣)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직질(職秩)이 낮고 이력도 얕으나, 지난 갑오년 가을과 겨울에 외람하게도 은대(銀臺)080) 의 임시 낭관(郞官)으로 편전(便殿)에 입시한 적이 20회쯤 됩니다. 일월(日月)의 빛을 지척에서 대하자 온화한 말씀으로 저의 성명을 하문하셨습니다. 병신년 겨울에 또다시 상서랑(尙書郞)이 되어 이마에서 발뒤축까지 죄다 천지 조화가 만물을 생장시키는 것과 같은 큰 혜택을 입었는데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갑자기 머나먼 지역의 살모사와 물여우가 우글거리는 소굴에 빠졌으니, 하루를 구차히 사는 것이 만 번 죽어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홍모(鴻毛)같은 목숨을 어찌 애석히 여길 겨를이 있겠으며 한 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돌이켜 생각하면, 일시에 명성을 감추고 저 깊숙한 계곡에서 아무도 모르게 목매어 죽는 사람처럼 하여 위로는 충절(忠節)을 굳건히 세워 국가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죽는 장소를 분명히 하여 영광스런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회복하기를 도모한 자도 있었으니, 옛날 충신 열사(烈士)로서 문천상(文天祥)과 주서(朱序)같은 사람도 모두 이 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대(前代)의 사가(史家)들이 비난하지 않았을 뿐더러 절개를 온전히 했다고 인정해 준 것은 진실로 몸이야 사로잡혀 있지만 일찍이 사로잡히지 않은 어떤 것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고루하고 용렬하여 비록 옛사람에게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지만 충성을 다 바치려는 뜻만은 옛사람들에게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개미와 같은 하찮은 목숨이나마 한 가닥 숨이 붙어 있다면 견마(犬馬)의 정성은 만 번 꺾여도 잘릴 수가 없습니다. 즉시 절의를 다 바치고 고국에 돌아가 왕부(王府)에서 형벌을 받아 몸뚱이가 두 동강이가 난다 해도 오히려 오랑캐에게 죽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더구나 추악한 놈들의 정상이 이미 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으니, 만일 하늘이 편리한 기회를 주어 틈을 탈 수 있다면 마땅히 변변치 못한 이 몸이지만 삼군(三軍)이 나가는 길에 앞장서서 국가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위로는 산릉(山陵)과 종사(宗社)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는 진대(秦臺)와 연옥(燕獄)의 수치를 씻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잠 못 이루고 스스로 분발하면서 창자가 하루밤에 아홉 번씩이나 뒤틀리는 것입니다. 아, 멀리 다른 나라에 의탁하고 있는 것을 옛사람들도 비통하게 여겼다는 것은 말할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살아 있는 동안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볼 수는 없더라도 살아서 대마도(對馬島)에 돌아가 부산(釜山)의 한 곳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아침에 갔다 저녁에 죽더라도 다시 일말의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예주(伊豫州)에 있을 때 기록한 왜국의 실정과 적의 괴수가 죽은 뒤에 왜장(倭將)에게 올리려 했던 것을 아울러 기록하여 보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소신이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무상한 인물이라고 여기시어 아울러 신의 말까지 버리지 마시고, 겉으로 내보이기도 하고 속으로 감추기도 하며 우레가 치듯이 엄하게 하고 바람이 불듯이 혼란스럽게 하시며 때로는 이 글을 참작하시어 처리하신다면 적을 무찌르고 방어하는 데 어찌 조그마한 도움만 있겠습니까."
- 【태백산사고본】 69책 11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98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군사-전쟁(戰爭) / 교통-수운(水運) / 재정-군자(軍資) / 외교-왜(倭)
○前刑曹佐郞臣姜沆, 齋沐百拜, 西向慟哭, 謹上言于主上殿下。 伏以, 臣在往年丁酉, 以分戶曹參判李光庭郞廳, 督運楊摠兵糧餉于湖南。 糧餉幾集, 而賊鋒已薄南原, 光庭亦向京師, 臣與巡察使從事官金尙寯, 傳檄列邑, 收召義兵, 思漢之聚者, 僅數百人, 而顧戀家屬, 旋卽解散。 臣不得已舟載父、妻子、兄弟, 遵西海, 以謀西上, 而篙士齟齬, 不能運船, 倘佯海曲, 猝遇賊船。 臣自度不得脫, 與家屬俱墜水中, 艤岸水淺, 盡爲奴倭所執, 惟臣父獨乘別船, 故得免同時俘殺。 分戶曹募粟空名告身數百通, 竝爲淪沒。 奉職無狀, 上辱朝廷, 益無所逃罪焉。 賊認臣爲士族也, 齊縛臣及兄弟於船樓徽纏, 所着手服盡裂, 越三年, 痕未磨滅。 賊遽回船, 至務安縣一海曲, 賊船彌滿數里許。 我國男女, 與倭幾相半, 船船號哭, 聲震海山。 至順天左水營, 賊將一人, 載臣及臣兄濬ㆍ渙、妻父金琫等及臣等家屬於一船, 押送于倭國。 到倭國, 南海道、伊豫道、大津城, 囚置我國被擄者, 無慮數千, 盡爲卒倭廝殺。 新來者, 晨夜啼哭, 曾來者, 或化爲倭, 歸計已絶。 臣以李顯忠挺身南走, 一事開誘, 莫有應者。 至翌年四月晦, 京師竹肆居人被擄於壬辰者, 自倭京逃至伊豫, 洞曉倭奴言語。 臣誘以西歸之意, 其人遂與定計。 以臣了不解倭語, 不帶舌人, 則寸步亦無以自致故也。 遂以五月二十五日, 自髡爲倭語, 乘夜西出, 妻子則紿棄於伊豫, 二兄則約會於豐後, 從臣者, 舌人及妻父金琫而已。 行三日, 潛憩于海上, 竹林中有一倭僧, 年可六十餘, 洗身瀑布, 假眠岩石。 舌人潛告臣等所以來之意, 僧哀嘆再三, 許以船濟臣于豐後, 此舌人橐中銀四錢償債。 臣等喜甚, 從僧下來, 十步之內, 忽逢値渡守者之部曲道兵者, 領卒倭遽至, 知臣之逋播也, 勒還于大津城。 自是之後, 防禁益嚴。 有金山 出石寺僧好仁, 頗解文字, 見臣哀之, 禮貌有加。 因示臣以其國題判、方輿、職官, 諺錄無餘, 臣旋卽謄寫。 又聞倭僧日雲家, 有其國輿圖, 甚詳備, 因舌人換出, 復以目擊之形勢, 參我國廟算之得失, 而間以愚者之千慮, 竊議於其間。 嗚呼! 敗軍之將, 尙不得不以語勇。 況臣被擄, 偸生於賊窟中, 輒敢饒筆, 犯分論事, 極知僭越, 無所逃罪, 然竊伏惟念, 古之人有以尸諫, 臨死而不忘其君者。 苟有利於國家, 則亦不可以罪人而遂已也。 萬里鯨海之外, 九重獸闥之上, 或未洞燭此奴情狀。 前後使蓋之出入, 不但往還忽遽, 戒禁密嚴, 所得或未詳備, 被擄脫還之人, 又多氓隷之人, 菽粟不分者, 所聞見, 或未的實, 故玆敢冒陳。 倭僧題判中, 以倭諺書塡處, 臣卽以我國諺書謄注, 而蔚山人金福者自言: "都元帥權慄之家奴也, 癸巳秋被擄, 亦來伊豫州。 謀以重貨, 賃倭船西歸。" 故臣卽以所謄錄者, 付其人。 萬一得徹於睿鑑之下, 則扶桑一域, 雖在絶海之表, 而此奴肝膽, 照在八彩之前, 變詐百出之醜奴, 必以明見萬里爲神, 而防禦應接之際, 不無絲毫之裨補矣。 賊以其年八月初八日, 移臣置於(大坂城)〔大阪城〕 , 船行幾滿月, 始至(大坂)〔大阪〕 。 坂者, 倭之西京也。 居數日, 又移臣置于伏見。 伏見者, 倭之新京也。 賊魁旣死, 賊路情狀, 與前日每異。 臣竊恐我朝之注措、改守, 或(共)〔供〕 機會。 因與被虜士人之在倭京者東萊 金禹鼎、河東 鄭昌世ㆍ姜天樞、晋州 姜士後、尼山 宋廷秀等, 謀取朝夕米, 各貿銀一錢, 因擇舌人之洞曉言語, 莫能辨異國人者, 資其路費船價, 使達于疆域之表, 書未發而群倭已撤還矣。 臣百計謀還, 手無一錢, 不得已傭倭書, 得白銀五十餘錢, 潛買倭船, 陰結壯士十餘人, 與東萊 金禹鼎等, 共謀西歸。 臣兄濬, 率篙卒、舌人, 以今年三月十二日, 先往船所, 臣與兄渙、妻父金琫及禹鼎等, 未起身時, 水邊之人, 潛告守倭家, 倭奴發卒搜捕, 囚繫二十日, 久乃得解。 舌人二名斬死。 嗚呼! 計窮矣, 技竭矣, 千里萬計, 竝落虛空矣。 豈臣之區區向日之誠, 不足以感動天地, 有此萬端阻礙耶? 嗚呼! 嬴秦棄禮而上功, 仲連欲蹈東海; 武王以仁而伐暴, 伯夷猶餓西山。 況倭何等醜奴, 此地何等絶域, 於我國臣民, 何等讎虜也? 況臣之家世, 自國初以來, 巡問使臣淮伯以下, 越若碩德希顔、希孟, 以及龜孫、鶴孫, 祖、子、孫、兄弟四世, 公卿將相, 其不受一命者, 只臣祖、臣父耳。 臣之從兄昆弟四十餘人, 不識一行書者, 咸以勳臣苗裔, 得免負羽從軍之役, 茂林豐草, 雨露百年。 臣又以漢南布衣, 冒忝科第, 職秩雖下, 履歷雖淺, 而往年甲午秋冬, 猥以銀臺假郞, 入侍便殿者, 幾二十數。 日月之光, 近臨咫尺, 天語溫溫, 降問姓名。 丙申冬, 又忝尙書郞, 自頂至踵, 盡歸造化, 生成大澤, 未報塵垢, 而遽陷於絶域之外, 虺蜮之穴, 一日偸生, 萬死無赦。 鴻毛之命, 豈暇顧惜, 片時之痛, 非不堪耐, 而顧念一時滅名, 有同溝瀆之自經。 上之不能建忠立節, 報補國家, 下之不能明處死, 以留榮名而圖復者, 在昔忠臣烈士之如文天祥、朱序者, 俱不得免。 前史不以爲非, 而予其全節者, 良以身雖被擄, 而所未嘗被擄者猶在也。 臣之陋劣, 雖下古人萬分, 而願忠之志, 不讓古人。 一脈螻蟻之命, 一息尙存, 則犬馬之誠, 萬折不已。 卽當竭節圖還, 就顯戮於王府之下, 縱令身首異處, 猶勝死葬蠻夷。 況醜奴情狀, 已落臣堵中, 萬一天假其便, 釁有可乘, 則卽當以不費之身, 首三軍之路, 憑國家之威靈, 上雪山陵、宗社之辱, 下灑秦臺、燕獄之恥。 此臣之所以耿耿自奮, 腸一夜而九回也。 嗚呼! 遠托異國, 古人所悲, 在歇後語也。 此生餘年, 不敢望復覩漢官威儀, 而生還對馬島, 望釜山一抹, 而朝以至夕以死, 更無絲髮餘憾矣。 其在伊豫時, 所錄倭情及賊魁斃後擬上倭將, 竝錄如左。 伏願殿下, 勿以小臣之偸活無狀, 而竝錄臣言, 陽開陰闔, 雷厲風亂, 間以此書從事, 則於折衝禦侮之際, 豈曰小補之哉? 云云。
- 【태백산사고본】 69책 11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98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군사-전쟁(戰爭) / 교통-수운(水運) / 재정-군자(軍資)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