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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11권, 선조 32년 4월 8일 정사 2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사간원에서 속오군 편성과 조경의 체자 등에 대해 아뢰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병란(兵亂) 이후 일반 백성을 편성하면서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 및 잡류(雜類)를 따지지 않고 속오군(束伍軍)073) 으로 편성했는데, 그 의도는 대개 무예(武藝)를 훈련하여 돌발 사태에 대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속오군의 역(役)이 정군(正軍)보다 갑절은 되고 본관(本官)에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부역시킬 일이 있으면 속오군을 데려다가 부리므로 부역에 시달려 조금도 쉴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상번(上番)할 때에는 여러 장수들의 아문에 방자(幇子)074) 로 분정(分定)하기까지 하는데, 혹독한 채찍을 맞고 침해를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속오군은 원래 본래의 역이 있고 보솔(保率)075) 은 없는데, 한 가정 안에서도 부자 형제의 수를 헤아려 충정(充定)하므로 늙은이나 어린아이까지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역의 고통이 이와 같이 감내하기 어렵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이 일로 원망하면서 달아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당초 병사를 훈련하려던 의도와는 크게 어긋나고 한갓 백성을 병들게 하는 해만 있을 뿐이니, 서둘러 변통하여 괴로움을 풀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변사로 하여금 상의해 선처하여 이들만 고통을 받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지금 대군(大軍)이 오랫동안 체류하자 갖가지 지공(支供)하는 물자들을 모두 민간에게서 책출하는데, 많은 명목을 만들어 사소한 것도 빠뜨리지 않고 징렴이 번중하여 한이 없습니다. 이것이 비록 사세가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고는 하더라도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의 고혈(膏血)은 이미 소진되어 침해를 견딜 수 없으므로 서로들 유리하여 흩어집니다. 이에 농사철은 벌써 지났는데 들판에 농기구를 잡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나라의 근본에 대해 보존할 방책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미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수 없고 앞날의 걱정도 차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외방 주현(州縣)의 각 항목의 쌀과 콩은 거의 다 거두어 들였고 그중 자질구레하게 남아 있는 수효는 본래 모두가 유리하여 살고 있지 않는 호구의 것으로서 다시 징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관청에서는 헛된 장부를 조사하여 족속과 이웃을 침해합니다. 이처럼 곡식이 탕진된 때에 아무리 급히 독촉한다 하더라도 결코 마련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국가의 재용에 도움이 없는데 백성을 병들게 하는 해독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각도의 감사·어사 등 양곡을 관할하는 신하들에게 하유(下諭)하여 각항의 색목(色目) 가운데서 아직 수봉(收捧)하지 못한 것은 일체 면제토록 하여 작은 은혜나마 널리 베푸소서.

함경 북병사(咸鏡北兵使) 조경(趙儆)은 지난 정유년 가을 적들이 기전(畿甸)을 침입해 올 때 적을 맞아 치라는 명을 받고서도 고의로 행군을 지체시키면서 전진할 뜻이 없어서 성(城)을 나선 지 4일 만에야 비로소 수원(水原)에 도착하였습니다. 그의 서성대며 관망하면서 자신을 아끼고 나라를 저버린 죄에 대해 백성들이 통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군율(軍律)로 논죄해도 실형(失刑)이 이미 심한데 어떻게 다시 곤외(閫外)의 중임을 제수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변방의 오랑캐들이 흔단을 일으켜 우리의 병사와 말을 잃어버렸는데이겠습니까. 우리가 책응할 수 있는 기밀은 오로지 곤수(閫帥)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조경과 같이 겁이 많고 느리며 중한 죄를 진 사람이 사기를 분발하고 계책을 결단하여 여러 고을들을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제목(除目)076) 이 한번 내려지자 물정이 해괴하게 여기니 합당한 인물이 없다고 핑계대어 일을 그르치는 후회를 남길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북방의 소란이 바야흐로 시급한데 방백과 곤수를 일시에 모두 바꾼 관계로 본도의 일이 극히 허술합니다. 감사와 병사를 아주 신중하게 가려 차출한 다음 날짜를 정하여 발송하소서. 근래 사신의 접대를 맡은 신하들이 국사의 다급한 형편은 생각하지 않고 부산하게 자신만 편안할 꾀를 꾸미고 있는데 접반사의 경우는 한층 더 꺼려 하고 회피합니다. 이에 어떤 자는 스스로 본 아문에 체차해 주기를 아뢰기도 하고, 어떤 자는 중국 장수에게 부탁하여 바꾸어줄 것을 요청하며, 어떤 자는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기필코 모면하고자 하는데, 그러한 폐습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모 유격(茅遊擊)의 접반관인 이신원(李信元)은 이미 유격과 먼저 가기로 약정해 놓고서는 즉시 병을 칭탁하여 유격의 책망을 받았는데, 정원에서 추고하기를 청하자 위에서 불러 보내라는 하교가 있은 다음에는 떠나갔으니, 그의 병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조정을 마음에 두지 않고 제멋대로 방자한 짓을 한 죄는 예사롭게 추고할 수 없으니, 잡아들여 추국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유(下諭)하는 일은 천천히 결정하겠다. 조경(趙儆)의 일은 적합한 인물이 있는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오직 논체(論遞)만을 일삼으니 모르겠다만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올 것인가, 땅에서 솟아날 것인가. 전대(前代)에서 구해올 것인가, 다른 나라에서 얻어올 것인가. 이와 같이 체직시킬 것을 논의하다가는 끝내는 필시 그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이 차출될 것이니, 심히 염려가 된다. 서성대고 있었다는 일은 필시 실상과 다른 말일 것이다. 그런데 매번 이것을 가지고 논박하면서 용납하지 않는다면 불가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을 쓰는 방도는 그 사람의 단점은 생략하고 장점만을 취할 뿐이다. 만일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갖추어지길 요구하여 하자가 없기를 기대한다면 아무리 옛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조경은 체차할 필요가 없다. 이신원(李信元)은 이미 접반관이 되어 떠났으니, 지금 잡아들여 국문할 수 없다. 뒷일 이와 같은 자가 있다면 잡아들여 추국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우선 그를 너그럽게 용서한다."

하고, 이어 정원에 전교하기를,

"하유하는 일에 대해 그 곡절을 알지 못하겠으니 비변사로 하여금 논의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9책 11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94면
  • 【분류】
    정론(政論) / 재정-역(役) / 재정-잡세(雜稅) / 구휼(救恤)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군역(軍役)

  • [註 073]
    속오군(束伍軍) : 조선조 선조(宣祖) 27년에 훈련 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고, 지방에 신역(身役)이나 벼슬이 없는 15세 이상의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을 뽑아 조직한 군대로, 평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게 하고 조련(操鍊)할 때와 유사시에는 군역(軍役)을 치르게 하였음. 효종(孝宗) 때에는 북벌 계획으로 강화되었다가 숙종(肅宗) 이후로는 폐지되었다.
  • [註 074]
    방자(幇子) : 관청에서 심부름하는 남녀 하인.
  • [註 075]
    보솔(保率) : 보인(保人)과 솔정(率丁)의 합성어. 보인은 군역에 징발(徵發)된 정군(正軍)을 경제적으로 보조하기 위하여 보(保)가 편성되었는데, 보란 신역(身役)의 단위를 일컫는 것으로 일보(一保)는 이정(二丁)으로 이루어졌으며, 보를 구성하는 정(丁)이 곧 보인으로 봉족(奉足)이라고도 불린다. 보인은 보포(保布)를 바쳐야 했다. 솔정은 한 가구에 속한 인정(人丁) 곧 솔거 인구(率居人口)를 가리키며 보솔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군사의 군무를 돕기 위해 주는 것이 솔정이다. 특히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와 같이 급보 대상(給保對像)이 아닌 군역을 진 사람은 솔정 10구 혹은 전(田) 10결(結) 이하인 경우에 요역을 면제하였고 솔정이 10구(口)가 넘을 경우에는 전이 10결 이하라 하더라도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 [註 076]
    제목(除目) : 임면(任免)의 조서(詔書).

○司諫院啓曰: "兵亂以後, 團結齊民, 勿論公ㆍ私賤、雜類, 編爲束伍, 其意蓋欲敎訓武藝, 以備緩急, 而今則束伍之役, 倍於正軍, 本官少有役民之事, 則輒以束伍軍用之, 長立官門, 少無休息。 至於上番之時, 分定於諸將衙門幇子, 其鞭扑被侵之苦, 不可勝言。 束伍之軍, 元有本役, 又無保率, 一家之內, 父子兄弟, 計口充定, 雖老幼不得免焉, 而其役之苦, 若是其難堪, 則民安得不以此爲怨, 而逃散乎? 大違當初練兵之意, 而徒有病民之害, 不可不汲汲變通, 以解倒懸。 請令備邊司, 商議善處, 俾無偏苦之患。 目今大軍久留, 凡百支待之物, 皆責於民間, 多作名目, 不遺(鎦)〔錙〕 銖, 徵斂煩重, 罔有紀極。 此雖出於事勢之不〔得〕 已, 而孑遺之民, 膏血已盡, 不堪侵暴, 相率流散, 耕節已過, 野無秉耒之人。 不於此時, 念及邦本, 以爲保存之策, 則已散之民心, 無以收拾, 而日後之患, 有不可忍言。 外方州縣各項米、豆, 幾盡徵納, 其所零碎未散之數, 則本皆流亡絶戶, 更無可徵者也, 而官家按其虛簿, 侵及族隣。 當此穀盡之日, 雖督之逾急, 而決無可辦之路。 無補於國家之用, 而病民之毒, 莫甚於此, 請下諭各道監司、御史、管糧諸臣, 各項色目之未及收捧者, 一功蠲免, 以布一分之惠。 咸鏡北兵使趙儆, 往在丁酉秋, 賊逼畿甸之日, 旣受迎擊之命, 而故遲其行, 無意前進, 出城四日, 始到水原。 其逗遛觀望, 愛身負國之罪, 國人莫不痛惋, 而尙保首領, 論以軍律, 失刑已甚, 豈可復授以閫外重寄乎? 況藩構釁, 士馬新喪? 在我策應之機, 專在閫帥。 以恇怯弛緩, 而身負重罪之人, 其能奮氣決策, 號令列邑乎? 除目一下, 物情駭異。 不可諉諸無人, 以貽僨事之悔。 請命遞差。 北虞方急, 而方伯、閫帥, 一時皆易, 本道之事, 極爲虛疎。 請監、兵使, 極擇差出, 刻日發送。 近來任使之臣, 不念國事之急, 紛紜以遂自便之計, 至於接伴使, 則尤爲厭避。 或自其本所衙門啓遞, 或囑於天將, 使之請改, 或托以疾病, 期於必免, 弊習已成, 極可寒心。 茅遊擊接伴官李信元, 旣與遊擊, 約以先往, 旋卽稱病, 以致遊擊嗔責, 及其政院請推, 自上有招送之敎, 然後始乃發去, 其病之不至深重, 亦可知矣。 不有朝廷, 任意自恣之罪, 不可尋常推考。 請命拿鞫。" 上曰: "依啓。 下諭事, 徐爲發落。 趙儆事, 不問可人之有無, 唯事論遞, 未審可堪者, 將自天而降乎? 從地而出乎? 求之於前代乎? 得之於異國乎? 如是論遞, 則終必至於反得其出於其人之下者, 甚可慮也。 至於逗遛之事, 則未必非情外之說, 每以此作一題目, 駁不得容焉, 無乃不可乎? 用人之道, 略其他而取其長而已。 若求備於一人, 期得其無疵無瑕者, 則雖古人難矣。 趙儆不須遞差。 李信元己爲接伴官下去, 今不可拿鞫。 後日有如此者, 則拿鞫可矣。 今姑饒他。" 仍傳于政院曰: "下諭事, 未知曲折, 令備邊司議啓。"


  • 【태백산사고본】 69책 11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94면
  • 【분류】
    정론(政論) / 재정-역(役) / 재정-잡세(雜稅) / 구휼(救恤)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군역(軍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