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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09권, 선조 32년 2월 24일 갑술 2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남별궁에 나아가 형 군문을 접견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형 군문(邢軍門)을 접견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아문(衙門)이 존엄하여 감히 자주 와서 뵙지 못하였으니 황공합니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일이 많으시고 저도 하는 일이 있어 서로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즘 들으니 요동(遼東)에 달자(㺚子)의 소요 소식이 있고 요서(遼西)에 또 노호(老胡)056) 의 변란이 있다 하므로 저는 빨리 돌아가 군무를 돌보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어제 통보를 보니 황상(皇上)께서 동정(東征)의 공을 기뻐하여 종묘에 감사드리고 군공(軍功)에 대해 서록(敍錄)하라고 하였으니, 감히 대인(大人)을 위하여 축하드립니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감사합니다. 정 주사의 상본(上本)에, 내가 은 5천 냥으로 석만자(石蔓子)057) 를 매수하였다 하고, 국왕을 지적하여 왜적과 교통하고 노득공(盧得功)의 초상을 그려 왜인에게 보였다는 말까지 있는데 이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으니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구경(九卿)이 회의할 때 모두 본국은 충순하다고 하였고, 태양같이 밝으신 황상이 위에 계시는데 어찌 간사한 속임수를 용납하겠습니까마는 지금 귀국이 주본을 올려 변명하지 않으면 이는 스스로 화를 부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주사(主事)가 우리 나라를 무함한 것도 부족하여 또 대인까지 참핵하였으니 망극한 참소가 이렇게까지 심하단 말입니까. 주본을 올리는 일은 물러가 헤아려 하겠습니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찬획(贊畫)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 급사(徐給事)도 함께 참핵하였습니다. 만약 은 5천 냥으로 왜적이 퇴각할 것을 매수했다고 한다면 심유경이 용사하던 당시 책봉사(冊封使)까지 보내면서도 그들을 물러가게 하지 못하였으니, 심유경이 어찌 은 5천 냥이 없어서 퇴각시키지 못했겠습니까. 틀림없이 은으로 퇴각시킬 수만 있다면 귀국도 어찌 은 5천 냥이 없겠습니까. 내가 산서(山西)로부터 동정(東征)의 명을 받았는데 군대가 왕래하는 수고로움과 기계를 운반하는 비용이 어찌 5천 냥에 그치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5천 냥만 가지고 사람을 보내 뇌물을 행하면 될 것인데 어찌 반드시 만리 밖에서 서리와 이슬을 무릅쓰고 칼날을 부딪치며 어려움을 겪었겠습니까."

하고, 역관 이해룡(李海龍)을 불러 말하기를,

"전일 석만자가 수급을 살펴볼 때 그대가 직접 보았는데, 석만자가 은 5천 냥을 받아 그 머리맡에 두고 갔던가?"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고금 천하에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왕으로 봉해 줘도 물러가지 않았는데 하물며 수천 냥으로 되겠습니까. 간사한 사람의 일은 예로부터 있었으며 큰 공을 세운 뒤에는 참소하는 사람이 반드시 따르기 마련입니다. 대인의 큰 공과 성대한 덕은 천지 귀신이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정 찬획(丁贊畫)은 아예 말할 것도 없으나 서 과관(徐科官)도 그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참핵한 주본을 얻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정(丁)·서(徐)는 똑같은 사람으로 조금도 차이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 주본은 보내드리겠습니다. 어제 용산창(龍山倉) 위관(委官)이 보고하기를 ‘근일에는 말먹이 콩이 모자라 소미(小米)로 대신 준다.’고 하였으니 콩을 빨리 운반해 와야겠습니다. 그리고 귀국의 군량을 관장하는 관원이 자주 교체된다고 하는데 반드시 근실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가려 그 책임을 맡기소서."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중국 군사가 만리 먼 곳에서 고생하며 소방을 구제하였는데 소방이 식량이 바닥나고 꼴도 이어대지 못하니 과인은 항상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이미 강물이 풀려 뱃길이 곧 소통될 것이니 제때에 운반해 와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은 소방을 보호하여 강토를 다시 일으켜 주었습니다. 지금 왜적이 물러가긴 하였으나 그들의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고, 나라의 형세가 위태하여 인심이 안정을 찾지 못하므로 뒷일의 마무리를 오로지 대인께 의지하는데 이제 돌아가려 하신다 하니 과인만 섭섭하게 여길 뿐 아니라 모든 신민들의 마음이 부모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 원컨대 대인께서는 이 땅에 주둔하여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해 주십시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만 도원(萬都院)이 이곳에 있으면서 오로지 귀국의 일을 관장할 것이고 저는 먼저 돌아가 노호(老胡)에 대비하여야 합니다. 귀국은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기계를 수선하여 왜노가 오가는 요충지를 차단하고 변방의 전수(戰守)하는 방비를 엄중히 할 것이며, 우리 군사나 조선 사람으로서 적진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자는 빨리 죽여서 사단을 야기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간첩의 무리가 우리 군사가 철수하는 사실을 그들에게 누설한다면 앞으로 일어날 문제를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보정(保定)과 요동의 군병을 총관해야 하므로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으며 제가 비록 요동으로 돌아가더라도 해마다 사신이 오갈 때 귀국에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낱낱이 통보하여 알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소국은 중국 군사가 아니면 자력으로 진기할 수 없으니 사후 마무리를 위하여 주둔할 군사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병화가 일어난 뒤로 오랫동안 농사를 폐하여 많은 군사의 식량을 대줄 수 없으니, 전일에 1만 5천 명을 주둔시켜 달라고 청한 것은 부득이해서였습니다. 이제 들으니 3만 명을 주둔시키려고 한다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모든 힘을 다 기울여도 식량을 이어댈 길이 없습니다. 혹시 대인의 은덕에 힘입어 중국 식량으로 그 절반을 해결해 주신다면 시종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겠습니다. 대인께서 우리 나라를 한집안처럼 보시므로 삼가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1만 5천 명을 주둔시켜 가지고는 안 될 것같기에 부득이 3만 명을 주둔시키는 것입니다. 이번 역사에 중국이 은을 사용하여 위문하거나 포상한 것이 수만 냥뿐이 아닙니다. 귀국은 반드시 우리의 양식을 얻어서 원조하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염채은(鹽菜銀)을 귀국이 마련해 낼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은광이 많지 않아서 송 경략(宋經略)께서도 일찍이 시험삼아 채굴해 보았으나 결국 소득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군문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미 식량이 모자란다고 하고 또 은도 없다고 하시니, 중국이 어찌 은도 주고 또 식량까지 운반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의 생각은 은과 식량을 모두 귀국에 책임지우려 하였으나 제가 주본을 올려 힘써 말하였기 때문에 식량만 마련하라고 하였던 것이니 두 가지를 다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동 좌측의 일로는 정동(征東)의 역사에 시달려 노새와 수레는 모두 탕진되었고 백성은 굶주려 자식을 팔아 먹고 사는 자도 있으며, 또 쌀 1만 석을 운반하였으나 겨우 6천여 석을 얻었고 그 비용은 또 이뿐만 아니므로 아무리 중국이라고 해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귀국을 위하여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이처럼 분부하시니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주례가 끝나고 상이 하직하겠다고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내일 회사(回謝)하겠습니다."

하였다. 서로 읍하고 나왔다.


  • 【태백산사고본】 68책 109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83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재정-창고(倉庫) / 광업(鑛業)

  • [註 056]
    노호(老胡) : 명간로(明看老).
  • [註 057]
    석만자(石蔓子) : 도진 의홍(島津義弘).

○上幸南別宮, 接見邢軍門。 上曰: "衙門尊嚴, 不敢頻頻來拜, 惶恐。" 軍門曰: "國王多事, 俺亦有所事, 不得相會耳。 近聞遼東㺚子聲息; 遼西又有老胡之變。 俺當速回, 策應軍務。" 上曰: "昨見通報, 皇上嘉悅東功, 告謝宗廟, 敍錄功次云。 敢爲大人賀之。" 軍門曰: "多謝。 丁主事上本中, 謂俺以銀五千兩, 買石蔓子, 指國王爲交通倭賊, 至有畫盧得功像, 以示倭人之語, 此則萬不近理, 不須辨也。 九卿會議時, 皆以本國爲忠順。 天日在上, 豈容憸(耶)〔邪〕 欺枉, 今貴國若不上本以辨之, 則是自取其禍也。" 上曰: "主事誣我小國不足, 又參大人。 讒言罔極, 至於是哉? 上本事, 當退而量爲。" 軍門曰: "非但賛畫爲然, 徐給事亦同參之矣。 若以五千兩銀, 買倭賊之退, 則沈惟敬時, 至於冊封遣使, 猶不退去。 惟敬豈少五千兩銀, 而不能使之退去乎? 若必以銀退去, 則貴國亦豈無五千兩銀乎? 俺自山西, 銜命東征, 師旅往來之勞, 器械搬運之費, 豈止五千兩乎? 若果如此, 只將五千兩, 差人行賂而已, 何必冒霜露觸鋒刃, 間關萬里之外哉?" 因招譯官李海龍言之曰: "頃日, 石蔓子驗馘時, 汝親見之矣。 石蔓子受五千兩, 置其頭而去耶?" 上曰: "古今天下, 寧有是理? 封王且不去, 況數千兩乎? 憸人之事, 自古有之, 大功之後, 讒人必至。 大人豐功盛德, 天地鬼神, 孰不知之? 丁賛畫固不足道, 不料徐科官又如此也。 本可得見乎?" 軍門曰: "是一樣的人, 一步不相違者也。 其本當送之耳。 昨日龍山倉委官報曰: ‘近日馬豆缺乏, 以小米替給’ 云。 須速運來。 且貴國管糧之官, 頻頻遞易云。 必擇勤幹一人, 以專其任。" 上曰: "當依命。 天兵萬里暴露, 拯濟小邦, 小邦糧餉已竭, 雖芻草亦不得繼, 不穀心常憂悶。" 軍門曰: "江氷已泮, 船路將通, 及時運到, 無令缺乏可也。" 上曰: "大人扶護小邦, 再造區域。 今者倭賊雖退, 伊情難測, 國勢危疑, 人心未定。 善後之事, 專靠左右, 而今將還朝云, 非但不穀缺然矣, 大小臣民, 如失父母。 願大人, 留駐弊圉, 以副人望。" 軍門曰: "都院在此, 專管貴國之事, 俺當先歸, 以備老胡矣。 貴國修城池繕器械, 截虜去來之防, 嚴邊上戰守之備, 天兵及人, 自賊逃還者, 速行厮殺, 無令惹起事端。 萬一奸細之徒, 透漏天兵撤回之事, 則前頭之患, 有不可言矣。 俺總管軍兵, 不可久留矣。 俺雖還, 春秋使价之往來, 若有係於貴國者, 則當一一通示。" 上曰: "小國非天兵, 則無以自振。 善後之留, 多之益好, 而兵火之後, 久廢耕種, 無以接濟。 前日之請留一萬五千者, 不得已也。 今聞欲留三萬, 此則雖竭小國之力, 必無繼餉之路。 倘賴大人之賜, 以天糧接濟其半, 則終始受恩, 宜如何報也。 大人之於小國, 視如一家, 不得不仰而呼之也。" 軍門曰: "若留一萬五千, 則不得已以三萬留之。 是役也, 天朝費銀(稿)〔犒〕 賞, 不止累萬。 貴國必欲得天糧來助, 則鹽菜銀, 貴國可以辦出乎?" 上曰: "小邦銀穴不多, 宋經略亦嘗試採, 而終無所得矣。" 軍門曰: "然則旣云乏糧, 又云乏銀, 天朝豈可賞銀, 又從而運糧乎? 朝廷之意, 欲銀糧俱責於貴國, 而賴俺上本力陳, 故只令責出糧餉, 二者不可得兼矣。 左一路, 困於征東之役, 騾子、車子, 都已蕩盡, 民生嗷嗷, 至有賣子而食者。 且運米一萬石, 纔得六千餘石, 其費又不在此限。 雖中國, 亦不可支矣。 不然, 俺爲貴國, 何敢不盡力乎?" 上曰: "大人分付若此, 不勝感激。" 酒禮訖, 上請辭, 軍門曰: "明當回謝。" 相揖而出。


  • 【태백산사고본】 68책 109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83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재정-창고(倉庫) / 광업(鑛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