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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09권, 선조 32년 2월 1일 신해 2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진 제독의 아문에 거둥하다

상이 진 제독(陳提督)006) 의 아문(衙門)에 거둥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3만의 병력을 남겨 두려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 그리고 수륙병(水陸兵)을 얼마나 남겨 둬야 하느냐고 하면 또한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

하니,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만약 3만 명을 남겨 둔다면 식량이 도저히 어렵습니다. 저번에 소신이 소소한 중국 장수를 만나 보니 모두가 3만 명을 남겨 두려 한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지탱하지 못할 형세입니다. 그리고 육병은 전일 자문(咨文)의 인원수대로 하고 수병의 수는 더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쪽에서 만약 듣지 않고 반드시 3만 명을 남겨 둔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2만 명도 극히 어렵고 2만 명이 넘으면 도저히 양식을 대기가 어렵습니다. 저번에 호판(戶判) 윤승훈(尹承勳)이 비변사에 와서 양식 조달하는 일을 상의하였는데, 육지로 운반하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키면 백성이 반드시 견디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바닷길로 운반하는 것에 전력하여야만 식량을 끊이지 않고 대줄 수 있을 것입니다. 검찰사(檢察使) 유근(柳根)의 배 2백 척과 평안도황해도의 배까지 도합 5백 척으로 식량을 실어다 내린다면 바닷가에 주둔한 군대는 굶주릴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좋기는 좋으나 일이 뜻대로만은 안 된다. 대체로 중국 군사는 좁쌀은 먹지 않고 쌀을 먹고자 하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필시 큰 변이 생길 것이다. 지난번에 승지(承旨)들이 다 그런 일을 보았는데 중국 군사가 좁쌀밥을 연(輦)007) 후면에다 뿌렸다고 하니, 이는 우리를 모욕한 것이다."

하였다. 홍여순(洪汝諄)이 아뢰기를,

"중국 군사가 머물러 주둔하는 것은 유명무실합니다. 적이 만약 다시 오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변방의 백성만 소란하게 할 뿐입니다. 저들이 만약 국왕을 보자고 요구하여 군사를 주둔시키는 일을 강정(講定)하려고 하면 사실대로 고하시기를 ‘우리 나라가 중국 병력에 힘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중국 군사를 많이 머물러 두는 것은 우리 나라의 소원이긴 하지만 국력이 크게 손상된 뒤이므로 계속 식량을 마련할 대책이 없어 이 때문에 고민한다.’는 것으로 말을 만들어 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의 말이 옳기는 하나 중국 장수를 접대하기가 극히 어렵다. 저쪽이 만약 노하여 ‘국왕이 이제는 우리를 싫어하여 이렇게 말을 한다.’ 하면 어찌할 것인다. 저번에 동 낭중(董郞中)008) 이 ‘국왕은 중국 군사를 머물러 두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원치 않느냐?’ 하기에 내가 ‘많은 숫자를 머물러 주둔시키는 것이 우리 나라의 지극한 소원이다. 다만 식량이 부족하여 이 때문에 근심할 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하자, 홍여순이 아뢰기를,

"그 대답이 극히 좋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육병을 많이 머물러 두어야 하는가, 수병을 많이 머물러 두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육병은 전일 자문의 인원수대로 요청함이 옳고, 수병은 1만 5천 명을 요청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남병(南兵)을 머물러 두어야 하는가, 북병(北兵)을 머물러 두어야 하는가?’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남북의 장수끼리 서로 알력이 심하니 말을 하기가 매우 어렵겠습니다. 만약 마병(馬兵)을 남겨둔다면 콩을 대주기가 어려우므로 대답하기를 ‘여러 대인(大人)은 용병술(用兵術)이 매우 신묘하니 반드시 마병과 보병의 우열을 알 것이다. 여러 대인들이 더 나은 쪽을 요량하여 남겨 두라.’고 하는 것으로 말을 만들어 대답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우리 나라 군병의 숫자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것은 병조가 압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병조인들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홍여순이 아뢰기를,

"변란 이후로 병안(兵案)이 다 비변사에 있으므로 신이 비변사에 가서 조사해 보았습니다마는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하고, 작은 쪽지를 무릎을 꿇고 바치면서 아뢰기를,

"이것이 군병의 숫자이긴 하지만 이것으로도 알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숫자가 있더라도 유명무실한 것이다."

하자, 홍여순이 아뢰기를,

"외방의 연병(鍊兵)은 명목만 있고 내실은 없는데 그것도 지금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모두가 농민이기 때문입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지난해에 양 경리(楊經理)009)울산(蔚山)에서 거사할 당시 징병한 숫자와 금년에 삼도(三道)에 진군한 숫자는 다 실제 숫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정도의 군사를 마련하여 내놓을 것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양남(兩南)010) 의 장정을 있는 대로 모으고 충청도의 군사를 추가한다면 군사 1만 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니 1만 명으로 대답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문(軍門)011) 은 주문(奏文)의 일로 화를 내고, 그 나머지 장관(將官)과 군병들은 시초(柴草)·방자(房子)·쌀 등의 일로 화를 내고 있다. 대개 우리 나라의 일로 나왔다가 이제 철수하여 돌아가는 상황이니 그들의 환심을 얻어도 오히려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인데 대소 장관이 이처럼 화를 내니 끝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여러 대신들은 잘 처리하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경들은 내 관아(官衙) 네 관아를 따지지 말고 문제가 없도록 한마음으로 서로 도우며 일해야 할 것이니, 호조에 양곡이 부족하면 곡식을 사들이는 등의 일을 철저히 조치하고, 병조에 방자(幇子)가 없으면 군사를 징발하고 사람을 고용하는 등의 일 또한 주선해 주어야 한다."

하니, 홍여순이 아뢰기를,

"이제 도감(都監)의 계사를 보니 매우 황공합니다. 신은 일찍이 이럴 줄 알고 황해도의 도망한 군사 2백 명과 경기군(京畿軍)을 재촉하여 올려보내라고 여섯 번 계달하였는데도 극소수만 올라왔으므로 또 계청하여 하유하였습니다. 대개 각 아문의 방자(幇子)가 수없이 와서 각 도감의 하인을 침해하여 폐단을 일으키고 조종하므로 지탱해 나가지 못하고, 심지어는 남몰래 중국 병사를 사주하여 관원을 침해하는가 하면 게첩(揭帖)을 만들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하며, 더 심한 경우는 이름을 써 가지고와서 달라고 독촉하니, 중국 장관이 어찌 우리 나라 졸병의 이름을 알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문과 유 제독(劉提督)012) 은 절친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소신이 전라도에 있을 때 제독의 가정(家丁)에게 들었는데, 파주(播州) 토관(土官) 양응룡(楊應龍)이 10만의 병력으로 험난한 곳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형 군문(邢軍門)은 경략(經略)이 되고 유 제독은 총병(總兵)이 되어 양응룡을 막았답니다. 왕 참정(王參政)013) 도 그 가운데 있었지만 지세가 매우 험난해서 진격하지 못하자 구차하게 화호(和好)를 청하기를 왜교(倭橋)의 일014) 과 같이 하고 ‘1년에 은 2백만 냥을 바치려고 한다.’는 내용으로 속여서 주본(奏本)을 올리니, 중국 조정에서 공을 포상하여 유야(劉爺)는 품계가 올라가고 왕 참정도 승진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형(邢)유(劉)가 서로 절친하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 내용을 아는데 양응룡이 지금 다시 배반하였다고 한다. 이번 3로(路)의 일은 매우 터무니없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육병(陸兵)은 자문의 인원수대로 대답하고 수병(水兵)은 숫자를 늘려 대답하고, 우리 나라 군사의 숫자는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각도에서 다 모으면 3만 명을 만들 수 있지만 식량을 대기가 어려우니 1만 명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상 감사를 아직까지 차송하지 않았는데, 적이 물러간 뒤에도 저렇게 버려두고 있으니 되겠는가. 이렇게 하고서도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대신들의 중론은 노직(盧稷)·남이신(南以信)·허욱(許頊)·신경진(辛慶晉)·정윤우(丁允祐) 다섯 사람이 적합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덕형이 또 아뢰기를,

"남쪽의 일은 적이 물러간 뒤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는데 신이 노둔하고 무능하지만 전일에 내려가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만 경리(萬經理)015) 의 자문에도 ‘적이 물러간 뒤에 부산에는 배 한 척이 없으니 이러고서도 나라를 꾸려갈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도원수 권율은 오랫동안 진중에 있었으니 어찌 심기가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일을 요량하여 처리하지도 못할 듯한데 감사를 아직 차송하지 않고 권율 한 사람만 믿고 있으니 남쪽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또 적이 물러간 뒤에 특별히 관원을 보내 백성을 위무하고 전함(戰艦)을 수리 제조하는 등 방비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을 철저히 조치해야 될 것인데 아직까지 막연하게 버려두었습니다. 중국 장수의 생각은 필시 신처럼 노둔하고 무능한 사람은 보낼 수 없더라도 반드시 별도의 관원을 보내려고 할 것입니다. 오래 머물지는 못하더라도 순찰하고 올라오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옳기는 하나 나는 만족스럽지 않다. 감사에 적합한 사람을 대답할 것이고, 필요 없는 말은 할 것이 없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노직남이신이 적합할 듯하고, 다른 대신들의 생각은 신경진정윤우가 적합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윤승훈(尹承勳)은 잠시 감사로 있으면서 잘 다스렸다는 명망이 있었으나 신병이 있고, 장운익(張雲翼)도 적합하지만 병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어 자리를 파하고 나왔다.


  • 【태백산사고본】 68책 10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65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 군사-군정(軍政) / 정론-정론(政論) / 군사-병참(兵站) / 인사-임면(任免)

  • [註 006]
    진 제독(陳提督) : 진인(陳璘).
  • [註 007]
    연(輦) : 임금이 타는 가마.
  • [註 008]
    동 낭중(董郞中) : 동한유(董漢儒).
  • [註 009]
    양 경리(楊經理) : 양호(楊鎬).
  • [註 010]
    양남(兩南) : 호남과 영남.
  • [註 011]
    군문(軍門) : 형개(邢玠).
  • [註 012]
    유 제독(劉提督) : 유정(劉綎).
  • [註 013]
    왕 참정(王參政) : 왕사기(王士琦).
  • [註 014]
    왜교(倭橋)의 일 : 선조 31년(1598) 11월에 제독 유정(劉綎)이 왜교성의 적장 소서행장과 비굴하게 화의(和議)를 맺고 금백(金帛)과 인질을 서로 교환한 다음 소서행장의 군사가 완전히 철수하게 한 뒤에 빈 성에 들어간 일을 말함. 그는 성안에 들어가서 땅에 이미 묻은 시체와 적군의 포로로 있던 우리 나라 사람의 목을 베어 전투에서 노획한 수급(首級)으로 충당하고 표제(表題)에 서로 대첩(西路大捷)이라 쓴 공문을 경략 형개(邢玠)에게 보내 자신의 공을 허위로 보고하였다. 왜교(倭橋)는 예교(曳橋)라고도 하는데 순천(順天) 동남쪽 25리 되는 곳에 위치한 여수 반도(麗水半島)의 요충지이다. 《임진왜란사(壬辰倭亂史)》 제4편 정유·무술 작전기(丁酉戊戌作戰期).
  • [註 015]
    만 경리(萬經理) : 만세덕(萬世德).

○上幸陳提督衙門。 上曰: "今欲留三萬兵, 則何以對之? 且水陸兵留之多小, 亦何以對之?" 德馨曰: "若留三萬, 則糧餉決難矣。 近日, 小臣見小小唐將, 則皆言欲留三萬, 若然則勢不支吾矣。 且陸兵, 則當依前日咨文數爲之, 若水兵, 則加數請之可也。" 上曰: "彼若不聽, 必留三萬, 則何以爲之?" 德馨曰: "二萬亦極難, 而二萬之外, 則決難繼餉。 頃日戶判尹承勳, 來于備邊司, 相議調糧之事, 陸運處留兵, 則民必不堪, 必專力於海運, 然後可得接濟。 檢察使柳根船二百隻、平安黃海道船隻, 共通五百隻, 載糧卸下, 則留兵海曲, 庶無枵腹之患矣。" 上曰: "卿言好則好矣, 然事不如意。 大槪兵, 不喫小米, 要食大米, 何以爲之? 必生大變。 頃日承旨, 皆見之矣, 兵以小米飯, 散擲於輦後, 是辱之也。" 洪汝諄曰: "天兵留屯, 有名無實。 賊若更來, 豈能禦賊? 只自騷蕩邊民而已。 彼若要見國王, 欲爲講定, 當以實告之曰: ‘小邦賴天朝兵力, 保有今日, 多留天兵, 小邦之願, 而殘破之餘, 繼餉無策, 以是爲憫。’ 當以此措辭告之可也。" 上曰: "判書之說雖是, 然接待天將極難。 彼若怒曰: ‘國王今則厭我們, 如是發言’ 云, 則何以爲乎? 頃日董郞中曰: ‘國王願留天兵乎? 抑亦不願乎?’ 予答曰: ‘多數留屯, 小邦至願, 但糧餉不敷, 以此爲憂耳’ 云矣。" 洪汝諄曰: "此對極好矣。" 上曰: "若問曰: ‘多留陸兵乎? 多留水兵乎?’ 云, 則何以對之?" 李德馨曰: "陸兵依前日咨文數, 請之可也; 水兵則以一萬五千, 請之宜當。" 上曰: "若問曰: ‘留南兵乎? 留北兵乎?’ 云, 則何以對之?" 李德馨曰: "南北將, 相軋已甚, 言語極難。 若留馬兵, 則豆子難繼, 當對曰: ‘諸大人用兵甚妙, 必知馬、步兵之優劣。 諸大人量留某兵可也。’ 以此措辭答之宜當。" 上曰: "此言好矣。" 上曰: "若問我國軍兵之數, 則何以對之?" 李德馨曰: "兵曹知之。" 上曰: "雖兵曹, 何以知之?" 洪汝諄曰: "亂後兵案, 皆在於備邊司, 臣往考於備邊司, 不得詳知矣。" 仍以小錄跪進曰: "此蓋軍數, 而以此亦難知之矣。" 上曰: "雖有此數, 有名無實。" 洪汝諄曰: "外方鍊兵, 雖有其名, 無其實也, 亦目今解弛, 皆是農民也。" 李德馨曰: "上年楊經理 蔚山擧事時徵兵數目、今年三路進兵數目, 皆實數也。" 上曰: "若問當鍊出幾許兵云, 則何以答之?" 李德馨曰: "搜括兩南丁壯, 添以忠淸之軍, 則可得實軍一萬矣, 以一萬答之宜當。" 上曰: "軍門以奏文事發怒, 其餘將官, 及軍兵等, 以柴草、房子、大米等事發怒。 大槪以我國之事出來, 今爲撤歸, 雖得其歡心, 猶有所難, 而大小將官, 如是發怒, 未知終有何事。 諸大臣善處可也。" 上曰: "卿等勿爲我司汝司, 一心共濟, 期於無事可也。 戶曹糧餉缺乏, 則貿穀等事, 十分措置; 兵曹幇子無有, 則徵兵及貰人等事, 亦宜周旋。" 洪汝諄曰: "今見都監啓辭, 極爲惶恐。 臣早知如此, 黃海逃軍二百名及京畿軍啓達, 六度催促, 而零星上來, 又爲啓請下諭矣。 大槪各衙門幇子, 無數來責, 各都監下人, 作弊操縱, 不勝支吾, 至於陰嗾唐兵, 侵責官員, 至作揭帖, 達於天聽, 甚者題名來督。 天朝將官, 豈知我國下卒之名哉?" 上曰: "軍門與劉提督相切云, 是乎?" 李德馨曰: "小臣在全羅時, 得聞於提督家丁, 播州土官楊應龍, 以十萬兵, 據險稱亂。 是時邢軍門爲經略, 劉提督爲摠兵, 禦應龍王叅政亦在其中, 而地勢甚險, 不得進戰, 苟且請和, 無異倭橋之事。 一歲欲納二百萬兩銀子, 以此意欺瞞上本, 皇朝賞功, 爺陞品, 王叅政亦陞職。 是故相切云矣。" 上曰: "予亦知之, 應龍今復叛云矣。 今次三路之事, 甚爲荒唐矣。" 上曰: "陸兵則以咨文數答之, 水兵則以添數爲答。 我國兵數, 何以答之?" 李德馨曰: "搜括各道, 則可得三萬, 而糧餉難繼, 以一萬對之宜當。" 上曰: "慶尙監司尙不差送。 賊退之後, 如彼棄之可乎? 若此而可以爲事乎?" 李德馨曰: "大臣僉議, 以盧稷南以信許頊辛慶晋丁允祐五人, 可合云矣。" 李德馨曰: "南方之事, 賊退以後, 無所措置。 臣雖駑劣, 頃日欲爲下去者此也。 萬經理咨文云: ‘賊退後, 釜山無一船。 若是而可以爲國乎?’ 云云矣。 都元帥權慄, 久在戎馬之中, 心氣豈無傷乎? 且料理似不能矣。 監司時未差送, 恃一權慄, 南方之事, 恐不如意。 且賊退之後, 另送官員, 撫安百姓, 修造戰艦, 防備諸事, 十分措置可矣, 漠然棄置。 天將之意, 必以爲如臣駑劣, 雖不可送, 必欲另送官員矣。 雖不可久留, 巡審上來, 似爲宜當。" 上曰:"卿言然矣, 然予竊哂之。 監司可合之人, 對答可也。 不須空談。" 李德馨曰: "盧稷南以信則臣意似合, 辛慶晋丁允祐則他大臣之意, 似合云矣。 且尹承勳暫爲監司, 有善治之名, 但有疾病, 張雲翼亦可合, 而有病云矣。" 遂罷黜。


  • 【태백산사고본】 68책 10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65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 군사-군정(軍政) / 정론-정론(政論) / 군사-병참(兵站)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