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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08권, 선조 32년 1월 21일 임인 4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허국위가 게첩을 올리다

허국위(許國威)가 보낸 게첩(揭帖)은 다음과 같다.

"8년 동안 침략했던 교활한 왜적을 하루 아침에 쓸어버리니 국왕의 강산은 예전과 같이 공고해졌고, 온 나라 백성들의 기뻐하는 빛은 하늘에까지 비칩니다. 천조(天朝)의 장사(將士)들 중 공이 큰 자에겐 벼슬을 올려주고 작은 자에겐 상금을 주었습니다. 이젠 곧 개가(凱歌)를 부르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중원(中原)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 어찌 만고의 쾌사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무에는 반드시 뿌리가 있고 물에는 근원이 있는 법이니 뿌리를 찾고 근원에로 거슬러 올라가야 비로소 근본을 알게 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왜적이 봉작(封爵)을 논의하면서부터 전수(戰守)를 모두 폐하여 일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은 싸울 것을 말하면 일을 만들어 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하루아침에 봉작한 뜻을 거역하고 서쪽을 침범하였습니다. 당시 군문(軍門)은 새로이 바뀌었고 경리(經理)는 겨우 설치되었으며 군수물자는 조금도 준비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안으로는 알맞게 조치하고 밖으로 급히 서둘러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수송하며 전함을 만들고 병기를 준비하였으나, 남원(南原)이 다시 함락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정세는 마치 거센 물결이 서쪽으로 치닫는 듯 위태로왔으므로 현황(賢王)께서도 궁권(宮眷)을 바닷길을 통해 황해도로 옮기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경리공(經理公)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평양(平壤)으로부터 동쪽으로 달려가 청산(靑山)과 직산(稷山)에서 적을 무찌르고 6백 리를 추격하자, 왕경(王京)은 전과 같이 평온함을 되찾았습니다. 그뒤 다시 군문과 더불어 변경을 진수(鎭守)할 계책에 대해 의논하기를 ‘저 왜적들을 꺾지 않는다면 저들은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하고, 지난 겨울에 직접 갑주(甲胄)를 입고 도산(島山)을 포위 공격하여 10여 일 만에 3개의 보루를 쳐부수고 적 1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니 지난해 1년 동안 안정을 누린 것은 실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은 우리 병력을 겁내어 나아갈 수도 물러갈 수도 없게 되자, 자리를 떠 모두 도망쳤습니다. 이제 조선 백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고, 중국 군사들은 영광스럽게도 벼슬과 상금을 하사 받았습니다. 그런데 먼저 노고를 바친 경리(經理) 한 사람만은 시골에 묻혀 살면서 끝내 어떻게 될지를 몰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늘과 땅은 필시 현왕에게 불쌍히 여기는 심정을 두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특별히 소장(疏狀)을 올려 구원을 호소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위로는 천노(天怒)를 받고 아래로는 인심을 잃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면 왕께서 국토를 소유하고 왕위를 보유하였다 하더라도 근본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는 제가 사정(私情)이 있어서가 아니라, 실은 공론(公論)이 참으로 이와 같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아, 관백이 난을 일으켜 팔도가 폐허가 되었고 우리 조정에도 적지 않게 누를 끼쳤습니다. 석 본병(石本兵)은 감옥에 갇히었고 송 경략(宋經略)은 귀양살이를 하니, 과연 구가 누를 끼친 것이겠습니까. 그들이 봉작하자는 논의를 한 한 가지 일만은 진정 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먼저 평양(平壤)을 쳐부수고, 이어 개성(開城)왕경(王京)의 동쪽 성곽을 수복하였으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7도(道)를 되찾아 현왕에게 바쳤으니, 공 또한 위대합니다. 현왕께서는 의당 소장 안에 논급하여 만세의 인심을 즐겁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만리 타국을 구원하러 나왔으나 자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떻게 남을 바로잡을 여가가 있겠습니까. 저는 평소 현왕에게 남달리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으니, 제가 현왕에게 보답함도 마땅히 덕으로 해야 할 것이며 남과 같이 묵묵히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68책 108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62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許國威揭帖:

八年狡, 一朝盡掃, 國王江山, 鞏固如舊, 市野黎庶, 喜色耀天。 天朝將士, 鉅勳者進爵, 微勞者賚金。 日將凱歌, 渡, 豈不稱萬古一快事哉? 但木必有根, 水必有源, 遡根窮源, 方爲知本。 竊照自議封以來, 戰守俱廢, 當軸者以談戰爲生事, 一朝忤封西犯。 彼軍門新更, 經理甫設, 軍興之具, 百無一備。 賴二人同心, 一調度於內, 一劻勷於外, 徵兵輸餉, 治舟備器, 而南原又失守矣。 勢若狂瀾西湧, 有如賢王, 亦移宮眷於黃海, 擬效航海故事矣。 經理公晝夜自平壤東馳, 衄之於稷山前, 追斬六百里, 而王京奠然如舊。 後復與軍門鎭邊計, 議謂不挫之, 彼必復來, 遂前冬, 躬擐甲冑, 攻圍島山, 旬餘破寨三所, 擒賊千餘, 去歲一年寧謐者, 實賴此也。 今懼我兵力, 進退無據, 掃穴盡遁。 民享故土之樂, 兵榮爵金之賜。 獨一先勞經理, 縮息田間, 懼罪不知所終。 上天后土, 必有哀於王。 若不爲特疏救解, 誠恐上干天怒, 下失人心。 卽有土有位, 亦爲不知本之人矣。 不侫非有所私, 實公論專如此也。 嗟嗟! 關白倡亂, 八道丘墟, 我朝貽累不少。 石本兵逮獄, 宋經略謫居, 果誰累之乎? 卽其議封一節, 誠所當罪。 然先之碎平壤, 復開城、王京以東城郭, 擧七道殘破之墟而授之, 王功亦偉矣。 王亦宜疏內及之, 以快萬世人心也。 不侫萬里應援, 愧無寸功。 薏珠未釋, 銅柱難標, 自救不暇, 何遑規人? 惟素受雅愛, 不與衆類, 則之報王, 自當以德, 亦不宜與衆默默也。


  • 【태백산사고본】 68책 108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62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