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관찰사 정경세의 적장 가등청정의 편지에 관한 치계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鄭經世)가 치계하였다.
"도산(島山)의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철수하여 갈 때에 성 밖에다 천장(天將)에게 고하는 글을 꽂아 놓았는데, 그 글에 ‘대일본국(大日本國) 가등(加藤) 주계두(主計頭) 평청정(平淸正)이 대명(大明)의 여러 장수에게 고하는 방문(榜文)이다. 전일에 들으니, 순천의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이 대명의 여러 장수와 세 나라가 화친하자는 약속이 있어서 너희 나라가 행장에게 볼모를 보내려고 했다 한다. 그러나 너희들이 거듭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보내어 행장을 포위하였다. 너희들이 이처럼 속임수를 행하였으니 어찌 좀도둑이 아니겠는가. 다만 이 거짓 약속이 대명의 여러 장수에게 있었는가, 행장에게 있었는가? 내가 알지 못하겠으므로 지금 이 방문을 게시한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서 성을 지킬 수 있지만 순천이 이미 위태로우니 내가 구제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이 성을 비우고 잠시 순천으로 가는 것이니, 너희들도 순천으로 오면 내가 자웅(雌雄)을 가리고 승부를 결정지을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건대 사세는 비록 이와 같으나 3국은 친한 형제의 나라이니 화친이 없을 수없다. 너희가 만약 화친하고자 한다면 내가 비록 일본으로 돌아간다 해도 통신(通信)하는 것을 어찌 방해하겠는가. 또 우리 태합 전하(太閤殿下)가 지난 8월에 비록 하찮은 질병으로 세상을 떳지만, 아들 수뢰 전하(秀賴殿下)가 있고 또 고굉(股肱)과 같은 가강공(家康公)이 있는데 문무 겸비(文武兼備)하여 주 무왕(周武王)을 보좌하던 태공(太公)과 조삭(趙朔)을 돌보던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219) 와 흡사하니, 이로 인하여 우리 일본의 사직이 편안하다. 이러므로 다시 조선을 공격할 것은 손바닥을 보듯 명백하니 화친하는 것만 못하다. 이만 줄인다.’고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106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36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註 219]조삭(趙朔)을 돌보던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 : 춘추 시대 진경공(晉景公) 3년에 도안가(屠岸賈)가 조씨를 멸망시키려고 조삭과 그의 친척을 모두 죽였는데 조삭의 아내는 아이를 잉태하고 숨었다가 얼마 후 아들을 낳았다. 도안가가 그 소문을 듣고 수색하자 공손저구와 정영이 모의하여 저구는 다른 아이를 업고 산으로 숨고 정영은 그곳을 가르쳐 주어 도안가의 장수들이 저구와 아이를 모두 죽였다. 그 후 정영은 진짜 유복자인 조무(趙武)를 업고 산중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조무가 장성하여 도안가를 멸망시켰다. 《사기(史記)》 권43.
○慶尙道觀察使鄭經世馳啓曰: "島山賊將淸正撤去之時, 城外揷立天將(孑)〔了〕 書, 有云: ‘大日本國 加藤王[主] 計頭平淸正諭大明諸將之榜。 頃聞順天之倭將行長, 與大明諸將, 有三國和平之約, 爾國欲出質於行長矣。 雖然, 爾等再信乖約, 出兵圍行長。 爾等如此行僞謀, 豈非穿窬? 但此僞謀, 在大明諸將乎? 在行長乎? 我不知之, 故今此榜也。 我在此, 雖可對陣守城, 順天已危, 我不救拯之, 則無勇也。 故我先掃空此城, 暫往于順天也, 爾等亦來于順天, 我當爭雌雄決勝負也。 熟以事勢, 雖至如此, 三國是親兄弟之國也, 不可無和平也。 爾若欲和平, 則(縱然)我雖還日本, 豈妨通信? 且我大閤殿下, 去八月, 雖微疾薨, 有令嗣秀頼殿下, 又有股肱大臣家康公, 有文有武, 恰似太公之於周武, 如嬰、臼於趙朔也。 因玆我日本社稷安寧也。 以是再伐朝鮮, 如指掌, 不如至和平。 不宣。’"
- 【태백산사고본】 67책 106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36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