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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05권, 선조 31년 10월 5일 정사 7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서과도와 진어사의 아문에 소방의 억울함에 대해 정문하다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서 과도(徐科道) 【서관란(徐觀瀾). 】 진 어사(陳御使)의 【진효(陳效). 】 아문에 정문(呈文)하였다.

"소방(小邦)이 악명(惡名)을 입고 씻어내지 못하여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다시 슬프게 호소합니다. 그가 말한 왜노(倭奴)와 왕래하고, 왜적에게 공물(貢物)을 바치며, 삼포(三浦)에 왜호(倭戶)가 있다는 등의 말에 대하여 원인을 따져 분명하게 진술하겠습니다. 일본(日本)이란 종자가 해마다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어 강헌왕(康獻王)이 겨우 평정하였지만 그래도 그들이 도적질해 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대마도(對馬島)는 소방에서 가장 가깝고 그곳의 사람들이 우리와 서로 팔고 사는 것을 이롭게 여겨 남쪽 변방에 와서 간곡히 요청하므로 마침내 왕래하기를 허락하였고, 통상(通商)하게 하여 그 욕구를 채워주고 미곡(米穀)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관사(館舍)를 두어 왜노(倭奴)를 대접하는 준례가 생겼습니다. 정통(正統)189) 연간에 그들이 사신 보내기를 요구함으로 인하여 일찍이 배신(陪臣)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통유(通諭)하고 왔는데, 이는 저들의 실정을 살펴 천조에 보고하려는 것이었으니 국가를 지니고 있는 자로서 면치 못할 바이고 또한 천조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바입니다. 정통 계해년190) 에 왜적들이 중국을 침범하고 이어 소방을 약탈하다가 소방의 변방 장수에게 잡히고 나머지 왜적은 대마도로 도망쳤으므로 소방이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잡아 보내라고 일러 포로들을 천조에 바쳤습니다. 가정(嘉靖)191) 계미년192) 에 왜노가 영파부(寧波府)에서 난리를 꾸며 변방의 장수를 죽이고 달아났는데, 그 무리들이 소방에서 체포되었으므로 포로와 죽인자들을 즉시 바쳤으므로 여러 번 조정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 삼포(三浦)에다 귀순한 왜노들을 거주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왜적의 상황을 탐지하여 보고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왜호(倭戶)가 있다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덕(正德)193) 경오년194) 에 왜노가 난리를 일으키므로 장수를 보내어 섬멸하고 그후로는 절대로 소방에 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해동기략(海東紀略)》으로 말하자면, 신숙주가 왜승(倭僧)이 기록한 왜국의 세계(世系)를 얻어 가지고와서 그 본고(本稿)에다가 소방이 관사를 두어 왜노를 대접하던 사례(事例)를 덧붙여 한 책을 만든 것입니다. 연호(年號)를 나누어 쓴 것은 더욱 변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크게 쓴 것은 본기(本紀)이고 나누어 쓴 것은 첨주(添注)이니 즉(卽)자를 더한 것을 보면 그 뜻이 더욱 명백합니다.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사기를 가지고 《춘추(春秋)》를 지으면서 노나라 원년(元年)은 크게 쓰고 주(周)나라 평왕(平王) 몇 년이라고 분주(分注)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가지고 존주(尊周)의 의리를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관백(關白)에 대해서는 전부 죽었다[死]고 썼으니 일본을 존봉(尊奉)하는 자라면 과연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조(祖)라고 호칭한 한 가지 일로 말하면 소방이 중국 조정을 사모하고 본받은 나머지 참람된 것이 많이 있었는데 강헌왕(康獻王) 때에 이르러 일체 바로잡아 제(制)를 교(敎)라 하고, 주(奏)를 계(啓)라 하고, 궐(闕)을 부(府)라 하고, 칙(勑)을 유(諭)라 하고, 태자(太子)를 세자(世子)라고 하였는데, 유독 칭호(稱號)만은 신라(新羅) 시대부터 이러한 착오가 있었습니다. 대개 신민(臣民)들이 스스로 존칭하여 전일의 잘못을 답습한 것이니, 이는 실로 무지 망작(無知妄作)한 죄입니다. 이로 인하여 죄를 받는다면 참으로 변명할 바 없지만 참람이라고 말한다면 실정이 아닙니다.

이른바 협강(夾江)과 중주(中洲)라고 한 것은 다만 머물러 농사짓는 것을 금지하여 뒤섞여 살며 사건을 야기시키는 걱정을 막으려고 한 것뿐입니다. 도사(都司)에게 이자하고 혹은 조정에 주문하여 승락없이 경작하는 곳을 모두 포기토록 하고 비석을 세워 금지 시켰습니다. 일의 대략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원통한 것은 신묘년195) 봄에 왜추(倭酋)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길을 빌려달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우리 임금께서 의리를 들어 배척하자 왜적들이 마침내 대거 쳐들어 왔습니다. 고금 천하에 적을 국내에 끌어들여다가 스스로 자기 나라는 망치면서 군부(君父)의 나라에서 땅을 다툴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황제께서 무엇 때문에 백만의 재물을 허비하여 상국을 범한 속국을 구원하겠으며 소방이 무엇 때문에 7년 동안이나 힘을 다해서 스스로 불러들인 왜적과 전쟁을 하겠습니까.

더욱 원통한 마음으로 호소할 일은 우리 임금께서는 즉위한 이래로 학문에 힘쓰고 정무(政務)에 열중하며 신하들을 우대하고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신민(臣民)에게 포학하게 한다고 무고(誣告)하였고, 일찍이 한번도 술을 마시며 즐긴 적이 없고 성악(聲樂)과 여색(女色)을 마음에 전혀 두지도 않았는데, 주색(酒色)에 빠졌다고 모함한 사실입니다. 노야(老爺)께서 소방(小邦)에 오셔서 모든 것을 잘 살피지 않은 것이 없으실 것입니다. 지난번 양무원(楊撫院)이 갈 때에 주문을 황제께 올려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정 찬획(丁贊畫)과 뜻이 서로 틀려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찌 감히 붕당(朋黨)을 결성하여 속여 성명(聖明)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찬획은 또 동방(東方)의 일이 잘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든 사람들의 공적을 무너뜨리기에 힘쓰고 있으니 그가 뜻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불초한 자입니다. 국가도 파탄되고 가정도 망한 상황에서 몸을 바쳐 임금을 도우며 지금까지 구차히 살고 있는데, 이토록 망극한 변고를 당하니 심장이 떨리고 두근거려 대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머리를 나란히 늘어뜨리고 왕법(王法)에 따라 죽어서 사람들의 말에 사죄하기를 원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노야(老爺)께서는 원통하고 억울한 정상을 통찰하여 빨리 명쾌한 처단을 내리시고 또한 황제께 아뢰어 우리 나라로 하여금 아비도 임금도 무시하는 패륜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몹시 슬프고 절박한 심정 견딜 수 없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66책 105권 8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1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출판-서책(書冊)

  • [註 189]
    정통(正統) :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年號).
  • [註 190]
    계해년 : 1443 세종 25년.
  • [註 191]
    가정(嘉靖) :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 [註 192]
    계미년 : 1523 중종 18년.
  • [註 193]
    정덕(正德) :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 [註 194]
    경오년 : 1510 중종 5년.
  • [註 195]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判中樞府事尹斗壽等, 率百官呈文于徐科道 【觀瀾。】 陳御史 【效。】 兩衙門曰:

小邦蒙被惡名, 莫能湔滌, 不避煩瀆, 再有哀籲。 其所謂交通倭奴、納貢倭賊、三浦戶等語, 請從源痛陳。 日本一種, 歲爲邊患, 康獻王僅能勘定, 猶未能防其竊發。 對馬一島, 最近於我。 其人利我互市, 來款南邊, 遂許其往來, 通其關市, 以中其欲, 賜以米穀, 以悅其心。 於是有館待倭奴之例焉。 正統年間, 因其求使, 嘗遣陪臣申叔舟, 通諭以來, 蓋驗察彼中情形, 報聞天朝, 此固有國之所不免, 而亦天朝之所已知也。 正統癸亥, 倭寇上國, 仍掠小邦, 爲小邦邊臣所得, 餘賊遁歸對馬島, 小邦諭島主, 挐送獻俘于天朝。 嘉靖癸未, 倭奴作亂於寧波府, 殺邊將而走, 其黨被獲於小邦, 卽獻俘馘。 嘉靖癸丑, 丙申等年, 俱獲入犯之, 節次獻俘, 屢蒙朝廷奬賞。 且於三浦許居歸附子, 使之探報賊聲息, 此所以有戶之說也。 正德庚午, 奴作亂, 遣將勦滅, 自後絶不居小邦。 至於《海東紀略》, 申叔舟僧所記其國世係, 遂因其本稿, 附以小邦館待奴事例, 爲一冊。 年號分書之事, 尤不足辨。 大書者本記也, 分書者添注也。 加一卽字, 其意尤明。 孔子史作《春秋》, 大書元年, 分注周平王幾年, 亦可以因此而有疑於尊之義乎? 況其關白, 皆書以死, 尊奉者果若是乎? 稱祖一事, 則小邦慕效中朝, 多有僭擬, 及康獻王一切釐正, 如制爲敎, 奏爲啓, 闕爲府, 勑爲諭, 太子爲世子之類。 獨其稱號, 則自新羅有此謬誤。 蓋以臣民, 自中尊稱, 襲舊承訛, 此實無知妄作之罪。 以此受罪, 固無所辭, 若謂之僭, 則非其情也。 所謂夾江、中洲者, 只欲禁革住種, 以防混處惹事之患而已。 移咨都司, 或奏聞朝廷, 將冒耕等處, 盡行抛荒, 立碑禁約。 事之大略, 不過如此。 最所冤痛, 辛卯之春, 賊酋秀吉, 致書假道, 寡君擧義斥絶, 賊遂空國而來。 古今天下, 寧有引賊入內, 自覆其國, 而爭地於君父之邦者哉? 若然, 皇上緣何費百萬財, 以援犯上之屬國; 小邦緣何竭七年力, 以戰自招之倭賊? 尤所冤籲者, 寡君受命以來, 勵精學問, 銳意治務, 優待臣隣, 字恤備至, 而乃以暴虐臣民誣之, 未嘗有一番宴飮, 聲樂, 女色不經於心目, 而乃以沈湎酒色, 詆之。 老爺來莅小邦, 宜無不察。 頃於楊撫院之去, 抗奏保留, 與丁賛畫激而至此。 安敢黨結朋欺, 以負聖明? 贊畫且懼東事之幸完, 務(懷)〔壞〕 諸人之成績, 主意所在, 未知如何也。 職等俱以無狀, 國破家亡, 捐身報主, 偸生到今, 遭此罔極之變, 心腸震悸, 不知所處。 唯願駢死於王法, 以謝人言。 伏願老爺, 洞察冤枉之情, 亟賜明勘, 轉奏天聽, 俾小邦, 得免於無父無君之域。 不勝痛泣懇迫之至。


  • 【태백산사고본】 66책 105권 8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1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