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급사에게 군사·병마·군량·성곽 수선 등에 대해 회자하다
서 급사에게 회자(回咨)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돌이켜보건대 본직(本職)은 재주가 용렬하고 형세 또한 어려워서 난리를 당한 지 7년이 되도록 스스로 떨쳐 일어서지 못하고 번거롭게 군사의 도움을 요청하여 두 차례 성대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동방을 보살피는 걱정을 천조에 끼쳤습니다. 그러기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은혜를 저버린 죄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천자의 은혜가 하늘과 같아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곡진히 더하여 군사와 식량을 증가해 주시니 이는 불 속의 사람을 구원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에 비교가 되지 않아 오늘날까지 끊어지지 않고 지탱해 온 것입니다. 대병을 벌써 내어 군사를 출동할 시기가 정하여졌기에 본직과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은 넓은 은혜에 감격하여 아침 저녁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수어지도록 노력하여 거의 만분의 일이나마 그 은혜를 갚으려 합니다.
생각하건대 이 왜적은 해외(海外)의 강포(强暴)한 자들로서 자존 망대하여 흉패(兇悖)하기 짝이 없는 천지 사이의 한 독종(毒種)입니다. 까닭없이 전쟁을 일으켜 우리 나라에 해독을 끼치는 것은, 마치 큰 돼지와 긴 뱀처럼 포악한 마음으로 남의 땅을 잠식하여 자기들의 영토를 넓히려는 계책으로 해상에 둔거한 채 시간을 끌면서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거짓으로 강화(講和)를 요청하여 우리의 국력(國力)이 어떤가를 시험하고, 혹은 늙고 병든 군사로 약한 것을 보여서 우리 군사의 마음을 해이하게 하였습니다. 천조에서 봉전(封典)182) 을 허락하였으나 사납고 패역스러움이 더욱 심하여 사절(使節)이 겨우 돌아오기가 무섭게 흉악한 군대가 또 이르렀습니다.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천조의 군사를 죽인 것이 3천 명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들의 흉모와 간계가 진실로 이에 그칠 뿐이 아닙니다. 지난해 적의 장수 소서행장 등이 길을 나누어 진격하여 거세게 몰아치는 기세가 한강의 남쪽에 닥치자 도성(都城)의 인심이 흉흉하여 조석(朝夕)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 총독(總督)·군문(軍門)이 방략(方略)을 가르쳐 주고 경리(經理)·도찰원(都察院)이 단거(單車)로 난리를 구원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한 성(城)에 들어가서 인심을 진정시키고, 마침내 제장(諸將)들과 약속하여 담소(談笑)하는 짧은 시간에 적을 물리쳐 우리 나라로 하여금 어육(魚肉)이 됨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후 도산(島山)의 승리에 천조의 위세는 더욱 진작되고 적의 기세는 크게 꺾였으니 가등청정을 잡아 묶지도 못하였어도 세상에 드문 하나의 뛰어난 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전라도·경상도의 두 도(道)가 전쟁의 와중에서도 보전된 것은 모두 이 한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공때문입니다. 대저 오랑캐는 금수입니다. 금방 배반하고 금방 복종하는 것은 진실로 그들의 일반적인 작태이지만 간교(奸狡)하게 이리저리 속이는 것은 이 왜적이 가장 심합니다. 만일 감춰진 빌미를 도려내고 뿌리의 싹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변변치 못한 약속으로는 그 흉악한 꾀를 그치게 하지 못하고 끝내 능멸하는 마음만을 열어 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하루라도 적을 놓아주면 여러 대의 걱정거리이다.’ 하였습니다. 저 왜적이 흉칙하여 제압하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7년을 낯선 땅에서 지내느라 정예(精銳)한 군사는 이미 기운이 떨어졌고 새 군사는 보충되지 않아 위세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다가 또 각처에 둔병(屯兵)했기에 병력이 자연 분산되어 물 위에 떠 있고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과 같이 죽음을 자초(自招)하는 도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날뛰면서 스스로 강한 체하는 것은 마지막 기세를 부리는 것일 따름입니다. 형세가 그와 같은데도 벌레가 독을 쓰듯 감히 천위(天威)에 항거하는 것은 단지 예전에 한번도 징계(懲戒)를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도(天道)가 좋은 운세로 돌아오고 안심이 일제히 분하게 여기는데 스스로 그 죄악을 두텁게 하였으니 어찌 끝까지 오래 지탱할 리가 있겠습니까.
현재 대병이 이미 모이고 군량이 대략 마련되었으니,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이 기세를 합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한꺼번에 일어나 천자의 위엄을 멀리 드날리며 당당한 기세로 임하면 계란을 누르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존망이 단지 이번 거사에 달려 있는데, 혹시라도 주저하고 기다리면서 진무(鎭撫)할 기회를 결단하지 않아 군사는 피로하고 재력은 떨어져 가을과 겨울을 나게 되면, 10만의 군사가 배회(徘徊)하고 기운이 위축되어 점점 군심(軍心)은 날로 헤이해지고 적의 준비는 날로 견고해 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봄의 조수(潮水)를 타고 군사를 증가하여 대거 충돌해오면 우리 나라가 참패를 당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천하의 대사(大事)가 이로부터 어긋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어찌 스스로 힘을 내지 않겠습니까. 다만 전쟁이 일어난 지 이미 오래되어 극도로 국력이 떨어진 데다 밖으로는 강한 도적을 방비(防備)하고 안으로는 대병의 군비(軍費)를 공급하느라 겨우 한 줄기 맥을 연명하여 실낱처럼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금 목숨을 내놓고 있는 힘을 다하여 기필코 헤쳐 나갈 방도를 힘쓰며 거의 천조의 위세를 의지하여 이 왜적을 토벌하려는 터에 어떻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를 소홀히 하여 대사를 그르치겠습니까.
지세(地勢)가 유리한 요새를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서울은 한강으로 견고함을 삼는데 충주(忠州)는 한강의 상류(上流)에 위치하여 조령(鳥嶺) 두 고개가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이른 바 조령과 죽령은 곧 경상도와 충청도의 접경(接境)지역으로 자못 잔도 철산(棧道鐵山)183) 같은 험함이 있기에 제법 지킬 만한 곳입니다. 추풍령(秋風嶺)이 또 청주와 금산(金山) 사이에 있으나 조령·죽령에 비해서는 지형이 평탄합니다. 대개 우리 나라는 본시 탄환(彈丸)만한 조그마한 지역이기에 시내와 산악의 험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수비하기 좋은 형세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와 일본은 큰 바다가 가로놓여 험한 파도를 믿을 만하였었는데 지금 이미 지키지 못하여 천연(天然)의 험요(險要)가 이미 적의 소유가 되었으니 전라도·경상도의 남쪽은 막아줄 만한 험한 지형이 다시 없습니다. 왜적이 만일 바다 위에 둔병하여 소굴을 만들고 때를 틈타 출몰하면, 경상도에서 강원도까지와 전라도에서 충청도·경기까지는 그 사이의 도로가 멀지 않으므로 유민(遺民)들이 놀라 흩어져 머물러 살 곳이 없을 것이니, 필시 수습하여 스스로를 보전하면서 웅거하여 지킬 방도를 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일거에 소탕(掃蕩)하여 지역 밖으로 몰아내어 한 명의 왜적도 없도록 한 다음에 수륙(水陸)의 군사로 해전에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병마를 선발하여 연습시킨 것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리 나라가 재차 왜적의 난리를 당하여 관병(官兵)은 거의 다 사망하였고, 여러 종류의 남정(男丁)을 불러 모아 대략 훈련시켜서 현재 동로(東路)에서 협초(協勦)184) 하는 자가 5천 5백여 원명(員名)185) 이고 중로(中路)에서 협초하는 자가 2천 2백여 원명이며, 서로(西路)에서 협초하는 자가 1만여 원명이고, 해영(海營)186) 에서 협초하는 자가 7천 3백여 원명입니다. 각기 대략적인 무예는 익혔으나 그 수효가 많지 않고 옷과 갑옷이 미비하여, 천조의 군사를 협조하게 하면 그런대로 우익(羽翼)을 펼칠 수는 있으나 실로 독자적으로 적과 겨루기는 불가합니다.
군량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근본은 양남(兩南)에 있는데 두 차례 왜적의 난리를 겪으면서 공·사(公私)의 창고가 모두 불타버렸기에 곡식을 생산하는 근원이 끊겼습니다. 온갖 계책으로 부지런히 일하여도 수습되는 것이 매우 적어 보잘것없으며 백성들이 재산을 모을 바탕이 없어져서 수효가 몹시 적습니다. 지난해 5월부터 시작하여 올해 9월에 이르기까지 용산창(龍山倉)과 강화 해구(江華海口)에 거두어들인 천조와 우리 나라의 쌀과 콩이 모두 39만 5천 3백 50석입니다. 그 안에서 이미 지급한 숫자는, 천조의 도미(稻米)가 2천 3백 10석, 소미(小米)가 3만 1천 7백 석, 콩이 2만 2천 5백 50석이고, 우리 나라의 대미(大米)가 5만 4천 9백 10석, 소미가 1만 9천 1백 40석, 콩이 8만 1천 7백 20석입니다. 현재 눈으로 헤일 수 있는 것이 천조의 도미가 5천 9백 석, 소미가 3만 2천 6백 70석, 콩이 2만 2천 2백 60석이고, 우리 나라의 대미가 3천 1백 20석, 소미가 9백 60석, 콩이 4천 4백 10석입니다.
그리고 현재 충주(忠州)로 운반하는 중국의 도미가 3천 7백 10석, 우리 나라의 대미가 3천 4백 90석, 천조 및 우리 나라의 소미가 모두 2만 1천 9백 70석, 콩이 모두 1만 6천 2백 90석입니다. 현재 여주(驪州)로 운반하는 천조 및 우리 나라의 소미가 모두 5천 50석, 콩이 3천 10석인데, 이상의 쌀과 콩은 동로와 중로의 두 길로 전송하고 있습니다. 현재 은진(恩津)으로 운반하는 천조의 도미가 1천 1백 90석, 소미가 1만 6천 8백 80석, 콩이 2천 9백 30석인데, 이상의 쌀과 8백 석, 소미가 2만 7천 8백 40석, 콩이 4천 1백 석인데, 이상의 쌀과 콩은 서로로 전송하고 있습니다. 현재 나주(羅州)로 운반하는 천조의 도미가 2백 석, 소미가 4천 9백 80석인데, 이상의 쌀과 콩은 해영으로 전송하고 있습니다. 또 3로(路) 및 해영을 살피기 위하여 모든 곳에 배신(陪臣)을 조발(調發)하여 운반과 지급을 전관(專管)시키고, 또 근방의 주(州)·현(縣)에 관청이나 개인의 쌀과 콩을 모두 거두어 군량에 대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지금 또 가을 벼가 벌써 익어 수확을 거의 마쳤으니 정상적인 액수 이외에 따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설치하여 민간에 권하여 모집하거나 혹은 사들여 모으는 등 온갖 방법으로 보태고 도우면 아마 부족함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곽의 수선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리 나라는 3면(面)으로 적의 침략을 받는 위치이기에 국가가 생긴 이후로 경도(京都)와 연해(沿海)지방에 모두 성(城)과 해자(垓子)를 설치하였습니다. 전쟁을 당한 뒤로부터 적군이 지나간 지역의 성채(城柵)는 모두 파손되었으므로, 전라도·충청도·경상도·경기 등처는 이미 험요(險要)의 소재(所在)를 자세히 가리어 산성(山城)을 쌓아 지키고 방어할 곳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민력(民力)이 쇠잔해져서 법식과 같이 수리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함락된 지역을 수복(收復)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의 전라도·경상도 지방이 재차 함락을 당하였으나 곧 천병의 구원을 입어 차츰 수복되고 있습니다. 다만 경상좌도의 울산(蔚山)·양산(梁山)·동래(東萊)와 우도의 김해(金海)·창원(昌原)·웅천(熊川)·고성(固城)·거제(巨濟)·진주(晉州)·사천(泗川)·곤양(昆陽)·남해(南海)와 전라좌도의 순천(順天) 등 주(州)·부(府)·군(郡)·현(縣)이 아직 함락당하여 있습니다. 현재 3로(路)로 일제히 진격하면 거의 옛강토를 회복할 것입니다.
적의 잔여 수효에 대해서는, 이 왜적은 왕래가 일정하지 않아 아침 저녁으로 형세가 다릅니다. 각처의 변신(邊臣)들이 보내는 치보(馳報)는 도망쳐서 돌아 온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서 얻은 것이 많아서 앞뒤가 같지 않으므로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각처의 초보(哨報)에 의거하면, 경상좌도의 울산군에 약 1만여 명이 있으니 곧 가등청정이 거느리는 것이고, 서생포(西生浦)에 약 4천∼5천 명이 있는데 어떤 이는 1만여 명이라고 합니다. 부산포(釜山浦)에 약 4천∼5천 명이 있고, 양산군에 약 4천∼5천 명이 있으니 곧 갑비수(甲斐守)가 거느리는 것입니다. 우도의 김해부에 약 1만여 명이 있으니 곧 풍직무(豐直茂)가 거느리는 것이고, 덕지도(德只島)에 약 4천∼5천 명이 있고, 고성현에 약 6천∼7천 명이 있고, 거제현에 약 4백∼5백 명이 있고, 진주에 약 4백여 명이 있고, 영신현(永新縣)에 약 2천여 명이 있고, 사천현에 약 7천∼8천 명이 있는데 어떤 이는 1만여 명이라고도 합니다. 곤양군에 약 3백여 명이 있고 남해현에 약 1천여 명이 있으니 곧 평의지(平義智)·평조신(平調信) 등이 거느리는 것이고, 창원부와 웅천현 두 곳의 남은 적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웅천현은 곧 대영풍무수(大營豐茂守)가 거느리는 것입니다. 전라도의 순천부에 약 1만 5천여 명이 있으니 곧 평행장(平行長)·비란도(飛蘭島) 등이 거느리는 것인데, 노약자(老弱者)가 모두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곳곳에 성을 쌓고 양식을 축적하면서 형편을 연락하여 도무지 본토로 돌아갈 뜻이 없습니다.
그들의 정형(情形)의 향배(向背)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흉악하고 패려한 모양은 이미 앞에 진술한 것과 같아서 개처럼 짖어대며 계략을 꾸며 끝없는 악을 자행한 것이 하루이틀이 아닌데, 지금은 천조의 군사와 서로 시살(廝殺)하면서 조금도 꺼리지 않으니, 그들의 향배의 소재는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군의 장수를 살펴보면 그중에서 가등청정은 몹시 포악하고 사나우나 단지 싸움을 좋아하는 한 무부(武夫)이고, 교활하고 거짓을 품고 있는 것은 소서행장이 최고이어서 전부터 우리 나라와 천조가 이 놈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 여러 차례였습니다. 가슴속에 남몰래 다른 뜻을 품고 흉악한 계책을 주장하면서 겉으로는 공순함을 보여 언제나 강화(講和)하여 군사를 거두는 것으로 말을 합니다. 형편이 곤궁하면 꼬리를 치면서 강화하기를 바라 우리 군사를 늦추고 군사가 물러가기를 기다려서 곧 다시 독(毒)을 마음대로 부립니다. 전후에 약속을 어기고 천조를 조롱하여 재차 군사를 움직이게 한 것은 모두 이 놈이 한 짓입니다. 지금 대군이 저들의 진(陣)을 억압해 천자의 위엄이 진동하자, 온갖 지혜를 짜내어 사신(使臣)을 통하며 강화를 요청하니 참으로 통분(痛憤)스럽습니다. 혹시라도 교묘한 꾀에 넘어가 오래 끌면서 군사를 출동하지 않다가 기회가 놓치게 되면 군사는 해이해지고 사기가 꺾여 대사를 그르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천조가 우리 나라를 위하여 천하의 군사를 출동하고 백만의 재물을 보내서 대사가 이미 10분에 8∼9는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구원하기를 시작하였는데 어찌 계속하여 그 끝을 내지 않으시렵니까. 이미 한창 강해지는 기세를 막았는데 어찌 저 쇠잔한 도적을 놓아 버리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단연코 힘을 다하여 식량과 기계를 마련하고 힘을 다하여 공급하면서 기세를 도와 완전한 승리를 거둘 따름입니다. 단지 대사는 틀어지기 쉽고 군의(群議)는 동요되기 쉬운 것이기에, 시기에 맞추어 섬멸하지 못하면 먼저 궤열(潰裂)될까 걱정입니다. 귀관(貴官)이 공경히 천자의 엄명(嚴命)을 받들어 우리 나라의 일을 조사 처리하게 되었으니, 먼저 명성이 미치는 곳에 풍채(風彩)가 즉시 변할 것입니다. 본직에 이마에 손을 얹고 기다리면서 가슴속에 있는 것을 진술하기를 소원하였는데, 비루하다고 업신여기지 않고 먼저 자문을 보내주시고, 또 옛날의 어진 임금이 중흥(中興)한 아름다운 말로 권면(勸勉)까지 해주시니 기쁘고 감격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오늘날 백만 생민(生民)의 목숨이 모두 귀관에게 달렸습니다.
번거롭게 요청하노니, 귀관은 위로는 황상(皇上)의 구제하시는 인덕(仁德)을 체득하고 아래로는 우리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생각하여 한편으로는 앞의 실정을 구비하여 속히 제주(題奏)하고 한편으로는 각 진영(陣營)을 엄히 감독하여 일거에 섬멸하면 우리 나라의 다행일 뿐더러 천하의 다행일 것입니다. 자문의 내용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살펴서 시행하십시오. 잘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흠차 사감 동정 군무 병과 좌급사중(欽差査勘東征軍務兵科左給事中)에게 보내는 자문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66책 104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10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
- [註 182]봉전(封典) : 중국 조정에서 공신(功臣)이나 그 선세(先世)에 내려주던 작위(爵位). 여기서는 일본의 왕(王)과 관백(關白)에게 작위를 봉해 줌을 허락하였다는 말이다.
- [註 183]
잔도 철산(棧道鐵山) : 몹시 험준한 요해지(要害地)를 이르는 말. 모두 중국의 파촉(巴蜀) 지방을 이르는데, 잔도(棧道)는 산로(山路)가 험준하여 나무 가교(架橋)를 만들어 통행하는 것이고, 철산(鐵山)은 지금의 사천성 정연현(四川省井硏縣) 동북에 위치한 철(鐵)의 산지(産地)로 제갈양(諸葛亮)이 이곳에서 병기(兵器)를 만들었다 한다. 《한서(漢書)》 권40 장량 열전(張良列傳) 《독사방흥기요(讀史方興紀要)》 사천(四川) 성도부(成都府) 정연현(井硏縣).- [註 184]
○回咨于徐給事。 其文曰:
竊照當職, 才旣譾劣, 勢又艱難, 被兵七年, 不能自振, 煩奏乞師, 再勤盛擧, 以貽天朝東顧之憂。 失職辜恩, 罪無所逃。 聖恩如天, 曲加矜憐, 增兵增餉, 不啻救焚拯溺, 綿綿扶植, 以至于今。 大兵已發, 師期有日, 當職與一國臣民, 感戴洪恩, 晨夜雪涕, 惟欲粉骨糜身, 庶能仰酬其萬一。 査得本(職)〔賊〕 , 强梁海外, 肆然自大, 薄兇積悖, 特一天地間毒種。 無故興兵, 毒害小邦, 封豕長蛇, 爲荐食啓疆之計, 屯據海上, 留連不退。 或陽爲乞款, 以試淺深, 或羸師示弱, 以緩軍心。 雖天朝許其封典, 而桀逆滋甚, 使節纔回, 兇鋒又至。 南原之陷, 敗殺天兵, 至於三千, 是其兇謀奸計, 固非但已。 上年賊酋行長等, 分道進搶, 長驅之勢, 已迫漢南, 都城洶懼, 莫保朝夕。 幸賴總督、軍門, 指授方略, 經理、都院, 單車赴難, 冒入危城, 鎭定人心, 遂約束諸將, 却賊於談笑之頃, 俾小邦得免魚肉, 而其後島山之捷, 天威益振, 賊勢大挫, 雖未得縛取淸賊, 亦一曠世之奇功。 迄今全、慶兩道, 得保餘燼者, 皆此一戰之功。 大抵夷虜, 禽獸也。 乍叛乍服, 固其常態, 而奸狡變詐, 此賊爲最。 若不芟夷蘊祟, 絶去根萠, 則區區約誓, 不足以戢其兇謀, 而適啓其陵侮之心。 語云: "一日縱敵, 數世之患。" 伊賊雖曰兇獷難制, 而七年客土, 選鋒旣褫, 生兵未添, 聲勢亦殺。 而兼又屯列各處, 兵力自分, 浮寄孤懸, 不過爲送死之寇, 而其所以跳躍自强者, 亦可謂末勢耳。 猶且蜂蠆肆毒, 敢抗天威者, 特以日前未嘗有一番懲創故耳。 天道好還, 人心齊憤, 自厚其惡, 理豈終久? 目今大兵已集, 糧餉粗辦, 騎步協勢, 水陸竝擧, 皇靈遠暢, 聲勢堂堂, 擧而臨之, 不啻壓卵。 小邦存亡, 只在此擧, 倘或遲疑等待, 撫機不斷, 兵疲財匱, 蹉過秋冬, 使十萬之師, 徘徊銷縮, 漸至軍心日怠, 賊備日固。 春汛添兵, 大擧衝突, 則小邦之糜爛, 已無復言, 而竊恐天下大事, 自此去矣。 其在小邦, 寧可不自力耶? 第以軍興旣久, 匱竭已極, 外以備禦强寇, 內以供奉大兵, 一脈僅延, 不絶如綫。 然而方竭死殫力, 務期接濟, 庶幾憑仗威靈, 以討此賊, 何敢一毫自忽, 以誤大事? 以言其地利險要, 則小邦京城, 以漢水爲固, 而忠州在漢江上流, 當鳥嶺、竹嶺兩嶺之會。 所謂鳥嶺、竹嶺者, 乃慶尙、忠淸連界之間, 而頗有棧道鐵山之險, 稍可據守。 秋風嶺又在淸州、金山之間, 而地勢比鳥、竹平坦。 大槪小邦, 本是彈丸蕞爾之區, 雖有溪山之險, 其間形便, 可據者無幾。 惟是小邦, 與日本, 隔以大海, 風濤足恃, 而今旣失守, 天塹之險, 已爲賊有, 全、慶以南, 無復形勝可以界限。 賊若留屯海上, 以爲巢窟, 而乘時出沒, 則自慶尙至江原, 自全羅至忠淸、京畿, 其間道路不遠, 遺民駭散, 無所棲泊, 必不能收拾自保, 以爲據守之計。 必須一擧蕩掃, 驅出境外, 使無一個倭賊, 然後水陸之兵臨海。 以言其兵馬簡練, 則小邦再被賊禍, 官兵死亡殆盡, 招集雜色男丁, 略加訓鍊, 見在東路協勦者, 五千五百餘員名; 見在中路協勦者, 二千二百餘員名; 見在西路協勦者, 一萬餘員名; 見在海營協勦者, 七千三百餘員名。 雖各粗習武藝, 而該數不多, 衣甲未備, 若使協助天兵, 則猶可張其羽翼, 誠不可獨爲抵敵。 言其糧餉, 則小邦根本, 在於兩南, 而自再經賊燹, 公私倉廒, 盡爲灰燼, 而生穀之源絶矣。 百計拮据, 收拾零星, 而生聚無因, 數甚不敷。 始自上年五月, 至本年九月, 於龍山倉及江華海口, 收過天朝、小邦米、豆, 共三十九萬五千三百五十石零內, 已支放, 天朝稻米, 二千三百一十石零, 小米三萬一千七百石零, 豆子二萬二千五百五十石零, 小邦大米五萬四千九百一十石零, 小米一萬九千一百四十石零, 豆子八萬一千七百二十石零。 卽目見在天朝稻米五千九百石零, 小米三萬二千六百七十石零, 豆子二萬二千二百六十石零, 小邦大米三千一百二十石零, 小米九百六十石零, 豆子四千四百一十石零。 見運忠州, 天朝稻米三千七百一十石零, 小邦大米三千四百九十石零, 天朝及小邦小米共二萬一千九百七十石零, 豆子共一萬六千二百九十石零。 見運驪州, 天朝及小邦小米共五千五十石零, 豆子三千一十石零, 以上米豆, 轉送東、中二路。 見運恩津, 天朝稻米一千一百九十石零, 小米一萬六千八百八十石零, 豆子二千九百三十石零, 以上米豆, 轉送中路。 見運全州, 天朝稻米二千八百石零, 小米二萬七千八百四十石零, 豆子四千一百石零, 以上米、豆, 轉送西路。 見運羅州, 天朝稻米二百石零, 小米四千九百八十石零, 以上米、豆, 轉送海營。 又照三路及海營, 俱有調發陪臣, 專管運轉、收放, 又於傍近州縣, 盡括公私米豆, 以圖接濟。 今又秋禾已熟, 收穫幾盡, 另於常額之外, 多方設法, 勸募民間, 或買辦收儲, 百般添助, 庶冀不致虧缺。 以言其城郭繕修, 則小邦三面受敵, 自有國以來, 京都及沿海地方, 俱設城、壕。 自被兵之後, 賊鋒經過之地, 城柵俱被夷殘, 全羅、忠淸、慶尙、京畿等處, 已經審擇險要去處, 設築山城, 以爲保守捍禦之地, 而只恨民力殘匱, 不得如法修葺耳。 若其淪陷果否收復, 則小邦全、慶地方, 再被淪沒, 旋蒙天兵救勦, 漸次收復, 唯慶尙左道 蔚山、梁山、東萊, 右道金海、昌原、熊川、固城、巨濟、晋州、泗川、昆陽、南海, 全羅左道 順天等州府郡縣, 尙被淪陷。 目今三路齊進, 庶幾得以恢復舊疆。 至於賊數去留多寡, 則本賊去來無常, 朝夕異形, 各處邊臣馳報, 多得於走回人等傳說, 前後不同, 委難的指。 姑據各處哨報, 慶尙左道 蔚山郡, 約有一萬餘名, 卽淸正所領, 西生浦約有四五千名, 或云一萬餘名。 釜山浦約有四五千名, 梁山郡約有四五千名, 卽甲斐守所領。 右道金海府, 約有一萬餘名, 卽豐直茂所領, 德只島約有四五千名, 固城縣約有六七千名, 巨濟縣約有四五百名, 晋州約有四百餘名, 永新縣約有二千餘名, 泗川縣約有七八千名, 或云一萬餘名。 昆陽郡約有三百餘名, 南海縣約有一千餘名, 卽平義智、平調信等所領, 昌原府、熊川縣兩處留賊, 未知的數, 而熊川縣卽大營豐茂守所領。 全羅道 順天府, 約有一萬五千餘名, 卽平行長、飛蘭島等所領, 而老弱俱居三分之一。 然而處處築城積餉, 聯絡形勢, 了無歸巢之意。 其情形向背, 雖未可料測, 兇悖之狀, 旣如前所陳, 其狺然蓄謀, 以逞其滔天之惡者, 固非一日, 而方與天兵, 互相厮殺, 略不顧忌, 則向背所在, 固不待智者知也。 仍照賊酋之中, 淸正雖甚暴桀, 而特是好鬪之一夫, 狡詐包藏, 行長爲最, 自前小邦及天朝被瞞於此賊者屢矣。 陰懷異圖, 主張兇謀, 而外示恭順, 每以講和撤兵爲言。 勢窘則搖尾覬款, 以緩我師, 候其兵退, 乃復逞毒。 前後背約, 幻弄天朝, 再動兵戈者, 皆此賊之所爲。 今者大軍壓壘, 天威震動, 乃鼓其餘智, 通使乞款, 誠可痛憤。 倘或發伊巧計, 淹延不發, 蹉了事機, 則師老氣衰, 大事悞矣。 竊念天朝爲小邦, 發天下之兵, 動百萬之資, 大事垂成, 十已八九。 旣已救之於始, 寧有不繼其終? 旣能遏諸方張, 焉有釋彼殘寇? 小邦惟當竭措糧械, 悉力供給, 協助聲勢, 以收全勝而已。 只恐大事好乖, 群議易動, 不能趁期勦滅, 未免守以持久, 使小邦餘力, 不能支撑, 而先自潰裂也。 貴科欽承嚴命, 査勘東事, 先聲所及, 風彩立變。 當職手額以待, 願陳所懷, 而不鄙夷之, 先行咨問, 仍勉以古昔賢王中興之美, 佩服感激, 不知所言。 小邦今日百萬生靈之命, 俱係於貴科。 煩乞貴科, 上體皇上拯濟之仁, 下念小邦危急之狀, 一面備將前情, 作速題奏, 一面嚴督各營, 一擧殲殄, 使東征之事, 得早結局, 以活遺民, 小邦幸甚, 天下幸甚。 除將咨內事理, 逐一査照施行外云云。 須至咨者, 右咨欽差査勘東征軍務兵科左給事中。
- 【태백산사고본】 66책 104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10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
- [註 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