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국위가 양 경리를 위해 본국에 글을 올리다
허 국위(許國威)가 본국에 글을 올렸다.
"통령 복병 어왜 유격 장군 서도 지휘 첨사(統領福兵禦倭遊擊將軍署都指揮僉事) 허국위는 삼가 아룁니다. 제가 질병에 걸린 사유는 공문 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노야께서는 굽어 살피시고 시행하소서. 제가 병든 것은 사실이며, 발병한 원인은 본래 기품이 허약한 데다 조선까지 오는 도중에 추위에 상하였고, 왕경(王京)에 도착해서는 물과 토질이 몸에 맞지 않아서입니다. 더구나 군사가 적어 대오(隊伍)도 이루지 못하고 배와 수레가 없는 것을 보고는 멀리까지 정토(征討)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잘못되지 않나 하는 생각에 밤낮으로 깊이 걱정하여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병이 생겼으며, 갑자기 무원(撫院)이 탄핵을 받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두려움과 의혹에 빠져 있는 중입니다.
무원은 대신(大臣)이고 정토는 대사(大事)이며 조선은 이역(異域)입니다. 대신을 시켜 이역에서 대사를 완수하게 하려면, 반드시 법을 관대하게 적용하고 편의대로 행할 수 있는 재량을 주어 한 사람이 칭찬하더라도 높여 주지 말고 한 사람이 비방하더라도 깎아 내리지 말며, 오직 종국(終局)의 성과를 독려한 뒤에 공과 죄를 결정하여야만 성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대신의 직임을 폐치(廢置)하게 되면 무원 이하 조선 땅에서 죽을 힘을 다하여 정벌에 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서도 상자에 가득한 방서(謗書)를 묵혀두고 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며 시조(示祖)가 들어오는 것을 자행(恣行)하게 하고 사인(舍人)의 참언을 물리치는 것처럼 하기는 결단코 불가능할 것이 틀림없으니, 휘하 장수들이 일에 임하여 더욱 애매 모호하게 대처하고 긴요한 국면에 당하여 앞장서서 대처해 나아가지 않더라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길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개 군대를 움직이는 일이란 태평스러운 때의 정사(政事)와는 전혀 다르고 칼날이 교차하는 아래서는 묘당(廟堂)의 논의와 같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소자첨(蘇子瞻)이 제갈 공명(諸葛孔明)을 힐책하여 말하기를, ‘형주(荊州)를 버리고 서촉(西蜀)을 취한 것을 보면 그가 무능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가령 소자첨으로 하여금 제갈 공명과 함께 군대를 다루게 한다면 절대로 그보다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남의 일에 대하여 말하기는 쉬워도 직접 당하면 어렵고, 일의 국면이 정해진 뒤에 말하기는 쉽지만 급박하게 닥친 상황에서 대처하기란 어려우며, 태평스러울 때에 일을 감당하기는 쉽지만 변화에 대응해야 할 때에는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후 장군(後將軍)106) 이 둔전(屯田)의 편의(便宜)에 대한 12가지 일을 건의하였을 때, 한 선제(漢宣帝)도 어렵게 여겼고 공경들도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오직 위상(魏相)만이 그 계획을 고수하여 마침내 군세를 떨치고 돌아옴으로써 선영(先零)107) 이 모두 평정되었고, 반초(班超)가 변방에서 전공을 세워 이적(夷狄)들에게 위세를 떨쳤을 때 이읍(李邑)이 비방하기를, ‘반초는 애첩과 자식을 데리고 나라 밖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 나라 안은 돌볼 마음이 없다.’고 하자, 황제는 도리어 이읍을 나무라고 반초에게 나아가 절제(節制)를 받게 하였으므로, 서역(西域)에서 공을 세워 70여 나라를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법망이 이토록 조밀하고 관리를 바꾸는 것이 이토록 빈번하고도 7년 동안 음모를 쌓아 온 교활한 왜적을 무찌르려 하고 있으니, 제가 비록 무장(武將)으로서 실상은 알 수 없으나 믿으려 하다가도 금방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적은 군사를 잘 쓴다.’고 하지만, 저는 ‘왜적은 장수를 잘 쓴다’고 여깁니다. 행장과 청정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을 침략한 지 7년 동안 평양에서 패하였고 서울에서 패하였으며 직산(稷山)과 청산(靑山)에서 패하였고 울산에서 패한 뒤에 겨우 섬에 들어가 웅거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병권(兵權)을 쥐고 있으며, 관백은 그들에게 군사를 증원하고 군량을 보내고 있는 외에 한 사람의 장수도 바꾸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울산 전투에서 2천여 명의 목을 베어 버리자 두 왜장은 군대를 거두어 움추린 채 지금까지 감히 서쪽으로 총칼을 내밀 엄두를 못내고 있으니, 이 모두가 누구의 공적입니까. 양 경리를 갑자기 교체하는 것은 마치 말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먼저 옆에서 떠들어대고, 나무를 심었다가 금방 뽑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의논이 많으면 공을 이루는 것이 적고 도필(刀筆)108) 을 중하게 여기면 변두(弁兜)109) 는 가볍게 여기기 마련이니, 영웅이 기가 꺾이고 철사(哲士)가 기미를 보고 피하는 것이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몸에 병이 겹쳐 물러나고 싶으나 물러날 길이 없습니다. 본래 가난한 선비로서 당세에 쓰일 길이 없어, 책을 읽었지만 이루지 못하였고 무예를 배웠으나 또한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먼 이역에서 날마다 비통하게 탄식만 하고 있으니, 날이 갈수록 숨은 가빠지고 뼈는 튀어 나오며 마음은 산란해지고 의지 또한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노야께서는 몸은 병들고 군사는 적으며 뜻만 컸지 재능은 엉성하여 머무르더라도 일에 도움될 것이 없는 저의 형편을 굽어살피소서. 또한 정 찬획(丁贊劃)의 상소문에 ‘용렬한 장수는 돌려보내야 되며 군량은 비축해야 된다.’고 한 논의를 따라 돌아가 조리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다시 살려주신 은혜를 대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감히 부월(斧鉞)을 범하여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아뢰는 말씀을 잘 받으십시오."
- 【태백산사고본】 65책 10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466면
- 【분류】외교-명(明)
- [註 106]후 장군(後將軍) : 조충국(趙忠國).
- [註 107]
○統領福兵禦倭遊擊將軍署都指揮僉事(許國器)〔許國威〕 謹稟:
國威患病情由, 具載公文中, 伏祈老爺, 恩照施行。 威病的眞, 其起病之根, 緣稟氣微薄, 途來冒寒入骨, 入抵王京, 水土不服。 且見兵少, 不成營伍, 水用無舟, 陸用無車, 慮蒙調征,勢恐悞事, 所以日夕深憂, 食減病生, 忽聞撫院, 被劾西歸,轉益惶惑。 夫撫院, 大臣也; 征討, 大事也; 朝鮮, 異域也。 任大臣成大事於異域, 必寬文網假便宜, 一人譽之不加隆, 一人毁之不加殺, 惟責其結局成效, 而定功罪, 乃能有濟。 今遽以一人之言而廢置之, 則撫院以下, 戮力鮮疆者, 決不能塵盈篋之謗, 赦三人之罪, 恣示祖之入, 闢舍人之讒也, 明矣。 無怪乎褊裨之夫, 益臨事模(梭)〔稜〕 , 當局先撑。 夫用兵之事, 與大平之政殊科, 而鋒鏑之下, 與廟堂之議難同。 昔蘇子瞻譏孔明曰: ‘棄荊州而就西蜀, 吾知其無能爲矣。’ 藉使子瞻, 與孔明用兵, 則斷斷乎在範圍之內。 信所謂談事易當事難。 談事於局定之後易, 猝然之際難; 當事於大平之時易, 應變之頃難。 昔後將軍上屯田便宜十二事, 漢 宣難之, 公卿咸以爲不可, 獨魏相堅其畫, 卒之振旅而還, 先零悉平。 班定遠功振外夷, 李邑毁之曰: ‘超擁愛妾抱愛子, 安樂外國, 無內顧心。’ 帝切責李邑, 令詣超受節制, 故成功西域, 附國七十。 今法網如此之密, 更置如此之頻, 而欲洗七年積謀之狡倭, 威雖武人無知實, 亦方信忽疑。 人之言曰: ‘倭善用兵’, 威獨曰: ‘倭善用將。’ 夫行長、淸正, 擁兵西犯凡七年, 所敗平壤, 敗王京, 敗稷山、靑山, 敗蔚山, 棲遲海島, 而尙握兵猶故, 關白爲之增兵繼餉,未聞有一代之者。 今蔚山之戰, 尙斬首二千餘, 二酋戢兵經今, 銃不敢西彈, 刀不敵西刃, 伊誰之功歟? 乃經理忽更, 未傳先咻, 方樹忽拔。 議論多而成功少, 刀筆重而弁兜輕, 無惑乎英雄短氣, 哲士先幾, 病自叢身, 退不可得也。 威本蓬士, 無當世用, 學書無成, 學劍又悞。 況在異域之鄕, 日起悲歌之嘆, 喘日促而骨日高, 心日亂而志日頹。 伏祈老爺, 俯念威身病兵少, 志大才疎, 留之無益於事, 且正犯丁賛畫疏中, 庸將可去, 廩餉可積之議, 容令回衛調理, 則生還之恩, 威誓世世結銜。 干冒斧鉞, 無任戰慄。 須至稟者。
- 【태백산사고본】 65책 10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466면
- 【분류】외교-명(明)
- [註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