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들과 함께 양 경리가 참소당한 사정과 중국에 보낼 자문에 대해 논의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 및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해원 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정탁(鄭琢), 좌의정 이원익(李元翼), 우의정 이덕형(李德馨), 호조 판서 한응인(韓應寅),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좌승지 허성(許筬), 주서(注書) 권진(倦縉),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최충원(崔忠元), 사관(史官) 유색(柳穡)·조중립(趙中立)이 입시(入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 경리(楊經理)가 참소당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 거조(擧措)가 분명치 아니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대개 울산(蔚山)의 싸움에서 남병(南兵)과 북병(北兵)이 서로 공(功)을 다투다가 정의(情意)가 어긋났는데, 이로 인해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사태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지금의 사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에 진주(陳奏)하고 한편으로는 군문(軍門)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반복해서 논변(論辯)하면, 중국 조정에서도 아마 실상을 알게 되어 사설(邪說)에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파직되었으니 지금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참소당한 데 대한 실상은 천자에게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사신(使臣)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급히 달려간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파발(擺撥)처럼 속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포정 아문(布政衙門)에 자문(咨文)으로 청하여 홍기(紅旗)와 파발마를 구해서 급히 군문에 자문을 보내고, 그들에게 진주하도록 요청하는 것도 하나의 방책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명의 소인으로도 천하의 일을 망치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나는 정응태(丁應泰)란 자를 단 한 번 보고서도 그가 음험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었다. 접견하던 날 나에게 ‘나는 들어가서는 충성을 다하고 나와서는 직언(直言)을 한다.’고 하고, 또 ‘국왕께서는 시(詩)와 서(書)를 잘 하신다고 하던데, 이것은 하나의 기예일 뿐이니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차라리 병서(兵書)를 많이 읽는 것만 못하다.’ 하고, 끝으로 ‘소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가 보는 《광애록(廣愛錄)》이라고 하는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책에는 ‘모든 짐승을 죽이지 말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끝내는 금수(禽獸)가 인간을 핍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 조수(鳥獸)의 발자취가 국중(國中)에 어지러울 것이니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여기에서 그 사람이 황탄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그 책에는 ‘만일 짐승을 죽이면 반드시 응보(應報)가 있어서 재앙이 자신에게 미칠 것이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두 천명(天命)이고 운수라 하겠다. 이미 평수길(平秀吉)을 일본에 태어나게 했고 또 심유경(沈惟敬)을 중원(中原)에 태어나게 했으니, 이는 하늘이 한 것이지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또 그는 양 경리를 수죄(數罪)하면서 ‘참(斬)해야 할 만한 것이 29가지이고 수치스러운 것이 10여 가지이다.’ 하였으니, 천하 만고에 어찌 이런 사람이 있겠는가. 귀역(鬼蜮)같이 음흉한 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또 ‘양호(楊鎬)가 조선을 움직여 성을 쌓았으니, 뒷날 이 성을 의지하여 배반하지 않으리란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으니, 이러한 말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참으로 천하에 더없이 원통한 일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성을 쌓는 한 가지 일은 고 황제(高皇帝)께서도 허락하신 일인데 어찌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탁은 아뢰기를,
"천하에는 간혹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에 치란과 흥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대개 경리의 사람됨은 성품이 주밀하고 자상한 것이 자못 부족합니다. 남병(南兵)과 북병(北兵)을 대우함에 있어 공평하게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병이 모두 그를 원망하고 있는데, 원망하는 자들은 모두 정응태에게 붙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 각로(趙閣老)는 만고에 없는 간악한 자이다. 늙은 간인(姦人)이 내각에 있으니 천하의 일이 어찌될 지 알 만하다. 석성과 심유경이 정말로 죄가 있다면 의심없이 곧바로 처단했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도 감옥에 가두어 두고 있으니, 저들이 자신의 죄를 모면하고 우리 나라를 무함하려는 책략을 빈틈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나라가 불행해서인데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양 대인(楊大人)이 어찌 범상한 사람이겠는가. 다만 성품이 급하고 말을 경솔히 하는 단점이 있을 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어제 우상(右相)이 등사해 보낸 품첩(稟帖)을 보건대, 그저께 아문(衙門)에서 병사를 뽑아 자위(自衛)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저께 아문 앞에는 창검이 삼엄하게 벌여 세워져 있고 표병(標兵)들이 바쁘게 움직이기에 신이 그 까닭을 물으니, 문하(門下)가 ‘진인(陳寅)의 군중에서 황당한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대응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실제로 그 내용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정 주사(丁主事)는 진인을 수공인(首功人)으로 삼는데, 경리는 이여매(李如梅)를 수공인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공의 고하를 다투고 있으나 나는 자세히 모르겠다. 누가 과연 가장 뛰어난 지 우상은 알고 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진인은 농소(農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는데, 이여매는 방관하고 있다가 공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2일 싸움에서는 이여매가 선봉이 되어 적을 유인하여 나오게 하고 몸소 앞장서서 나가 진격하였으며, 파새(擺賽)와 양등산(楊登山)이 서로 협격(夾擊)하였습니다. 소신은 그때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고 진인도 그 소식을 듣고서 말을 타고 달려갔으나 10리도 가지 못하여 적들은 이미 모두 섬멸되었는데, 이때 벤 수급이 모두 4백 명이었습니다. 이때는 진인이 뒤에 있었으니 어떻게 제일의 공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탄하고 있습니다. 22일 승리를 거둔 뒤에 승기를 타고 곧바로 쳐들어갔더라면 파죽지세로 이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징을 쳐서 퇴군시켰으므로 군정(軍情)은 이 때문에 모두들 허물을 양 경리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도산(島山)을 주머니 속에 든 물건으로 여겼다가 이와 같이 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리와 마귀(麻貴)·유정(劉挺) 두 장수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러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면 그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허성(許筬)이 아뢰기를,
"경리가 진인의 중군인 주폐(周陛)를 가두었으므로 진인이 그를 되찾고자 하여 하마터면 군사를 풀어 서로 공격할 뻔하였다고 아문의 원역(員役)들이 모두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게 무슨 말인가. 가령 경리가 주폐를 가두었다 하더라도 진인이 도리상 어떻게 감히 그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의 집에 천총(千摠) 한 명이 와서 묵고 있는데, 하루는 여러 장관(將官)들이 와서 모여 술을 마시면서 신을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경리를 헐뜯으며 무리한 말까지 하였는데, 그 기상이 몹시 흉악했습니다. 신이 그렇지 않다고 했더니 그들은 신에게 극도의 모욕을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으로 보면 경리는 크게 인심을 잃었으니, 이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정응태란 자는 매우 하찮은 자이니 경리를 미워하여 모략으로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그의 말이 어찌 조정 사람들의 시청(視聽)을 현혹시킬 수 있겠는가. 조 각로는 대간인(大姦人)으로 석성과 한패가 되어 강력하게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 이는 필시 정응태와 서로 안팎으로 상응하여 사기(事機)를 뒤틀리게 만든 것일 것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왜적은 9백여 리에 걸쳐 군영(軍營)을 연결시켰으므로 그 적세가 날로 치솟고 있는데, 정응태의 상소에는 ‘군사를 더 조발할 필요가 없고 군량을 더 가져올 필요가 없다. 그리고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중국이 조선을 위해 요즘과 같이 구원해 준 적은 없었다.’ 하였으니, 이 말이 더욱 불측하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왜적은 끝내 중원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누구의 말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송응창(宋應昌)이 지은 《복고요편(復古要編)》이라는 책이 한 권 있는데, 내용 중에 ‘왜적은 전라·황해·평안도 등의 길을 경유한 뒤에야 중원 땅에 다다를 것이니 필경 이렇게 될 리는 만무하다.’ 하였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발언에 그치지 않고 서책에까지 기록하여 놓았으니 천하를 그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응창은 그 모습만 보아도 아주 음험한 사람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송응창이 ‘왕경(王京)의 성곽은 험준하므로 공격하여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대수(査大受)를 시켜 용산창(龍山倉)에 불을 지르게 하였더니, 왜적들은 군량이 없어서 밤중에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성중에는 미곡이 낭자하였는데 어찌 군량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하늘을 속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이니 말해도 소용이 없다. 오늘 말한 일들은 착실히 상의해야 할 것이다. 경리에 대한 일은 늦춰서는 안 되니 반드시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해야 한다. 중국 조정에서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나면 죄적(罪籍)에 빠지게 될는지도 모르니 오늘의 일은 양 대인 일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완만히 하면 그 사이에 사의(邪議)가 마구 일어나서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양 대인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성품이 완만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접견할 때마다 말하였다.
그리고 지난번 나에게 ‘귀국에는 차(茶)가 있는데 왜 채취하지 않는가?’ 하고는, 좌우를 시켜 차를 가져오라고 하여 보여주며 ‘이것은 남원(南原)에서 생산된 것인데 그 품질이 매우 좋다. 그런데 귀국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것을 마시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우리 나라는 풍습이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이 차를 채취해서 요동(遼東)에 내다 판다면 10근에 1전(錢)은 받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서번인(西蕃人)들은 기름기를 즐겨 먹기 때문에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차를 채취하여 팔아서 1년에 전마(戰馬) 1만여 필씩을 사고 있다.’ 하기에, 내가 ‘이것은 육안차(六安茶)의 종류가 아니고 작설차(鵲舌茶)이다.’ 하니, 답하기를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귀국에서는 인삼차를 마시는데 이것은 탕(湯)이지 차가 아니다. 그것을 마시면 마음에 번열이 생기므로 마음이 상쾌해지는 차를 마시는 것만 못하다. 귀국의 배신(陪臣)들이 차를 마신다면 마음이 열리고 기운이 솟아나서 온갖 일들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이어 나에게 차 두 봉지를 주었는데, 이는 당신도 차를 마시면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깨우쳐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또 차를 위해 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꺼낸 말이니, 계획적으로 한 말이다."
하자, 정탁이 아뢰기를,
"이것은 단지 희롱하고 업신여기는 말일 뿐입니다. 태만스런 기운이 어떻게 차를 마신다고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유 제독(劉提督)의 군병이 중로에서는 여염(閭閻)에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입성(入城)한 뒤로는 경리 표병(標兵)의 막사를 전부 빼앗아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경리의 헌패(憲牌) 때문에 더욱 원망을 맺은 탓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우리 나라까지 의심하지 않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서성(徐渻)의 말을 듣건대, 조금도 개의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황응양(黃應陽)의 말에 ‘경리가 요동 포정(遼東布政)으로 있을 당시 갑오년083) 에 유 제독이 총병(摠兵)으로 이곳에 왔다가 귀환할 때 수레 90량(輛)을 요구하였고 이어 주본(奏本)을 올려 참핵하여 1급(級)을 강등시켰다. 이번에 올 때에도 헌패로 저지하였기 때문에 이런 연유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심지어는 「나의 표하병(標下兵) 중에서 만약 양 노야라고 존칭하여 부르는 자가 있으면 용서치 않고 중히 처벌하겠다. 」고까지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으로서 마음쓰는 것이 이러하면 되겠는가. 한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때문에 기필코 보복하려고 하니 과연 음험하다 하겠다. 지난번 내가 접견할 때 헌패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기에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더니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내가 또 ‘소방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오로지 대인만을 믿고 있다. 지난번 대인이 돌아간 뒤 흉적들이 다시 쳐들어와서 양호(兩湖)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시살하였다. 금일의 일은 오직 대인만을 믿고 있다. 돌아간 뒤에는 동지(動止)가 어떠했으며 그 사이 수년 동안 어느 지방에서 지냈는가?’ 하니, 답하기를 ‘내가 귀국하자마자 바로 사천(四川)에서 양응룡(楊應龍)이 발호하여 나는 명을 받들어 출정(出征)했었고, 다시 서강(西羌)의 변이 일어나 나는 그들을 격파하느라고 곤륜산에까지 갔다가 돌아와 이어 섬서(陝西)에서 유진(留鎭)하고 있었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매우 과장된 것이었다. 수군 도독(水軍都督) 진인(陳璘)은 명장(名將)인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명장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유 제독이 회남으로 내려간다 하더라도 반드시 진 도독(陳都督)의 수병(水兵)이 함께 모인 뒤에야 협력하여 진격 초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정응태(丁應泰)의 주문에 ‘왜적은 아주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중국이 무엇 때문에 국내를 텅비우고 외국 일에 힘쓸 필요가 있는가.’ 하였으니 이 말이 더욱 흉악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이 주장이 시행된다면 천하의 일은 끝장나게 될 것이다."
하였다. 허성이 아뢰기를,
"후에 조선이 배반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느나고 한 말은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참으로 사소한 말이 아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최천건(崔天健)을 우선 서둘러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지연된다면 사사건건 더욱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일의 일은 오직 우리의 정직함으로 저들의 잘못된 것을 막아내는 것뿐이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저들의 사설(邪說)이 어떻게 마구 행해질 수 있겠는가. 설사 양 경리(楊經理)보다 열 배가 더 나은 새 경리가 나와서 단시일 내에 일거에 섬멸해 버린다면 다행스런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양 경리보다 못하다면 왜적을 언제 섬멸하게 될지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허성이 아뢰기를,
"풍세(風勢)가 순조롭지 못하면 양선(糧船)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윤두수(尹斗壽)는 아뢰기를,
"장산곶(長山串)은 지나더라도 등산곶(登山串)을 지나기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한응인은 아뢰기를,
"경창(京倉)에 비축된 양곡으로는 겨우 6일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망하게 하는 것을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송(宋)나라 때에는 장강(長江)은 천참(天塹)이라 오랑캐들이 넘어올 수 없었는데, 이때 마침 전당강(錢塘江)의 조수(潮水)가 3일 동안 이르지 않았고, 아골타(阿骨打)가 요(遼)를 침입할 때에는 하수(河水)의 깊이가 말의 배에까지도 차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천하에 이처럼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룡 등이 이어 물러나왔다.
- 【태백산사고본】 64책 101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45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인물(人物) / 군사-통신(通信)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사법(司法) / 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재정-창고(倉庫)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註 083]갑오년 : 1594 선조 27년.
○上御別殿, 引見大臣及備邊司有司堂上。 入侍, 領議政柳成龍、海原府院君 尹斗壽、行知中樞府事鄭琢、左議政李元翼、右議政李德馨、戶曹判書韓應寅、兵曹判書李恒福、左承旨許筬、注書權縉、事變假注書崔忠元、史官柳穡ㆍ趙中立。 上曰: "楊經理之被參, 未知何故也。" 德馨曰: "其擧(錯)〔措〕 怳忽, 不可知也。 大槪蔚山之役, 南、北兵爭功, 情意乖戾, 乃至於是也。" 上曰: "今日之事, 計將安出?" 成龍曰: "今日之事, 不容但已。 一邊陳奏天朝, 一邊移咨軍門, 反覆辨析, 庶幾朝廷知實狀, 而不爲邪說所惑, 爲今日急務耳。" 上曰: "已爲罷職, 今無及矣。 然被誣之狀, 不可不暴白於天日之下耳。" 成龍曰: "使臣雖星夜疾馳, 終未得如擺撥之速達。 今宜咨請於布政衙門, 得紅旗、撥馬, 急急咨報軍門, 請其陳奏, 亦一策也。" 上曰: "一小人足以壞天下之事。 丁應泰予一見而知其人險詖。 接見之日, 言於予曰: ‘俺入則盡忠, 出則直言。’ 又曰: ‘國王能詩能書云, 此特一藝耳, 將何用哉? 莫如多讀兵書。’ 終言: ‘勿殺牛。’ 以所看一書, 名曰《廣愛錄》, 其書曰: ‘百獸不殺。’ 若然則終至於禽獸逼人, 獸蹄鳥跡之道, 交於中國, 其可乎哉? 予於是乎知其人之詭誕也。 豈知今日至於此也?" 恒福曰: "其書以爲: ‘若殺之, 則必有報應, 殃禍及身’ 云矣。" 上曰: "莫非天也, 莫非數也。 旣生平秀吉於日本, 又生沈惟敬於中原, 莫之爲而爲也, 豈人力之所可爲也? 且數楊經理罪曰: ‘可斬者二十九條, 可羞者十餘條’ 云。 天下萬古安有如此之人乎? 雖鬼蜮, 不至是矣。 又言: ‘楊鎬動朝鮮築城, 安知他日倚此而爲叛也?’ 此等說話何如乎? 誠極天下之冤痛也。" 成龍曰: "築城一事, 高皇帝亦許之, 豈得以爲罪乎?" 鄭琢曰: "天下或有如此之人, 故國家有治亂興亡。" 德馨曰: "大槪經理之爲人, 性稟頗欠周詳。 南、北軍兵待之, 不能脫彼此形跡, 故南兵皆怨之, 怨楊者, 皆付于丁。" 上曰: "趙閣老, 萬古姦人也。 老姦在閣, 天下事可知矣。 使石星、沈惟敬, 果有罪也, 斷之毋疑也, 而今猶在監, 彼之謀免己罪, 傾陷我國者, 算無遺策矣。 是亦我國之不幸也, 奈何? 且楊大人豈尋常人哉? 但性急而言易矣。" 上曰: "昨見右相謄送稟帖, 昨昨衙門徵兵自衛云, 是何等語也?" 德馨曰: "昨昨於衙門前, 劍戟森羅, 標兵等奔走(倉)〔蒼〕 皇, 臣問之門下, 乃曰: "陳寅軍中做荒唐事, 說此以應之’ 云, 而實未曉其意也。" 上曰: "大抵丁主事以陳寅爲第一功, 經理則以李如梅, 爲首功云。 二人爭功之高下, 予所難詳, 何人果爲最優, 右相知之乎?" 德馨曰: "陳寅農所之戰, 大獲首功, 李如梅則旁觀而得之云, 而二十二日之戰, 李如梅爲前鋒, 引賊而出, 挺身擊之; 擺賽、楊登山夾而擊之。 小臣隨後望見, 陳寅亦聞之, 躍馬馳入, 未及十里, 已盡滅賊, 斬首四百。 此時則陳寅在後, 安有第一功乎? 至今遺恨。 二十二日克捷之後, 乘勝直擣, 則有如破竹之勢矣, 而反自鳴金而退, 軍情皆以是歸咎於經理耳。" 上曰: "以島山爲囊中物, 而如是耳。" 上曰: "經理與麻、劉兩將, 不相能云, 信乎?" 恒福曰: "看其下人等相較之事, 信矣。" 許筬曰: "經理囚陳寅中軍周陛, 故陳寅欲奪之, 幾至於發兵相攻, 衙門員役, 皆言矣。" 上曰: "是何言也? 假使經理囚周陛, 在陳寅之道, 何敢乃爾?" 恒福曰: "小臣家有一千摠來寓, 一日將官輩, 來會飮酒, 招臣出來。 仍相與詆詬經理, 加之以無理之說, 其氣象甚惡。 臣言其不然, 則又辱臣無所不至矣。" 上曰: "以此觀之, 則經理大失人心。 雖在此, 不必成功也。 一丁應泰, 至幺麽也, 嫉怨經理, 設謀傾陷, 渠之言, 奚足以眩亂朝廷之視聽哉? 趙閣老, 大姦人也。 黨於石星, 力主和議。 此必與應泰, 表裏相應, 轉輾事機, 豈不寒心哉? 倭賊連營九百餘里, 勢日熾盛, 應泰之疏曰: ‘兵不必加調, 糧不必增運。 且自天地開闢以來, 中國未有爲朝鮮拯救如今日者’ 云, 此言尤不測也。" 成龍曰: "倭賊終不得犯中原云, 此未知何人言之也。" 德馨曰: "宋應昌着成一書, 名曰《復高要編》, 有曰: ‘倭賊踰全羅、慶尙、黃海、平安等路, 然後抵中原地, 終必無是理。’ 此則非但一時發諸口, 至於書諸簡策, 將欲誤天下也。 上曰: "應昌見其形貌, 陰險人也。" 德馨曰: "應昌曰: ‘王京城子險峻, 未易攻拔。 故使査大受, 焚龍山倉, 倭賊無糧餉, 宵遁’ 云。 當時城中粒米狼戾, 何得云無糧餉乎? 此則欺天矣。" 上曰: "往事已矣, 言之無益。 今日言事, 正宜着實商議。 經理事, 不可緩也, 必須今明內爲之。 天朝論議激發, 則或不無陷於罪籍, 今日事, 不但爲楊大人一身, 實係我國家存亡。 若或小緩, 則其間邪議橫生, 已無及矣。 楊大人以我國人, 性稟弛緩, 不能莅事, 每於接見, 輒言之。 前日言於予曰: ‘貴國有茶, 何不採取?’ 使左右, 取茶來示曰: ‘此南原所産也。 厥品甚好。 貴邦人何不喫了?’ 予曰: ‘小邦習俗, 不喫茶矣。’ 此茶採取, 賣諸遼東, 則十斤當銀一錢, 可以資生。 西蕃人喜喫膏油, 一日不喫茶則死矣。 中國採茶賣之, 一年得戰馬萬餘匹矣。’ 予曰: ‘此非六安茶之流, 乃鵲舌茶也。’ 對曰: ‘此一般也。 貴國啜人參茶, 此湯也, 非茶也。 啜之中心煩熱, 不如啜之爽快矣。 使貴國陪臣喫茶, 則心開氣擧, 而百事能做矣。 仍贈予茶二包, 似是爾若喫茶, 則或可做事, 以(驚)〔警〕 之之意也。 此非爲茶言之, 專爲不做事而發, 設辭言之也。 鄭琢曰: "此直戲侮之言也。 怠慢之氣, 豈喫茶所能療也?" 元翼曰: "劉提督軍兵, 於中路, 或不入閭閻而來, 入城之後, 盡奪經理票兵寓處而入之。 此以經理憲牌之故, 尤爲結怨也。" 上曰: "無乃幷與我國而疑之乎?" 恒福曰: "聞徐渻之言, 小不介意云矣。" 德馨曰: "黃應陽言: ‘經理爲遼東布政時, 劉提督甲午年, 以摠兵來此還歸時, 責車九十兩, 仍上本參劾, 降其一級。 今番之來, 又以憲牌止之, 故以此懷憾, 至曰: 「我標下兵, 若稱楊老爺者, 當重究不貸」’ 云矣。" 上曰: "人之處心, 如是可矣, 以一時不相能之故, 必欲報復, 則可謂險矣。 曾於接見之時, 憲牌一事, 不及一言, 予先發其端, 對之豁如也。 予又曰: ‘小邦重恢, 專恃大人。 前者大人旋歸之後, 兇賊再動, 蹂躪兩湖, 廝殺人民。 今日之事, 惟大人是賴。 未審旋歸之後, 動止何如, 僅數年間, 留住何地方耶。’ 乃答曰: ‘俺入歸, 卽値四川 楊應龍跋扈, 俺奉命出征, 又有西羌之變, 俺擊破之, 至崑崙而還, 仍留鎭陝西’ 云。 此言極誇大矣。 水兵都督陳璘, 名將乎?" 恒福曰: "名將也。" 成龍曰: "劉提督雖下湖南, 必待陳都督水兵齊集, 然後協力進勦矣。" 德馨曰: "丁應泰奏文, 有曰: ‘倭賊不甚難。 中國何必虛內而事外?’ 云, 此說尤爲凶慘矣。" 上曰: "此說若行, 天下事已矣。" 許筬曰: "後朝鮮安保其不叛之語? 尤極痛心。" 上曰: "此誠不小之言也。" 成龍曰: "崔天健爲先星馳, 入送可矣。 若或遲延, 節節尤難矣。" 上曰: "今日之事, 唯當以我之直, 拒彼之曲而已。 若我直則彼之邪說, 安得肆然行之? 設使新出經理, 十倍於楊, 指顧之間, 一擧蕩滅則幸矣。 萬一不及於楊, 則滅賊無期矣。" 許筬曰: "風勢不順, 糧船不得前來。" 斗壽曰: "長山串雖過, 而登山串過去, 爲尤難。" 應寅曰: "京倉所儲, 僅支六日。" 上曰: "天之所廢, 非人力所爲。 宋時長江天塹, 虜不得飛渡, 而(餞塘)〔錢塘〕 潮三日不至; 阿骨打入遼時, 河水深不及馬腹。 此豈非天耶? 天下有此慘痛事耶?" 成龍等因辭出。
- 【태백산사고본】 64책 101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45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인물(人物) / 군사-통신(通信)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사법(司法) / 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재정-창고(倉庫)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