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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99권, 선조 31년 4월 29일 계미 1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군량 수송, 중국군의 동태, 이여송 조제 문제, 도산의 적정 등을 논의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가 당상을 인견하였다. 【입시한 사람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좌의정 이원익(李元翼), 우의정 이덕형(李德馨), 대사헌 이헌국(李憲國), 호조 판서 김수(金睟), 이조 판서 홍진(洪進), 예조 판서 심희수(沈喜壽),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행 훈련 도정(行訓鍊都正) 최원(崔遠), 병조 참판 박홍로(朴弘老), 이조 참의 김홍미(金弘微), 교리 신흠(申欽), 부교리 김순명(金順命), 헌납 경섬(慶暹), 좌부승지 이정구(李廷龜), 가주서 최충원(崔忠元)·심즙(沈諿), 봉교(奉敎) 심액(沈詻), 대교(待敎) 임수정(任守正)이었다. 】 상이 이르기를,

"근래 명장(明將)의 접대 관계로 바쁘고 몸에 병도 있고 하여 오래도록 접견을 못하였는데, 의견이 있으면 모두들 개진하라."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다른 말은 할 겨를이 없고 다만 군량에 대한 일로 군하(群下)가 민박한 실정입니다. 달리는 좋은 계획이 없고 오직 최후로 의주(義州)의 군량을 수송하여 접제(接濟)하는 것만이 지금으로서는 첫째로 해야 할 급무인데, 민력(民力)이 이미 바닥이 나고 게다가 농사철까지 되어 육운(陸運)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비록 조금씩 운반해 오는 것이 있다 하여도 거기에서 덜어내어 이곳에서 쓰고 나머지를 양남(兩南)으로 나누어 보내는 실정이니, 수천 리 밖에 있는 대군을 접제하기 위하여 때 맞추어 수송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형세인 데다 유 제독(劉提督)이 또 곧 나온다는데, 지금 경창(京倉)에는 소미(小米) 2천여 석이 있을 뿐이고 대미(大米)는 전라도에서 올려 올 것 7천여 석뿐입니다. 유정(劉綎)의 군대는 다른 군대와 달라서 남방의 묘민(苗民)들이니, 우리 나라가 이 지경인 줄을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들이 만약 소미를 먹지 않는다면 일은 더욱 난처해지는 것입니다. 가령 대미를 절반쯤으로 하여 반반씩 지급한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장졸(將卒)들이 또 반드시 원망할 것 아닙니까. 신들이 매일 호조 판서와 온종일 이야기하는 것은 이에 대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도 그렇겠다. 영남의 대군에게는 군량을 이어댈 만한 형세가 되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소신이 지난해에 왕래하였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당초 대병이 남하했을 때에는 영남 사람들이 꼭 이길 것이라는 기대에서 있는 힘을 다해 주선하였기에 조금은 지탱이 되었지만 대병이 퇴각한 뒤에는 바닥이 나 그 당시 남은 군량은 낱낱이 셀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지금 또 대군이 내려간다면 다시는 군량을 이어댈 방법이 없습니다. 영남에는 달리 선운(船運)할 만한 곳이 없어 반드시 여기에서 수송해야 되는데 좌도(左道)는 죽령(竹嶺)을 통해서만, 그리고 우도(右道)는 조령(鳥嶺)을 통해서만 수송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수만 석의 곡식을 반드시 충주(忠州)에다 실어다 두어야지만 가져다 먹을 수가 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가 모두 동이 났으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좌도에는 곡식을 일찍이 이운룡(李雲龍)을 시켜 서둘러 수송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먹고 있는 것이 틀림없이 그 곡식일 것입니다. 강원도·함경도에서 수송된 것과 여기에서 수송된 것 외에는 달리 들어오는 길이 없고 또 비록 있다 하여도 얼마되지 않습니다. 저번에 경리가 울산에 갔을 때 신이 직접 본 일인데 하루 방출되는 수가 1천 3백여 석이어서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었으나 그때는 백성들이 적을 섬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라도 있었기 때문에 남녀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이고지고 갔었지만 지금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도의 대구(大丘) 이하는 백성들이 모두 흩어지고 텅비어 있어 사람이 없었으므로 접제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에 애당초 군대를 보낼 때 식량을 계산하여 보내고 보리가 익기를 기다려 계획을 세웠더라면 그런대로 3∼4개월은 지탱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계책이 없습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군량의 일은 과연 민박한 문제입니다. 남쪽에서 온 자를 만나면 반드시 농사에 대하여 물어보는데 전라도 일대는 아직 파종을 못했다고 하고, 연산(連山) 이상은 조금 심은 곳이 있으나 임천(林川) 등지는 전혀 경작을 못하여 대가(大家)·세족(世族)들이 모두 다 떠났다고 하니, 중국군 접제만 어려울 뿐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 창생들이 모두 길거리에서 굶어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황해도의 백성들은 싸움터에 가기가 싫어서 자기 발을 스스로 끊어 싸움터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니, 기강은 없어지고 민원(民怨)도 극도에 달한 모양입니다. 인심이 이 지경이 되어 수습할 길이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나라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김수에게 이르기를,

"경리가 지금 영남으로 수송하라고 독촉하고 있는데 계속 수송할 수는 있는가?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철병(撤兵)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도 지탱될 수가 있겠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아마 지탱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이 유영경(柳永慶)·심우정(沈友正)의 장계를 보았더니 좌도는 5월 보름 전까지는 지탱할 만한 식량이 있으나 우도는 더욱 형편이 없다고 하였고, 김신원(金信元)·송일(宋馹)의 장계에는 하루 수송되는 것으로 하루를 지탱하기가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쪽 사정을 경리에게 여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경리가 현재는 적을 토벌하기에만 정신을 쓰고 있어 비록 사세의 어려움을 말하더라도 그 말이 틀림없이 귀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듣지 않더라도 미리 말은 해야 할 것이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이미 세 차례나 자문(咨文)을 올렸지만 모두 답이 없었습니다."

하고,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이렇게 민망스럽고 절박한 실정을 들어 조용히 말하여 보고 또 울면서 고하여 보았다가 그래도 듣지 않으면 혹 이자(移咨)를 하거나 정문(呈文)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라는 곧 망할 형세이고 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임진년에는 그래도 앞날의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늙은 것이 죽지 않고 있다가 끝내 오늘날의 이 꼴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상이 이르기를,

"군량 수송을 끝내고 나서 군대를 출발시켰어야 옳았다. 사세는 헤아려 보지도 않고 우선 대병력부터 발동시켰으니 용병(用兵)을 어찌 그렇게 한다는 말인가."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사세로 보아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대병력이 내려가지 않았던들 적들이 반드시 먼저 움직였을 것입니다."

하고, 이원익은 아뢰기를,

"형 군문(邢軍門)이 있을 때 뒤에 올 병마를 잠시 멈추어 이곳 준비가 끝날 때까지 좀 기다려 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문은 군량 문제가 자기 책임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정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아무리 자문으로 청했어도 듣지 않고 내려갔습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지난 가을 대병력이 남으로 내려갈 때만 하여도 윤승훈(尹承勳)이 9만 석은 준비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민력(民力)이 바닥이 나서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경리가 서울로 돌아온 후 1만 병력을 1곳에 각기 2천 명씩 5곳에 나누어 주둔시키기 위하여 8∼9개월 간의 군량을 준비하도록 재삼 분부하고서도 그후 군문 및 해방도(海防道)와 의논하고서는 반드시 병력이 많아야지만 적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병력을 출동하여 남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신이 지금 듣기에는 오유충(吳惟忠)영천(永川)에 있는데 군량이 동난 지 오래되어 사흘을 먹지 못했다고 하고 모국기(茅國器)성주(星州)에 있으면서 역시 양식이 동나 하루 두끼도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이 전부터 그러한 걱정이 있을까 염려하여 누차 여쭈었는데도 지금 이렇게 되었으니 이는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영남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충주에 군량이 많이 쌓여 있으면 군정(軍情)이 조금은 안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많이 운반해 놓기 전에 장마라도 져서 길이 막히게 된다면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도 통판(陶通判)은 또 군량 수송을 독촉하는 자문에서 승군(僧軍)을 징발하여 군량을 운반하도록 일찍이 분부하였는데도 끝내 아무런 동정이 없었으므로 만홀(慢忽)하다고 하였다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세도 그렇고 만홀한 점도 있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영남이라고 해봐야 다만 경주(慶州)·안동(安東)·풍기(豊基)·영해(寧海)·영덕(盈德) 등 몇 고을에 조금의 인력이 있을 뿐 의성(義城) 이하는 전혀 사람이 없는데 그러한 현상은 중국군들도 다 직접 보고 있는 것으로서 사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어찌 모두가 만홀한 소치이겠습니까."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의주(義州)에 있는 군량 중에서 황주(黃州)녹사포(鹿沙浦)로 수송할 것은 쌀과 콩 합하여 3천 석인데, 그것은 아직 도착을 못시켰지만 조읍포(助邑浦)로 수송할 것은 이미 모두 실어 왔습니다. 중국에서 보내온 군량이 의주에는 쌓여 있으나 아직 제때에 수송을 못하고 있는데 대체로 중국에서는 한 사람이 모든 조치를 전적으로 맡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처리가 편리한데 반하여 우리 나라는 그렇지가 못하여 논의는 많고 성사되는 일은 적습니다. 수양 산성(首陽山城)에도 수천 석의 쌀이 있어 현재 운송을 독촉 중이라는데 다 실어왔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신(群臣)들이 헌책(獻策)한 것은 채택을 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처리할 셈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헌책이래야 새로운 내용이 아니고 바로 전일에 이미 해보았던 계책들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경리가 언제나 하는 말이, ‘요양(遼陽) 등지 같은 데서는 남부 여대(男負女戴)하고 혹은 차량(車輛)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운송하여 의주에다 쌓아두었는데, 그대 나라에서는 전혀 운반하지 않는다.’ 하고 노여운 마음을 갖고 있으니 어느 날 갑자기 식량이 동이 나는 날이면 반드시 난처한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저번에 한효순(韓孝純)이 운량(運糧)을 잘못한다 하여 개차하고 최동립(崔東立)을 바꿔 임명하였을 때 경리는 그가 나간 날짜를 기록하여 두고 ‘왜 지금까지 배를 챙겨 실어보내지 않느냐.’고 야단하였습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이미 정문(呈文)하였습니다."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정문하는 것도 걱정스런 일입니다. 저쪽에서는 일은 처리하려 하지 않고 정문만으로 꾸며대기만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헌국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일은 원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왕년에 중국으로부터 둔전(屯田)을 하라는 분부가 있었을 때도 비변사에서는 모두 폐단만 있어 할 것이 아니라고들 하였습니다. 소신은 그때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를 위하여 둔전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인데 소소한 폐단을 굳이 따질 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적들도 그 소식을 듣고는 ‘역시 중국군은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다.’ 하여 꺼려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의론이 많아 결국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강 남쪽의 거민들이 자기들의 마소를 내어 영남까지 실어다 주려 하였다고 경리가 말했다는데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이는 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나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신도 모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소신이 생각하기는 광주(廣州)의 백성들이 심우정(沈友正)을 유임시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쌀을 충주까지 운반하겠다는 뜻으로 비변사에 와 정문을 올렸으나 비변사가 허락을 안 했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경리 아문에 올렸었는데 아마 그 사실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고, 심희수(沈喜壽)는 아뢰기를,

"광주 백성들이 그것을 경리에게 올리자, 경리가 이르기를, ‘천병이 영남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백명의 심우정이 있더라도 어떻게 광주를 확보할 것인가.’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을 말한 것은 아닌 듯하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광주 백성들이 도감(都監)에 와 정문(呈文)을 하려고 하기에 소신이 말렸는데 그후 경리가 동대문(東大門)에 갔을 때 그에게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가는 사이에 혹 운량 문제에 대하여도 언급이 있어 그러한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이 그 출처를 알아보려고 기고(旗鼓)에게 물었더니, 아마 기패관(旗旆官) 등이 헛소문을 듣고는 그 사실을 기고관에게 전하고 기고는 또 그것을 들은 대로 경리에게 말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리는 또 말하기를, ‘조선의 당상관(堂上官)들은 고기잡이 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는 운량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는데 그러한 말들도 어디에서 들은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고, 김수는 아뢰기를,

"강가의 사람들이 혹 말할 수는 있으나 또한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홍진(洪進)이 아뢰기를,

"황해도(黃海道)의 민심은 더욱 붕괴되어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육운(陸運) 때문인 것입니다. 백성들이 선가(船價)를 비록 갑절로 내는 한이 있더라도 육운만은 그만두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육운은 반드시 기간을 앞당겨 대령시켜도 번번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운반하는데 20여 일이 걸려 부마(夫馬)가 지칠 뿐만 아니라 오고 가는 사이 반드시 쌀과 콩을 배상하여 부족분을 메워야 하므로 백성들이 육운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외방의 관리들이 만약 처리를 잘하여 그렇게 되지 않게 한다면 백성들이 편리해 할 것입니다. 유근(柳根)이 4월 23일 장연(長淵)에서 배를 모아 의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만약 빨리 운송이 된다면 5월 보름경에는 서울까지 도착이 될 것이고 한번 운송하는데 5만 석 가량은 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운(水運)도 기한을 정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지금의 수수(水手)들은 전일과 라 행선(行船)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침몰할 걱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유근이 건조한 배는 5만 석을 운반할 수 있는데 바람이 높기 이전인 9월까지 3차례 운행이 가능하니 만약 3차례를 운반하면 15만 석을 수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5월부터 금년 4월까지 소요된 수량이 22만 석인데, 이것을 가지고 따져볼 때 금년은 대병(大兵)은 수가 지난해와는 크게 달라서 쌀 30만 석은 수송되어 와야지만 거의 접제가 가능할 것입니다."

하고, 김수는 아뢰기를,

황해도에 쌓아둔 것을 다시 수탐(搜探)하여 올려왔으면 하고 저번에 아뢴 바 있습니다."

하고, 홍진이 아뢰기를,

"모두 일은 반드시 담당자가 그것을 적의하게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황해도 운량 건도 조정에서 그것을 낱낱이 계산하여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니, 모름지기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하나하나 개진하여 상문(上聞)하게 하면 반드시 편리한 계책이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 제독이 2개월 간의 군량을 서둘러 준비하도록 분부를 내렸다고 하는데 그 준비는 가능한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전라도에 현재 있는 곡식으로 계산하면 40∼50일은 지탱할 수가 있습니다."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수병(水兵)의 군량은 나주(羅州)에 준비하고 육병(陸兵)의 군량은 전주(全州)에 준비해 두어야 지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각처에 분산되어 있어 얼마 안 되는 것들을 한 데 모은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또 함경남도의 곡식 1만 석을 경상도로 수송하도록 한 것도 물론 그것이 부득이하여 취한 조치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사정도 매우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하고, 김수는 아뢰기를,

"그것은 황민중(黃敏中)이 모은 군량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원례(朱元禮)가 올라왔다는데 그가 온 뜻은 무엇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신이 아침에 경리 아문에 가서 남하(南下)하는 이유에 대하여 물었더니, 혹자는 그가 행장(行長)을 만나 상의할 일이 있어 가려 한다고도 하고, 혹자는 둔전(屯田) 상황을 보기 위하여 가려고 했는데 지금은 이미 가지 않기로 했다고 하였습니다. 주원례가 왜인 7∼8명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황응양(黃應陽)을 보내 앞을 가로막고 보내지 못하게 하였는데, 저들이 만약 성심으로 강화를 원한다면 허락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북경(北京)으로 압송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리는 가지 않기로 한 것인가? 그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가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전일에 진주(晉州) 사건에 대하여 묻기에 신이 도원수(都元帥)가 통지한 뜻을 말하니, ‘대장(大將)의 신기(神氣)가 아직 불안정하다 하였는데 이는 마귀(麻貴)를 가리켜 한 말이다. 유 제독(劉提督)이 오기를 기다려서 논의하여 처리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틀림없이 거사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어제 제독을 만났을 때 조용하였는데 필시 이론(異論)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운량 문제는 호조가 담당하여야 할 일이고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착실히 거행할 뿐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많은 관원들이 모여 논의한다 하여도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일을 담당한 사람이 착실하게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호령(號令)이 통하지 않아 호조가 비록 외방에다 공문을 띄운다 하더라도 외방에서는 그것을 보통으로 받아들여 하루 이틀 시간만 보내니 그것이 오늘날의 폐단입니다. 서도(西道)의 군량을 만약에 빨리 운송할 수 있다면 충주(忠州)까지는 수송이 가능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충주에서는 경상도로 운송이 될 것인데, 만약 충주에다만 많이 쌓아 놓아도 중국군의 진퇴에 따라 접제할 수 있을 것이며, 또 군정(軍情)도 믿는 데가 있어 두려워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모든 일은 당연히 유사(有司)에게 맡겨야 하는데 요즘 와서는 정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일이 잘 성취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말들을 하여도 일에는 도움되는 것이 없어 신은 그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병조의 일은 병조가 맡고 호조의 일은 호조가 맡아 각기 자기 직책을 다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혜가 바닥이 나고 힘이 다한 상태인데 미리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아니하고 이제 와서 호조에다만 책임을 지우면 호조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난해에는 벼와 곡식들이 매우 흔하여 무명 베 1필 값이 쌀로 40두까지도 갔었는데 그때 만약 쌀과 콩을 매입하여 창고를 가득 채워두었더라면 그 이익이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후회 막급입니다."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그것은 국가 전체가 함께 걱정할 문제이지 어찌 호조만의 걱정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 제독이 오면 거사를 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고 보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만약 군량만 준비된다면 반드시 거사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난색을 보이는 듯한 뜻이 있었습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신이 변협(邊協)에게서 들은 말인데, 왜적들이 여름철 초목이 무성할 때면 숨어서 총을 쏘기 때문에 싸우기가 쉽지 않고 반드시 가을 겨울 나뭇잎이 떨어진 뒤라야지만 섬멸하기가 편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신립(申砬)은 정반대로 말하였기 때문에 신은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초목이 무성할 뿐 아니라 여름철 장맛비가 내릴 때라서 거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경리가 이곳에 오래 있었으므로 우리 나라 형편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경상도에 갔을 때도 그가 중국에 아뢰기를, ‘조선은 완전히 결딴나 버렸는데도 오히려 군량 조달을 하여 전후 소비한 것이 거의 4만 석에 이르고 있다.’ 하였는데, 황상(皇上)께서도 반드시 그간 사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경리는 언제나 우리 나라를 두고 성실성이 적다고 말한다. 나는 그를 접대하는 데 있어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를 속이거나 숨기려 들지 않았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경리는 성격이 쾌활한 편인데 언제나 우리 나라더러 성실성이 부족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장(唐將)이 각관(各官)의 군향(軍餉)·기계(器械) 등을 조사할 때 그것이 문보(文報)와 같지 않고 반드시 숫자가 가산된 것이 있기 때문에 필시 그로 인하여 성실성이 적다고 여길 것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경리가 왕내징(王來徵)을 시켜 양향을 조사할 때 송일(宋馹) 등의 문보와 맞지 않으므로 경리가 신에게 그것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차차로 이렇게 속이고 있으니 왜 그렇게 성실성이 없는가.’ 하였습니다."

하고, 이정구는 아뢰기를,

"각처에서 보고한 숫자가 한 때 한 곳에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뒤로 혹 증감(增減)이 있는데 이는 형세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고, 심희수(沈喜壽)는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은 문부(文簿)에 능숙한데 반하여 우리 나라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틀리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큰 수에 심한 차이만 없다면 그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 제독(麻提督)이 잡물(雜物)들을 마련하여 내라고 하고 있다는데 그것을 자기 아문에서 마련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호조에서 마련하도록 하는 것인가? 그것이 만약 군중에서 쓰는 물건이라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불가한 일인 듯하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모든 공장(工匠)과 잡물들을 전부 호조에서 마련하여 오도록 하고 있으며, 칠장(漆匠)·유기(鍮器) 같은 것도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장관(將官)도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양 포정(梁布政)은 절대로 그러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고, 김수는 아뢰기를,

"형 군문(邢軍門)의주(義州)에 있으면서 공역(工役)을 크게 일으켰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리는 좋은 사람이다. 사람이 활달하고 기량이 있으며 또 지개(志槪)도 있는 사람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의 사람됨이 어찌 평범하겠습니까."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그의 마음이 사심은 없으면서 성급하기 때문에 남의 말이 쉬 먹혀들어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떠도는 잡언(雜言)도 모두 영국윤(寗國胤)이 한 말입니다. 영국윤은 재간이 있기 때문에 등용되었는데 그가 말만 하면 반드시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오종도(吳宗道)가 항상 하는 말이, ‘경리는 성질이 급하며 영국윤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니 대우를 잘 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는 대체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문아(文雅)한 맛이 적고 경솔한 점이 많으며 말하는 것을 보면 혹은 무식한 사람 같기도 합니다. 모든 일이란 반드시 익히 안 다음 처리를 해야 되는 것인데 그는 언제나 화난 얼굴을 하고 있어 그게 매우 난처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도(性度)는 역시 좋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기질(氣質)의 병이야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도량있고 활달하여 내가 보기에는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결과는 성공을 한 후라야지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를 어찌 일률적으로 논할 수 있을 것인가. 요동(遼東)에 있을 때는 나도 꽤 걱정을 하였는데 지금 보면 도량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 와서 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그가 대단히 잘못을 저질렀다손 치더라도 뒤좇아 논의한다면 옳지 못한 일이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그는 치밀성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체적으로 호인(好人)이던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결과를 보아야 알 일이겠으나 협기(俠氣)가 많이 의기(意氣)로 자부하는 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말한 기개와 도량이 있다는 것도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를 일러 무식하다고 한 것은 무엇을 보고 한 말인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선비다운 기상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분부한 일을 우리 나라가 그대로 받들어 행하지 못한다 하여 마음을 태우고 있는데 혹은 문을 닫고 혼자 앉아서 가슴을 두드리며 한탄을 하고 매사가 늦다고 민망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호부(戶部)가 경리에게 이자(移咨)하기를, ‘독촉을 제대로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성지(聖旨)가 있었다.’ 하여 그 때문에 고민한다고 합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경리가 말하기를, ‘나는 틀림없이 여기서 죽을 것이다.’ 하면서 울고 포정(布政)도 울었다고 합니다."

하고, 이정구는 아뢰기를,

"어사(御史)와 작별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 말이 좋지 않은 것 같다. 포정도 울었다는 것인가?"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저번에 포정의 접반관을 만났는데, 그의 가정(家丁)이 돌아가겠다는 것을 안찰(按察)이 만류하자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제독(李提督)이 싸움에 패하여 죽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곡절을 알 수가 없고 시신도 있는 곳을 모르며, 혹은 그날이 4월 3일이라 하고 혹은 13일이라고도 하니 그 역시 정확한 소식을 알 수가 없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광녕(廣寧) 사람이 경리 아문에 와 비밀히 말하기를, ‘조문환(曹文煥)이 많은 달적(㺚賊)을 죽이고 이 제독에게 보고하자 제독은 즉시 광녕으로 달려가 교장(敎場)을 열고 열무(閱武)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침입하여 온 적의 수가 적다는 말을 듣고 병력을 나누어서 보냈던 바 성 밖의 적은 과연 그 수가 적어서 즉시 격파하였으나, 뒤를 이어 대부대의 적이 밤에 습격해 왔기 때문에 대패를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 그렇게 성급하게 서둘렀을까?"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아마 벽제(碧蹄)에서 싸우듯이 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들이 새외(塞外)에 있었던 것인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가정(家丁)의 말에 의하면, ‘오랑캐의 수가 매우 적었는데 즉시 달려가 보니 사막의 건너편에 대부대의 적이 산 아래 잠복하여 있었다.’ 하였는데, 싸움에 패한 곡절에 대하여는 그도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함께 나온 사람들 역시 낭패를 당하고 돌아갔으며 제독은 틀림없이 난자당하여 죽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홍진(洪進)이 아뢰기를,

"조제(弔祭)는 반드시 문보(文報)가 있기를 기다려서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정구가 아뢰기를,

"예판(禮判)이 오늘 나가려고 하다가 밖의 의논들이 그렇기 때문에 좀 천천히 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제독이 틀림없이 사로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패한 후 먼 곳으로 도망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의 성격이 강하여 틀림없이 사로잡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비록 죽고 싶어도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도 그렇다. 그리고 이여매(李如梅)광녕의 총병(摠兵)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전에 이곳에 왔던 사람이니, 성절사(聖節使)가 들어갈 때 그 편에 글을 보내 안부를 묻는 것은 어떻겠는가?"

하였다. 정탁(鄭琢)이 아뢰기를,

"그것은 좋습니다마는 사교(私交)의 혐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정구가 아뢰기를,

"그러면 제독의 죽음에 대하여도 그 속에 언급을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이야 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게첩(揭帖)을 하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허괵(許𥕏)도 우리 나라에는 공로가 있는 자였으나 그에게는 그러한 일이 없었는데 괜찮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와는 경위가 다르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인정으로 보아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방 우리 나라에서 돌아가 지금 광녕의 총병이 되어 있는데 절사(節使)가 가면서 그곳을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저번에 이여송(李如松)이 총병으로 있을 때도 진주사(陳奏使)가 가는 편에 예단(禮單)을 붙여 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번 역시 그때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절사가 이미 길을 떠났으니 그들이 강을 건너기 전에 예물과 유지(有旨)를 붙여 보낼 수 있도록 서둘러 내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심희수가 아뢰기를,

"총병 조승훈(祖承訓)이 해주위(海州衛)의 참장(參將)으로 있을 때도 게첩을 보낸 일이 있었으니,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은 무방할 것 같으나 다만 그의 형의 생사를 확실히 알 수 없어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우리가 언급을 하지 않는다면 그쪽에서도 미처 못들은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거기 가서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때 역관(譯官)을 시켜 임시 변통으로 말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광녕에서 패했을 때 장관(將官)으로서 도망간 자도 혹 있었다는데 당당한 중국 조정에서도 그 모양이니 하물며 우리 나라이겠는가. 만약 요우(遼右)에 시끄러운 일이 많아지면 우리 나라의 일은 더욱 불행하게 될 것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함경도 장계를 보았더니, 남병사(南兵使)를 체직시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 세력이 점점 성해진다면 매우 우려되는 일이다. 남병사는 당연히 체직시켜야 할 것이나 적임자를 얻지 못할까 그것이 염려된다. 만약 세력이 큰 적이 침범해 온다면 비록 병사 1백 명이 있더라도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노을가적(老乙可赤)이 여러 호족(胡族)을 분탕하고 기회를 넘보면서 시끄러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는 전일 이탕개(尼湯介)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커서 9백 리에 달하는 땅을 차지하고 북녘 오랑캐와 서로 통하는데 그 무리만도 7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적을 누가 당해낼 것인가.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북녘 오랑캐들이 근래 와서 겁을 주고 있는 상황과 번호(藩胡)가 우리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 모든 곡절을 낱낱이 경리 아문에 알리고, 그로 하여금 한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 격문(檄文)을 띄워 그들을 개유하고 의리를 들어 가르치는 한편, 위엄으로 겁을 주기도 하여 감히 그 지방에서 시끄러움을 피우지 못하도록 만들게 하는 길만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될 것 같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자문(咨文)을 지금 막 마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문 속에다 그 곡절을 다 쓸 수는 없을 것이니 접반사로 하여금 자세히 진품(陳稟)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남병사를 체임한 후에는 적당한 자가 누구이겠는가? 유희서(柳熙緖)가 적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빨리 갈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적을 제어할만한 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사졸(士卒)들이 매우 그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고, 정탁이 아뢰기를,

"사졸들이 그를 사랑한다면 이는 좋은 일로서 현장(賢將)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근래에 무변(武弁)으로서 쓸 만한 인재가 아주 적습니다. 비록 질(秩)이 낮은 사람이라도 전진(戰陣)에 쓸 만한 자가 있으면 골라 혹 당상(堂上)으로 승진시켜 발탁해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영(李英)은 질이 낮기는 하지만 그 인품이 전진에 쓰기가 적당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는 어디 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황주(黃州) 사람입니다. 그리고 김태허(金太虛)도 무반으로 쓸 만한 인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남쪽에 오래 있어 적들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므로 그를 다른 도(道)에다 써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나이는 지금 몇인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50여 세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수일(李守一)도 쓸 만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권응수(權應銖)도 용장(勇將)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 사람도 용사로서 싸움에 당하여 쓸만한 인물이기는 하나 다만 몸가짐을 삼가치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응서(金應瑞)에게 왜 죄명이 주어졌는지 그 곡절을 나는 모르고 있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이런 시기에 버려두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는 현재 거느린 군대가 없어 자기 능력을 시험하지 못하고 있으니 경리에게 여쭈어 복직을 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는 비록 병졸 중에서라도 발탁하여 써야 한다. 그 정도의 인재라면 당연히 모처(某處)에다 써야지 어떻게 버려둘 수가 있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대구(大丘)에서 중영장(中營將)으로 있을 때는 백성들이 그의 힘으로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고, 또 항왜(降倭)들을 잘 다루어 울산(蔚山) 싸움 때 항왜들을 데리고 밤이면 도산성(島山城) 밖에 잠복해 있다가 물 길러 나온 왜병들을 4∼5명 혹은 6∼7명씩 밤마다 꾀어내었기 때문에 명장(明將)들도 그를 기이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노를 다루는 솜씨가 매우 좋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 수십 명만을 데리고 직접 적진에 가서 행장(行長)과 얘기를 나누다가 오기도 하였는데, 그것 역시 어려운 일로써 그의 용감성을 알 만하다. 김응서의 그러한 일에 대하여는 경리도 이미 알고 있으니, 이제 그에게 다시 직(職)을 주어 기용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양남(兩南)의 수령(守令) 자리를 사람들이 모두 부임하기를 싫어하여 비록 죄를 내려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고, 홍진은 아뢰기를,

"상주 목사(尙州牧使) 황극중(黃克中)은 병이 심중한데도 감히 병을 들먹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눈까지 어두워서 당연히 갈아 임명해야 할 것인데 이조(吏曹)에서는 아예 그러한 길을 트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길이 한번 트이고 나면 사람들이 모두 병을 핑계하여 면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그의 개차를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황극중만은 억지로 보내기는 어려운 처지입니다."

하고, 이헌국은 아뢰기를,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 사람들이 사진(仕進)을 하려 하지 않고 서북 지방을 너도 나도 피란의 장소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재상도 나와서 일을 하지 않으며 문관(文官)들은 모두 시골로 물러가 있어 비록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에 제수하고 누차 유시를 내려도 즉시 오지 않으니,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하고, 정탁이 아뢰기를,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다고 한 말이 어디 그것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평시에는 상을 내려도 물러가는 자가 없더니 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는 죄를 내려도 물러만 가니 여기에서 세상의 변천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리의 접반사는 우상(右相)이 계속할 것인가? 경리가 개차를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부사(副使)는 왜 차출(差出)하지 않는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요즘 김수로 하여금 사후(伺候)를 하게 하였더니 대인(大人)이 싫어하여서 이항복으로 하여금 사후를 맡게 한 지 며칠째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덕형은 재상이 되었기 때문에 부사 차출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산(島山)의 내성(內城)은 그 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내성이 아니라 고산(孤山)이 두 층으로 되어 있어 마치 동분(銅盆)을 엎어놓은 모양이고 그리 높지도 않아 조산(造山)과 비슷한데, 거기에다 목책(木柵)을 치고 그 위에다 성을 쌓아 그것을 내성이라고 하니, 말은 세 겹이라지만 사실은 두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지형(地形)을 따라 두 겹으로 쌓은 것인데 신이 그 삼면(三面)을 둘러보았더니 돌로 쌓고 위 아래에 구멍을 내어 모두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그곳 1백 보 내에는 총알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습니다. 진인(陳寅)이 당장 들어가 함락시키려다가 수백 명이 총알에 맞아 죽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大砲)로 그 구멍을 깨버릴 수는 없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가까이 가서 쏠 수가 없어 멀리서 쏘기 때문에 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서낭당(城隍堂) 아래는 바로 바다인데 포막(鋪幕)들이 줄지어서 도산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청정(淸正)이 처음에는 서낭당에 있었는데 이여매(李如梅)가 서낭당을 쳐부수고 토굴이나 포막 할 것 없이 모조리 불태웠으며 무수한 적을 죽였으므로 궁지에 몰린 청정도산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신이 군관(軍官)을 시켜 뒤쫓아 가보라고 하였더니 태화강(太和江) 근처에 있는 적들의 포막도 모두 불타고 있었으며, 모국기(茅國器) 군대는 우리 나라 포수(砲手) 8명을 데리고 도산 성문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는 들어가기만 하면 죽음을 당한다고 했다 합니다. 신이 도산과 마주보고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 바라보니, 경리는 매우 급하게 독전(督戰) 중이었고 왜적들 역시 방어에 정신이 없었는데 그렇게 한참 싸우더니 왜병 1명이 백기(白旗)를 들고 나와 동문(東門) 가에다 꽂고는 포를 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경리는 그때 반드시 간계가 있을 것이락 생각하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나 오래 걸려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경리는 조금 후퇴시켰다가 다음날 다시 공격하기로 했던 것인데 그 싸움에서 사상자가 많이 생겨 다시 공격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생소나무로 3층의 목책(木柵)을 만들어 놓고 있었기 때문에 화전(火箭)을 써도 다 태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의 병력이 평양에서 싸울 때에 비하면 어떠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때보다는 더욱 많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쳐부수지 못하였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도산의 지형과 조건이 평양에 비하여 공격하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 안에 물은 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없습니다. 처음에는 밥을 짓지 못했다가 연일 비가 내리는 바람에 밥을 지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성 밖에는 물이 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성 밑에 우물 두 곳이 있어 김응서(金應瑞)를 시켜 메워버렸는데도 그곳에 와 길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밑에는 중국군이 접근할 수가 없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중국군은 접근할 수가 없고 김응서를 시켜 가만가만 가서 그들을 유인하게 한 다음 중국군이 가서 모두 빼앗았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청정(淸正)이 서찰을 보내 강화할 뜻을 밝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경리가 그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기를, ‘천조(天朝)의 대장(大將)이 군사 10만을 이끌고 왔다. 너희들은 나와서 항복하라.’ 하니, 청정은 ‘명령대로 하겠으나 문장에 능한 중이 서생포(西生浦)에서 나와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김대부(金大夫)가 나와서 박대근(朴大根)에게 한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정이 있는 성(城)은 좋은가? 우리 나라 성에 비하여 어떠한가?"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성은 말할 것도 못됩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번 일로 말하면 저 적들이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일지병(一枝兵)을 시켜 저들의 양도(糧道)만 끊어버린다면 저들은 필시 속수 무책(束手無策)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자, 아뢰기를,

"2천∼3천 명에 불과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야전(野戰)은 중국군을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비록 야전이라도 숲이 빽빽한 곳에서는 이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이헌국이 아뢰기를,

"중국군은 전진을 잘하는 것이 장점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번에는 우리 나라 사람들도 용감히 싸웠다고 합니다."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번 훈련 도감의 군대는 중국 장수들도 모두 칭찬하였습니다. 이인남(李仁男)이 왜병 1명을 생포하여 그의 갑옷을 벗기고 거기에 새기기를, ‘유악 속에서 계책 세우고 천리 밖에서 결승 취하리 [謀猷帷幄中 決勝千里外]’ 하였다고 합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군대가 비록 훈련은 잘하지 못하지만 말달리고 활쏘는 재주 등은 모두 뛰어난 편입니다."

하고, 이헌국이 아뢰기를,

"당 태종(唐太宗)도 패하여 돌아갔으니 우리 나라 군대를 열등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야 이적(李勣)평양에서 패하지 않았던가. 군대란 오직 세(勢)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기강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비록 서관(庶官)이나 백집사(百執事)일지라도 잘 골라 쓰지 않으면 안 될 처지인데 더구나 상신(相臣)이겠습니까. 신같이 변변찮은 사람이 어찌 감히 하루인들 그 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들이 신을 볼 때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전후 은혜를 입어온 신으로서야 비록 죽은들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누차에 걸쳐 민박한 심정을 들어 아뢰었으나 도리어 엄한 하교를 받았습니다. 지금 낯을 들고 출사(出仕)는 하고 있으나 늘 걱정스럽고 황공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조(先朝)의 신숙주(申叔舟)가 40세 이전에 재상이 되자, 그 당시 사람들이 그를 괴이하게 보았었는데 신은 재능도 그만 못하고 나이도 그보다 적은 처지로서 어떻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걱정스럽고 민망한 심정을 이루 다 아뢸 수 없으니, 빨리 체직을 명하시고 나이많고 덕있는 이를 다시 골라 망해가는 나라 형세를 진작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피(辭避)하지 말고 나라 일을 다시 구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왕옥(王獄)의 죄인들이 줄을 이어 도망가 숨고 있는데 이는 기강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두고 한 말인가? 그 사람들은 이 일 때문에 이미 파직을 당한 바 있는데 지금 또 파직을 시킨다면 사체로 보아 미안한 일이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관(官)을 두고 직(職)을 나누어 맡기는 데에는 본래 등급이 있으니 관작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따라서 성이문(成以文)에게 제수한 것을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이문이 이미 행공(行公)하였는데 출신(出身)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하여 개정한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지난번 차자(箚子)를 올렸더니 빨리 나오라는 뜻으로 하교를 하셨기에 황공하여 감히 다시 사의를 표하지 못하고 출사는 하였으나 극히 낭패스러운 일입니다. 경리(經理)는 여타 장관(將官)과 비할 수 없는 자로서 황제의 명령을 받고 우리 나라를 경리하는 입장이므로 그는 군무(軍務)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출척(黜陟)과 진퇴(進退)에 대하여도 관여할 것입니다. 그가 소신을 지척(指斥)한 것은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닌데 신이 어찌 감히 태연스레 공무에 임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게첩(揭帖) 건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이 어찌 꼭 좌상을 지적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이 영남(嶺南)에 있을 때 경리의 차관(差官)이 와서 이모(李某)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는데 신은 그때 병중이어서 몰랐습니다. 병세가 호전된 뒤에야 비로소 들었는데 당시 통사(通事)들이 토혈(吐血)을 한다고 말했답니다. 지금 게첩 속에 이른바 혈병(血病)이라고 한 것은 바로 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 일에 대해 잘 모른다. 경리의 차관이 ‘좌상이 토혈병을 앓는다.’고 경리에게 고했다는 것인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 당시 영국윤(甯國胤)의 보고에 의하면 김응서(金應瑞)는 왜적과 서로 통하고 있고 이원익은 간 곳을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경리가 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마침 군관(軍官)이 경상도에서 막 돌아와 경리에게 이원익의 병이 위중하다고 전하였는데, 경리의 차비 통사(差備通事) 표헌(表憲)은 토혈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번 일은 필시 그걸 들어 말한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영국윤이 보고한 것만 하더라도 신이 스스로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선전관(宣傳官)이 급하게 유지(有旨)를 가지고 내려가기에 신이 열어보니, ‘경리가 영 도사(甯都司)를 차송(差送)하였으나 꼭 그가 말한 대로 다 따를 것은 없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생각에는 경리가 출척과 진퇴의 권한을 다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짐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영국윤(甯國胤)이 들어왔는데 혹 따를 만한 일일지라도 따르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군기(軍機)에 관한 일까지도 들어주지 않았으니, 영국윤이 그렇게 모함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그때 병중에 있으면서 유성룡과 항상 하는 말이, ‘지금 시기는 마치 풍파에 배가 뒤집히려는 듯한 형세여서 감히 딴 뜻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오직 사력을 다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경리 게첩 중의 김수 건에 대하여는 죄를 지고 운량을 관리하라고 회보하였으나 신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처치가 없습니다.

지난번 영상은 정고(呈告) 중이었고 좌상도 궐위(闕位)되어 있을 때 소신이 혼자 있으면서 심지어 자문(咨文) 등의 일까지도 혼자서 처리하였으므로, 중군인들은 그때 소신이 조정의 권한을 혼자 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소신이 비록 염치가 없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런 것이야 아무 상관없으나 이러한데도 아직까지 처치하지 않고 있으니, 인정이나 사리로 보아 민박한 일일 뿐만 아니라 경리를 대우하는 도리로서도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신이 혹 그의 아문에 가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해서 머리를 내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자처(自處)를 하려다가 마침 소명(召命)이 계셨기에 감히 그렇게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때에 명장(明將)의 그 같은 말 때문에 행공(行公)을 하려 하지 않는다면 행공할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좌상은 오직 나라 일만을 위할 뿐 혐의쩍게 여기지는 말라."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경리가 오랜 기간 여기에 주재하고 있지만 그의 호령이라면 듣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유독 이 일에 대하여서만 회답을 하지 않는다면 신의 입장이 미안할 뿐만 아니라 혹시 상에게 누(累)가 미칠까도 염려가 됩니다. 나라 일을 맡은 이상 죽음이라도 사양하지 않겠으나 직명(職名)을 그대로 띠고 있는 것만은 미안한 일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 문제는 신 역시 전일에 누차 아뢴 것입니다. 대체로 경리가 우리 나라 일이 하나도 되는 것이 없음을 보고 상신(相臣)을 바꾸면 일을 할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그 말은 사실 옳습니다. 지금은 나가면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고 물러서면 갈 곳이 없는 때이므로 작은 혐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경리는 대신(大臣)들이 적합한 인물이 아니어서 이렇게 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신의 생각에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일을 담당한다면 국사가 혹 제대로 될 것으로 봅니다. 경리의 뜻이 이미 그러하니 만약 중국 조정에까지 그 사실을 아뢰어 결국 사람을 잘못 써서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라고 한다면 군부(君父)에 큰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지금 아래에서 사피하는 것이 평상시와는 다르니 위에서 처치하는 방법도 평상시와는 달라야 합니다. 저들 뜻이 그러한데 그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후회가 있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자, 상이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세 명의 대신이 한꺼번에 사피하면 나라 일은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사체로 보더라도 온당치 못하거니와 만약 그가 지척(指斥)했다 하여 체임을 시키더라도 훗날 또 누구를 지척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재상은 필시 완전한 자가 없을 것이니 어찌 모두 물러가야만 하겠는가.

그리고 경리 아문에 익명서(匿名書)가 있다고 하는데 중국 사람의 짓인지 아니면 우리 나라 사람이 한 짓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이 하였다면 이는 틀림없이 뜻을 얻지 못한 간인(奸人)이 하였을 것이다. 윤승훈(尹承勳)이 왜노에게 땅을 떼어주기로 허락했다고 하니 어떻게 감히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도 그렇습니다마는 소신에 관한 것은 그에 비하여 더욱 잔혹한 내용이었습니다. 필적은 아마 수재(秀才)가 쓴 것 같다고 이덕형이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도 경리 아문에다 부쳤다는 것인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어느 중국인이 신에게 말하기를, ‘놀랄 만한 일이 있다. 충주(忠州) 서문(西門)에 영의정의 성명을 쓰고 8가지 죄목을 나열하여 놓았는데 이것을 마의(馬醫)가 가져왔기에 유정륜(劉正倫)과 함께 보니 말이 두서가 없었으므로 불태워버렸다.’ 하였습니다. 신이 무슨 사실을 썼더냐고 물으니,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지난번에 왜적과 서로 통한 일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람이 쓴 것이던가, 우리 나라 사람이 한 짓이던가? 중국인과 우리 나라 사람은 필적을 보면 구별하기가 매우 쉽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수재가 썼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 나라 사람의 짓일 것입니다. 중국인이야 하필 그러한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런 일은 괘념할 것도 없고 또 전할 만한 것도 못된다. 인심이 좋지 못해 그런 것이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입에 담을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대신들이 사피하는 자리에서 소신까지 이렇게 아뢰게 되어 극히 미안한 줄 아나 신의 성품이 원래 게을러 운량(運糧) 등의 제반 조치를 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리도 그 일로 이미 외방에다 게첩을 하고 신이 반드시 체임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약 그의 호령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일이 진행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判書)는 저들이 운량을 게을리 한다고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처럼 말하지만 그걸 꼭 혐의할 것이야 있겠는가."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직임(職任)과 관련된 일이야 하루에 여러 번 책망을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지금 시급한 것이 선운(船運)인데 공사를 막론하고 소유 선척(船隻)을 모조리 모은다면 선척이 적은 것도 아니고 또 만약 중국쌀로 배삯을 계산하여 준다면 배를 가진 자도 실업(失業)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격군(格軍)들도 생활을 영위할 길이 생겨 틀림없이 전일처럼 억울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용은 적게 쓰면서도 많은 양을 운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번에 유근(柳根)의 공사(公事)를 보니 역시 그렇게 하고 싶어하였습니다. 경리에게 여쭈어 서둘러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유근은 마음을 다해 하고 있으니 유근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운(陸運)은 중지하고 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우선은 중지하였다가 망종(芒種)이 지나면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잘하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지체되는 일이 많고 또 그 곳의 관원들도 육운은 못할 것으로 알아 태만히 여기기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경리가 남하(南下)하기 때문에 부마(夫馬)가 오래도록 대기하고 있는데, 그가 만약 가지 않기로 하였다면 빨리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가고 안 가고는 우상(右相)이 잘 알 것이니 서둘러 유시를 내리도록 하라. 도원수(都元帥)가 만약 군대를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다면 어찌 허술한 점이 없겠는가. 아울러 유시를 내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경섬(慶暹)이 아뢰기를,

"신이 원주 도사(原州都事)에게 들으니, ‘내가 민간에서 곡식 20여 석을 모아 놓았는데, 어사가 내려왔으나 모을 계책이 없자 수령에게 분부하여 모으게 하였다. 수령은 분부를 받고 부득이하여 내가 모은 것을 덜어내어 보고하였고, 모속관(募粟官)이 다시 그렇게 하라고 하자 수령은 또 부득이 내가 모은 것으로 보고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로 볼 때 실지 효과는 없이 주전(廚傳)의 폐단만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적임자를 얻으면 그뿐이지 관원이 꼭 많아야 되는 것은 아니니 바라건대 꼭 필요하지 아니한 행차를 없애 민간의 폐단을 다소나마 줄이소서."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런 일은 이미 없앴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줄일 것이 또 있는가? 그것은 비변사와 호조가 할 일이니 살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섬이 아뢰기를,

"영남에도 관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그것은 어사를 두고 한 말로 경리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줄여야 할 것이 있으면 줄이고 없으면 굳이 줄일 것은 없으니 헤아려서 하라."

하였다. 경섬이 아뢰기를,

"근래 명장(明將) 접대를 하느라 거둥이 잦았으니 성상의 체후도 매우 피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인접(引接)을 하지 않으시어 위아래의 정의(情意)가 서로 통할 수 없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대신과 비변사를 자주 인대(引對)하시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은 말이다. 다만 여가가 없을 뿐이다."

하였다. 자리를 파하고 나갔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99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425면
  • 【분류】
    공업(工業) / 교통(交通) /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 농업-권농(勸農) / 농업-전제(田制) / 물가-운임(運賃) / 물가-물가(物價)

    ○癸未/上御別殿, 引見大臣及備邊司堂上。【入侍領議政柳成龍、知中樞府事鄭琢、左議政李元翼、右議政李德馨、大司憲李憲國、戶曺判(曹) 〔書〕 金睟、吏曺判書洪進、禮曺判書沈喜壽、兵曺判書李恒福、行訓鍊都正崔遠、兵曺參判朴弘老、吏曺參議金弘微、校理申欽、副校理金順命、獻納慶暹、左副承旨李廷龜、注書崔忠元沈諿、奉敎沈詻、待敎任守正。】 上曰: "近緣接待天將, 身且有病, 久未引見。 如有所懷事, 僉陳可也。" 柳成龍曰: "不暇及他, 只以糧餉一事, 群下悶迫。 他無善策, 惟後頭義州之糧, 輸運接濟, 爲當今第一急務, 而民力已竭, 又當農時, 陸運亦難。 雖有些少運來, 除出而用於此處, 其餘則分送兩南, 接濟大兵數千里之外, 萬無及運之勢。 劉提督又將出來, 京倉只有小米二千餘石, 大米則全羅道上送者只七千餘石。 兵異於他兵, 南兵民, 豈知我國至此乎? 若不喫小米, 事尤難處。 假以大米, 參半支給, 而他餘將卒必怨。 臣等每與戶判, 終日言之者此也。" 上曰: "此亦然矣。 嶺南大軍之糧, 其有可繼之勢耶?" 成龍曰: "小臣上年往來, 豈不知之? 當初大兵南下, 嶺南之人, 意謂必勝, 竭力爲之, 庶或小支, 大兵退還之後, 其時所餘之糧, 歷歷可數。 今又大軍下去, 更無繼餉之策。 嶺南無他船運之地, 必自此處運送。 左道則從竹嶺, 右道則從鳥嶺, 可以輸之。 必須數萬石, 輸置忠州, 然後可及運餽, 彼此俱竭, 不知所以爲計。 左道之穀, 曾使李雲龍急輸, 今之所食者必此也。 江原咸鏡所輸及自此運送之外, 無他路, 雖有, 零碎所送。 前者經理往蔚山時, 小臣親見, 一日所放, 一千三百餘石, 萬無支吾之勢, 而其時民以爲, 可以滅賊, 故男女童稚, 皆負戴而去矣, 今則甚難。 右道大丘以下, 皆潰散, 蕩然無人, 尤難接濟。 當初若計糧而送兵, 待其麥熟然後爲計, 則庶或支三四月, 而今則無策。" 李憲國曰: "糧餉一事, 甚爲悶迫。 若遇自南來者, 則必問農事, 全羅一道, 時未播穀, 連山以前, 稍作農, 林川等地, 全不耕作, 大家、世族, 皆已移居, 不特天兵接濟之難, 而哀我蒼生, 皆將盡塡於丘壑矣。 臣又聞黃海之民, 厭於赴戰, 自斷其足, 而圖爲免赴之計, 紀綱蕩然, 民怨已極。 人心至此, 不可收拾。 今之國事, 將不可爲矣。" 上謂金睟曰: "經理方督嶺南之運, 可能繼運乎? 若難則其勢不得不撤兵。 有可支之勢乎?" 金睟曰: "勢將不能支矣。 臣見柳永慶沈友正狀啓, 左道之糧, 可支於五月望前, 右道尤無形狀。 又見金信元宋馹之啓, 一日所運, 不足支一日之放云矣。" 上曰: "然則此間事情, 可稟於經理前矣。" 金睟曰: "經理方銳意討賊, 雖言其事勢之難, 而言必不入其耳矣。" 上曰: "雖不聽, 可以前期言矣。" 金睟曰: "旣爲三度咨文, 而皆不答矣。" 李憲國曰: "將此悶迫之情, 從容以道之, 涕泣以告之, 然猶不聽, 則或移咨, 或呈文可矣。 國將亡矣, 事無可爲。 壬辰之事, 猶有前頭之望, 今則無可爲矣。 老臣不死, 目見今日。" 仍作涕泣狀。 上曰: "運糧而後, 發兵可也。 不料事勢, 先發大兵, 用兵豈如是耶?" 李憲國曰: "事勢則然矣。 然大兵不下, 賊必先動。" 李元翼曰: "邢軍門在時, 請暫留後來兵馬, 以待措置, 而軍門則糧餉非其任矣, 他國事情, 不相管攝, 雖咨請, 不聽矣。" 李德馨曰: "前秋大兵之南下也, 尹承勳猶能措九萬石, 今則民力已竭, 更無所爲。 經理還京之後, 議欲留一萬兵於五處, 一處各留二千, 八九月糧餉措置事, 再三分付, 而厥後議于軍門, 海防道曰: ‘必兵多, 然後防賊’, 仍發兵南送矣。 臣今聞是惟忠永川, 糧餉久絶, 三日不食; 茅國器星州, 亦乏糧, 日不再食云。 大槪在前, 亦慮有此患, 臣再再呈稟, 而今至於此, 勢使然也。 嶺南雖如此, 若忠州之糧多積, 則軍情少安矣。 未得多運, 若至霖潦, 而道路難通, 則後悔何及? 陶通判又移咨督糧, 出僧軍運糧事, 曾有分付, 而竟無形影, 通判以爲慢忽云云。" 上曰: "事勢則然矣, 慢忽亦有之。" 柳成龍曰: "嶺南只有慶州安東豐基寧海盈德若干郡邑, 稍有人力, 義城以下全無人矣。 如此形狀, 天兵亦皆所親見, 勢使然也, 豈盡慢忽之致也?" 金睟曰: "義州之糧, 運到於黃州 鹿沙浦者, 米、太三千石, 而時未運到, 運於助邑浦者, 皆已輸來。 天糧雖積於義州, 尙未登時輸運, 大槪中原則一人專委措置, 故事事便易, 我國則不然, 議論多而成功少矣。 首陽山城有數千石之米, 方督運, 而未知及來否也。" 上曰: "群臣所獻之策, 不用乎? 何以爲之?" 金睟曰: "獻策非新策, 乃前日所爲之策也。" 李德馨曰: "經理每言: ‘如遼陽等處, 則男負女戴, 或以車輛, 晝夜運之, 積峙於義州, 而爾國全不運之。’ 先有怒心, 一朝糧盡, 必有難處之事。 頃以韓孝純不能運糧遞之, 改差崔東立, 經理紀錄出去之日, 曰: ‘何至今不收船載送乎?’ 云。" 金睟曰: "已爲呈文。" 李德馨曰: "呈文亦悶矣。 彼以爲不爲事事, 而只以呈文修飾云。" 李憲國曰: "我國之事, 無遠慮。 往年中原有分付, 使之屯田, 而備邊司皆以爲有弊不可爲, 小臣以爲天朝爲我國欲屯田, 豈可計小弊乎? 賊聞之, 亦以爲天兵有久遠計, 有所畏憚議論多, 不能爲矣。" 上曰: "經理言: ‘漢南居民有欲出牛馬, 運到嶺南。’ 云, 此何言耶?" 金睟曰: "罪則臣當之, 然未知此說之所自出也。" 柳成龍曰: "小臣思之, 廣州之民, 願留沈友正, 欲運米於忠州, 以此來呈於備邊司, 備邊司不許, 故呈於經理衙門, 恐指此而言也。" 沈喜壽曰: "廣州民呈於經理, 經理云: ‘天兵若不保嶺南, 則雖百沈友正, 豈能保廣州乎?’ 云。" 上曰: "似非謂此也。" 李德馨曰: "廣州百姓, 來都監欲呈, 小臣止之, 而其後經理往東大門時, 呈之云。 如是往來之際, 或以運糧事言及, 而有如此說也。 臣欲知言根出處, 問於旗鼓, 則旗旆官等, 妄有所聞, 如是傳言於旗鼓, 而旗鼓自以所聞, 言於經理矣。 經理又言: ‘朝鮮堂上官有捉魚船, 不爲運糧。’ 若此等說, 亦未知何從而聞也。" 金睟曰: "江邊人或言之, 然不近(以)〔似〕 矣。" 洪進曰: "黃海道民情, 尤甚崩潰, 無意於作農, 此陸運之故也。 百姓雖倍出船價, 欲止陸運云。" 柳成龍曰: "陸運必先期待令, 每至留滯。 一運, 費二十餘日, 夫馬困頓, 且往來之際, 必賠出米、豆, 添補其缺, 民之不堪於陸運者, 以此也。 外方之官, 若能善處, 使不如此, 則民必便之。 柳根四月二十三日, 聚船於長淵, 入往義州云。 若能速運, 則必於五月望間, 輸到於京, 一運可至五萬石云。" 上曰: "水運, 不可期以日月矣。" 成龍曰: "今之水手, 似異於前日, 習於行船, 無沈沒之患。 柳根所造之船, 可運五萬石。 限九月風高之前, 可以三運, 若三運, 則可輸十五萬石耳。 自前年五月, 至今四月會計, 則用度之數, 乃至二十二萬石。 以此推之, 則今年大兵之數, 與前年大不同, 運米三十萬石, 然後庶可接濟矣。" 金睟曰: "黃海道所儲, 欲更爲搜探, 上來前爲啓辭矣。" 洪進曰: "凡事, 必須擔當者, 爲能措置得宜。 黃海道運糧之事, 自朝廷未能一一遙度。 必須令本道監司, 條陳上聞, 則必有便宜之策矣。" 上曰: "劉提督分付, 二箇月糧餉, 急急措置云, 可能措耶?" 金睟曰: "以全羅道時存之穀計之, 可支四五十日矣。" 柳成龍曰: "水兵之糧, 措於羅州, 陸兵之糧, 措於全州, 猶有可支之勢, 而然皆分在各處, 零星湊合, 勢極難矣。 且咸鏡南道之穀一萬石, 使送於慶尙道。 此雖出於不得已, 而其處之事, 亦爲可慮。" 金睟曰: "此黃敏中所募之糧也。" 上曰: "朱元禮上來云, 未知此何意耶。" 李德馨曰: "臣朝往經理衙門, 問其南下之意, 則或言: ‘見行長有相議事故欲往。’ 或言: ‘欲見屯田形止。’ 今則已爲停行矣。 朱元禮七八人來, 故送黃應陽, 使之(欄)〔攔〕 阻不送。 彼若誠心講和則許, 不然則當拿送北京云。" 上曰: "然則經理定不往耶? 細知之乎?" 德馨曰: "定不往矣。 前日問晋州事, 臣以都元帥所通之意言之, 則大將神氣, 還不定, 蓋指也。 須待劉提督, 可以議處云。" 上曰: "然則必不擧事矣。" 德馨曰: "昨見提督從容。 必有異論, 故如是言之。" 上曰: "運糧一事, 戶曹當之, 不但議論而已。 但當着實擧行, 不可付之無可奈何。" 柳成龍曰: "多官會議, 別無所爲, 擔當之人, 當爲着實行之。 但今號令不行, 戶曹雖移文於外方, 外方視之尋常, 今日明日遲延過時, 此當今之弊也。 西道之糧, 若能速運, 則可得運至忠州, 自忠州可運於慶尙道。 若多積於忠州, 則天兵進退, 可以接濟, 軍情有所恃而不恐矣。" 李憲國曰: "凡事當付諸有司, 而近來政出多門, 故事不易就。 發言盈庭, 無補於事, 臣竊痛之。 當兵付兵, 戶付戶, 使之各盡其職, 可也。 今則智窮力竭, 不爲之預先措置, 而今乃責之戶曹, 戶曹亦將奈何? 上年間, 大穀甚賤, 一匹綿布, 或直米四十斗。 若於此時, 貿得米豆, 以實倉庾, 則其利不亦博哉? 到今思之, 後悔何及。" 柳成龍曰: "此國家所同憂, 豈獨戶曹之憂也?" 上曰: "劉提督來, 則能擧事否?" 李德馨曰: "若措糧餉, 則必擧事。 然其言, 則似有持難之意。" 李憲國曰: "臣聞邊協之言, 則倭賊於夏月草木茂盛之時, 則隱跡發丸, 未易相戰。 必秋冬木落後, 便於勦滅云, 而往者申砬易言之, 臣知其必敗也。 今時非但草木茂盛, 夏潦將降, 勢難擧事矣。" 德馨曰: "經理久於此地, 我國事勢, 備知之矣。 上年往慶尙道時, 奏於皇朝曰: ‘朝鮮殘破之餘, 尙能措糧, 前後所費, 幾至四萬石云云。’ 皇上必知此間事情矣。" 上曰: "必知之矣。 然經理每以我國爲小誠。 予於接待之際, 必誠必實, 雖些少事, 不容有欺隱也。" 德馨曰: "上敎至當。 經理性快, 每謂我國少誠實也。" 上曰: "將摘奸各官軍餉、器械, 則與文報不同, 必有加數之處, 必以此爲少實也。" 德馨曰: 經理使王來徵, 査看糧餉, 則與宋馹等文報不同, 經理示臣曰: ‘次次相欺, 何無實耶?’" 李廷龜曰: "各處所報之數, 非一時一處之事, 厥後或有增減, 勢不同矣。" 沈喜壽曰: "中國之人, 能於文簿, 我國則不能爲, 必多差錯。" 柳成龍曰: "大數不甚錯, 則其間異同, 勢所必然。" 上曰: "麻提督責辦雜物云, 自其衙門辦出乎? 令戶曹辦出乎? 若軍中所用之物則可矣, 不然則似不可。" 金睟曰: "凡工匠、雜物, 皆令戶曹責辦, 如漆匠、鍮器, 皆爲之。" 上曰: "他將官, 亦有爲之者乎?" 李憲國曰: "梁布政絶不爲此等事, 經理亦不爲之云。" 金睟曰: "邢軍門義州, 大作工役云矣。" 上曰: "經理是善人。 豁達有器量, 有志槪。" 柳成龍曰: "其爲人, 豈偶然哉?" 李德馨曰: "其心虛而急, 故人言易入。 近日雜言, 皆寗國胤所言也。 也有幹能, 故取之, 言必聽之。 吳宗道每言: ‘經理性急, 而寗國胤, 難待之人也, 須善遇之’ 云。 大槪處事之際, 少文雅多率略, 言語之間, 或似無識人矣。 凡事必爛熟相識而爲之可也, 而每有發怒之色, 此甚難處。" 上曰: "性度則不順人也。 然氣質之病, 人孰無之? 度量豁達, 予所見則非常也。" 柳成龍曰: "畢竟成功, 然後可知。" 上曰: "不以成敗, 論英雄。 此則何可一槪論之? 在遼東時, 則頗憂之, 今見之, 不無度量矣。" 柳成龍曰: "大槪來我國做大事, 雖作大段事, 若從而議之則不可。 大抵少縝密底人也。" 上曰: "大槪好人耶?" 李德馨曰: "觀畢竟, 然後可知, 然俠氣多矣, 以意氣自許也。" 上曰: "予言有氣槪、度量者此也。 無識云者, 未知有何所見?" 李廷龜曰: "少儒者氣象矣。" 德馨曰: "分付之事, 我國不能成形, 以此焦心, 或閉門閑坐, 拊膺長嘆, 必以事事漸緩爲悶矣。" 李廷龜曰: "戶部移咨於經理曰: ‘不能催督, 則責有所歸事, 有聖旨。’ 云, 以此爲悶云。" 李憲國曰: "經理云: ‘我必死於此’, 涕泣, 布政亦泣云。" 廷龜曰: "御史別時事也。" 上曰: "醉則醉矣云, 而此言似不好矣。 布政亦泣乎?" 金睟曰: "前見布政接伴, 則家丁告歸, 按察令姑留, 悲愴垂涕云。" 上曰: "李提督敗死云, 未知曲折, 屍身亦不知在處。 或云四月初三日, 或云十三日, 亦未知實報也。" 李德馨曰: "廣寧人到經理衙門, 秘言之曰: ‘曺文煥多斬賊, 而報李提督, 提督卽馳到廣寧, 設敎場閱武之際, 聞賊兵小, 分兵派送, 城外之賊果小, 卽擊破之, 有大勢之賊夜襲, 其後是以大敗’ 云。" 上曰: "何如是急遞耶?" 柳成龍曰: "似是碧蹄用兵。" 上曰: "塞外有虜乎?" 德馨曰: "家丁言: ‘虜數甚少, 卽馳往, 則沙磧山外, 大勢之賊, 伏於山下。’ 戰敗曲折, 渠亦不能細知。 出來之人, 亦狼狽而還, 提督必亂斫死云。" 洪進曰: "弔祭, 必待文報而後爲之。" 李廷龜曰: "禮判今日欲出去, 外論如此, 欲姑徐徐耳。" 上曰: "李提督必不就生擒。 或敗沒走在遠處, 未可知也。" 德馨曰: "中國之人, 性屈强, 必不就擒矣。" 廷龜曰: "雖欲死, 不殺則奈何?" 上曰: "此亦然矣。 李如梅廣寧摠兵云。 其人曾來此地者也。 聖節使入歸時, 修書致問如何?" 鄭琢曰: "好矣, 然似涉私交如何?" 李廷龜曰: "提督(迎)〔之〕 死, 亦及於其中耶?" 上曰: "其事爲不爲間, 揭帖則如何?" 李憲國曰: "許𥕏, 有功於我國者也。 亦無如此之事, 未知如何。" 上曰: "此則異矣。" 柳成龍曰: "人情則當如是。" 上曰: "纔自我國旋歸, 今作摠兵於廣寧。 節使之行, 固不可無心過去也。" 李廷龜曰: "前者李如松爲摠兵, 陳奏使去時, 亦付禮單以送。 此亦相似。" 上曰: "節使旣發行。 須(未)及未越江前, 付送禮物、有旨。 急急下送可也。" 沈喜壽曰: "摠兵承訓, 爲海州衛參將時, 亦送揭帖, 今亦爲之, 似不妨, 但厥兄生死, 尙未的知, 似難措辭。" 柳成龍曰: "不及之, 則彼必以爲不及聞也。 到彼若實然, 則使譯官, 臨時措辭亦便。"

    上曰: "此廣寧之敗, 將官或有走之者。 堂堂天朝尙如此, 況我國乎? 若右多亂, 則我國之事, 尤不幸也。" 柳成龍曰: "臣見咸鏡狀啓, 則南兵使當遞云。 未知何以爲之。" 上曰: "虜勢漸熾, 極可憂也。 南兵使當遞, 但恐未得其當也。 若大勢之賊來犯, 則雖百兵使, 何可當之? 老乙可赤焚蕩諸, 有窺覘作挐之漸。 此非前日尼湯之類, 度地九百里, 與北虜相通, 其衆七千云。 此賊誰可當之? 今之計, 不若將此北虜近日恐嚇之狀, 及藩之作我藩籬凡干曲折, 一一呈稟於經理衙門, 使之馳一介人, 傳檄以諭之, 敎之以義, 懾之以威, 使不敢侵擾於地方, 則庶或可矣。" 李廷龜曰: "咨文, 時方磨勘。" 上曰: "咨中不能悉其曲折, 令接伴使, 詳細陳稟可也。 南兵使遞之, 則誰可合耶? 柳熙緖若不可制敵, 則可速改也。" 金睟曰: "其制敵與否, 未可知也, 士卒甚愛之云。" 鄭琢曰: "士卒愛之則善, 可謂賢將也。" 柳成龍曰: "近來武弁之可用者乏少。 雖在秩卑之中, 擇其可用於戰陣者, 或陞堂上, 擢用似當。 李英雖秩卑, 其人可合於戰陣也。" 上曰: "是何處人?" 成龍曰: "黃州人金太虛, 亦可用武弁也。" 上曰: "此人久在南方, 賊亦知其名, 不可用於他道。 然其年幾何?" 李恒福曰: "年可五十餘也。" 成龍曰: "李守一, 亦可用也。" 金睟曰: "權應銖, 亦勇將也。" 成龍曰: "亦勇士, 臨戰可用, 但持身不謹。" 上曰: "金應瑞罪名曲折, 予不知之。" 成龍曰: "此人不可棄於此時也。" 上曰: "無所領之兵, 無所試其才。 經理前呈稟復職可也。 此時雖卒伍之中, 當拔擢而用之。 如是之人, 宜用於某處, 豈可棄之?" 成龍曰: 大丘中營將, 民之賴此而生者甚多, 又能善御降倭蔚山之戰, 率降倭, 乘夜潛伏於島山城外, 汲水之, 誘之以出, 或四五人, 或六七人, 夜夜如是, 天將亦多奇之。" 上曰: "御甚善, 又能率數十人, 直造賊陣, 每與行長接話而來, 此亦難事。 其勇敢可知也。 應瑞之事, 經理亦已知之, 今可復其職而用之。" 李憲國曰: "兩南守令, 人皆厭赴, 雖罪之, 亦不畏之。" 洪進曰: "尙州牧使黃克中, 病雖深重, 而不敢言病, 目亦不明, 勢當遞差, 而吏曹不欲開端。 一開其端, 則人皆稱病而圖免, 故姑勿許改。 然克中勢難强送矣。" 李憲國曰: "紀綱蕩然, 人不樂仕, 西北地方, 爭爲避亂之所。 宰相亦不來仕, 文官皆退在鄕曲, 雖或爲臺侍, 屢次下諭, 而亦不趁來, 尤爲痛心。" 鄭琢曰: "爵祿可辭, 豈此之謂乎? 其在平時, 雖賞之, 無退去者, 當此危急之日, 雖罪之, 猶退去, 此可以觀世變也。" 上曰: "經理接伴使, 右相仍爲之乎? 經理若不許改, 則奈何? 副使何不差出乎?" 沈喜壽曰: "近日使金睟伺候, 而大人不肯之, 故使李恒福, 爲伺候者數日矣。 李德馨入相, 故不出副使矣。" 上曰: "島山內城之制如何?" 柳成龍曰: "非內城也。 孤山有兩層, 如覆銅盆之狀, 勢不高峻, 如造山, 然設木柵而其上築城, 是謂內城。 雖云三匝而實二匝也。" 李德馨曰: "因地形築二匝, 臣周見其三面, 則以石築之, 出穴上下, 皆能放砲。 百步之內, 發丸如雨。 陳寅快入欲拔, 而數百人中丸而死, 故不能拔。" 上曰: "大砲不能觸破其穴耶?" 德馨曰: "未得近前而放, 故遠莫能破也。 城隍堂之下, 是海也。 鋪幕星羅, 以至於島山淸正初在城隍堂, 李如梅之拔城隍堂也, 土窟、鋪幕, 一時盡焚, 斬級不知其數, 淸正窮蹙入島山。 臣使軍官追見, 則大華江近處, 賊幕亦盡焚燒。 茅國器軍士, 率我國砲手八人, 入島山城門而還出曰: ‘(人)〔入〕 則被殺’ 云。 臣上島山對峯望見, 則經理督戰甚急, 倭賊亦蒼皇防禦, 相戰良久, 有一持白旗出來, 揷於東門之邊, 勿令放砲。 經理謂之必有奸計, 而猶不(正)〔止〕 戰, 久不能拔。 經理使之少退, 翌日欲更攻, 而人多傷死, 不得攻矣。 以生松木, 爲三層木柵, 火箭亦不能盡燒矣。" 上曰: "今番兵力, 比平壤時何如?" 德馨曰: "尤盛矣。" 上曰: "然則何以不能攻耶?" 德馨曰: "島山形勢(此)〔比〕 平壤, 尤難拔矣。" 上曰: "城中有水乎?" 德馨曰: "無之。 初不能炊飯, 而連日下雨, 故得以炊食。" 上曰: "城外有水乎?" 德馨曰: "城底有二井, 使金應瑞塡之, 而猶來汲。" 上曰: "其底, 唐兵不能近乎?" 曰: "唐兵則不能近, 而令應瑞潛往, 誘引兵, 盡奪之。" 上曰: "淸正送書, 有講和之意云, 然耶?" 曰: "經理移檄曰: ‘天朝大將提兵十萬以來。 爾可出降’ 云, 則淸正以爲: ‘當依命, 而須待能文之僧, 自西生出來, 然後可爲’ 云, 金大夫出語於朴大根矣。" 上曰: "淸正之城好耶? 比我國之城何如?" 李憲國曰: "我國之城, 不足言矣。" 李德馨曰: "今番之事, 彼賊無謀。 若使一枝兵, 絶其糧道, 則彼必束手無所爲矣。" 上曰: "賊衆幾何?" 曰: "不過二三千矣。" 上曰: "野戰必不如天兵矣。" 柳成龍曰: "雖曰野戰, 林藪隱密之地, 則難矣。" 李憲國曰: "天兵能進, 是爲貴矣。" 柳成龍曰: "今番則我國之人, 亦勇戰云。" 李德馨曰: "今番訓鍊都監之軍, 唐將亦皆稱讚。 李仁男捕一, 得其甲, 則刻之曰: ‘謀猷帷幄中, 決勝千里外。’" 成龍曰: "我國之軍, 雖不能訓鍊, 而馳馬、弓矢等技, 皆所長。" 李憲國曰: " 太宗亦敗歸。 我國之軍, 不可謂之劣也。" 上曰: "李勣, 亦敗於平壤。 兵者勢(行)〔而〕 已。" 李德馨曰: "國事至此, 紀綱蕩然, 雖庶官、百執事, 不可不擇人而用之, 況相臣乎? 如臣無似, 何敢一日冒居? 人莫不爲臣怪之。 臣前後受恩, 雖死何惜? 屢將悶迫下情, 達於天聽, 而反蒙嚴敎, 强顔出仕, 進退憂惶, 罔知所措。 先朝申叔舟, 未四十爲相, 時人猶且怪之。 臣才不逮而年又少, 豈宜居此位乎? 危悶之情, 不敢盡達。 亟命遞改, 更擇耆德之人, 以振垂亡之勢。" 上曰: "勿爲辭避, 更宜拯濟國事。" 李憲國曰: "王獄罪人, 相繼逃躱, 此緣無紀綱而然也。" 上曰: "禁府堂上之言乎? 其人等, 旣以此事見罷。 今又罷之, 事體未安。" 憲國曰: "國家設官分職, 自有等級, 官爵不可濫施。 成以文請改正。" 上曰: "以文旣爲行公, 以出身未久之故, 改之亦未安。" 李元翼曰: "前上箚字, 以速出之意下敎, 惶恐不敢更辭, 黽勉出仕, 極爲狼狽。 經理非如他將官之比, 受帝命, 經理我國, 不但料理軍務而已, 如黜陟、進退, 亦當知之。 指斥小臣, 非是偶然, 臣豈敢晏然而行公乎?" 上曰: "謂揭帖事乎? 豈必指左相乎?" 元翼曰: "臣在嶺南時, 經理差官來問某何在, 臣方病時, 不知之。 旣歇始聞之, 通事輩以吐血言之。 今揭帖中所謂血病云者, 指臣也。" 上曰: "大槪未知此事矣。 經理差官, 以左相爲吐血病, 告於經理云乎?" 李德馨曰: "其時甯國胤之報, 以爲金應瑞交通倭賊, 李元翼不知去處, 經理問於臣。 適有軍官, 纔自慶尙道, 來傳(經理)〔元翼〕病重, 經理差備通事表憲, 以吐血證告之。 今番之事, 必擧此而言之。" 元翼曰: "寗國胤之所報, 豈非臣之所自誤乎? 其時宣傳官急急持有旨下去, 臣開見則曰: ‘經理差送寗都司, 不必盡從其言’ 云。 意謂經理必欲執進退、黜陟之權, 故朝廷有此命也。 不久, 也入來, 雖或可從之事, 亦不肯從, 至於軍機之事, 亦不聽從, 之如此, 固然矣。 臣在病時, 與柳成龍每言: ‘此時如風波覆舟之勢, 豈敢有他意? 惟當死而後已。’ 今經理揭帖中金睟事, 則以戴罪理餉回報, 臣則無處置之事。 頃者領相在告, 左相闕位, 小臣獨在, 至如咨文等事, 臣獨當之, 唐人以爲獨執朝權。 小臣雖曰無廉恥, 此則固不足恤, 如此而尙未處置, 非但情事悶迫, 其於待經理之道, 亦甚未安。 或往衙門, 人皆指點, 不得出頭。 今日欲自處, 而適有召命, 未敢耳。" 上曰: "此時以天將如此之言, 不欲行公, 則行公者幾人? 左相只爲國事, 勿以爲嫌。" 元翼曰: "經理久駐於此, 凡有號令, 莫不聽從, 獨於此事不答, 非但於臣未安, 恐累及也。 以身當國事, 死亦不辭, 仍帶職名則未安。" 柳成龍曰: "臣亦前日屢達矣。 大槪經理見我國之事, 一無所成, 以爲改相。 臣則猶(可)〔以〕 爲此言誠是。 此時則進有一死, 退無所歸, 不可爲小嫌, 而經理以大臣未得人, 以致如此爲心, 臣心亦以爲他人爲之, 則事或可爲也。 經理之意, 旣如彼, 仍致轉奏於天朝, 畢竟以爲用人失當致此云爾, 則累及於君父者多矣。 今則下之辭避, 異於常時, 上之處置, 亦異於常時。 彼意如許, 而不從, 則恐有後悔。" 上厲聲曰: "大臣三人一時辭避, 國事豈可爲乎? 事體亦未穩。 若以指斥而遞之, 則明日未知指斥何人。 宰相必無完全者, 豈皆退乎?" 經理衙門有匿名書云。 唐人或我國人未知其誰爲也, 若我國人爲之, 則必奸人不得志者所爲也。 以尹承勳, 爲許割地。 何敢爲此言乎?" 柳成龍曰: "此亦然矣, 小臣之事, 比此尤慘。 書跡似是秀才之書云, 李德馨言之矣。" 上曰: "亦付於經理衙門乎?" 李德馨曰: "有唐人謂臣曰: ‘有可駭事。 忠州西門, 有書領議政姓名, 數八罪, 馬醫持來, 與劉正倫見之, 語多胡亂故焚之。’ 臣問以何事, 則曰: ‘不能記得, 而頃與倭賊交通云云。’" 上曰: "唐人所書乎? 我國人所爲乎? 唐人、我國人書跡, 分別甚易。" 德馨曰: "秀才所書云。" 成龍曰: "必是我國人所爲。 唐人豈必如此?" 上曰: "如此事不足數, 亦不可傳也。 人心不祥矣。" 李憲國曰: "何足〔掛〕 齒牙間?" 金睟曰: "大臣辭避, 小臣亦以此啓達, 極知未安, 而臣性素緩, 運糧諸事, 不能措置。 經理旣以此事, 爲揭帖外方, 請臣必遞。 不從號令, 事不可爲矣。" 上曰: "判書則彼謂運糧似緩, 故如是言之, 何必嫌乎?" 柳成龍曰: "職任間事, 雖一日屢責, 何關?" 李廷龜曰: "船運方急, 公私船隻, 盡數搜括, 則船隻不爲不多。 若以唐糧, 量給其價, 則有船者不至失業, 而格軍亦有資生之路, 必不如前日之冤抑。 所費者小, 而所運者多矣。 前見柳根公事, 亦欲如是爲之。 稟於經理, 急速爲之似當。" 柳成龍曰: "柳根盡心爲之。 非柳根則難矣。" 上曰: "陸運停止乎?" 金睟曰: "姑停之, 芒種後當更爲之。 不得善爲, 人多留滯。 且其處官員, 以不可陸運定之, 旣已緩心, 不可說也。" 李憲國曰: "以經理南下之故, 夫馬久爲待候。 其行若停, 則不可不速爲放送。" 上曰: "右相必知其停行, 斯速下諭。 都元帥若領兵待候, 則豈不虛疎? 竝可下諭。" 慶暹曰: "臣聞於原州都事, 募粟民間, 得二十餘石。 御史又下去, 無可募之策, 分付守令, 使之募聚。 守令不得已以都事〔所募〕 , 除出報之。 募粟官又令如此, 守令亦不得已, 又以都事所募報之。 以此見之, 實無其效, 而廚傳有弊。 凡事得人而已, 官不須多。 請除不急之行, 以祛民間萬一之弊。" 柳成龍曰: "已除之矣。" 上曰: "有更減者乎? 此則備邊司、戶曹之事, 察爲。" 慶暹曰: "嶺南亦多官員矣。" 金睟曰: "此謂御史矣, 此則經理盡知之矣。" 上曰: "可減者有之則減之, 無之則不須減也。 量爲。" 慶暹曰: "近來緣接待天將, 擧動頻數, 上體亦必勤勞。 然久廢引接, 上下情意不能通之。 大臣及備邊司, 頻頻引對, 則必補益矣。" 上曰: "此言是矣, 但無暇矣。" 乃罷黜。


    • 【태백산사고본】 63책 99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425면
    • 【분류】
      공업(工業) / 교통(交通) /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 농업-권농(勸農) / 농업-전제(田制) / 물가-운임(運賃) / 물가-물가(物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