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가 경상도에 군량을 보낼 대책에 대해 이야기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도(慶尙道)에 분파(分派)된 중국군의 수가 거의 4만 명에 달하고 있는데, 현재 군량이 거의 동이나 며칠 밖에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니, 사기(事機)가 급박하여 몹시 민망합니다. 좌도(左道)는 강원(江原)·함경(咸鏡)에서 운송할 군량이 쌀과 콩 합하여 2만 5천여 석이 있고, 또 뱃길이 닿으므로 해운(海運)이 어렵기는 하여도 그런 대로 이어갈 대책이 있지마는, 우도(右道)는 군량을 이어댈 길이 백계 무책입니다. 그곳은 다만 충주(忠州) 길을 통하여 경창(京倉)의 쌀을 배로 운반하는 도리 밖에 없는데, 경강(京江)의 선척(船隻)은 수가 적어 한 차례 운반이래야 겨우 1천 2백 석 정도여서 대병력에게 1∼2차 지방(支放)하는 데에 불과하고, 영로(嶺路)의 육운(陸運)은 수운(水運)보다도 더 어려워서 부마(夫馬)와 선척이 갔다가 돌아오고 또 올라오고 하는 사이에 날짜가 차질이 나기 쉽기 때문에 제때에 군전(軍前)까지 운송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운반 수단으로 수만 병마의 보급을 대어 군량이 떨어짐이 없기를 바란다면 이는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만약 제도(諸道)를 통하여 접제(接濟)할 방법을 다방면으로 강구하지 않으면 본도(本道)로서는 다시 어찌해 볼 길이 없습니다.
충청도 금강(錦江) 일대의 물이 위로는 형강(荊江)과 연결이 되고 아래로는 바다에 닿아 있어 조운(漕運)할 수가 있는데, 물이 많을 때면 형강 이상까지 올라갈 수 있고 물이 얕더라도 연기(燕岐)까지는 댈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경상도 초입인 금산(金山) 지방까지는 수삼일(數三日) 일정에 불과하고 길도 그리 험준하지는 않아, 조령(鳥嶺)에 비하면 자못 편리하고 가깝습니다. 그러니 강화(江華) 이남의 독운 어사(督運御史)로 하여금 급히 해선(海船)을 이용하여 당량(唐糧)을 싣고 금강 하류에 배를 대게 하고, 그와는 별도로 충청도로 하여금 따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밑이 평평한 작은 배들을 많이 준비하였다가 해선이 도착하는 즉시 그 배에다 옮겨 싣고 물의 천심(淺深)에 따라서 연기·문의(文義)·영동(永同) 지방으로 운송하게 하며, 그곳에서는 부근 각 고을의 부마(夫馬)를 집결시켜 다시 우도의 군전(軍前)까지 운반하게 하면, 비록 대대적으로 접향(接餉)은 못한다 하더라도 충주 길로 운반하다가 미처 대지 못하는 것을 다소 보충할 수 있어 편리할 것 같으니,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그러고도 부족할 경우에는 전라도에 분파된 중국군은 그 수가 경상도와 같이 많지 않고 저장된 군량도 아직 6∼7만여 석이 있다고 하는데, 전주(全州)에서 경상도까지는 길도 그리 멀지 않습니다. 부득이 전주 근처의 군량을 덜어 내어 당장 시급한 경상도부터 먼저 구제하고 덜어낸 분량은 하도(下道)의 곡식을 옮겨다 보충하게 하며, 충청도에서도 현재 물가에 쌓아둔 운량(運糧)을 덜어 내어 우선 운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모으는 것이 매우 불편한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일이 더 버틸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실행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 윤승훈(尹承勳)이 걱정하기를 그 당시 며칠 분의 식량 밖에 없다고 하였는데, 그가 치계(馳啓)한 후 이미 10여 일이 지났으니 그곳 사정이 아마 그 동안 또 달라졌을 것이어서 지금 이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경상도라는 곳은 적이 있는 곳이어서 적이 물러가기 전에는 군량 운반 문제를 하루라도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실정이므로, 이번에 미처 대지 못했다 하여 영영 그만둘 수는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니 이상 몇 가지 문제를 들어 별도로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도원수와 충청·전라·경상도의 감사(監司) 총관(摠管)에게 하유하여 분호조 당상(分戶曹堂上)·독운 어사·조도사(調度使)로 하여금 서둘러 거행하게 하는 한편, 호조에서는 중국에서 온 군량(軍糧)을 강화(江華)로 나누어 보내어 강화 이남 독운 어사로 하여금 서둘러 배에 싣고 금강에다 대도록 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되도록 서로 협력하여 네 소관 내 소관을 따지지 말고 피차 일체가 되어 공동 노력을 함으로써,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백년 대계를 무사히 성사시킬 수 있도록 아울러 당부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99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411면
- 【분류】외교-명(明) / 군사-병참(兵站) / 교통(交通) / 재정-창고(倉庫) / 과학-지학(地學)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備邊司啓曰: "慶尙道派分天兵之數, 幾至四萬員名, 而見糧垂竭, 不足支數日云, 事機之急, 極爲悶迫。 左道則江原、咸鏡當運之糧, 猶有米豆二萬五千餘石, 且有船路, 海運雖艱, 亦有可繼之策, 唯右道繼餉, 百計無策。 只靠忠州一路船運京倉之米, 而京江船隻數少, 一次所運, 僅一千二百石, 不過大兵一二次支放, 而嶺路陸運, 又難於水運, 夫馬、船隻往返上來之間, 時月易蹉, 不克趁時運到軍前。 以此欲望接濟數萬兵馬, 無乏軍興, 其勢極難。 若不多般講究, 數道接濟, 自本道更無可爲之路。 忠淸道 錦江一帶之水, 上連荊江, 下接海口, 可通漕運, 水多則可達荊江以上, 水淺猶可至燕歧。 自此抵慶尙初面金山地方, 不過數三日程, 而路且不甚險峻, 比鳥嶺, 頗便近。 令江華以南督運御史, 急用海船, 裝載唐糧, 回泊于錦江下流, 別令忠淸道, 別定差使員, 多備平底小船, 等候海船到日, 卽時替載, 隨水淺深, 運到燕歧、文義、永同地方, 集附近各官夫馬, 輸到右道軍前, 雖不能大勢接餉, 可以補助忠州運路不及之虞, 似爲便益。 依此爲之, 猶或不給, 則全羅道派分唐兵, 不至於慶尙之多, 而糧儲之數, 尙有六七萬餘石云, 自全州至慶尙地方, 路亦不遠, 不得已姑除全州近處糧餉, 先救慶尙目前之急, 而其數以下道之穀, 那移充之, 忠淸道亦爲除出水邊見在運糧, 一邊先爲運送。 如此拮据湊合, 勢極非便, 而事到十分地頭, 諉爲難行, 而不爲之措處, 則更無可爲之地。 且尹承勳所憂, 政在數三日糧, 馳啓之後, 已過十數日, 彼中事情, 想已變遷。 如是爲之, 必未相及, 然慶尙一道, 係是賊在之地, 此賊未退之前, 糧運之憂, 不可一日而小緩, 不可以今番不及, 而遂止不爲也。 以此數項, 別遣宣傳官, 下諭於都元帥及忠淸、全羅、慶尙監司總管, 使分戶曹堂上、督運御史、調度使, 使之急急擧行, 一邊令戶曹, 分西來唐糧, 派流江華, 而使江華以南督運御史, 急速裝運, 回泊錦江, 且以務要協計合力, 勿爲此疆彼界之別, 一體勉力, 共濟大計之急, 竝爲申飭何如?" 傳曰: "依啓。"
- 【태백산사고본】 63책 99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411면
- 【분류】외교-명(明) / 군사-병참(兵站) / 교통(交通) / 재정-창고(倉庫) / 과학-지학(地學)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