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96권, 선조 31년 1월 20일 병오 5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유격 진인을 만나 적과의 전투 상황 및 이길 계책을 논의하다

상이 진 유격(陳遊擊) 【진인(陳寅). 】 관사에 행행하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방(小邦) 때문에 풍설이 몰아치는 먼길을 와 직접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중상(重傷)을 입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하니, 유격이 답하기를,

"지난해 울산(蔚山) 싸움에서는 12월 23일 기병(騎兵)이 먼저 도착하여 울산성의 외부 방책을 격파하였고, 다음날 제가 보병(步兵)을 거느리고 안에 있는 목책(木柵) 세 겹을 격파하여 석굴(石窟)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성이 견고하여 공격해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므로 풀을 쌓아 태우려고 사람마다 한 단씩을 가지고 오르는데 총탄이 비처럼 쏟아져 가까이 가는 자마다 총을 맞고 넘어졌기 때문에 감히 성에 다가가는 자가 없었습니다. 대포(大砲)로 격파하려고 하였으나 성이 높아 쳐다보 아야 하는 형세라서 기예를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양(楊)021) ·마(麻)022) 두 분에게 ‘오늘의 형세는 경솔히 거사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서서히 대군(大軍)이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한번에 짓밟아버리자.’ 하니, 경리(經理)가 ‘외성(外城)을 공격할 때에 그대가 가장 먼저 성에 올라 갔었으니 그대가 거느린 군사들의 용감함이 제군(諸軍)의 으뜸이다. 빨리 공격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라.’ 하였습니다. 제가 드디어 손바닥에 침을 뱉고 예기(銳氣)를 떨치고 용기를 분발하여 먼저 성에 올랐는데, 적의 탄환을 이[齒]에 맞았어도 조금도 두려운 마음이 없이 더욱 사졸들을 격려하여 독수리와 새매처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탄환이 또 넓적다리에 맞았으므로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에서 드디어 물러났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싸움에서 위세와 명성이 사해에 떨쳤으니, 청적(淸賊)이 요행히 죽음을 면하였으나 적도들이 모두 혼백이 나가버려 앞으로의 싸움에는 반드시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끝낼 것이외다. 소방의 재조(再造)는 모두가 황상(皇上)의 은혜이외다. 대인(大人)도 소방의 일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시석(失石)을 무릅쓰다가 몸에 상처까지 입었으니, 감격스럽고 미안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소이다."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이 일은 분수내의 일인 것으로 위로받을 일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 안동(安東)에 도착하였을 때 고을 수령이 왜적의 진영에다 곡식을 운반해주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여겨 의심하였는데 울산을 격파한 뒤 왜적들의 군량을 보니 모두가 왜적의 토산(土産) 쌀이었고 조선의 쌀은 없었으므로 비로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제가 행군하면서 오르내릴 적에 그 수령이 있는 힘을 다하여 지공하였고 또 구료(救療)에도 성의를 다하였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신하들이 어찌 적에게 양식을 가져다 주는 일이 있겠소이까. 그럴 리가 없소이다. 오늘날의 싸움에서 대인이 적세를 자세히 보았으니 아시겠지만 어렵겠소이까, 쉽겠소이까? 앞으로 어떤 계책으로 대응해야 하겠소이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저 적들은 두려워할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단지 굴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공격하기가 쉽지 않은 것뿐입니다. 만약 평평한 들판으로 나온다면 경기(輕騎)와 철마(鐵馬)로 사면에서 공격하고 매서운 포격과 예리한 칼로 휘돌아 몰아치면서 풀베듯 하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제가 울산을 포위하고 있을 때 청적(淸賊)에게 전하기를 ‘네가 장기(長技)가 있다면 마땅히 나와서 함께 싸울 것이지 어찌 굴속에 숨어만 있는가?’ 하였으나 적은 끝내 겁을 먹고 숨어서 한 발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기세가 위축되고 힘이 모자라서였던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듣기로는 조선의 병마(兵馬)는 겁이 많아 쓸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번 전쟁터에서 시험해 보니 매우 날쌔고 용맹스러워 참으로 굳센 병사였습니다.

단지 그들을 올바른 방법으로 쓰지 못하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힘을 다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중국에서 병사를 쓸 때에는 병사가 적의 수급 하나를 베면 은(銀) 60냥을 상으로 주고 또 벼슬까지 주어 포상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무슨 상을 주고 무슨 벼슬로 표창하는지 모르겠지만, 갈 때는 짐을 지고 멈추면 밥을 하여 온갖 수고를 다하면서 편안히 쉬는 것을 보지 못하겠으니,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사기(士氣)를 고무시켜 사지(死地)로 기꺼이 뛰어들고 용기를 분발하여 먼저 나가게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조선의 전체 군사를 모두 뽑아낸다면 그 숫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팔도(八道)의 병사를 당초 모두 뽑아내었는데 전쟁에서 많이 죽어 남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소이다. 그런데다가 이제 또 울산의 싸움에서 정예병들이 모두 죽어서 남은 사람이 거의 없소이다."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조선 군사 1만에 천병(天兵) 1만을 증가시켜 제가 장수가 되어 거느리고 요해처에 주둔하면서 일이 없을 때는 훈련도 시키고 둔전(屯田)도 하며, 일이 있을 때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서서히 시세(時勢)를 보아 도모할 것 같으면 적을 섬멸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즉시 거행하고 싶지만 조선에 군량이 없어 뒤를 댈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이 사람의 의견은 대개 둔전하면서 지구책을 쓰려는 것인 듯하다. 나도 일찍이 이 계책을 정원에 전교한 적이 있다."

하니, 좌부승지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지난번 울산에서 접전(接戰)할 때 양(楊)·마(麻) 두 대인이 모두 우리 토병(土兵)들이 싸움을 잘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들이 석굴(石窟)을 공격할 때 몸을 가리는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싸웠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중국인들은 별로 몸을 가리는 물건도 없이 맨몸으로 철환(鐵丸)에 맞섰기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이른바 육신으로 예리한 칼을 끊으려는 것과 같은 짓이다. 몸을 가리는 물건도 없이 견고한 성 아래로 몰려갔으니 어떻게 태산으로 계란을 깨뜨리는 형세를 초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유격이 말하기를,

"조선낭선(筤筅)023) 이나 모창(矛槍)과 같은 무기(武器)가 있습니까? 이런 무기를 가지고 차례로 행군하면 앞뒤가 서로 이어지고 완급(緩急)이 중도를 얻게 되어 적을 만나도 흩어지지 않고 적을 공격함에도 쉽게 꺾을 수가 있습니다. 국왕께서 시험삼아 5천 명을 나에게 맡겨주시면 내가 그들을 훈련시켜 그 무기를 쓸 수 있게 하고 일이 끝난 뒤에는 역시 5천 명을 돌려드리되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게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본토의 병사를 중국군의 숫자에 덧붙여 둔전도 하고 조련도 시키는 등 장구책을 세워야 합니다. 당초 양· 두 대인이 내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일을 그르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인이 소방을 위하여 둔전도 하고 조련도 하면서 오래 머무를 계책을 세우는 것은 실로 훌륭한 방안이며 실로 원대한 생각이외다. 매우 감사하외다."

하였다. 상이 다례(茶禮)를 행하기를 청하였다. 유격이 말하기를,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병사들은 약간 강하지만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군사는 그렇게 정예롭지 않습니다. 잇따라 배로 와서 구원할 때 우리 군대의 뒤를 포위하려고 진격하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면서 언덕에 오를 기세를 취했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대포로 적선 1척을 쏘아 격침시켰으나 적이 그래도 물러가지 않기에 또 1척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2척을 계속 격파하자 적이 물러나 도망쳤는데, 다시는 언덕에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적이 나르듯이 건너올 용기와 죽을 힘을 다할 능력이 있었다면 어찌 3척의 배가 격파되었다고 후퇴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보아 적들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비록 조선군들이 도망을 잘 친다고는 하지만 북병(北兵)도 무너져 도망치는 것이 조선군보다 더욱 심합니다. 거기에다 촌락(村落)들에 소란을 일으켜 피해를 줌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으니, 조선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불쌍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중국 군사는 본래 조선을 구원하러 온 것인데 도리어 조선을 소란하게 만들어 이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구원한다는 뜻이 어디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인께서 소방을 위해 우려하는 것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에 드러남이 이와 같으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소이다."

하였다. 유격이 말하기를,

"종이를 얻어 납의(衲衣)를 만들어 우리 군사들에게 주어 전장에서 쓰고자 합니다.

휴지를 막론하고 팔도(八道)에 널리 구하여 쓰기에 넉넉하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르,

"종이로 옷을 만들면 총탄을 막을 수 있소이까?"

하자, 유격이 말하기를,

"매우 좋습니다."

하고, 이어서 종이로 만든 갑옷을 내어보이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만들어 입으면 크고 작은 탄환이 모두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물에 적셔서 입으면 탄환을 막는 데 더욱 신묘한 효과가 있습니다. 옷을 만드는 방법은 먼저 종이를 두텁게 깔고 삼승포(三升布)를 안팎에 붙이고 종이로 만든 노끈을 둥글게 맺어서 개암[榛子] 열매 정도의 크기나 밤 크기로 만들어 빽빽하게 서로 붙게 하여 노끈으로 꿰어서 옷안에 매달면 되는 것입니다. 설면자(雪綿子)를 종이 사이에 깔면 더욱 신묘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후일 왜적을 방비하는 계책은 성을 공격할 필요가 없이 그들이 성을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습격한다면 이기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17∼18세 때부터 왜적을 토벌하는 일에 종사하여 이제 40여 년에 이르렀으니, 어찌 왜적의 설정을 모르겠습니까. 왜적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인께서 일찍이 척 총병(戚摠兵)의 군중에 소속되어 있었소이까?"

하니, 유격이 답하기를,

"척계광(戚繼光) 때에는 제 나이가 어려서 종군(從軍)하지 못했습니다. 유정(劉綎)의 부친 유현(劉顯)과 함께 종사하였으며, 또한 여대유(余大猷)와 함께 전진(戰陣)에서 동행하였습니다. 여공(余公)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로 당시 사람들이 극찬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왜적들이 만약 절강(浙江)을 침략한다면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절강의 병사들이 전투에 용감하여 앞을 다투어 적을 죽이면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병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급한 사태가 벌어지면 곧바로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격하는 것을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인이 울산을 공격할 때 용맹은 삼군(三軍)을 격동시켰고 의지는 만부(萬夫)의 피를 끊게 하였으며, 한번 소리를 지르면 먼저 성에 오르자 모든 적들이 기세가 꺾였다 하니 소방 사람들이 모두 대인의 웅풍(雄風)에 감복하고 있소이다."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안동영천(榮川) 두 고을의 수령은 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의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그들의 공이 가장 크니, 반드시 상전(賞典)을 베풀어 그들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통사(通事) 오정복(吳廷福)은 행차를 따라다니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접반관(接伴官)도 언제나 좌우에 있었으며, 초관(哨官) 등도 있는 힘을 다해 생사를 함께 하였으니, 역시 상을 주어 권장해서 그 수고에 보답하시기 바랍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겠소이다."

하였다. 유격이 말하기를,

"영천의 유생(儒生)들은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직접 군량을 짊어지고 운반하였으니, 영천은 어떤 고장이길래 수령도 그렇게 훌륭하며 백성들도 그렇게 훌륭합니까. 제가 탄환을 맞고 돌아왔을 때 어른들이 와서 위문했을 뿐만 아니라 나이 어린 유사(儒士)들까지 와서 마음 아파하였으니, 실로 가상합니다. 또 도성(都城) 동문(東門)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관사가 있어 투숙하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서로 맞아다가 접대하면서 ‘천조(天朝)의 대인(大人)이 상처를 입고 왔다.’ 하면서 힘을 다해 후대하였으니, 이는 모두 국왕의 융숭한 뜻을 체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방이 대접을 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지 못하여 상하(上下)가 걱정하고 있는데 대인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매우 감사하오."

하였다. 유격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인후한 풍속을 일일이 국왕께 알려드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훌륭한 사람들이 있는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청하기를,

"심기가 피곤하니 주례(酒禮)를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처난 곳이 걱정스러워 감히 억지로 권하지 못하겠소이다."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제가 돌아오는 도중에 여러 차례 옷을 보내주셨는데,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예단(禮單)을 증정하고 서로 인사한 뒤에 나왔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67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 / 농업-전제(田制) / 교통-마정(馬政) / 의생활(衣生活)

  • [註 021]
    양(楊) : 양호(楊鎬).
  • [註 022]
    마(麻) : 마귀(麻貴).
  • [註 023]
    낭선(筤筅) : 낭선(狼筅)이라고도 쓰는 병장기의 일종. 길이가 1장 5∼6척 되는 대모죽(大毛竹) 끝에 한자 정도의 칼날을 달고 중간 중간에 꼬챙이를 붙여서 적을 막는 병기임.

○上幸陳遊擊 【寅。】 館處, 接見。 上曰: "以小邦之故, 風雪遠路, 親冒矢石, 以致重傷, 不知所言。" 遊擊曰: "上年蔚山之役也, 至十二月二十三日, 騎兵先到, 攻破蔚山外柵; 翌日俺領步兵, 共破內木柵三重, 至石窟下。 城堅攻之未易下, 欲以積草而焚之, 人持一束而上, 銃丸如雨, 近者輒倒, 無敢撲城者。 欲以大碗撞破, 而城高勢仰, 不得施技。 俺謂兩爺曰: ‘看今日之勢, 似難輕擧。 徐竢大軍齊到, 一擧而蹂躪之。’ 經理曰: ‘當攻外城之時, 汝旣先登。 汝軍之勇健, 冠於諸軍, 須急攻勿失也。’ 俺遂唾掌奮銳, 賈勇先登, 賊丸中齒, 而小無怖心, 益勵士卒, 鷹揚鶻擊, 而丸又中腿, 隔於超距, 遂乃退步。 思之至今, 不勝忸怩。" 上曰: "往者之役, 威聲振海, 賊雖幸免死, 賊徒皆已禘魄。 將來之役, 必不血刃而罷。 小邦之再造, 秋毫皆皇上之恩, 而大人且以小邦之故, 冒萬死衝矢石, 致傷膚體, 不勝感激未安之至。" 遊擊曰: "是乃分內事, 不須致慰。 俺初到安東, 聞邑主輸穀於營, 以爲實然而疑之, 攻破蔚山之後, 見其糧, 皆是賊土山稻, 而無朝鮮之米, 始覺其非實也。 俺行軍上下時, 厥倅盡力支供, 且其救療, 極其誠意, 甚可嘉也。" 上曰: "我國人臣, 豈有齎糧於盜者? 無是理也。 今日之役, 大人詳看賊勢, 未知難耶, 易耶? 前頭之事, 以何策而應之?" 遊擊曰: "彼賊不足畏也, 不足慮也。 只以入據窟中, 故攻之未易也。 若出於平原曠野, 則以輕騎、鐵馬, 四面衝之, 烈砲利刃, 回薄驅之, 芟之刈之, 有如薙草而無難矣。 故俺方圍蔚山之時, 送言於賊曰: ‘汝有長技, 則當與我出戰, 何潛伏一窟中爲?’ 賊終慴伏, 不敢出一步, 彼其勢蹙力屈故也。" 且曰: "俺曾聞朝鮮兵馬, 怯懦無用, 今試於戰場, 則甚銳且勇, 眞勁卒也。 但用之不得其道, 故不致力於戎陣之間矣。 夫中原之用兵也, 士斬一級, 則賞以銀六十兩, 且加爵命而寵褒之。 未知朝鮮用何賞褒何爵? 行則負擔, 止則炊飯, 勞苦百狀, 未見安逸, 其何以鼓舞士氣, 樂赴死地而賈勇先登乎?" 且曰: "環朝鮮一國, 括出兵額, 則其數幾何?" 上曰: "八道之兵, 當初盡括, 多死於干戈, 餘存者不敷。 而今又蔚山之役, 精銳盡殲, 餘者無幾矣。" 遊擊曰: "以朝鮮兵一萬, 添天兵一萬, 俺爲師帥而屯於要害, 無事則或鍊習或屯田, 有事則防禦其衝突, 徐看時勢而圖之, 賊無不勝。 今雖欲卽爲更擧, 朝鮮無糧餉以繼, 奈何?"上顧謂承旨曰: 觀此意思, 蓋欲屯田持久之計也。 予曾以此計, 傳敎於政院矣。" 左副承旨鄭經世啓曰: "曩在蔚山接戰之日, 兩大人, 皆稱土兵之善戰也。" 上曰: "唐兵方其攻石窟時, 無蔽身之具, 徒手搏戰乎?" 鄭經世曰: "唐人別無掩身之物, 徒以赤身而當鐵丸, 以此多致死傷矣。" 上曰: "是所謂如以肉齒利劍。 身無掩蔽之物, 而頓至堅城之下, 安能致擧山壓卵之勢也?" 遊擊曰: "本國有筤筅、矛槍諸軍器乎? 以此兵器, 次次而行軍, 則首末相仍, 緩急得中, 遇敵不散, 攻敵易摧也。 國王試以五千人, 付之於我, 則我當訓鍊而服用之, 事畢之後, 亦當以五千人還之, 而無一人死傷者耳。 當今之計, 得本土之兵, 添用於天兵之數, 或屯田、或組練, 以爲長久之計。 當初大人, 不用吾計, 故致有今日之誤事也。" 上曰: "大人爲小邦, 有屯田組練久駐之策, 計實勝也, 慮實長也。 多謝多謝。" 上請行茶禮, 遊擊曰: "淸正之兵稍强, 而行長之軍, 不甚勁銳。 當連船來救之際, 欲爲繞出軍後之計, 且進且退, 勢若登岸。 俺初以大砲, 撞破一船而沈之, 賊猶不退, 又撞破一船。 須臾二船繼破之, 賊乃退遁, 更無向岸之意。 賊若有飛渡之勇, 殊死之力, 則豈以此三船之破而退北乎? 以此知其賊之無能爲也。" 且曰: "雖云朝鮮兵, 善於北走, 而北兵之奔潰, 尤善於朝鮮。 而擾害村落, 無所不至, 朝鮮之民, 何辜何罪? 可憐可憐。 大槪天朝本欲來救朝鮮, 而反擾朝鮮, 至於此極, 安有救之之意乎?" 上曰: "大人爲小邦憂慮, 見於色發於言如此, 不勝感激。" 遊擊曰: "欲得紙卷以爲衲衣, 以給吾軍, 用於戰場。 勿論休紙, 廣求八道, 以足於用?" 上曰: "以紙作衣, 可以禦丸乎?" 遊擊曰: "甚好矣。 因出示曾造紙甲曰: 依此樣造着, 則大小丸皆不得入矣。 濡水而衣, 則禦丸尤妙矣。 作衣之法, 先以紙厚鋪, 以三升布, 着內外, 以紙繩盤結, 如榛子大, 或如栗子大, 簇簇相襯而穿之以繩末, 結之於衣內。 若以雪綿子, 間紙鋪之, 則尤妙矣。" 且曰: "後日禦之策, 不須攻城, 竢其出城而掩擊之, 則蔑不勝矣。 吾自年十七八歲, 從事於討, 今至四十餘年, 豈不知情乎? 倭賊不足畏也。" 上曰: "大人曾屬戚揔兵軍中乎?" 遊擊曰: "戚啓光時, 吾年尙幼, 未及從軍。 與劉綎〔顯〕 從事, 而亦與余大猷, 同行於戎陣之間。 余公之文武兼材, 當時之人極稱之。" 且曰: "倭賊若寇於浙江, 無一人生還者。 蓋以浙江之兵, 勇於戰鬪, 爭先殺賊, 知進而不知退故也。 俺雖有病, 今若有急, 卽可躍馬馳突, 小不辭難矣。" 上曰: "聞大人攻蔚山之時, 勇激三軍, 志烈萬夫, 一叫先登, 群醜靡然, 少邦之人, 皆服大人之雄風矣。" 遊擊曰: "安東榮川兩太守, 盡力於天兵之支供, 厥功最大。 須用褒典, 使之激厲。 通事吳廷福, 追行不離, 接伴官長在左右, 哨官等竭力, 同其死生。 亦須奬賞, 以酬其勞。" 上曰: "如敎。" 遊擊曰: "榮川儒生, 無少無大, 親爲負戴, 以輸糧餉。 榮川何等地方, 而太守最賢, 人民亦賢? 俺中丸來時, 非但人人皆來致慰, 稚儒少士, 亦來而悲傷, 誠可嘉也。 且距都城東門三十里, 有館里焉, 欲爲投宿, 人爭迎待, 以爲天朝大人, 中傷而來, 極力厚待, 皆體國王盛意也。" 上曰: "小邦以不得竭力於支待, 上下憂慮, 而大人如是敎之, 多謝多謝。" 遊擊曰: "如此仁風厚俗, 若不一一通之於國王, 緣何知有此等好箇?" 仍謝曰: "氣惱, 請罷酒禮。" 上曰: "恐傷瘡處, 不敢强請。" 遊擊曰: "俺在中路, 屢遺衣服, 罔知所報。" 上呈禮單, 遂相揖而出。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67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 / 농업-전제(田制) / 교통-마정(馬政)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