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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96권, 선조 31년 1월 16일 임인 3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접반사 이덕열이 후퇴중 입은 피해와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하다

부총 이여매(李如梅)의 접반사 이덕열(李德悅)이 치계하기를,

"이달 4일 각 진영이 회군(回軍)한 일은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그날 제군(諸軍)이 철수할 때 수륙(水陸)의 왜적들이 군사를 모아 30리 밖까지 추격하여 왔습니다. 중국군의 전사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혹 3천이라고도 하고 혹 4천이라고도 합니다. 그 가운데 노 참장(盧參將)이 거느린 일군(一軍)은 뒤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몰살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군중에서 내용을 숨기고 있어 아직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까닭없이 갑자기 철군하였고 적이 뒤를 타고 공격해 왔으므로 창황히 도망쳐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궁시(弓矢)와 개장(鎧仗)을 길에 가득히 내버려 적에게 넘겨 주었으니 이와 같이 통곡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 부총은 추격하는 왜적 몇 명의 수급을 베었으므로 적이 약간 물러났습니다. 지난달 23일 선봉으로 적을 가장 많이 베었고 24일에는 먼저 성에 올라가 함락시켰으며 25일과 26일에는 적선 10여 척을 격파하였고 이달 3일에는 강탄(江灘)의 왜적을 쳐서 물리쳤는데, 좌협(左協)이 전후로 벤 적의 숫자가 6백 90여 급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회군하는 군사는 다시 대오(隊伍)를 편성하지 못하고 그 행동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촌락(村落)에 들어가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고 촌부(村婦)들을 강범하며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는 자까지 있었으므로 적이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백성들의 불행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마을의 노파가 울부짖으면서 ‘굶주림을 참고 쌀을 찧어서 군량을 댄 것은 왜적을 평정하는 날을 기대해서인데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살아갈 길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는 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부총은 지금 안동에 머물러 우선 군마(軍馬)를 쉬게 하고 있는데, 4∼5일 뒤에 상경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6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副摠李如梅接伴使李德悅馳啓曰: "本月初四日各營回軍事, 則已爲馳啓矣。 當日諸軍撤還之際, 水陸倭賊, 合兵追擊, 至于三十里之外。 唐軍死者無數, 或云三千, 或云四千, 其中盧參將一軍, 則以在後, 幾盡覆沒云, 而軍中諱言, 時未知其的數矣。 大抵無端撤軍, 賊乘其後, 蒼黃奔北, 自取敗衂, 弓矢、鎧仗, 投棄盈路, 以至藉寇, 安有如此痛哭之事? 言之無及。 李副揔則斬其追賊數級, 而賊乃小退。 當其前月二十三日, 以前鋒斬獲最多, 二十四日先登陷城, 二十五、六日撞破賊船十餘隻, 本月初三日擊走江灘之賊, 左協前後斬賊, 六百九十餘級云矣。 回還之軍, 則無復隊伍, 任其行止, 遍入村落, 搜索民財, 强逼村婦, 至有殺人者, 有同經賊。 吾民不幸, 一至於此。 有村嫗呼泣而言曰: ‘忍飢舂米, 以供軍餉, 冀見平賊之日, 而今反如此, 更望得生之路乎?’ 聞之不覺淚下。 副摠時留安東, 姑歇軍馬, 四五日上京云云事。"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6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